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오노 나나미
상권
46-49/ "훈족이 밀려온다!"...
개펄지대로 도망친 사람들
... 연대기에 의하면 452년에 일어난 사건이다. 그 23년 후에 서로마제국은 멸망했다.
53/ 697년에 베네치아인은 처음으로 주민투표에 의해서 국가원수(doge)를 선출했다. 이것은 1797년에 베네치아 공화국이 붕괴될 때까지 끊기는 일 없이 계속되었다...
800년에 프랑크족의 왕 샤를마뉴는 로마 교황에 의해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로서 대관했다... 샤를마뉴의 아버지 피핀은 베네치아에게 비잔티제국의 지배로부터 벗어나 자기의 지배 아래로 돌아오라고 요구해 왔다.
57/ ... 서쪽의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샤를마뉴와 동쪽의 비잔틴제국의 황제 사이에 조인된 조약에 의해서이다... 베네치아인이 비잔틴제국에 속하는 것을 인정한 것이다. 또한 베네치아인에게는 신성로마제국 내에서의 교역의 자유까지 인정했다...
59/ 제10대 원수인 안젤로 파르티치파치오가 선두에 나서서 베네치아인들은 나라 전체를 몽땅 옮기는 마지막 이주를 했다...
66/ 성 마태오에게는 탄생을 나타내는 인간.
성 루가에게는 희생을 나타내는 암소.
성 마르코에게는 부활을 의미하는 사자.
성 요한에게는 승천을 나타내는 독수리.
83/ 소택지재를 모두 힘을 모아 집을 지을 수 있는 땅으로 만드는 일에서부터 시작된 베네치아에서는 토지의 사유관념은 아주 초기 무렵에 이미 없어졌던 것으로 생각된다...
84/ 소금과 물고기밖에 없고, 토대를 다지기 위해 목재까지 수입하지 않으면 안되었던 베네치아인에게는 자급자족의 개념은 애초부터 없었을 것이다...
92/ 이렇게 해서 150개를 넘는 섬과 180개에 가까운 운하와 410개나 되는 다리로 이루어진 베네치아가 탄생했다.
114-115/ 하천교역이 지배적이었던 9세기까지 베네치아 상인이 취급하고 있던 중요한 상품은 소금과 소금에 절인 생선이었다. 그러나 그후의 해상교역 시대로 들어서자 주요상품은 노예와 목재로 바뀌었다...
... 6세기경에는 앵글로색슨이, 9-10세기에는 동유럽의 슬라브 민족이 노예시장에서 주로 매매된 민족이었다... 11세기 이후 베네치아 상인들은 노예의 공급원을 찾아서 흑해로까지 나가지 않으면 안되었다... 노예를 사는 주요 고객은 아프리카의 사라센인이었다. 하렘에도 팔렸지만 이슬람교도의 군대를 보강하는 데 그 대부분이 쓰였다...
116/ 북아프리카의 이슬람교도에게 노예와 목재를 팔아 금이나 은으로 지불을 받은 베네치아 상인들은 그 '외화'를 가지고 콘스탄티노플로 갔다... 향료라든가 옷감이라든가 금은 세공품과 보석도 샀다. 이런 것들을 싣고 콘스탄티노플을 떠나 베네치아로 돌아오는 것이 베네치아 상인들의 주된 교역로였다...
123/ 둥근 형의 배라는 의미로 '코카'라고도 불렸던 범선은 길이가 너비의 약 3배인 데 비해서, 갤리선의 길이는 너비의 8배나 되었다... 갤리선의 너비는 5미터가 보통이었기 때문에 길이는 40미터가 되는 셈이다...
126/ ... 나침반이 쓰이기 시작한 것은 14세기가 되고부터다.
129/ ... 대포가 사용되기 전까지의 군선이란 승무원의 수에 의해 결정되었다...
133/ 1177년에 베네치아는 당시의 신성로마제국 황제 프리드리히(바르바로사)와 교황 알렉산데르 3세를 초청하여 원수 세바스티아노지아니의 조정으로 화평협정이 조인되었다...
1000년경에 베네치아인이 싸우지 않으면 안되었던 상대는 슬라브와 사라센의 해적들이었으나 1081년의 상대는 남이탈리아로부터 시칠리아를 정복한 노르만인이었다.
135/ ... 두라초의 공방전은... 격전 끝에 베네치아군의 승리로 끝났다... 비잔틴제국 황제는 베네치아 상인이 비잔틴령 전역에서 완전한 자유통상을 허용한 것이다... 콘스탄티노플의 중심지인 금각만을 따라서 베네치아 거주구를 두는 것이 허용되었다... 속속 베네치아 '상사'가 지점을 두기 시작했다.
137/ 1099년에 십자군 함대라고 이름을 붙인 베네치아 함대가 아드리아 해를 내려가서 오리엔트로 향했다...
143-144/ ... 1147년의 제2차 십자군도 실패로 끝나고, 1187년에는 살라딘에 의해서 예루살렘도 점령당하고 말았다. 1189년에 요란스러운 선전을 하면서 보낸 제3차 십자군도 리처드 사자심왕의 영웅다운 모습이 화제가 되었을 정도이고...
두 개의 조류는 참으로 때를 맞춰 부딪쳤다. 1202년에 일어난 제4차 십자군이 그 합류점이었다...
229-231/ '프레스티토 마리티모'를 해상융자라고 번역했는데, 이것은 보통 단기간의 융자를 위한 제도이며 이자는 연 20퍼센트였다...
또 하나의 융자제도는 내가 한정합자회사라고 의역했지만, '콜레간차'라는 제도다... 말의 의미 자체는 '연대'이다. 같은 제도를 제노바에서는 '코멘다'(소개, 추천)라는 말로 썼다.
... 계약 방법에 따라 두 가지로 분류된다...
첫번째 방식은 자본가는 전 자본의 3분의 2를 출자한다... 선원 겸 상인은 나머지 3분의 1을 출자한다. 이익은... 반분하는 규칙으로 되어 있었다.
두번째 방식은 자본가가 자본의 전액을 출자하는 케이스다... 이익은 자본가가 4분의 3, 경영자가 4분의 1의 비율로 나누는 것으로 되어 있었다.
... '콜레간차'는 보통 한 척의 배를 건조한다든가, 한 항해에 한해서만 '연대'가 성립되었다.
248-249/ '무다'라고 불리는 정기상선로 제도가 창설된 것은 1255년이었다...
'무다'라는 말의 원래 의미는 벌레 등이 봄이 되면 껍질을 벗고 탈바꿈하는 것을 뜻하는 것이다...
... 다음의 네 개가 강으로 비유하면 대하에 해당하는 항로였다.
1. 그리스 항로 - 콘스탄티노플에서 흑해로, 선단의 일부가 본대와 갈라져서 가는 일이 많았다.
2. 키프로스, 시리아, 팔레스티나 항로.
3. 알렉산드리아 항로.
4. 플랑드르 항로 - 영국의 사우샘프턴에 들르는 일이 많았다.
... 한 계절에 내보낸 선단의 수는 30에서 50이었다고 한다...
250/ 우선 그리스 항로에서의 수출품은 플랑드르의 모직물과 피렌체산의 직물, 독일의 금속제품과 베네치아의 유리공예품이다. 수입품은 포도주, 올리브유, 과일 그리고 스파르타와 테베에서 생산되는 비단, 설탕, 벌꿀, 납, 염료 등이었다. 흑해 지방의 산물로서 밀, 모피, 가죽이 있었지만 노예는 갤리선에 싣는 것이 금지되어 있었기 때문에 콘스탄티노플과 알렉산드리아 사이를 왕복하는 범선이 사용되었다.
키프로스, 시리아, 팔레스티나 항로의 경우도 목재를 넣으면 수출품은 대체로 같은 물건이었다. 수입품은 향신료를 비롯해서 다마스쿠스산 견직물, 과일, 염료 등이어서 갑자기 오리엔트를 느끼게 한다.
알렉산드리아 항로에 이르러서는 이건 완전히 동양의 특산물인 향신료의 독점시장 같은 느낌을 준다. 베네치아의 수출품은 금속제품과 모직물에 목재와 노예였다.
플랑드르 항로는 가장 늦게 1300년대 초기에 개설된 항로이지만, 수출품은 향신료, 설탕, 그리스산 포도주(영국인은 특히 이것을 소중히 여겼다)와 고급직물이고, 수입품은 주로 양모와 모직물이었다...
252/ ... 향신료는 일종의 양념이었다... 후추와 육계와 정향나무와 육두구와 생강이 고기를 맛있게 해주는 것이었다. 그밖에 월계수 잎이 있지만 이것은 서유럽에서 생산되었다.
253-254/ 인도와 실론산 향신료가 인도양을 건너서 베네치아의 정기선단이 도착하는 오리엔트의 항구까지 운반되는 데는 네 개의 통상로가 있었다.
1. 흑해 통상로 - 인도양을 지나 페르시아 만 입구로부터 상륙하여, 페르시아를 통과하여 카스피 해 부근의 타브리즈로부터 흑해 연안의 트레비존드로 나간다.
2. 소아르메니아 통상로 - 이것은 마르코 폴로가 지나간 길이다. 타브리즈에 도착할 때까지는 흑해 통상로와 같지만, 거기서부터 길을 서쪽으로 잡고 지중해에 접하는 소아르메니아의 라이아초로 나간다.
3. 아콘 통상로 - 인도양을 통과하여 홍해로 들어간다. 그리고 홍해의 동안인 지다에 상륙하여 메카, 메디나를 지나 다마스쿠스까지 사막의 배라고 불리는 낙타의 등으로 운반된다. 다마스쿠스로부터 지중해에 접하는 아콘까지는 3, 4일의 거리였다.
제4의 통상로는 홍해를 더욱 북상해서 수에즈까지 가든가, 아니면 도중에서 서안에 상륙하여 나일 강을 내려가 카이로, 알렉산드리아로 향하는 길이다. 카이로에 도착한 후에 알렉산드리아로 향하지 않고 아콘으로 가는 수도 있었다.
265-266/ 1300년 전후를 고비로 하여 첫째로 항해기술의 혁명이 일어났다. 그 다음에 배의 구조가 변화하기 시작했다. 상인 쪽에서도 상업기술의 획기적인 개량을 하게 된 것도 이 시기였다. 그리고 이런 것들을 기반으로 해서 상인의 유형도 달라진 것이다.
먼저 항해기술의 변화인데, 그것은 나침반과 항해도와 '타볼라디 마르테로지오'라는, 말하자면 항로의 조견표가 항해에 필요한 세 가지 기구로서 큰 구실을 하기 시작하면서 일어났던 것이다.
나침반은 9세기에 이미 중국에서 고안되었던 것 같다. 그것이 아라비아인에 의해서 지중해로 건너오게 되고, 1302년에 이탈리아의 해양국가의 하나인 아말피의 상인에 의해서 개량되었다. 그리고 그 유효성 때문에 지중해 지방의 선원들 사이에 급속히 보급되었다고 한다. 물론 14세기 중에 몇 번이나 개량되었다.
268/ 1300년 전후에 북유럽의 둥근 형의 배가 지중해에도 알려지게 되었다. 흘수선이 높은 사각돛 범선이었다. 이 '코카'는 인건비의 절약은 곧 수송 비용의 경감이라는 점에서 이탈리아 해양국가들의 주목을 끌게 되었다.
272-273/ 14세기의 특색인 개혁의 세번째는 상업기술의 진보였다. 그것은 우선 부기의 보급에 의해서 시작되었다.
부기가 베네치아인의 발명이라는 것은 전설이다. 사실은 토스카나 지방 프라토의 상인이 고안한 것인 듯하다. 그러나 그것을 복식으로 만든 것은 베네치아인이었다...
부기의 기입에 불가결한 아라비아숫자가 유럽에 들어온 것은 1200년대 초의 피사 사람들의 공이다....
... 완전히 베네치아인의 공적으로 돌려도 좋은 것은 근대적인 의미에서의 은행제도를 창설한 일이다.
280/ 서유럽에서 금화를 최초로 만든 것은 베네치아가 아니었다. 1251년에 제노바가 '제노비노'라고 불리는 금화를 만들었다. 이듬해에 피렌체도 유명한 '피오리노' 금화를 만들기 시작했다. 북아프리카로부터 금이 들어오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베네치아가 금화를 만드는 것은... 1284년부터였다...
281/ 두카토라고 불리는 베네치아의 금화는, 무게에서는 3.56그램으로... 순도에 이르러서는 0.997이라는... 순도를 자랑하고 있었다... 1797년에 베네치아 공화국이 붕괴될 때까지 500년 간 그 순도를 계속 유지했다.
385/ 제노바는 1284년의 멜로리아 해전에서 서지중해의 경쟁상대인 피사를 완전히 전열에서 밀어내고 말았다. 지브롤터 해협 통행의 자유를 획득해서 대서양 항로에 대한 길도 열었다... 비발디 형제의 예를...
이 두 사람의 제노바인은 1291년에 지브롤터 해협을 건너서 아프리카 연안을 남하하여 인도로 건너가려고 항해를 떠났다. 불행하게도 아프리카의 중간쯤까지 가서 소식이 끊어졌지만...
386/ ... 1295년... 제2차 베네치아-제노바 전쟁은 흑해 연안의 시장이 쟁점이 되었다.
이보다 4년전에 이집트의 맘루크 왕조의 맹공으로 십자군이 정복한 땅 중에서 남아 있던 마지막 부분인 아콘이 함락되었다... 서유럽 그리스도교의 패퇴에 분노한 로마 교황은 이슬람 교도와의 교역을 금지했다. 제노바도 베네치아도 시리아나 팔레스티나, 이집트의 어디하고도 교역을 할 수가 없게 되고 말았다. 동양으로부터 실려 오는 향신료를 비롯한 물산을 서유럽의 상인이 살 수 있는 장소로는 흑해 연안만이 남게 되었다.
하권
40-43/ '톰마소 모체니고 연설'... 국가원수 모체니고가 죽음의 병상에서 했다는 연설이다...
국채는... 600만 두카토로 줄어들었고 수출총계는 1천만 두카토에 수입도 거의 동액이며, 여기서 나오는 이익은 400만 두카토에 이른다.
국영 조폐창은 해마다 120만 두카토의 금화를 주조하고 은화는 80만 두카토를 주조하여 내보낸다... 베네치아 내의 가옥의 가치는 700만 두카토를 넘었고 거기서 나오는 임대료 수입은 연간 50만 두카토에 이른다.
법의 평등은 다른 나라에도 널리 알려져 있어 외국인들도 이 나라에서 재판을 받고 싶어할 정도이다.
45척의 대형 갤리선에 1만 1천 명의 선원이 상시 출항할 수 있는 상태에 있고
300척이 넘는 200암포라(120톤)급 이상의 대형 범선에 8천 명의 선원이 배치되어 있으며,
3천 척에 이르는 40에서 200암포라(24톤에서 120톤)급의 소형 범선에 1만 7천 명이 선원으로 취업해 있다.
조선공은 6천 명을 헤아리며, 비단과 면직물 등의 직물공은 범포를 짜는 공원들을 합쳐 모두 1만 6천 명에 이른다.
연간 수입이 700두카토에서 4천 두카토에 이르는 시민은 1천 명을 헤아린다(당시에는 집세를 빼고 한해에 15에서 20두카토만 있으면 충분히 생활할 수 있었다).
톰마소 모체니고의 연설은 1423년의 것이다. 이 시기에 이만큼 정확한 통계를 가질 수 있었던 나라는 지중해 세계와 유럽을 통틀어도 베네치아밖에는 그 예를 찾아볼 수가 없다...
143/ ... 1458년에 성지순례를 한 파도바의 기사 카포디리스타는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느긋이 바다여행을 즐길 생각이면 한 사람 앞에 60두카토는 준비해야 한다. 그중 베네치아로부터 야파까지의 왕복 배삯(식대와 출입국세 포함)이 35에서 40두카토, 팔레스티나에 상륙한 후의 성지와 성유적 참관료로 이교도들에게 지불할 돈이 15두카토, 그밖에 성지에 머무르는 약 20일 동안의 경비는 각자가 부담해야 하니까 이것까지 포함하면 60두카토는 최소한의 필요경비라 할 수 있다.
145/ ... 또 '특별 코스'에 해당하는 시나이 반도 경유 순례를 하고자 하는 사람들을 위해 예루살렘으로부터 시나이 반도, 그리고 카이로를 거쳐 알렉산드리아로 빠져 그곳에서 베네치아 배편으로 베네치아로 돌아오는 코스가 기획되어 있었다. 이 몫의 비용은 따로 23두카토를 내게 되어 있었다.
성지순례를 나서려면 세 가지 증명서가 필요하다. 첫째는 교구의 사제가 발행해주는 순례자 전용 패스포트 비슷한 것, 둘째는 로마 교황이 발행하는 성지순례 인가서 비슷한 것, 이것이 없으면 이곳저곳의 성스러운 유적들을 참배하여 얻게 되는 '면죄'가 무효가 되니 순례자들에겐 없어서는 안될 서류였다. 셋째는 ... 이슬람 국가가 발행하는 통행허가증을 받아야 한다... 이 비자와 ... 교황의 인가서를 베네치아 정부가 일괄적으로 받아주는 것이다.
202/ ... 최초의 근대적 지도는 1300년대 전반에 베네치아에서 만들어졌다. 베네치아인 수도사와 한 귀족과 베네치아에 살고 있는 제노바 태생의 제도공, 이 세 사람의 공동작업의 산물이었다....
15세기에 만들어진 해도의 특징은 지중해 세계에 한정된 것이 아니고 대상이 훨씬 넓어진 점이다. 그 중에서도 베네치아의 무라노 섬의 수도사 마우라가 만든 세계지도는 고대 이후로 끊겼던 세게지도 제작을 다시 살려 그것을 새로운 지식으로 수정한 것이었다...
205/ (1454년 다음해의) 다음해에 알비제는 포르투갈 상선들에게 좀더 남쪽으로 내려가자고 권한다... 우연히도 '카보 베르데' 섬을 발견한다.
북아메리카 방면에서는 1300년대 말기에 한 베네치아인이 그린란드를 발견하였다...
237/ 1506년, 오랫동안 서열 첫째의 단골이었던 독일 상인들이 후추 구입처를 베네치아에서 안트웨르펜으로 옮기기로 결정한다. 영국, 프랑스, 플랑드르는 이미 안트웨르펜으로 바꾼 바가 있었다....
253/ ... 아메리카 대륙 발견 후에도 신대륙의 은과 독일산 은의 비율은 한참 동안 독일산 은이 유리했다. 그러나 1580년 무렵을 고비로 대량으로 나돌기 시작한 신대륙의 은이 독일산 은을 밀어낸다... 이후로 은 시장은 안트웨르펜으로 옮겨가 버렸다.
256/ 종전에 비해서 폭발적으로 늘어난 것의 하나가 비단 등 견직물에 대한 수요였다. 대량의 견사가 페르시아로부터 알레포로 집결되어 베네치아 상인의 손을 거쳐 독일의 견직산업의 중심지인 프랑크푸르트의 쾰른으로 유입되었다. 견사를 가공한 완제품이 같은 루트를 역방향으로 실려나간 것은 말할 것도 없다. 다만 후자의 경우 종착역이 콘스탄티노플이 되는 경우가 많았다.
259/ 16세기 초의 이탈리아는... 독일, 에스파냐, 프랑스에 의한 침탈의 제물이 되어가고 있었다... 장인이며 기능직들은 몸이 가벼워서 롬바르디아와 토스카나 지방으로부터 베네치아로 대량 이주해왔다... 그 결과 베네치아의 모직공업은 눈이 휘둥그레질 만큼의 발전을 하게 된다.
261/ 안경이 보급도 이 세기의 특색이다. 다만 렌즈의 개발은 이미 13세기에 무라노 섬의 유리공업 단지에서 이루어졌다는 말이 있지만 14세기 초에 안경 제조가 허가되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가장 오래된 안경을 낀 인물의 초상화는 1352년에 그려졌다... 안경의 사용이 일반화하는 데는 200년쯤 걸린 것 같은데 이것은 렌즈 제조상의 기술진보를 기다려야 했기 때문일 것이다...
262/ 인쇄기술은 15세기 중반에 구텐베르크가 발명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것이 베네치아에 소개된 것은 발명 후 20년이 지나서였다.
273/ ... 벌써 1474년부터 베네치아에서는 새로운 고안에 대하여 10년간의 특허를 허가할 것을 법으로 정하고 있었다. 특허제도가 처음으로 확립된 것도 베네치아에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