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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궁리인 Aug 31. 2022

발표가 다가 아니었음을

전후좌우도 살펴야


의욕이 넘쳐서

 

 주니어 보드 (junior board)는 과장급 이하 직원들로 구성되어 운영하는데, 청년 중역회의라고도 한다. 임원회의 등과는 별도로 참신한 아이디어를 얻거나 회사 경영과 관련한 직원의 의견을 듣고 경영에 반영하는 등 의사소통의 창구로 활용된다. 1990년대에 대기업을 중심으로 도입되어 지금도 많은 기업에서 운영하고 있다.


 대리 진급을 막 앞둔 시기였다. 당시 우리 회사에서도 주니어 보드를 운영하고 있었다. 갑자기 과장님이 부르더니 올해 청년 회의 의장으로 추천되었다고 한다. 아마도 교육 담당이니 시킨 것 같았다. 부담스러웠지만 회사 생활도 익숙해지고 슬슬 자신감이 붙던 시기라 해보겠다고 했다.


 이왕 하는 거 의욕적으로 활동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첫 번째 테마로 <조직문화 개선>으로 잡았다. 성장 일변도의 시기로 ‘딱딱한 회사 문화를 개선해 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첫 번째 회의 내용은 강당에서 발표하라는 담당 C 임원의 말씀에 더 힘이 났다. 

 



#1 물불 안 가리고


 구성원들의 의견도 수렴하고 직원들 인터뷰도 해 보니 생각보다 문제가 많았다. 대부분 기업이 그렇겠지만 상명하복과 형식주의, 관행의 답습, 의사소통 통로의 부재, 지나친 보고서 작성 등 예상보다 더 했다. ‘그래 직원들의 이야기가 잘 전달되어 조금이라도 변화되도록 만들어 보자’ 하고 의욕이 샘솟았다. 

 

 며칠 후 담당 임원이 발표 내용을 보자 한다. 찬찬히 들여다보던 C 임원의 얼굴이 굳어진다. 평소 인자한 분인데, 보기에도 부담스러운 듯했다.


 “내용은 잘 봤어. 속속들이 다 발표하는 것이 중요한 것은 아니야. 한 번 더 생각해봐” 하신다. 


 발표 수위가 경영진은 물론 회사에 미칠 파장을 염려하고 있는 거 같았다. 아직 학생 시절의 패기가 덜 빠졌던 것인지, C 임원의 설득에도 


 “이번 기회가 아니면 직원들의 생생한 이야기가 전달되기 어렵습니다.” 하고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한 시간 가까이 이야기를 한 후, 조금 수정해보겠다 하고 자리를 물러났다.


 오후에 갑자기 K 임원이 보자 한다. 평소 고압적으로 유명한 이였다. 부를 이유가 없는데 뭐지? 하며 긴장했다.


 

“네가 조직문화 관련해서 발표한다며? 직장 생활이 네 생각처럼 호락호락한 게 아냐.”  


 “그렇게 문제점을 들춰내서 좋을 게 뭐가 있어. 매사 적당히 하는 게 좋은 거야” 한다. 


 아마 C 임원에게 상황을 듣고 발표 내용과 수위를 낮추라고 지원 사격을 하는 거 같았다. 한참 조언(?)을 들었다.



#2 더 세련되게 했더라면


 K 임원의 은근한 압력에 ‘이렇게 할 거면 왜 이런 제도를 운영하는 거야?” 하고 화가 났지만 인사를 담당하는 C 임원의 입장도 이해가 되었다. 수위 조절은 했지만 그래도 직원들의 의견이 더 소중했다. 직원들의 날 것 그대로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당사 조직문화의 현상과 문제점, 해결방안 순으로 작성했다. 


 사장님을 비롯한 임원, 본사 부서장과 직원 대표 등이 강당으로 속속 들어섰다. 지금처럼 파워 포인트가 없던 때로, 연단에 올라가 전지를 넘겨 가며 발표했다. 


 

상명하복, 형식주의, 권위주의 문화 팽배, 관행 중심 등의 표현이 언급되며 여기저기서 웅성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저 친구 어쩌려고 저러지’, ‘내용이 너무 센데’ 하는 반응인 듯했다. 고위 임원 중 한 사람은 시종일관 매섭게 노려보고 있었다. 사장님도 굳은 표정으로 듣고 있었다.


 조금 걱정도 되었지만 젊은 혈기가 있었던지, ‘뭐 다 맞는 이야기인데…’ 하고 30분 남짓한 발표를 마쳤다. 몇몇은 고생했다고 하면서도, 


 “좀 살살하지 그랬어?’ 한다. 


 다행히 큰 파장은 없이 끝났고 이후로도 별 영향은 없었다.


 1년 동안의 청년회의 활동은 변화를 지향한 나름의 의미 있는 시간들이었지만, 돌이켜 보면 그날의 발표는 아쉬운 점이 많았다. 


 “조직문화 개선”이라는 주제가 너무 광범위하고 무거웠다. 또 해결방안도 단순 나열식이 아닌 시스템과 제도, 프로세스, 문화 등으로 구분해서 대안을 구체적으로 언급했으면 더 설득력이 있었겠다는 생각이 든다. 


 당시만 해도 프레젠테이션이라는 개념도 없었고 전달 스킬도 미흡했다. 지금 생각하면 듣는 분들 입장에서도 문제점 일변도의 이야기라 당혹스러웠을 것이다. 생생한 이야기를 제대로 알려서 변화를 이끌어야겠다는 생각에만 몰입되어 있었던 것이다. 


 또한 사후에 청년회의 차원의 소프트한 이벤트 등의 방법을 통해 조직문화 개선을 지원하는 노력도 병행했으면 더 좋았겠다는 생각도 든다. 


 C 임원의 경륜 있는 말씀 대로, 적절한 수위 조절도 필요했겠다 싶다. 난처했을 입장을 생각하면 죄송스러울 따름이다. 당시에는 드물게 직원들 말을 차분히 경청하시던 C 임원의 인자하신 얼굴이 떠오른다.  





 주니어 보드는 경영진의 열린 경영을 알리기 위한 도구나 업적으로 활용되어 형식적으로 운영되어서는 안 된다. 또한 주니어 보드가 또 하나의 세력이 되어 부서나 업무에 지나치게 영향력을 발휘하거나 과도하게 우대받는 것도 문제가 된다.

 

 원활한 의사소통 추구, 참신한 아이디어 수렴, 경영 지원 등 본래의 긍정적 취지를 살려, 종사자 모두가 만족하고 성장하는 경영의 효과적 툴로 작용하면 충분하지 않을까? 



이미지 출처 : 제목 - ENA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 #1 - SBS 스토브리그 #2 - 픽사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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