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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영필 Zho YP Sep 20. 2022

정치질서의 기원

프랜시스 후쿠야마

Francis Fukuyama (2011), The Origins of Political Order, 함규진 역, 웅진지식하우스, 2012년.




역자 해제

8-10/ 새뮤얼 헌팅턴은 "효율적이고 합법적인 정부가 안정적으로 유지되는 상태"를 정치 발전이 이루어진 것으로 보았다.

헌팅턴은 이런 정치 발전은 '지지의 범위 the scope of support'와 '제도화의 수준 the level of institutionalization'이 모두 높을 때 이룩하기 쉬워진다고 보았다...

후쿠야마의 지적처럼 헌팅턴의 정치 이론은 "... 인류사에서 아주 최근에 해당하는 시대의 환경을 전제하고 있다."

... 프랜시스 후쿠야마는 정치 발전을 가늠하는 정치의 세 가지 제도적 조건을 국가, 법치주의, 책임정부로 제시한다.


1부 국가이전

인간의 출현부터 국가의 등장까지


1장 정치는 왜 필요한가


43-44/ 그리스와 로마에서 수립된 고전 공화주의 모델은 여러 후대 국가들이 모방했는데 제노바, 베네치아, 노브고로트, 네덜란드연방 등의 과두제 공화국들도 그런 예였다. 하지만 이 정부 형태에는 한 가지 치명적 약점이 있음을 후대의 사상가들(이 전통을 숙고했던 미국 '건국의 아버지들'도 포함한)이 지적했다. 고전 공화주의는 큰 규모의 사회에 맞지 않으며, 기원전 5세기의 그리스 도시국가나 초기 로마 같이 작고 시민 구성이 동질적인 사회에나 적합하다는 점이다.


47/... 잘 알려진 정치 발전 이론 하나는 유럽의 국가 건설이 전쟁 수행의 필요성에서 비롯되었다고 본다. 전쟁을 수행할 필요성과 근대적 국가기구의 발전 사이의 상관성은 초기 근대 유럽에서는 아주 타당해 보이며, 고대 중국에서도 그만큼이나 그럴듯해 보인다. 그러나 이를 성급하게 국가 형성에 관한 일반 이론으로 선언하기 전에 몇 가지 곤란한 문제들부터 해결해야 한다...


5장 리바이어던이 등장하다


109/ 국가 형성 이론들

'국가는 자발적 사회계약의 산물이다(사회계약론)'

'국가는 관개시설 건설 계획이다(관개시설론)'

'인구조밀론(인구압력론)'

'국가는 폭력과 강압의 산물이다(전쟁폭력론)'

'연접과 그 밖의 지리적-환경적 요인들(외접론)'

'국가는 카리스마적 권위의 산물이다'


2부 국가 만들기

종교와 사상이 국가 건설의 경로를 가르다


7장 전쟁과 국가의 탄생


141/ 정치학자인 찰스 틸리는 유럽의 국가 건설이 유럽 군주들의 전쟁 수행 필요성에서 비롯되었다는 유명한 주장을 했다. 전쟁과 국가 건설의 상관성은 한결같지 않다. 대체로 라틴아메리카에서는 그런 식의 상관성이 나타나지 않았다. 그러나 중국의 동주 왕조 시대에는 전쟁이 의심할 여지없이 가장 중요한 국가 형성 추진력을 제공했다...


152-153/ 법가가 쓰는 용어 때문에 혼동을 일으켜서... 법치주의와 일맥상통한다고 여기면 안 된다. 서구, 인도, 이슬람 세계에서는 국가 이전에 법이 있었으며, 그 법은 종교에 의해 신성시되고 사제 집단의 손으로 수호되었다... 왕이나 황제도 법을 지켜야 하며,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없다.

이런 의미에서의 법치주의는 중국에 존재했던 적이 없고, 적어도 법가에게는 절대로 없었다. 그들에게 법이란 단지 왕이나 지배자가 지시한 사항을 성문화한 것일 따름이었다. 그것은 프리드리히 하이에크 Friedrich Hayek의 관점에서는 '법'이라기보다 '명령'일 뿐이다. 그런 법은 통치자의 개인적 이해관계를 반영할 뿐이며, 공동체 전체를 다스리는 도덕규범에 대한 공동체 성원의 합의를 반영하지 않는다. 법가의 법령이 근대적 법치주의와 조금이라도 일치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상앙의 법률관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일단 형벌을 제정하면 모든 사회 구성원에게 차별 없이 시행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이 일반법 앞에서는 귀족조차 예외가 아닌 것이다.


158/ 수많은 근대화의 길

왜 통일된 진제국의 정치적 근대화가 경제, 사회 부문에서의 근대화로 이어지지 않았을까?... 자본주의에는 다른 제도들의 출현이 필요했다. 서구의 자본주의 혁명에는 초기 근대의 인지 혁명 cognitive revolution이 앞섰고, 이는 과학적 방법론, 근대 대학 제도, 과학적 관찰에서 새로운 부를 얻어내는 기술혁신, 그리고 이런 혁신을 부채질하는 동기를 유발하는 재산권 제도 등을 낳았다. 진나라는 여러 가지로 지적 토양이 비옥한 곳이었다. 하지만 그 주된 학문 전통은 회고적이었으며 근대 자연과학에 필요한 추상화를 해낼 수가 없었다.


또한 전국시대의 중국에는 독립적인 상업 부르주아가 나타나지 않았다. 도시는 상업의 중심이 아니라 정치, 행정의 축이었으며, 자치와 독립의 전통을 가지지 못했다. 상인이나 공인의 사회적 지위는 미미했다. 그들의 지위는 지주에게 귀속되어 있었다. 재산권은 존재했지만 근대 시장경제의 발전을 추진할 만한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더 이상 재산을 징발하지 않도록 제한하는 법치주의도 결국 없었다.


사회적 근대화는 친족 기반의 사회관계 붕괴, 그리고 보다 자율적이고 개인주의적인 사회관계의 등장을 내용으로 한다. 이는 두 가지 이유로 진나라의 통일 과정에서 나타나지 못했다. 첫째, 자본주의 시장경제가 발생하지 않았으므로 노동 분화가 철저히 이루어지지 않았고, 그에 따라 새로운 사회집단과 정체성이 나타나지 않았다. 둘째, 중국 사회의 친족 중심성을 허물어뜨리려는 노력은 독재국가에 의해 위로부터의 개혁으로 추진되었다. 서구에서는 이와 달리 기독교가 친족의 굴레를 거둬냈다....


위로부터의 사회공학은 보통 목표에 미달한다. 중국의 부계 혈통제와 가산제적 정부의 제도 기반은 심각한 타격을 받았으나 파괴되지는 않았다. 이제 보듯, 단명한 진 왕조 이후로 이들은 다시 고개를 들며, 계속해서 국가의 권위에 도전하며 중국인의 감성에 호소력을 유지한 채로 이어져간다.


16장 기독교가 가족주의를 타파하다


267/ 유럽 사회는 매우 일찍부터 '개인주의적'이었다. 여기서 개인주의란 가족이나 친족이 개인의 결혼, 재산처분, 기타 개인 문제에 참견하지 않으며 그 개인 스스로 결정한다는 뜻이다... 개인주의는 국가가 나타나서 개인의 권리를 천명하고 그 강제력으로 그런 권리를 보장할 때까지 기다리지 않았다... 유럽에서 사회발전은 정치발전에 선행했다... 그럼... 유럽인들은 언제 친족의 굴레에서 탈피했으며... 어디서 그런 추진력을 얻었을까? 해답은 게르만 부족들의 로마제국 유린 직후 그들이 기독교로 개종했을 즈음이다...


269-270/... 앨런 맥팔레인 Alan MacFarlane의 영국 개인주의 연구는 재산을 자유롭게 처분하며 유언장에서 자녀에게 상속하지 않을 수 있는 개인의 권리가 16세기 초 영국의 커먼로 common law에 수립되었다고 밝혀냈다... 맥팔레인은 토지의 물권 right of seisin 또는 자유 보유권 freehold possession이 적어도 이보다 3세기 전에 이미 잉글랜드 전역에 수립되어 있었음을 지적한다...

복잡한 친족 구조가 몰락하는 중요한 지표의 하나가 여성의 재산보유권 및 처분권이다... 부계 사회에서 그런 권리를 인정한다는 것은 종족의 재산 통제력이 약해졌다는 뜻이며...


271/... 마르크 블로크는 혈연이 9세기와 10세기 이전부터 사회조직의 근거였다고 말했다... 하지만 중국, 인도, 중동에서 볼 수 있는 씨족, 단일 조상에서 내려오는 부계 혈통의 거대한 집단인 씨족은 유럽에서는 일찌감치 사라졌다고 블로크는 지적한다... 중세 유럽인들은 자신의 계통을 부계로만 따지지 않았으며 부족사회에서 종족의 경계를 정하기 위해 단일 혈통으로만 계통을 정했던 것을 무시해 버렸다고 지적했다...


272/ 블로크에 따르면 봉건제 자체가 사회연대의 원천으로 친족 간 유대에 기댈 수 없는 사회가 취한 궁여지책이라고 볼 수도 있다. 7세기말부터 유럽은 파괴적인 외침에 시달렸다. 북쪽에서는 바이킹이, 남쪽의 북아프리카와 스페인에서는 아랍이, 동쪽에서는 헝가리가 쳐들어왔다... 9세기에 카롤링거가 쇠퇴하면서 도시들도 축소되었고 수없이 많은 군벌들에게 둘러싸이게 된 사람들은 촌락별로 흩어져서 자활에 들어갔다... 봉건주의는 친족의 '대안'으로 탄생했다.


273/... 유럽이 친족에서 탈피한 적절한 시기... 가장 그럴듯한 설명을 사회인류학자인 잭 구디 Jack Goody가... 무려 6세기로 소급하면서... 가톨릭교회의 제도적 이해관계가 열쇠였다고 말한다... 가톨릭 교회가... 네 가지 관습에 적대적이었기 때문이다. 1) 가까운 친척간 결혼, 2) 죽은 친척의 과부와의 결혼(이른바 형제계승혼), 3) 입양, 4) 이혼... 이후의 교회 포고문은 축첩을 금지하고 일부일처제인 평생 결혼을 장려하고 있다.


274-275/ 서유럽에서 상대적으로 여성의 지위가 높아진 것은 교회의 이익 추구에 따른 부산물이다. 교회는 과부가 친족 집단의 일원과 재혼하여 그녀의 재산이 부족에게 돌아가는 것을 방해했으며... 자식 없는 과부와 미혼녀들이 교회에 재산 기부를 많이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여성의 재산권은 부계 혈통 종족에 조종을 울린 셈이었으니 이로써 부계 단일 혈통의 원칙이 무너졌기 때문이다.


276-278/... 결혼과 상속의 원칙을 바꿈으로써 교회는 어느 정도는 정치적으로 그리고 대체로는 경제적 동기에 따라서 움직였다... 그 결과 유럽 사회의 개인주의는 이미 중세기에 자리를 잡았으며 이는 국가 건설 과정보다 먼저 이루어졌다. 그리고 종교개혁, 계몽주의, 산업혁명보다도 몇 세기나 앞선 일이었다. 이 거대한 근대 발전의 결과로 개인 생활이 크게 바뀌었다기보다, 가족 규범의 문화가 먼저 근대화의 조건을 다져놓았다고 해야 할 것이다. 16세기 이탈리아, 잉글랜드, 네덜란드에서 나타난 초기 자본주의 경제는 인도나 중국에서처럼 대규모로 조직된 상당한 재력을 갖춘 친족 집단의 저항을 극복해야 할 필요가 없었다...


... 씨족이나 부족은 없었으나 귀족 기득권 세력이 있었다... 봉건적 주군-신하 관계는 강자와 약자 사이의 자발적인 계약으로 이루어지며 양쪽 다 법적인 책임을 지게 된다. 그것이 매우 불평들하고 계층적인 사회를 공식화했지만, 그럼에도 개인주의의 전조를 마련한 한편, 법인격 이해의 폭을 넓혀주었다. 역사학자인 슈츠 Jeno Szucs는 지주와 농민 사이의 관계는 1200년 경에 계약관계의 지위를 얻었다고 본다.


친족 기반 지역사회 구조를 봉건적 구조로 바꾼 것은 지역정부의 효율성이라는 점에서... 봉건제도는 계약에 기반하므로 근본적으로 더 유연했으며, 더 계층적이므로 더 결정적인 집단행동을 취할 수가 있었다... 재산권을 법적 권리로 만들면 누구든 친족 기반 사회 체계에서 부과하는 제약을 무시하고 재산을 사고팔 수 있는 명확한 힘을 얻는다. 지역 영주는 부족장이 할 수 없는 방식으로 자신이 '대표'하는 지역을 위해 결정적인 목소리를 낼 수 있다...


... 확대 친족 제도에 대한 가톨릭교회의 공격을 예로 보자. 그런 가치는 기독교 교리에서 직접 비롯되지 않았다. 적어도 콘스탄티노플의 동방교회는 그런 식으로 결혼과 상속 원칙을 뜯어고치려고 하지 않았다. 그 결과 촘촘히 짜인 친족 공동체들이 비잔티움이 다스리는 땅에서는 거의 대부분 살아남았다. 유명한 다세대 공동 주거 공동체인 세르비아의 '자드루가'나 봉건화를 어렵고 복잡하게 만들었던 알바니아의 씨족들은 단지 두 예일 뿐이었다. 이런 제도가 서유럽에서 소멸한 것은 교회가 물질적 이익과 권력을 추구하여 사회적 가치를 스스로의 이익에 따라 활용하기 시작하면서이다. 따라서 어떻게 보면 경제라는 거북이는 종교라는 거북이의 등에 올라타 있었으며, 다른 쪽에서 보면 종교라는 거북이는 더 바닥과 가까운 경제라는 거북이 등에 올라타고 있었다...


3부 법치주의

법은 어떻게 종교의 자리를 대신했는가


279/ 종교에 근거하는 법률이 근대적 법치의 기초를 닦았다고 말할 수 있다. 독립된 종교적 권위가 존재한다는 사실은 통치자들에게 자신들이 궁극적인 법의 원천이 아니라는 인식을 심어주었다... 초기 근대 유럽의 중대한 정치 갈등은 사회 위계질서의 정점에 신이 아닌 자신을 놓으려 했던 군주들의 새로운 주권 이론이 빚어낸 것이었다. 근대 법치주의의 등장 과정에는 이런 주장에 대한 저항의 성공, 그리고 법의 우선성의 재확인 이야기가 포함된다. 이 저항은 종교 전통이 법률에 신성함과 독립성, 그리고 일관성을 부여하지 않았던들 훨씬 어려웠을 것이 틀림없다.


17장 법치주의의 기원


280-281/ 법률과 입법의 법의 차이는 법치주의 자체를 이해하는 데 핵심적이다... 법률 law은 공동체를 하나로 엮는 추상적인 정의의 규범의 집합 a body of abstract rules of justice이다. 전근대사회에서 법률은 어떤 인간 입법자보다 위에 있는 존재에 의해 정해졌다. 신적인 권위라거나, 유구한 전통이거나, 자연이거나. 반면 입법의 법 legislation은 오늘날 실정법이라 불리는 것과 관련되며, 정치권력의 한 기능이다... 법치주의는 선행하는 법체계가 입법에 대해 주권을 갖고 있을 경우에만 존재한다고 하는데, 다시 말하면 정치권력을 가진 개인이 법에 구속을 받는다고 인식해야 한다...

... 이제 법률과 입법의 차이는 헌법과 일반법의 차이에 반영되어 있으며, 이중 전자는 초다수결 투표제 등의 보다 엄격한 개정 요건을 갖는다...

... 법치주의는 정치 질서의 분리 요소로 국가권력에 제한을 두는 것이다. 행정 권력에 대한 첫 번째 견제는 민주적 의회나 선거에 의한 것이 아니다. 그런 것들은 오히려 통치자가 법에 따라 활동해야 한다는 사회적 믿음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국가 건설과 법치주의는 일정한 긴장 속에서 공존한다.


286-288/ 법률이 입법의 법에 앞선다는 하이에크의 이론

오스트리아의 위대한 경제학자 프리드리히 하이에크는 정교한 법 기원론을 내놓았는데 이는 법치주의의 의미와 함께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법의 의미를 구성하는 틀을 설명해 준다... 하이에크는 법의 기원에 대해 '합리주의자' 또는 '구성주의자'라 부르는 사람들을 겨냥한다. 말하자면 입법자가 사회의 문제를 합리적으로 분석하고 스스로 최선의 사회질서를 수립할 수 있다고 여기며 만들어낸 것이 법률이라고 보는 시각이다. 하이에크는 이런 구성주의 constructivism는 지난 300년 동안 사실을 오도해 온 이론이며 특히 데카르트와 볼테르를 포함한 프랑스 계몽사상가들이 그런 사상을 내놓은 부류라고 한다. 그들은 인간의 이성이 인류 사회의 동학을 이해하기에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이는 하이에크가 보기에는 크나큰 오류로 말하자면 프랑스 대혁명이나 러시아혁명처럼 정치권력이 하향식으로 사회 전체를 미리 정해놓은 사회정의의 틀에 맞추어 재구성하려는 시도로 이어졌다... 하이에크에 따르면... 어떤 단일한 행위자도 사회 전체의 움직임을 완전히 파악할 만한 지식을 확보하여 사회를 합리적으로 재구축할 수 없다는 데 있다. 사회의 지식 대부분은 근본적으로 국지적이며 사회 전체에 분산되어 있다. 어떤 개인도 법이나 규칙이 계획된 대로의 변화를 가져올 수 있는지를 알 만큼 충분한 지식을 얻을 수 없다... 사회질서가 이루어지는 과정은 점진적이고 진화적이며 탈중앙적이다... 그것은 탈중앙적인 적응과 선택에 의한 것이지, 창조주의 목적의식을 가진 설계에 의해서가 아니다...


하이에크가 뚜렷이 머릿속에 담고 있던 자생적 질서의 모델은 영국의 커먼로였다. 그 법률 체계는 수없이 많은 판사들이 눈앞에 있는 구체적 사건에 일반적인 규칙을 적용하고자 애쓴 끝에 결정한 판례가 쌓이고 쌓이면서 형성된 것이다.


289/ 관습법에서 공통법(커먼로)으로

법은 사회규범의 탈중앙적인 변천에 근거한다는 하이에크의 근본적 견해는 넓은 의미에서 옳다... 그러나 법의 변천에는 큰 불연속성이 있으며 그것은 정치권의 개입으로만 설명되고 '자생적 질서'의 과정으로는 설명되지 않는다...


이런 이행 중 하나는 잉글랜드에서 관습법이 커먼로로 바뀌는 과정 자체였다. 커먼로는 단지 관습법을 공식화하거나 성문화한 것에 그치지 않는다. 두 가지는 근본적으로 서로 다른 법이다...


292/... 유럽에 기독교가 도입된 것은 부족 관습에서 비롯된 법의 변천이 처음으로 큰 불연속성을 만난 계기였다... 가톨릭교회가 밀어붙인 의도적 혁신이었다. 교회는 지역의 가치에 정반대로 행동했다. 동방교회도 이슬람 교회도 각자의 사회에서 기존의 친족 법규를 그런 식으로 바꾸려고 시도하지 않았다...


영국 법률 변천의 두 번째 중대 불연속은 커먼로의 도입 그 자체였다... 초기 잉글랜드 국가의 등장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으며 결국 지배력을 가졌던 데는 국가권력의 힘이 결정적이었다...


293/... 왕이 제공할 수 있는 중요한 봉사의 하나는 그 지역의 영주들의 재판 결과에 불만을 품은 지역민들에게 항소할 법정을 마련해 주는 것이었다... 시간이 지나며 규모와 범위의 경제가 주는 이점도 생겼다. 사법행정은 인력, 전문성, 교육 훈련을 필요로 했다. 국가 최초의 관료제가 왕의 법정에 의해 수립되어, 관습법을 수집하고 전례를 체계화하여 판결문에 필요한 전제조건을 마련하도록 했다...


294/ 따라서 커먼로는 영국 법률 발전사에서 하나의 불연속적인 존재였다. 그것이 앞서 이루어진 판례를 토대로 삼기는 해도, 노르만 정복을 통해 이전의 데인인과 앵글로색슨인 귀족을 밀어내고 하나의, 점점 더 강력해지는 중앙 권력이 세워지지 않았다면 이 땅의 법률이 되지 못했을 것이다...


역사학자 조지프 스트레이어는 중세기에 초기국가는 군사 조직보다 사법적, 재정적 시스템에 의거해 건설된다고 주장했다...


295/ 이와 비슷한 변화는 다른 유럽 국가들에서는 일어나지 않았다...


296/... 커먼로는 수많은 판사들의 독자적 작업이 합쳐져 만들어졌을지 모르지만, 그것은 강력한 중앙집권적 국가가 없이는 애당초 나타날 수도, 또는 강제될 수도 없었다...


18장 국가가 된 교회


298/ 그리 많이 알려져 있지 않은 사실은 서구 기독교 사회 역시 11세기 초에는 사실상 황제교황주의였다는 점이다. 황제교황주의의 실질적 의미는 정치권력이 종교 권력 담당자들을 선임할 힘이 있다는 뜻이고, 이는 중세 초기에는 유럽 전역에서 일반적이었다...


299/ 가톨릭교회의 독립선언

가톨릭교회가 정치적 권위로부터 독립선언을 한 것은 11세기말이었다.


300/... 힐데브란트가 보기에 교회가 스스로 개혁하지 않으면 정치권력에게서 독립할 수 없었다... 이 개혁은 당연하게도 기존 주교들의 반대에 부딪혔고 그레고리우스 교황은 자신이 그들을 서임할 수 없는 이상 그 싸움에서 이길 수 없음을 알고 있었다. 1075년의 칙서에서 그는 왕에게서 주교를 해임할 권리와 세속적 서임권을 빼앗는다고 선포했다... 하인리히가 1077년에 카노사에서 그레고리우스에게 고개를 숙이도록 압력을 넣었다...


301-303/... 이 문제는 결국 1122년의 보름스 협약으로 정리되었으니, 황제는 서임권을 대부분 포기하고 교회는 상당한 세속 사안에 대해 황제의 권위를 인정했다.

서임권 투쟁은 이후의 유럽 발전에 몇 가지 점에서 중대한 영향을 미쳤다. 먼저 그것은 가톨릭교회가 근대적이고 계층적이며 관료적이고 법치주의적인 제도로 거듭날 수 있게 했으며, 법사학자 해롤드 버먼 Harold Berman이 주장하듯, 이후 세속 국가의 모델이 되게끔 했다. 새뮤얼 헌팅턴의 제도 개발 범주 가운데 하나가 자율성이며 어떤 조직이 그 일꾼의 임용을 마음대로 할 수 없다면 결코 자율적이라고 할 수 없는 것이다...


... 교회는 여러 면에서 진정한 국가의 성격을 갖춰나갔고, 한정된(작지만) 영역에서 자체의 무력과 직접적 사법권을 주장하게 되었다...

그레고리우스의 개혁은 종교 지도자들이 영적 영역과 세속 영역의 모든 사안에 단일한 권위를 주장함으로써(황제와 왕을 폐위할 권한까지 포함해) 정치 지도자들의 권위를 줄이는 의미가 있었다. 기독교 교황은 사실상 인도의 브라만이 처음부터 주장해 온 권위를 그때 주장했다고 볼 수 있다... 교회가 통제할 수 있는 영적 영역을 명확하게 구획해냄으로써, 한편으로 세속 통치자들의 자체 영역에 대한 통제권도 명확히 정립되었다. 이 분업은 이후 세속 국가 탄생의 초석을 마련했다.


... 서임권 투쟁은 유럽의 법과 법치주의 발전 모두에 큰 영향을 미쳤다. 법의 발전은 교회가 스스로를 정당화하려고 체계적인 교회법을 마련하려던 노력에서 나왔으며 법치주의의 발전은 독자적이고 잘 제도화된 영적 권위의 영역이 창출되면서 이루어졌다.


307-308/... 영국의 국가적 정체성 역시 이미 싹이 트고 있었다. 1215년 러미니드 벌판에서 귀족들이 존 John 왕에 맞서서 마그나카르타에 서명하도록 강요한 것은 그들이 개별 군벌의 특혜를 얻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그들은 왕의 법정에서 자신들의 권리를 더 잘 보호받을 수 있는 통일된 국민정부를 기대했으며 스스로를 더 큰 공동체의 대표라고 생각했다...


310-311/... 동방교회는 서유럽과 달리 로마법 전통이 단절된 적이 없었음에도 비잔티움 황제에게 교회가 상위자임을 선언한 적도 없었다...

... 근대화의 요소들이 종교개혁, 계몽사상, 산업혁명의 시대에 모두 한 목에 출현하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근대 상법전은 자치도시와 태동하던 상업자본의 요구에 따라 이루어졌으나, 법치주의는 일단 경제보다는 종교적 동기에서 시작되었다. 따라서 경제적 근대화에 결정적인 두 가지 기본 제도, 즉 '사회 및 재산 관계에서 개인의 선택의 자유'와 '투명하고 예측 가능한 법률에 의한 정치권력의 규제'는 전근대적 제도인 중세 교회에 의해 마련되었다. 경제 영역에서 그 진가를 발휘하는 때는 한참 뒤가 될 것이지만.


4부 책임정부

통치권자에게 책임을 묻다


22장 국가 건설의 네 가지 유형


363-364/... 1222년, 러니미드 초원에서 마그나카르타 조인이 있은 지 7년 뒤, 헝가리 왕 안드라스 2세 Andrew Ⅱ는 궁정 관료들의 압력을 받고 '금인金印문서'에 서명했다. 이야말로 동유럽판 마그나카르타라고 할 수 있는 문서였다... 초기 현법이라고 할 만한 이 문서는 헝가리 왕의 권한은 효과적으로 제약했지만 무절제한 귀족들을 제어하지 못했다... 결국 1526년 모하치 전투에서 패배하면서 오스만 제국에게 자유를 통째로 빼앗기고 말았다.


365/ 유럽의 '동주東周 시대'

1100년의 봉건 유럽은 주 왕조대의 중국과 여러 면에서 닮아 있었다...

15세기와 17세기 사이, 거대한 정치 변혁이 유럽에서 일어났다. 이는 강력한 민족국가의 성립을 가져왔는데, 기원전 5세기에서 3세기 당시 중국이 겪었던 변화에 비길 만했다.


25장 국가에 대한 제약과 강력한 국가 사이: 헝가리


418/... 허약한 중앙정부는 1241년 러시아를 유린하고 헝가리로 쳐들어온 몽골에게 무력하게 무릎을 꿇었다... 결국 헝가리군은 모히 전투에서 대패했다...


420-421/ 헝가리에서 강력한 국가를 건설할 마지막 가능성은 15세기 후반 오스만 제국이 남동부를 위협했을 때 나타났다. 1446년에 의회에서 섭정으로 선출된 대지주 귀족인 야노슈 후냐디Janos Hunyadi는 1456년의 영웅적인 베오그라드 방위전을 비롯한 여러 전투에서 투르크를 물리침으로써 대단한 영예를 누리게 되었다. 그 결과 야노슈의 아들인 마티야슈(Matyas, 마티아스 코르비누스 Matthias Corvinus라고도 한다)가 1458년 왕으로 선출되었고 그는 이후 30년 이상 재위하며 헝가리 국가의 근대적 중앙집권화에 성공한다... 1490년에 마티야슈가 죽자 귀족들은 지난 반세기 동안 국가가 획득한 권력을 대부분 되찾아 가버린다... 1526년의 모하치 전투에서 귀족들의 엉성한 군대는 쉴레이만 대제가 이끄는 투르크군에게 참패했다...


27장 조세와 대표: 영국


447/ 커먼로와 법률제도의 역할

잉글랜드의 대의정치기구를 구축하는 기초 벽돌이 카운티 재판소나 헌드레드 재판소 같은 사법 기구로 시작했음은 특기할 만하다. 영국사에서 법치주의는 정치적 책임성이 나타나기 훨씬 전에 존재했으며 책임정치는 항상 법률 체계의 보호와 맥을 같이한다... 잉글랜드에서는 다른 유럽 사회에 비해 법은 대중의 것이라는 인식이 높았다. 공적 책임성은 일단 준법을 뜻한다고 여겨졌다...

법치주의 핵심 기능 중 하나가 재산권 보호인데, 이것이야말로 커먼로가 다른 어느 곳의 법률보다도 효과적인 부문이었다... 역설적이게도 이는 또한 영국 왕들이 귀족에 맞서 비엘리트의 재산권을 지켜주려 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 대가로 왕들은 강력한 중앙집권 국가의 정당성을 인정받았다...


448/... 15세기 잉글랜드 사법 체계의 독립성과 외견상의 중립성은 진정한 '제3권력'으로 자리매김되며 헌법적 문제(가령 의회가 왕실 특허장을 취소시킬 수 있는가)까지 결정할 권한을 갖게 되었다. 한 관측자의 말대로 "중세 유럽, 다른 곳에서는 그런 문제가 그런 방식으로 그것도 오직 일방적으로 처리되는 것을 꿈도 못 꿀 일이었다. 다른 곳에서는 그런 문제라면 법률 용어의 동원이 아니라 기만이나 강압으로 해결되는 게 보통이었다...

영국 법률의 독자성을 몸소 구현해 준 사람으로 에드워드 코크(Sir Edward Coke, 1552-1634)만 한 사람을 생각할 수 없다... 제임스 1세 James Ⅰ가 일부 사건을 커먼로가 아닌 교회법에 따라 처리하려고 하자, 코크는 왕에게 법을 선택적으로 해석할 권리가 없다며 격렬히 반대했다...


451-453/ 자유도시와 부르주아

... 영국의 정치 발전사에서... 이 나라에서는 유럽의 다른 어떤 나라에서보다(네덜란드는 예외일 수가 있다) 도시와 도시를 근거로 하는 부르주아가 일찍 나타났다. 도시 중산층은 내전과 명예혁명이 있기 훨씬 전부터 의회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상당한 경제적 정치적 힘을 행사했다. 이들은 세 가지 방식으로 권력에 맞섬으로써 대귀족들과 왕의 권력에 균형을 이루었다... 이 중요한 현상은 카를 마르크스, 막스 베버, 앙리 피렌 Henri Pirenne에 이르는 학자들이 자세히 연구해 저작을 남기고 있다...


마르크스보다 약 75년 전, 애덤 스미스는 [국부론]에서... 그가 '풍요로워짐'이라고 표현하고 있는 경제성장의 자연스러운 진행 과정을 설명한다. 그것은 농업 생산량의 향상에서 시작되어, 도시와 농촌 사이의 국내 무역량 증대로 이어지고, 마지막 단계에서야 국제무역 증대가 나타난다. 그러나 근대 유럽에서는 그런 순서가 뒤바뀌었다고 지적한다. 국내무역에 앞서 국제무역이 발전했으며, 그런 발전이 본격화된 다음에야 대귀족과 대지주의 정치적 패권이 무너졌다는 것이다...


... 공동의 이익이 시민들을 왕의 편에 서게 만들었고 왕은 영주들에 맞서 시민계급을 보호했다.

스미스는 이 때문에 왕이 자치도시들의 헌장과 법률을 용인했으며, 그들에게 숙적인 영주들과 대등하게 싸울 여건을 마련해 주었다고 덧붙인다.


따라서 도시와 부르주아는 마르크스의 생각처럼 단지 경제성장과 기술혁신의 결과로 나타난 것이 아니다... 기술적으로 진보된 자본주의 시장은 도시민들이 아니라 진보적인 지주들 또는 국가 자체에 의해 개척되었고 따라서 충분히 발전하지 못했다.

도시에 기반을 둔 자본주의 시장경제가 나타난 이상, 낡은 맬서스적 세계를 떠나 생산성 향상이 일상적이 되는 근대 경제체제로 들어서게 된다... 근대적인 정치 발전 시스템은 사회경제적 변동에 의해 정치 변동이 추동되는 식으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러나 먼저 자본가 계급이 출현하기 위해 정치적 전제조건이 필요했으니 바로 대귀족층에 대한 도시민과 왕의 공동의 증오였다. 동유럽처럼 이 조건이 정착되지 못한 곳에서는 그런 자본가 계급이 나타날 수 없었다.


454-457/ 조세를 둘러싼 투쟁

영국 귀족과 젠트리는 프랑스에서처럼 특권과 면책권을 확보하려 하지 않았는데, 그 결과 상대적으로 부유한 의회의 구성원에게 대부분의 세 부담이 돌아가고 있었다. 그 까닭은 그들이 잉글랜드의 지방 단위가 가진 높은 단결력을 모르지 않았기에 농민, 장인, 그리고 신흥 부자들인 중류층에게 세 부담을 지울 엄두를 낼 수 없었고, 따라서 의회에 직접 특권과 권력을 부여하기 어려웠던 것으로 보인다.

... 17세기 후반에는 가산제가 뒤집어질 수도 있다는 중요한 모델이 마련되었고 그것은 오늘날의 반부패 운동에도 어느 정도 참고가 될 수 있다... 정부가 일의 효율을 높이게끔 외부 환경이 재정적 압력을 행사할 것... 정부 내의 개혁 세력이 개혁을 밀고 나갈 수 있게 충분한 지지를 얻을 것...


458-460/ 명예혁명

... 통치자의 정당성은 피통치자의 동의에 근거하는가, 왕은 그런 동의 없이는 정책을 추진할 권한이 없는 것인가? 위기를 겪으며 이루어진 결론은 중요한 헌법적, 종교적, 재정적, 군사적 함의를 가졌다. 헌법적으로 왕은 의회의 동의 없이 군을 육성할 수 없다는 원칙을 세웠다. 의회는 국가가 감히 억압할 수 없는 영국민의 권리에 대한 법률을 통과시켰다. 재정적으로는 새로운 세금은 의회의 명시적 동의 없이 부과될 수 없다는 원칙을 세웠다. 종교적으로 이 결론은 가톨릭교도가 잉글랜드의 왕이나 여왕이 될 수 없도록 했으며, 개신교의 분파들을 관용하는 법안도 포함했다(다만 가톨릭, 유대교, 소시니안파 등은 관용의 대상이 아니었다). 마지막으로 영국 국가를 크게 성장시켜 정부가 보다 높은 수준의 부채를 질 수 있도록 했다...


명예혁명은... 철학자 존 로크는... 토머스 홉스의 주장을 확대했다... 로버트 필머 Sir Robert Filmer의 왕권신수설을 반박하는 것이었고... 홉스에 맞서서 시민의 자연권을 침해하는 폭군은 시민의 손으로 교체해야 한다는 주장을 폈다. 그것은 1689년의 헌법적 결론에서 결정적으로 실현되었는데, 그런 원칙들은 이로써 보편적 용어로 명시되었다... 로크의 [제2논고]에서 미국 독립혁명과 건국의 아버지들의 헌법 이론까지의 거리는 별로 멀지 않다...


명예혁명이 책임정치와 대의정부의 원칙을 제도화했다고 해도, 아직 민주주의의 도래의 목소리는 명확히 울려 퍼지지 않았다... [미국 독립선언서]처럼, 명예혁명도 국민 동의의 필수성이라는 원칙을 수립했으며 이후 세대에 정치적 의미의 '국민'이 의미하는 대상의 범위를 넓히는 책임을 넘겨주었다.

... 강력한 자본주의 경제는 이미 17세기 후반부터 있었으며, 성장하고 있던 중류계급이 스튜어트 절대주의와의 투쟁을 담당했다. 따라서 명예혁명의 성공은 강력하고 신뢰할 수 있는 재산권의 원인이라기보다 결과였다. 재산을 가진 영국인은 스스로에게 뭔가 중요한 지킬 것이 있음을 느꼈다.


명예혁명의 주된 성취 중 하나는 국민 동의 원칙을 세움으로써 조세의 정당성을 확보하는 것이었다... 명예혁명과 그 직후 이루어진 재정 및 은행 개혁(1964년 잉글랜드 은행 설립 등등)은 분명 공공재정에 혁명을 가져왔다. 이는 정부가 투명한 공채 시장에서 자금을 조달할 수 있게 해 주었고, 그것은 프랑스나 스페인에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 결과 18세기에는 정부의 채무 한도가 크게 늘었고, 이로써 영국은 더 크게 발전할 수 있었다.

 

461/ 미국과 프랑스의 혁명에 미친 영향

... 헤겔의 위대한 해석자... 알렉상드르 코제브 Alexandre Kojeve... 근대 정치 질서의 3요소(강력하고 유능한 국가, 국가의 법의 지배 수용, 모든 국민에 대한 정부의 책임성)는 18세기말에 이르러 세계의 이곳저곳에서 성립했다. 중국은 일찍이 강력한 국가를 건설했고, 법치주의는 인도, 중동, 유럽에 수립되어 있었다. 그리고 영국에서는 책임정부가 처음으로 나타났다. 예나 전투 이후의 정치 발전은 뭔가 새로운 것을 추가하기보다는 이런 제도들을 세계 전역으로 복사해 퍼뜨리는 것이었다고 해도 된다. 공산주의는 그런 '추가'를 해보려고 20세기에 노력했지만, 21세기에는 자취를 감춰버렸다.


영국은 최초로 이 세 가지 요소를 모두 갖춘 나라였다. 3대 요소는 상당히 상호의존적이다. 강력한 초기 국가가 없다면, 법치주의나 정당한 재산권이라는 넓은 개념도 존립할 수가 없다. 강력한 법치주의와 정당한 재산권이 없었다면, 영국 하원이 단결하여 영국 군주에게 책임성을 물을 생각을 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리고 책임성 원칙이 없었다면 영국 국가는 프랑스 대혁명의 즈음에 강대국으로서 성장하지 못했을 것이다.


28장 책임정부와 절대주의의 갈림길


470-472/ 어째서 잉글랜드는 헝가리처럼 끝나지 않았을까?


... 러미니드에서의 영국 귀족들처럼, 헝가리의 귀족들도 13세기에 군주에게 압력은 넣어 금인문서라는 헌정적 타협안을 받아들이게 했다. 그리고 이후의 세월 동안 중앙집권적 국가의 성립을 저지했다. 마티야슈 후냐디가 1490년에 죽은 뒤로는 귀족계급이 군주정이 추진해 온 중앙집권화 개혁을 무산시키고 이전 세대의 체제로 돌아가 자신들의 권력을 되찾았다.

그러나 헝가리 귀족계급은 자신들의 힘으로 나라 전체를 강화하려고는 하지 않았다. 그보다 그들은 자신들에게 부과되는 세금을 낮추고 자신들의 개인적 특권을 든든히 했으며, 그 대가로 국가의 방위능력을 희생시켰다. 반면... 영국... 의회가 왜 헝가리 의회처럼 스스로를 지대 추구 동맹으로 만들고 결국 스스로의 이익을 깎아먹지 않았는지를 살펴봐야 한다.

잉글랜드에서 책임정부가 추악한 과두제로 타락하지 않을 수 있었던 까닭에는 두 가지가 있다. 첫째로 잉글랜드의 사회구조... 헝가리보다 훨씬 유동성이 높고 비엘리트에게도 개방되어 있는 사회였다. 헝가리에서는 젠트리가 귀족층에 흡수되었으나, 잉글랜드에서는 자체적으로 크고 응집력 있는 사회집단이 되었다. 그 힘은 어떤 점에서는 귀족보다도 강했다. 또한 잉글랜드에서는 헝가리와 달리, 헌드레드나 카운티 등등의 지방행정 영역에서 풀뿌리 정치 참여의 전통이 있었다. 잉글랜드 군주들은 의회에 출석하여 그의 신민들과 대등한 입장에서 공동 이해관계에 대해 논의하는 데 익숙했다. 게다가 헝가리에서는 영국의 요먼에 해당되는 계층, 즉 상대적으로 부유한 자영농으로 지역 정치에 참여하는 계층이 존재하지 않았다. 헝가리의 도시들은 귀족들의 엄격한 통제를 받았으며 영국처럼 부유하고 강력한 부르주아를 낳지 못했다.


둘째, 개인의 자유를 존중하는 영국의 전통에도 불구하고 중앙집권화된 국가는 사회 전반적으로 지지를 받고 있었다. 영국은 정의의 보편적 시스템을 개발한 최초의 국가들 중 하나였다. 재산권을 보장하고 대륙국가들과의 분쟁에서 막강한 해군력을 확보했다... 영국 내전은 프랑스, 볼셰비키, 중국 사회주의혁명 이후와 마찬가지로 성공 이후의 '진보의 독재' 양상을 나타냈다...


홉스는 [리바이어던]에서... 인간은 인간이라는 사실만으로 권리를 갖는다고 했다. 로크는 이 전제를 받아들이는 한편 정당한 지배권이란 다른 무엇이 아니라 피치자의 동의에 근거한다는 주장을 폈다. 국민은 군주를 폐위할 수 있다. 그러나 오직 동의 원칙에 근거했을 때 가능하다. 이 초기 자유주의자들에 따르면 권리는 추상적이고 보편적인 것이다. 그리고 강력한 개인들의 손으로 변조될 수 없는 것이다. 헝가리는 이런 사상이 그곳에 퍼지기 훨씬 전에 투르크와 오스트리아에게 무릎을 꿇었다.


이 비교에서 한 가지 간단한 교훈을 얻을 수 있다. 정치적 자유(즉 사회가 스스로를 통치할 수 있는 능력)는 사회가 중앙권력에 맞서 헌정적 굴레를 지울 수 있느냐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행동이 필요할 때 실행할 수 있는 강력한 국가를 필요로 한다... 정부가 응집력 있게 움직일 수 없다면, 넓은 의미의 공적인 목표가 없다면, 진정한 정치적 자유의 토대를 세울 수가 없다... 따라서 책임성 있는 정치체제의 안정성은 국가와 그 배경이 되는 사회 사이의 넓은 의미의 세력균형에 근거한다.


473/ 덴마크 따라잡기

... 덴마크 왕실은 13세기부터 상대적으로 약해졌는데, 왕이 귀족 의회와 국무를 협의하며 교회의 특권을 부여하도록 하는 내용의 [덴마크 대헌장]에 서명했기 때문이다. 덴마크의 경제는 다른 유럽 지역들과 마찬가지로 장원을 주축으로 했으나, 그 위치가 발트해의 입구인 데다 한자동맹 도시들과 가까웠으므로 국제무역이 경제 발전에 좀 더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었다. 15세기 중반에 잠시 스칸디나비아의 대부분을 하나로 묶었던 칼마르 연합이 무너진 다음, 덴마크는 매우 중요한 국제적 지배 세력으로 군림하며 노르웨이, 아이슬란드, 쉴레스비히와 홀스타인의 독일어 지역, 그리고 지금은 스웨덴이라고 불리는 순드의 여러 지방을 통제했다.


덴마크와 다른 스칸디나비아 국가들이 독특한 발전의 길을 걷게 된 한 가지 사건을 든다면, 바로 개신교의 종교개혁일 것이다... 1536년에 루터파 덴마크 국가교회가 수립되었다... 그러나 덴마크 종교개혁의 진정한 정치적 영향은 그것이 농민의 문맹률을 낮추었다는 점이다...


현대 사회에서의 사회적 동원은 보통 경제 발전의 결과로 이루어진다. 이는 중세 잉글랜드에서도 마찬가지였는데, 당시 커먼로에 따른 재산권의 신장이 잉글랜드 부농들을 정치적으로 활동적인 요먼 계급으로 변화시켰다. 반면 16세기 덴마크에서는 종교가 사회적 동원을 추동했다...


1760년에서 1792년 사이에 중대한 정치 혁명이 일어났다. 덴마크의 어느 개명 군주가 '스타운스반트'라 알려진 농노제를 폐지하기 시작했다...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이 1776년에 덴마크에서 출간되었으며, 그 내용에는 자영 농민이 부자유 농노보다 훨씬 생산적이라는 언급이 있었다...


... 1814년, 나폴레옹 전쟁의 결과로 노르웨이를 잃었다... 프로이센은 1864년... 쉴레스비히 공국과 홀스타인을 덴마크에서 빼앗음으로써... 하룻밤 사이에 덴마크는 작고, 민족적으로 단일하며, 국민 대부분이 같은 언어를 쓰는 나라가 되었다...


... 덴마크의 사례에서 사상의 역할은 매우 중요했다. 루터 교회와 그룬트비히 이념 차원에서만이 아니라 18세기와 19세기에 여러 덴마크 군주들이 인권과 헌정주의에 대해 계몽사상을 따랐다는 점에서 그랬다...


5부 정치 발전 이론의 발전을 위하여

산업혁명 이후 발전의 조건은 어떻게 달라졌는가


29장 정치 발전과 쇠퇴의 조건


491/ 모든 곳에는 삼각 소간이 있다.

생물학자인 스티븐 제이 굴드 Stephen Jay Gould와 리처드 레원틴 Richard Lewontin은 '삼각 소간'을 들면서 생물학적 혁신이 예측 불가능한 방식으로 이루어진다고 설명했다. 삼각 소간은 건축에서 돔을 받치고 있는 기둥이 아치를 그리면서 곡선 세모꼴 모양이 남게 되는데 그 부분을 말한다. 그것은 건축자가 의도적으로 설계한 것이 아니라, 다른 요소들을 계획하여 짜 맞추는 과정에서 생겨난 부산물이다...


우리는 정치 발전에서도 이런 삼각 소간의 예를 많이 찾아냈다. 기업이라는 아이디어, 즉 '구성원 개인의 정체성과는 별개의 정체성을 가지며 상존하는 기구'라는 아이디어는 원래 사업 분야가 아니라 종교계에서 나왔다. 가톨릭교회는 여성의 상속권을 지지했는데, 여권신장을 위해서가 아니라(7세기에는 생각하기 어려운 이야기였다), 강력한 씨족이 차지하고 있는 부동산을 교회 쪽으로 빼돌릴 방법을 강구하던 끝에 나온 입장이었다... 독립적인 사법부가 행정부를 견제한다는 아이디어는 서임권 투쟁을 벌이던 사람들의 뇌리에는 일절 없었으며... 그러나 서유럽에서는 종교 조직이 쟁취한 독립이 시간이 지나며 사법부의 독립으로 발전했다. 법의 종교적 기반은 세속적인 것으로 바뀌었지만, 법의 구조는 현재와 같이 남았다. 따라서 법치주의가 온통 삼각 소간이었던 셈이다.

... 어떤 제도의 역사적 기원은 그 제도의 기능과는 큰 연관이 없다. 일단 발견되고 난 다음, 그 제도는 각기 다른 사회에서 전혀 예상 밖의 방식으로 활용되거나 억제될 수 있다.


30장 달리진 정치 발전의 조건


500/ 새뮤얼 헌팅턴의 1968년 작 [정치발전론: 변혁사회에 있어서의 정치 질서]는 정치 발전이 자체적 논리에 따라 이루어지며 경제 발전, 사회 발전과 관련은 있되 별개라는 통찰이 핵심이다...


512/ 반면 경제성장이 더 나은 통치를 창출하지 못한 예도 많이 있다. 하지만 반대로 좋은 통치가 있는 경우에 성장이 나타난다. 한국과 나이지리아를 보자. 1954년 한국전쟁을 치른 한국의 1인당 GDP는 1960년에 영국에서 독립한 나이지리아보다 낮았다. 이후 50년 동안에 나이지리아는 3000억 달러 이상의 석유 수입을 얻었으나 일인당 국민소득은 1975년에서 1995년까지 낮아지기만 했다. 반면 한국은 같은 기간에 7 내지 9퍼센트의 성장을 했으며 1997년에 아시아 금융 위기가 닥칠 무렵에는 세계에서 열두 번째로 큰 경제권을 형성하고 있었다. 이런 차이가 난 까닭은 나이지리아에 비해 한국의 정부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우수했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다.

 

516-517/ 한국전쟁 직후의 한국은 상대적으로 강력한 정부를 갖고 있었다. 중국에서 유교 국가 전통을 물려받았고, 1905년에서 1945년까지 일본 식민지 시절에 여러 근대적 제도가 도입되었다. 한국은 1961년에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 장군의 지도 아래 산업화 정책을 써서 급속한 경제성장을 달성한다... 1987년에는 민주화가 이루어지고 최초의 민주적인 대통령 선거가 치러지게 되었다. 이 나라의 빠른 경제성장과 민주화는 모두 체제의 정당성을 뒷받침했고, 이는 다시 1997년부터 1998년까지의 혹독했던 아시아 금융 위기를 견뎌낼 힘을 주었다. 마지막으로 경제성장과 민주화 모두는 한국의 법치주의가 다져지는 데 힘을 보탰다... 그러나 한국의 패턴은 반드시 보편적 사례라고 할 수 없으며, 근대화에는 다른 여러 경로가 있을 수 있다.



Note:

미국 독립 혁명 기 국가 건설의 과정을 발제하다가, 사놓고 읽지 않았던 이 책을 들여다보게 되었다. 정말 명저이다. 가장 인상 깊은 것은 법치주의의 성립 과정이다. 그리고 동아시아에서는 법치주의가 서구문명이 이식되기 전까지는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법가의 사상과 법치주의는 전혀 별개의 차원이었다.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법 위에 군림하려는 수많은 인간 군상을 바라볼 때, 우리 사회에 완전히 내면화되지 못한 법치주의를 바로 세우는 것만큼 중요한 사상 실천은 없다는 것을 새삼 깨닫는다.

(2022. 9.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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