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태기
에필로그
나는 이 '잃어버린 고리'를 '판타 레이'라는 개념에 찾고자 한다. '판타 레이'는 고대 그리스 철학자 헤라클레이토스의 유명한 언명으로 "만물유전", 즉 "모든 것은 흐른다."라는 뜻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지상의 물체들은... 4원소설을 제시했다. 그리고 천상세계의 물체들...은 제5원소라고 불리는 유체 에테르로 구성되어 있다고 보았다... 르네상스 시대와 과학혁명 초기, 학자들은... '보텍스(vortex, 소용돌이)'라는 유동현상에 주목했다. (유체역학에서는 '와류', '와동'이라고 부르지만...)
... 뉴턴역학은 바로 이 데카르트의 보텍스 이론에 대한 정면도전이었다...
1장 레볼루션과 보텍스
1582년 10월 4일의 다음 날이 10월 15일이 되면서 갑자기 달력에서 열흘이 사라진다. '그레고리력'이라 불리는 새 달력의 도입으로 벌어진 일이다. 기원전 46년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시행한 율리우스력은... 미세한 오차가 1500년 이상 누적되며 차이는 무려 10일에 이르게 된다. 오차의 누적으로 부활절이 다른 절기와 충돌하자 로마 교황청은 오랜 고민 끝에 10일을 삭제하고 새 달력을 정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신교국가들은 교황이 밀어붙인 새 달력을 거부했고...
1473년 폴란드 북쪽 도시 토룬(Torun)에서 태어난 코페르니쿠스는 꽤 유명한 가톨릭 주교였던 외삼촌의 권유로 교회법을 공부하면서 교황청의 고민거리인 달력문제에 눈을 돌린다... 1501년 코페르니쿠스는 달력문제를 본격적으로 연구하기 위해 파도바 대학교에서 의학을 전공한다... 히포크라테스가 "점성학을 알지 못하는 자는 의사가 될 수 없다"... 당시 일원론적 세계관에서 점성술로 인간사를 바라보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고, 천문학(astronomy)과 점성학(astrology)은 아직 구분되지 않았다.
... 1514년 교황 레오 10세는 직접 달력문제를 해결하고자 천문학(또는 점성술)으로 이름 높은 코페르니쿠스를 초청한다... 거절했다. 이미 천동설을 의심하고 있던 그는 지구를 중심에 둔 천문체계로는 달력개혁에 근본적인 한계가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1517년 마르틴 루터가 레오 10세의 면죄부 발행에 반박문을 발표하며 시작된 종교전쟁으로 달력개혁은 중단된다.
1533년 코페르니쿠스는 레오 10세의 조카였던 새 교황 클레멘스 7세에게 지동설을 설명할 기회를 얻는다. 해가 지날수록 율리우스력의 오차가 누적되자 교황청은 정확한 1년의 길이를 설명할 수 있는 코페르니쿠스의 이론(지동설)에 호감을 보인다. 하지만 신교의 리더 마르틴 루터는 1539년 "여호수아가 멈추라고 한 것은 태양이지 지구가 아니다."라고 성경 구절을 인용하며 가톨릭이 옹호하던 지동설에 돌직구를 날렸다. 루터의 공격은 신교의 나라 프로이센으로 둘러싸여 있던 폴란드의 가톨릭 성직자 코페르니쿠스를 난처하게 했다. 지동설이 종교 갈등으로 번질 것을 우려한 주위 사람들의 권유로... 1543년 출판 교정이 마무리될 무렵 이미 코페르니쿠스는 뇌출혈로 쓰러진 뒤었다. 다행히 코페르니쿠스는 자신의 책의 인쇄본을 보고 난 뒤 눈을 감았다...
'레볼루션'이 '혁명'이라는 의미를 가지게 된 것은 뉴턴의 <프린키피아>가 출판되던 1688년 영국의 명예혁명 부터이다. 이처럼 원래 천문학 용어였던 '레볼루션'은 코페르니쿠스 이후 '혁명적인 변화'라는 의미로 이해되기 시작했다. 철학자 이마누엘 칸트는... "코페르니쿠스적 전환(Kopernikanische Wendung"이라고 명명했으며...
<천구의 회전에 대하여>가 출판되자 천문학자들은 지동설보다 코페르니쿠스의 획기적인 천문 계산법에 더 주목했고, 태양의 1년 주기에 대한 계산은 한층 더 정확해졌다. 마침내 1582년 교황 그레고리우스가 코페르니쿠스 이론에 상용된 계산법을 바탕으로 새 달력을 발표한다... 하지만 신교국가인 영국은 170년이 자난 1752년이 되어서야 새 달력을 받아들였고, 가톨릭을 받아들이지 않은 러시아는 볼세비키 혁명정부가 들어선 1918년에야 받아들였다...
... 1562년 위그노 전쟁이 벌어지면서... 사상 통제에 강력히 반발하던 조르다노 브루노Giordano Bruno는 1591년 베네치아에서 체포되어... 결국 1600년 브루노를 공개 화형에 처했다. 얼마 전까지 코페르니쿠스의 이론으로 새 달력을 완성했던 교황청은 이 시점 이후 지동설을 불온 사상으로 간주한다.
... 당시 루돌프 2세는 명목상 신성로마제국 황제였지만... 빈에서 따돌림을 받아 신교가 지배하던 프라하에 머물렀다. 달력개혁 이후 정확한 천문관측이 중요해지자... 당대 최고의 관측전문가인 덴마크 왕족 튀코 브라헤를 초빙했다... 케플러는... 지동설을 확신했지만, 튀코 브라헤는 동의하지 않았다... 1601년 귀족과의 만찬에서 와인을 마시고 생리 작용을 참다가 방광이 터져 어이없이 죽어 가던 튀코는 마지막 순간에야 모든 자료를 케플러에게 넘긴다는 유언을 남긴다.
... 브라헤의 관측결과와 코페르니쿠스의 이론이 달랐던 것이다. 이후 케플러는 코페르니쿠스의 이론에 타원 궤도를 결합함으로써 보다 완전한 지동설을 완성한다. 1625년... 이 천문 관측표는... "루돌프표(Tabulae Rudolphinae)"라고 명명했다. 여기서 뉴턴의 만유인력 법칙의 기반이 되는 '케플러의 법칙'이 탄생한다.
... 파도바 대학교 교수 갈릴레오 갈릴레이가 1609년 천문관측에 망원경을 도입하여... 지동설과 타원궤도는 부인할 수 없는 사실로 굳어진다. 하지만 거듭되는 신교와의 갈등에 통제력을 상실할까 불안해하던 교황청은 마침내 1616년 코페르니쿠스의... <천구의 회전에 대하여>를 금서로 지정하기에 이른다.
루돌프 2세가 사망하자 신성로마제국은 보헤미아에 신앙의 자유를 허용하지 않았고, 반발한 보헤미아의 지배세력들이 1618년 황제의 비서를 프라하 왕궁 창문 밖으로 집어던지는 사건이 발생한다...
그리스어로 '피지스'는 라틴어로는 '나투라이(naturae)'... 로서 자연이라는 의미와 함께 '본질(또는 본성)'이라는 뜻도 가지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연철학으로서 피지스를 다루는 학문을 '물리학(physics)'이라고 불렀다... 데카르트 시대에 와서는 생명의 '본질(physis)'인 운동 메커니즘을 '물리학(physics)'으로 다루는 '생리학(physiology)'으로 발전했다. 따라서 의사 데카르트는 사물의 운동과 천체의 운동을 '생리학' 관점으로 바라보았다. 이러한 연구의 결과로 탄생한 것이 1637년의 <방법서설>이다.
... 코페르니쿠스 시절만 해도 인간의 질병을 해결하기 위해서 천문 관측이 중요했지만 데카르트는... 일원론적 세계관을 거부했다. 대신 물리 법칙이 적용되지 않는 영혼의 영역과 반드시 직접적인 인과율이 존재하는 물질의 영역을 구분하는 이원론적 세계관을 도입한다...
30년 전쟁이 절정에 이르자 가톨릭의 사상통제가 더욱 심해진다... 종교전쟁이 마무리되는 시점에 지구가 태양을 돌고 있다는 사실은 지식인들에게 더 이상 의문의 대상이 아니었다. 문제는 '왜 도는가?'였고, 이제부터는 무엇이 행성들의 '레볼루션'을 일으키는지에 대한 의문으로 바뀌었다...
전유럽을 휩쓴 30년 전쟁은 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으로 마무리된다. 보헤미아에서 합스부르크 가문에 대한 반발로 시작된 이 전쟁으로...
5장 서양이 동양을 넘어서는 1776년
1729년 젊은 인쇄업자 프랭클린... 자신만의 독특한 인쇄기술로 나뭇잎 모양을 지폐에 넣어 위조문제를 해결했다...
1741년 그는 새로운 개념의 벽난로를 개발한다... 당시로는 생소한 유체역학 원리인 사이펀(siphon) 현상을 이용했다... 1752년 프랭클린의 유명한 번개실험이 성공하고, 식민지인으로서는 최초로 런던 왕립학회 회원이 된다.
당시 스코틀랜드 글래스고 대학교 의과대학 교수였던 조지프 블랙Joseph Black은 1754년 이산화탄소를 최초로 발견했다... 블랙의 연구를 시작으로 기체에는 다양한 종류가 있으며 공기는 이들의 조합이라는 것이 서서히 밝혀진다. 이는 다시 조지프 프리스틀리Joseph Priestley와 앙투안로랑 드 라부아지에Antoine-Laurent de Lavoisier로 이어져 4원소설이 무너지며 연금술의 시대가 끝나고 화학이 탄생한다...
1763년 와트는 글래스고 대학교에서 교내 연구장비로 들여온 토머스 뉴커먼Thomas Newcomen의 증기기관 수리를 맡게 되면서 처음으로 증기기관을 접한다... 갱도가 깊어지며 지하수를 퍼올리는 말의 숫자가 늘어나자 탄광업자들의 고민도 늘어났다. 이에 1698년 토머스 세이버리Thomas Savery는 최초로 증기기관을 이용해 지하수를 퍼올린다... 뉴커먼은 세이버리의 증기기관을 개량하여 실린더-피스톤 개념을 도입했으며 300년이 지난 지금도... 동력기관의 기본원리이다...
... 애덤 스미스는 프랑스 지식인 피에르 사무엘 듀퐁Pierre Samuel du Pont과 프랑수아 케네Francois Quesnay와 토론하며 유럽에서 새로운 산업과 경제질서가 재편되고 있음을 직감한다.
... 케네는 프랑스 의사 선배인 데카르트의 '피지올로지physiology, 생리학'적 관점을 반영한다... 케네는 자신의 견해를 '피이오크라시physiocracy'라고 불렀다... '피지오크라시'는 '가만히 두라'는 의미의 프랑스어 '레세 페르Laissez Faire. Let it do'라는 말로 요약할 수 있었다...
... 애덤 스미스는 '자유방임주의'로 번역되는 케네의 '레세 페르'를 적극 받아들이고, 프랭클린의 지폐를 옹호했다...
글래스고 대학교에서 증기기관을 수리하던 와트는 블랙 교수를 통해 뉴커먼 증기기관에서 '잠열潛熱, latent heat'의 문제를 알게 된다. 실린더 내부의 수증기 응결로 작동하는 뉴커먼의 증기기관은 상변화相變化로 인한 열손실이 상당했다. 1769년 와트는 응축기를 실린더 외부로 돌려 열효율을 획기적으로 증가시킬 아이디어를 생각해낸다. 하지만 당시의 제조기술로는 이 아이디어를 실현할 수 없었다. 그는 일단 특허부터 등록했다.
... 볼턴의 주선으로 버밍엄의 루나 소사이어티에서 프리스틀리의 처남 존 윌킨슨John Wilkinson을 만난다. 윌킨슨은 대포 포신의 구멍을 완전한 원형으로 가공하는 '보링boring'기술을 개발한다. 이 기술은 와트의 특허에서 피스톤-실린더 사이의 간격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새로운 제조기술이었다.
6장 열과 저항
... 1754년... 블랙에 의해 이산화탄소가 처음 발견되면서, '기체-공기'라는 4원소설이 흔들린다. 블랙은 또한 1761년 얼음이 녹을 때 온도 변화 없이 열이 흡수되는 것을 관찰하고, 이를 '숨어있는 열'이라는 의미로 '잠열'이라고 불렀다... 이 무렵 1도 단위로 측정할 수 있는 정밀한 온도계가 탄생했기 때문이다...
7장 루나 소사이어티와 산업혁명
볼턴은 주화 제작 공정을 단조로 찍어내는 스탬핑(stamping)으로 바꾸고 자신의 증기기관으로 단위시간당 생산량을 극대화해서 제조단가를 획기적으로 낮춘다. 또한 뉴턴이 했듯이 테두리 디자인을 복잡하게 만들어 어설픈 공정기술로는 위조비용이 오히려 비싸지도록 만들었다... 2011년 영국정부는 50파운드 고액권을 발행했는데, 표지인물로 볼턴과 와트를 선정했다.
9장 대포와 화약
1453년 동로마제국의 멸망은 서양사에서 중세가 종말을 고하고 근대가 시작된 기점이다...
총포의 발달은 16세기를 거치며 기사계급을 완전히 몰락시켰다. 1605년에 발표된 미겔 데 세르반테스의 소설 <돈키호테>은 이러한 격변기의 시대상을 잘 보여준다.
... 당시까지 대포는 주로 청동으로 만들었는데, 정작 영국은 구리가 생산되지 않아 청동 대포 제조에 애를 먹고 있었다.
역사적으로 청동기 시대 이후 철기 문명이 시작되었지만, 이때까지 유럽은 제철기술이 발달하지 못하여 철제무기는 단조로 생산하는 칼에 국한되어 있었다. 주조로 만들어야 하는 대포의 경우 잘 깨지는 주철의 한계로 화약 폭발력을 버티지 못하고 포신이 깨지는 경우가 많아 실전 배치는 못하는 상황이었다. 헨리 8세는 영국에서 흔하던 철광석을 이용한 주철 대포기술에 박차를 가해 드디어 주철 대포를 실전 배치한다. 덕분에 그의 딸 엘리자베스 1세에 이르러 강력한 주철 대포로 무장한 영국 해군이 스페인의 무적함대를 격파한 것이다. 이때가 1588년이다.
... 뉴턴이 운동법칙에 대해 연구하고 미적분학을 발견하게 된 배경은 사과에 대한 관심보다는 대포의 탄도였다고 보는 것이 맞을 것이다...
... 포병장교였던 나폴레옹은 오일러의 책을 탐독했다...
... 윌킨슨이 개발한 보링기술... 을 대포제조에 이용할 수 있음을 눈치챈 캐런 철강소는... 1778년... 새로운 대포를 출시하면서 이 대포의 이름을 '캐러네이드Carronade'라고 이름붙인다. 1779년 최초의 캐러네이드가 실전에 배치되기 시작하며, 이 캐러네이드 대포로 향후 유럽 해전의 판도가 바뀐다.
26장 판타레이와 새로운 산업의 탄생
1844년 미국인 찰스 굿이어Charles Goodyear는 고무 경화법을 개발하여 당시까지 불안정한 물질이던 고무를 다루는 획기적인 방법을 제시한다. 1823년 영국 화학자 찰스 매킨토시는 지우개로나 사용되던 고무로 방수 소재를 개발하여... 고무 산업의 문을 열었다. 1840년대에는 전신의 발달로 고무가 전신망의 방수 절연재료로 대대적으로 사용되었다... 현실적인 대안으로 떠오른 것이 구타페르카Gutta Percha나무에서 추출한 진액이다.
1848년 페러데이가 제안한 구타페르카 진액은 순식간에 고무를 대체한다. 이에 독일의 지멘스 역시 구타페르카로 전신을 깔았으며, 이 구타페르카 회사로 1871년 독일에서 출발한 콘티넨탈continental은 나중에 벤츠에 타이어를 공급하기 시작한다... 한편 당시까지 골프공은 수백 년간 깃털을 뭉쳐 만들어 왔는데, 1848년 탄성이 뛰어난 구타페르카 소재의 골프공이 만들어지며 골프 스포츠에도 일대 혁명이 일어난다.
... 이런 가운데 이 고무 경화법에 힘입어 고무가 안정적인 소재로 거듭나게 되과, 다시 구타페르카를 대체하며 거의 모든 산업에 고무가 응용되기 시작한다. 이로써 19세기 후반 고무산업이 폭발적으로 발전하게 된다.
이 무렵 천연 고분자 셀룰로스에 질산이 첨가되면 강력한 폭발물질이 되는 것이 우연히 발견된다. 이것이 나이트로셀룰로스로서, 같은 시기 발견된 나이트로글리세린과 함께 기존의 재래식 화약을 급속히 대체한다. 한편 1869년 코끼리 상아 하나에서 당구공을 8개밖에 생산할 수 없어... 당구공 공급부족을 해결할 대체물질 개발에 거액의 상금을 건다. 이에 미국 발명가 존 웨슬리 하얏트John Wesley Hyatt는 나이트로셀룰로스에 몇 가지 첨가물을 더해 셀룰로이드를 개발하여 상아를 대체한다. 이렇게 인류 최초의 플라스틱이 탄생한다...
1882년 미국인 조지 이스트만George Eastman은 사진을 현상하던 유리판을 대체하기 위해 나이트로셀룰로스로 필름을 개발한다... 코닥 필름으로 뢴트겐이 엑스선X-ray 촬영을 했으며, 연속 사진이 가능해져 영화가 탄생한다. 하지만 근본적으로 나이트로셀룰로스는 화약을 대체하는 물질이라 폭발성이 강하여 숱한 사고가 발생했다. 영화 <시네마천국>에서 상영기사 알프레도가 실명한 것도 이 때문이다. 1940년대 이후에는 안전한 아세테이트로 대체되었다...
1887년 영국의사 존 보이드 던롭John Boyd Dunlop은 아들이 세발자전거를 타며 엉덩이가 아파하는 것을 보고 공기압 타이어를 개발한다...
1889년 프랑스에서 한 남자가 펑크 난 던롭 타이어를 때우기 위해 미슐랭을 찾았다... 찰스 매킨토시의 조카딸로부터... 미슐랭 형제는 펑크가 났을 때 접착제로 때우는 시간이 오래 걸린다는 점에 주목한다. 그들은 기존의 공기 주입식 타이어를 현재와 같은 착탈식으로 바꾸어 쉽게 교체하도록 만들었다...
1895년 발생한 드레퓌스 사건으로 프랑스 사회가 둘로 분열한다... 1903년 시작된 자전거 경주대회 '투르 드 프랑스Tour de France'이다... 자동차 여행용 안내 책자를 만들어 미슐랭 타이어 교체방법과 서비스를 받을 수 있는 지점들을 슬쩍 집어넣는 것이다... 이 책이 <미슐랭 가이드>이다.
27장 유동성 에너지 석유와 자동차 혁명
1859년 석유에서 케로신kerosene이 추출되면서 그때까지 등불에 사용되던 고래기름을 대체한다... 케로신은 등불에 사용되었다고 하여 한자문화권에서는 '등유'라고 불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