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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궁리인 Aug 20. 2022

매뉴얼 다시 보기

인연이 있는 걸까?


장점도 많은데

 

 며칠 전 서울의 집중호우로 인명의 손실과 함께 가옥과 차량이 침수되는 가슴 아픈 일이 있었다. 관계 당국에서 많은 비용을 들여 대비를 한다고 했지만 또다시 사후약방문이 되고 말았다.


 뉴스에서는 전철역의 침수 상황 영상을 보여주면서 물의 유입을 막는 역할을 하는 <차수판(遮水板)> 운영 등 매뉴얼 보완을 언급하며 비상상황 시의 대처가 미흡했다는 점을 강조했다.


 매뉴얼(Manual)은 표준국어 대사전에 따르면 ‘내용이나 이유, 사용법 따위를 설명한 글’이라고 명기하고 있다. 업무에 필요한 업무 기준과 지침을 정리한 것이라 할 수 있겠다. 시간이라는 요소가 경쟁의 큰 축이 되고 빠른 업무처리가 강조되는 사회적 분위기와, 개인의 역량이 강조되는 시대 흐름 속에서 매뉴얼은 고리타분하게 여기는 경향이 강해지는 듯하다.


 묘하게도 매뉴얼을 만들 기회가 많았다. 정교한 업무 처리와 개개인의 역량 강화 차원에서도 여전히 쓰임새가 많고, 서비스 등 업종에 따라서는 더 강조되어야 한다고 본다.


 나의 매뉴얼과의 인연은 군대 생활에서부터 시작되었다.



#1  잘 적응해야 할 텐데


 남들보다 3년가량 늦게 입대를 했다. 군기가 센 편이라 ‘잘 적응할 수 있을까?’ 걱정하던 차에 기름을 담당하는 행정병을 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상급 부대인 만큼 대형 유류 탱크와 주유 시설은 물론 연간 운영 비용도 상당한 규모였다. 부대의 버스부터 다양한 군용 차량 유류 수급 관리는 물론, 타 부대에서 출장 오는 차량의 주유 지원까지 크고 작은 업무를 혼자 해야 했다. 별다른 인수인계도 없이 투입되다 보니 초반에는 어려움이 많았으나, 인간은 적응의 동물인지라 어느덧 제대의 시기가 다가왔다.


 

 후임으로 C이병이 낙점되었다. 얼마 남지 않은 시간에 최대한 많은 것을 알려주기에는 시간이 너무 빠듯했다. 거의 업무를 배우지 못했던 생각이 났다. C이병의 빠른 적응을 위해 업무 소책자를 만들었다. 어렸을 때 심취했던 무협소설의 주인공이 보고 절정의 고수로 거듭나던 무공 비급이 생각난 것이다.  


 이왕 만드는 것이니 최대한 자세히 만들어 보자 싶었다. 월별 유류 관리 수급 관리 대장과 관련 서류 작성법, 재고 운영 등 행정적인 내용은 비용이 수반되니, 예시를 들어 업무 절차별로 기술했다. 유류 관리 면에서도 드럼통 관리, 적재 등 사소한 부분까지 기술해 시행착오를 최소화하도록 작성했다.


 가령 200Kg인 드럼통을 들 때는 어느 부위에 힘을 실어야 힘이 덜 드는지, 뚜껑을 열 때 적절한 렌치 사용법과 빈 드럼통을 쌓을 때의 요령 등 시시콜콜한 내용도 언급했다. 규모가 큰 유류 창고의 낙엽을 청소하는 방법까지 쓸 정도로 세세한 내용을 총망라해서 기재했다.


 다 작성하고 나니 상당한 분량이었다. 일종의 매뉴얼이었던 것이다. 말로만 하는 것보다는 이 소책자를 토대로 설명하니 C이병도 이해하기 나았을 것이다. 추후 그가 혼자 업무를 할 때 이 매뉴얼이 그래도 조금은 힘이 되기만을 바랬다.




#2  몰입의 시간들


 신입 사원으로 교육부서에 근무할 때였다. 어느 날 영업 담당 임원이 일본어로 된 책을 주며 번역을 해 보라 한다. 보니 <전화 상담 업무 매뉴얼>이었다. 당시는 저작권 인식도 미흡해, 회사 업무에 도움이 되게 하겠다는 일념으로 주어진 시간보다 더 빨리 번역해 회사에 배포했다.


 몇 년 후에 고객 정산 부서로 발령받아 몇 달 안되었을 때, J과장이 보자 한다.


 “교육 출신이니 이 참에 <고객 청구, 입금 매뉴얼> 한 번 만들어봐.” 한다. 나날이 업무의 폭과 깊이가 확대되는데 초창기라 어수선한 상태였다. 업무의 고수인 J과장이 이런 상황을 놓칠 리 없었다. 존경하는 선배의 이야기라 한 두 달 시간은 걸렸지만 힘든 줄 모르고 신나서 일했다.


 200 페이지가 넘는 두꺼운 매뉴얼을 만들어 놓고 보니 보람도 보람이지만, 덕분에 업무에 대한 이해가 깊어졌고 타 부서 업무로까지 시야가 확대되는 것이 느껴졌다. 아마도 현업이 처음이었던 나를 신속히 육성하려는 J선배의 깊은 뜻이 담겨있었을지도 모르겠다.


 이러한 매뉴얼과의 긍정적 추억이 나에게 알게 모르게 배어 있었을지 모르겠다.



 팀장이 되었을 때도 매뉴얼을 직접 제작하곤 했다.


 지점에 있을 때는 <거절 극복 응대 화법>이라는 책자를 만들었다. 영업 사원을 면담하다 보니, 영업 시 화법이 소득에 영향을 미친다는 점을 깨달았다. 그런데 아무도 이것을 교육하는 곳이 없었다. 고객 유형별 특징에 따른 우수 영업사원의 응대 화법을 수집하고 이를 발전시켜 책자로 만들었다.


 영업사원 개개인의 판매 능력에만 의존하지 않고, 거절을 극복할 수 있는 영업 스킬 향상을 통해 영업사원 개개인의 소득을 올리고 싶었던 것이다.


 본사에서 영업 기획을 할 때는 회사의 얼굴인 직원들의 영업 역량이 천차만별이고, 영업을 처음 경험하는 이들의 조기 적응이 필요하다는 점에 생각이 미쳤다.  


 <지점 영업의 노하우와 스킬>이라는 소책자를 만들었다. 세일즈와 응대 화법, 복장과 이미지 메이킹, 거절 극복, 영업 실 사례, 업종별 영업 가이드 등 꼭 필요한 내용을 촘촘히 담았다. 스마트한 직원의 노력 덕분에 평소의 생각과 방향이 잘 녹아든 실전 매뉴얼이 탄생했다.


 물론 이러한 매뉴얼이 본래의 취지에 맞으려면, 사용자가 실제 활용할 수 있도록 다양한 제도적 장치와 문화 또한 병행이 필요하다 하겠다.




 매뉴얼이 요즈음의 세태와는 거리감이 있을 수도 있겠지만, 업종과 일의 내용에 따라서는 여전히 유효하고, 기술 발전과 신 업태 등장에 따라 더 중요한 영역도 있다.


 매뉴얼은 업무를 정리하고 기준을 수립, 재정비하게 한다. 우수 사례를 표준화하고 새로운 방법을 적용하고 업무의 디테일을 추구할 수 있다. 이는 해당 업무뿐 아니라 그 조직의 긍정적 가치 정립에도 기여하게 되고 계승, 발전으로 연결된다.


 

 개인화 물결 속에서 업무 스킬이 곧 개인의 자산이 되는 시기이다. 이전처럼 잘 전달이 안 되는 경우가 많다. 그럼에도 마땅히 전달되어야 할 내용은 매뉴얼 등으로 명확히 정리되어야 한다. 이것이 되지 않으면 후임자는 막막하다. 안 해도 되는 실수와 시행착오를 줄이고 적응에 스트레스를 받는 것을 최소화할 수 있어야 한다.  


 여전히 많은 일상의 영역에서 매뉴얼의 부재와 필요가 느껴진다. 물론, 매뉴얼 제작이 또 다른 일이 되고 스트레스가 되어서는 안 된다. 새로운 돌파구가 필요하거나 한 단계 더 도약하려면, 지금 시점에 다시 매뉴얼의 강점을 재조명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한국인 특유의 장점인 도전의 토대가 될  있도록 이 시대와 어울리는, 조직과 업무에 맞아떨어지는 <스마트 매뉴얼>의 제대로 된 활용을 꿈꿔본다.


 

이미지 출처 : 제목 -  뉴스1, #1 #2 #3 - 픽사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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