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자 가트
Azar Gat (2006), War in Human Civilization, 오숙은·이재만 역, 문학동네, 2017년.
제11장 유라시아의 선봉: 동부, 서부, 스텝지대
439-442/ 봉건제란 무엇인가
봉건제와 관련해 무엇보다 유의할 점은 봉건제가 한결같이 국가 구조의 산물이었다는 것, 그리고 국가의 완전한 해체로 귀결되지 않는 한 분절적 형태로나마 국가 구조의 한 형태로 남았다는 것이다. 봉건제는 완전히 지역화된, 친족에 기반하는 족장사회와는 융합하지 않는다. 오히려 봉건제는 큰 국가들에서 특징적으로 진화했다. 전근대 국가사회들에서 통칙이나 마찬가지였던 귀족의 시골 지배와 봉건제를 동일시할 수 없다는 점도 유의해야 한다. 이 사회들이 계층화될수록 토지귀족의 영향력 - 사회적·경제적·정치적·군사적 영향력 - 은 증대했다... 이 사회들은 서로 다른 경로로 봉건제를 발전시킬 잠재력을 품고 있었을지 모른다... 전근대의 대다수 자연경제는 봉건제의 독특한 경제적·정치적·법률적 예속 형태를 발전시키지 않았다. 지방 귀족이 지배하는 조각난 국가들 부류에서 봉건제의 특별한 점은 봉건제가 군사적 목표를 위한 정예 기마 군제로서 등장했고 중앙의 정치권력을 찬탈하면서 그리고 시골 지역의 인구를 그저 복종시키는 데 그치지 않고 노예/농노 처지로 전락시키면서 스스로를 영속화했다는 것이다.
봉건제에 대한 모든 표준적 정의들은 무엇보다 토지 수여를 바탕으로 존속하는 전문화된 전사 계급의 우위를 포함한다... 그 특성이란 이들이 한결같이 기병이었다는 것이다... 봉건제는 중앙권위로부터 토지 수여를 바탕으로 존속하는 기마전사들과 영주들 쪽으로 지역-지방의 정치권력과 사법권력을 끌어당기는 중력이었다. 봉건제는 다음 조건에서만 등장할 수 있었다.
· 말을 소유한 사회에서
· 전쟁 도구로서 말을 선호한 환경에서
· 가장 기초적인 소규모 농업경제를 가진 큰 국가에서, 다시 말해 탐나지만 값비싼 기마부대를 지원하고 관리할 경제·관료제 하부구조를 결여한 까닭에 군역의 대가로 토지를 수여하고 '조세' 대신 '지대'를 받아야 했던 국가에서
봉건제가 진화하려면 이 세 가지 전제조건이 있어야 했다.
여기서 핵심적이지만 충분히 인정되지 않는 요인은 모든 전근대 국가의 예산에서 단연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한 항목, 흔히 예산을 대부분 차지한 항목이 군사비였으며 기병이 가장 비싼 병과였다는 것이다. 기병이 가장 중요했던 곳에서는 국가의 운영과 기병을 육성하고 유지하는 능력이 거의 같은 의미일 정도였다. 이 엄청난 과제가 봉건제를 낳았다. 열악한 행정기구와 기초적인 소규모 경제를 가진 국가들은 이 과제에 대처하기 위해 보통 분산식 위탁에 의존했다... 전사들(그리고 나머지 봉사 제공자들)을 수입원에 직접 연결함으로써 국가는 행정 관료제라는 복잡하고 비싸고 번거로운 중간 매개를 통해 수입을 순환시킬 필요성을 낮추거나 아예 없앨 수 있었다. 더욱이 봉신들은 수여받은 자원을 경영하는 계층처럼 기능했다.
443-444/ ... 개인의 충성 서약이 특히 11세기 이래 유럽 봉건 체제의 그토록 현저한 특징이 된 까닭은 다른 방도로는 봉사 제공을 보장받기가 어려웠기 때문이다. 유의미하지만 문제가 많았던 단 하나의 봉사 보장책은 주군과 봉신 간의 권력 균형과 봉토를 몰수하겠다는 궁극적인 위협이었다. 지급수단을 깔고 앉은 채로 무력을 독점하고 있던 지주-기사 엘리트층은 시간이 흐름에 따라 토지 소유를 세습할 권리를 얻어냈는가 하면, 자신이 노예/농노를 전락시킨 주변 시골 지역 농민들에 대한 정치적·사법적 권위까지 전유할 수 있었다. 그들은 거주지를 요새화하고 성주(castellan, 프랑크 왕국에서 이렇게 불렸다)가 되어 상위 권위자와 지역 주민들을 상대로 입지를 대폭 강화했다.
이것은 봉건제의 악순환이었다. 중앙의 관료제-행정 기구를 통해 수입을 징수하고 다시 분배할 필요성을 줄이려는 국가의 시도가 기껏해야 불충분한 성과만 거두는 가운데, 시골 지역의 수입원에 직결된 기병들은 이 수입원을 통제해 국가의 소득원을 한층 고갈시키고 중앙 행정체계를 지탱하는 국가의 능력을 약화시키기만 했다... 갈수록 권력을 키워가던 지주 기마전사들은 대개 주군을 위해 군역에 임하는 기간을 제한할 수 있었다. 예를 들어 봉건시대 유럽에서는 군역이 40일로 제한되었다.
... 말 봉건제 외에 다른 봉건제는 존재하지 않았는데... 기병-특히 중기병-을 유지하려면 보병을 유지할 때보다 비용이 훨씬 많이 들었고... 기병은 일반적으로 보병보다 토지를 적어도 2배에서 최대 15배 많이 소유하거나 수여받았다... 솔론의 4계급 분류에서 기병은 황소 두 마리를 가진 유복한 농민층, 즉 중장보병대의 중추를 이룬 이들보다 수입이 거의 2배 많았다... 비잔티움에서 기병은 보병보다 토지를 4배 많이 수여받고 특별한 중기병은 16배 많이 수여받은 것으로 추정된다. 중세 카롤링거 왕조의 영역에서 재산 자격제한은 보병이 10~18헥타르 이상, 기병이 120~216헥타르였고, 헨리 2세 시대 잉글랜드 군에서 기사는 중보병보다 재산이 2.5~4배 많았으며, 백년전쟁 전야에 기사는 궁수보다 재산이 5배 많았다.
445-446/ 전통적으로 학자들은 오직 세 가지 역사적 사례와 관련해서만 봉건제라는 명칭을 사용하는 데 대체로 동의했다... 기원전 1200년경 유라시아 스텝지대로부터 말과 전차(그리고 바퀴)가 들어온 이후 등장한 중국의 봉건제다... 기마 귀족이 군사적·사회적으로 부상하면서 기존 징집 보병대의 비중은 줄어들었다... 후대 동주東周왕조(기원전 842년부터) 시대에 군주의 실질적 권력은 왕실 영지에 한정되었다. 이른바 춘추시대(기원전 772~481년)에 왕조의 영역은 사실상 자치를 하는 수백 개의 정치체로 해체되었고, 이들 정치체의 통치자나 '공公'은 자신이 충성을 맹세한 주왕조의 종주에게 봉신으로서 복종하는 시늉만 했다... 더 많이 알려진 두 사례는 일본과 유럽의 봉건제다...
447/ 봉건 영주(다이묘大名)가 기마전사에게 보수를 주는 일이 유럽보다 흔했던 일본에서는 전사가 통제하는 토지 규모가 훨씬 작았고, 충성서약이 덜 중요했으며, 영주와 기사 간의 격차가 더 컸고, 전사가 한 봉건 주군에서 다른 주군에게로 옮기는 일도 더 잦았다... 이 차이점들 때문에 유럽에서는 일본보다 토지 소유와 그에 따른 정치적·사법적 권위가 봉건 위계구조에서 아래쪽으로 더 많이 양도되었다.
449/ 봉건제의 발흥과 관련해 학자들은 프랑크 왕국에서 등자의 확산 속도가 화이트가 말한 것보다 상당히 느렸음을 입증했다. 등자는 8세기 중엽 카를 마르텔Karl Martel이 기병에게 토지를 수여하기 시작한 이후 9세기와 10세기에 점차 확산되었다... 일본에서 떠오른 기마전사들은 어쨌든 창기병이 아닌 궁기병이었다.
452/ ... 유럽에서 봉건제는 고전 시대 지중해에서 문해력을 갖춘 부유한 도시적·관료제적 선진 사회들이 붕괴하고 수 세기가 지난 뒤에야, 이 붕괴와 무관하게 게르만족의 후진 국가-사회들에서 진화했다. 그리고 일본의 경우 (중국에서) 수입한 기본적인 문명이 있기는 했으나 경제적으로 보든 사회적으로 보든 뒤이어 등장한 봉건 사회와 엇비슷하게 미발전 상태였던, 새로 건국된 커다란 중앙집권 국가를 희생양으로 삼아 봉건제가 힘을 얻었다.
456/ ... 고대 근동의 문명들에서 군사용 말타기는 기원전 9세기 동안 처음 도입되었는데, 북쪽의 우크라이나 서부 아시아 스텝지대로부터 전해진 것으로 보인다... 다른 곳과 마찬가지로 아시리아에서도 귀족은 주로 말을 부리는 전사로서 처음에는 전차를 탔고 나중에는 말을 탔다...
462/ ... 중국에서는 중세 후기 유럽에서의 전개 과정과 여러 면에서 흡사한 체제의 완전한 봉건화 및 파편화 과정이 춘추시대(기원전 772~481년) 동안 진행되었지만, 전국戰國시대(기원전 5세기부터 221년까지) 동안 이 과정의 방향이 뒤집혔다.
511/ ... 스텝지대 유목민은 서유럽을 정복하기는커녕 지배한 적도 없다. 이유는 간단하다. 앞서 언급한 다른 지역들과 비교해 닫혀있고 바위투성이인 서유럽의 지형에는 유목민의 말과 가축을 먹일 넓고 탁 트인 목초지, 즉 그들의 특수한 존속양식과 생활방식의 토대가 없었다. 스텝지대 유목민이 이주할 수 있는 최서단 경계는 언제나 헝가리 평원이었고, 여기서 그들은 중부유럽과 서유럽을 습격해 공포로 몰아넣을 수 있었다. 그러나 정말로 대규모인 기마 목축민의 거주지가 되기에 헝가리 평원은 너무 좁았다. 아틸라의 훈족, 아바르족, 헝가리 마자르족 모두와 관련해 헝가리 평원의 한정된 목초지는 시간이 흐름에 따라 기마 유목민의 위협이 약해진 주요한 이유였다...
유목민이 뿌리내릴 수 있었던 곳은 유럽 동남부의 광대한 스텝지대뿐이었다. 이 지역에서 칭기즈 칸의 제국을 계승한 킵차크 칸국은 제1천년기 말 이래 동유럽에서 출현한 농경 국가사회들을 지배했고 그들의 조공에 의존해 살았으며, 그들 덕분에 광활한 스텝지대의 제국 연합체로서 존속할 수 있었다.
515-516/ 몽테스키외는 유럽의 이 유일무이한 특징을 제일 먼저, 제일 분명하게 규정했거니와 이 특징의 근간인 지리와 생태 요인들까지 포착해냈다.
아시아에는 언제나 대제국들이 있었다. 유럽에서 대제국들은 결코 계속 존재할 수 없었다... 유럽에서는 자연적 경계가 중간 크기 국가들을 다수 형성하며, 이들 국가에서 법치는 국가의 존속과 양립 불가능하지 않다...
... 그렇지만 그리스를 비롯한 지중해의 정치체들을 보호해주고 외부에 접근하게 해주었던 바로 그 바다가 장차 제해권을 장악할 지상제국들을 위해 통신용 고속도로-아시아의 개활 평원에 비견할 만한-로 기능할 수 있었다는 데 유의해야 한다...
... 유럽의 정치적 파편화와 더 높은 수준의 권력 분배에 이바지한 지리-생태 요인들은 조각난 지형 말고도 있었다. 앞서 언급한 대로 서유럽은 중국이나 북인도와 달리 목축생활을 하는 광대한 스텝지대 변경에 노출되지 않았다...
517-521/... 몽테스키외와 베버를 비롯한 이들이 말했듯이 전제적 통치에는 관개농업이 더 유리했다... 이 모든 이유로 인해 관개농업 경작자들은 대체로 건지농업 종사자들보다 고분고분했다. 남쪽에서 관개농업을 했던 바빌로니아나 이집트가 아니라 주로 건지농업에 기반을 둔 메소포타미아 북부 아시리아의 농민 경제가 고대 근동에서 가장 효과적인 보병을 배출했다는 점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 그러나 오늘날 역사가들과 사회과학자들의 연구는 몽테스키외와 애덤 스미스 이래 유럽의 선대 학자들이 언제나 감지했던 것, 즉 상대적으로 아시아 사회들이 제국 통치에 더 취약했고 더 전제적이었으며 사회적/경제적 양극화가 더 심했다는 것을 확증한다.
... 더구나 바위투성이 지형, 한정된 목초지, 더 가까운 군사작전 거리, 도시에 집중된 방어시설, 더 높은 동원 수준 등으로 말미암아 유럽에서는 보병이 우세해졌고, 그 결과 사회 내에서 민중의 교섭력이 강해졌다.
유럽에서도 사회의 근간인 이런 조건이 힘을 잃을 때마다 기병에 비해 보병이 확연히 약해졌다... 근동의 길게 뻗은 국경선에서는 사막에서 오는 유목민의 습격을 가로막기 위해서뿐만 아니라 사산조 페르시아 제국의 대규모 기병대를 격퇴하기 위해서도 기동 기마무대가 절실히 필요했다. 앞서 확인했듯이 8세기부터 서유럽에서는 기마전이 갈수록 중요해졌는데, 광대한 프랑크 왕국의 변경에서 원거리 군사작전을 전개하고 사방에서 들이닥치는 기동성 뛰어난 습격자들을 물리치려면 재빨리 대응할 기동 기마부대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원시적/환경적 농경사회에서 기마전사들은 권력을 잡을 수 있었고 봉건제의 절정기인 11세기와 12세기에 사회-군사적 우위를 지킬 수 있었다. 유럽사에서 으레 그랬듯이 이후로는 아직 화기火器 사용 이전이었음에도 보병이 다시 주요 병과가 되었다.
조건 면에서 방금 말한 유럽의 정반대에 가까웠던 아시아의 국가 및 제국들에서는 근접 격돌전이 일반적이지 않았고 오히려 원거리 발사 전술이 표준이나 마찬가지였다. 아시리아의 보병 가운데 방어용 갑옷을 입고 전투태세를 갖춘 중보병들조차 팔랑크스와 비슷한 밀집대형으로 싸우거나 전장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하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서남아시아의 광대한 개활지에서는 기마 병과-전차와 기병-가 우위를 점했다. 포위전과 여타 특수임무에서 발군이었던 보병대는 주로 발사 무기를 이용해 적군을 약화시키고, 적군의 전열을 흐트러뜨리고, 기병들이 결정타를 날릴 여지를 만들어내기 위해 전투에 고용되었다. 창병의 주된 기능은 궁수를 보호하는 것이었다. 헤로도토스가 기술한 대로 아케메네스 왕조 페르시아의 군대는 이런 전투방식의 계승자였다... 다만 고대 인도에서는 전투 코끼리가 갈수록 결정적인 역할을 하면서 기병을 두번째 자리로 밀어냈다.
일찍이 전차-물론 유럽의 바위투성이 지형 때문에 기병보다 작전 수행에 제약이 훨씬 많았다-시대에도 전형적인 전차 교전은 동양과 서양에서 현저히 달랐다. 고대 근동의 평원에서 표준이었던 재빠른 전술적 조종과 원거리 화살 사격은 유럽에서 실행하기 훨씬 어려웠다. 전차는 전략적 기동성(아울러 엘리트를 위한 더 간편하고 위신이 서는 이동수단)을 제공했지만, 전장에서 전차전사들은 대개 전차에서 내려 무거운 무기를 들고 걸으면서 싸웠다...
523/ 동양에도 파르티아와 사산조 페르시아의 귀족 사이에서 육성된 완전 무장 창기병(카타프락트cataphract) 같은 중무장 충격기병이 있었고 물론 서양에도 사격 경기병이 있었다. 그러나 상이한 조건으로 인해 서양에서는 중세의 기사로 정점을 찍은 중무장 충격기병이 우세했다. 그렇다 해도 중무장 충격기병은 유럽사의 대부분 동안 중무장 충격보병을 보조하는 역할을 했다. 반면에 동양에서는 경기병, 그중에도 특히 궁기병이 우위를 점했다.
제14장 총포와 시장: 유럽의 신흥국가들과 지구적 세계
586/ 근대성은 유럽에서 도약했다. 유럽에서는 다른 무엇보다 베이컨이 말한 세 가지 혁명적 혁신인 화기, 대양 항해, 인쇄술(이 가운데 유럽에서 기원한 것은 없다)이 훨씬 더 발전했다.
595/ 유럽은 이른바 군사혁명을 경험했다. 화기가 야전과 포위전을 탈바꿈시켰고, 육군이 엄청나게 확대되고 더 영속적인 조직이 되었으며, 갈수록 강력해지는 국가의 중앙권위가 점차 육군에 보수를 지급하고 육군을 관리하고 지휘하게 되었다. 비슷한 과정이 해군에도 영향을 미쳤고, 유럽인들은 해군을 이용해 제해권을 장악했다...
첫번째로 제기할 물음은 '군사혁명'이 정확히 언제 일어났느냐는 문제와 관련이 있다. 이 표현을 만들어낸 마이클 로버츠Michael Roberts는... 이 주제에 도전해 주제를 발전시키고 자기 것으로 만든 역사가는 제르리 파커Geoffrey Parker다...
596/... 중세 후기 유럽을 연구하는 한 역사가는 이 시작점을 더 앞당겼다. 백년전쟁 기간에 장기 복무하는 유급군인들이 흔해졌고 이 전쟁이 끝날 무렵에는 프랑스의 칙령대Compagnie d'ordonnance 같은 영속적 국군의 토대가 놓였다.
597/ ... 2부에서 설명했듯이 이 과정 역시 1500년경에야 널리 쓰인 보병 화기가 사용되기 한참 전부터 그런 화기와 무관하게 활발히 진행되었다. 이 점을 입증하는 가장 두드러진 사례는 14세기와 15세기에 기병대에 맞서 압승을 거둔 잉글랜드의 창궁 대형과 스위스의 장창 대형이었다. 야전에 도입된 화기가 기병 소멸의 원인이라고 믿는 이들이 많지만, 사실 화기는 오히려 기병을 부활시켰다. 화승총의 느린 발사 속도-대략 1분에 한 발- 때문에 16세기와 17세기 통한 아쿼버스arquebus(화승총의 일종) 총병과 머스킷 총병은 창병의 보호를 받아야 했다. 이렇게 총기와 장창을 결합한 대형은 번거로웠으며, 종전의 막강한 스위스식 팔랑크스에 비해 보병의 전술적 유연성과 기동성, 충격 효과를 떨어뜨리는 대형이었다. 그런 이유로 이 대형은 갈수록 야전 방어시설 뒤에서 싸우려고 하는 보병의 경향에 일조했다. 충격무기를 피스톨로 보완한 기병은 개활지에서 다시 한번 주요한 공격 병과가 되었고, 이 위치를 유럽 안팎에서 다음 두 세기 내내 유지했다...
598/... 육군의 규모는 전반적으로 커졌다. 파커에 따르면, 이 확대를 주로 설명할 수 있는 것은 '군사혁명'의 또다른 주요요소인 화기 방어시설의 도래다. 화기가 야전 뿐 아니라 포위전의 양상까지 바꾸어 놓았기 때문이다. 신석기 시대의 예리코부터 역사시대 내내 방어시설의 정점은 적의 습격을 물리적으로 저지하는 높은 장막벽이었다. 화력은 이런 유형의 방어시설에 종지부를 찍었다.
... 화약과 화포 둘 다 명백히 중국에서 개척되었다. 일찍이 9세기에 발명된 화약은 11세기부터 군사적 용도로 쓰이기 시작했고, 뒤이어 화포는 13세기 혹은 어쩌면 12세기부터 쓰이기 시작했다. 몽골족이 동서양을 연결하고 있었던 까닭에 둘 다 아주 빠르게 퍼져나갔다. 대포는 1320년대나 1330년대부터 유럽의 기록에 등장했고 14세기 후반기에는 오스만의 영토에, 15세기에는 인도에 도댤했다. 이 무렵부터 서유럽이 화포발달을 선도하기 시작했다... 풍부한 광산자원과 번창하는 야금업 또한 이 발달에 이바지했다...
15세기 중엽 기술 개선이 연달아 이루어진 이후 유럽인들이 제작한 철포, 즉 '소금에 절인'화약을 사용하고 석제 포탄을 발사하는 철포는 높은 성벽을 두른 방어시설을 무력화할 정도로 강력해졌다...
604/... 1450년부터 1520년까지의 짧은 이행기를 빼면 포위술과 방어시설에 도입된 화포는 심대한 변화를 일으키기는 했지만, 그 이전 시기와 비교하여 화포로 인해 이 양자의 균형, 그리고 포위전과 야전의 균형이 근본적으로 바뀌지는 않았다...
613/ 국가와 군대
유럽에서 동원하는 자원이 증가한 과정과 중앙국가가 부상한 과정이 밀접히 연관된, 서로를 강화한 두 과정이었다는 점은 널리 인정받고 있다. "전쟁이 국가를 만들었고 국가가 전쟁을 만들었다." 13세기부터 유럽의 많은 통치자들은 국가 전쟁에 들어가는 고비용을 충당할 의도로 내키지 않아 하는 대의기관으로부터 과세 동의를 얻어내는 데 점점 더 성공했다...
616/ 육군의 규모에 관해 말하자면, 이미 11장에서 역사적으로 유지 가능한 순수한 직업군인 병력의 상한선이 인구의 1퍼센트였음을 지적했다. 아우구스투스가 고정한 원수정 로마의 비율, 즉 제국인구 4000만 명 이상에 정규 군인 약 25~30만 명은 이 황금률을 예증한다...
619/... 체이스가 아주 잘 보여주었듯이 화기는 중서유럽 사람들에게 가장 유용했는데, 지리로 인해 이 지역의 주된 군사적 난제는 스텝지대의 미꾸라지 같은 경기병이 아니라 회전會戰과 포위전이었기 때문이다...
623/... 화기 보유에 결정적인 불균형이 없는 곳에서는 화기가 군사에, 그리고 군사를 통해 사회와 국가-유럽과 그 밖에 다른 곳에서-에 미치는 영향이 그리 혁명적이지 않았다. 학자들이 인정했듯이, 화약은 베이컨이 말한 근대성의 세 요소 중 둘째 요소인 대양 항해와 결합해 바다에서 훨씬 더 혁명적인 영향을 미쳤다.
1500년 이후 역사상 처음으로 전 지구를 포괄하고 대양을 통해 대륙들을 연결한 유럽 무역 체제의 확립은 근대성의 형성에서 단연 중요한 요인이자 '유럽의 기적'의 진짜 엔진이었다.
624/... 1500년경 돌연 성숙한 이 과정 역시 그 이전에 유라시아 도처에서 오랫동안 진행된 과정이었다. 중세 후기 동안 유럽을 에워싼 지중해, 대서양, 북해, 발트해를 연결하는 역동적인 무역망이 유럽 자체에서 발달했다. 고대 로마의 지중해 일대는 기후와 생태의 다양성이 낮았던 까닭에 농산물과 제조품을 생산하는 조건이 평준화되어 교환이 제한되었지만, 유럽 북부와 남부의 현저히 다른 조건은 사치품 무역뿐 아니라 주요 생산물의 대량 무역까지 자극했다. 인도양에서 기원한 삼각돛 항해는 중세 초기에 아랍인들을 통해 지중해 유럽에 도달했다. 11세기에 중국인들이 항해를 위해 두루 사용한 나침반은 12세기 후반에 유럽에 도착했다.
627/... 16세기 초부터 갑판을 따라 탑재한 화포로 중무장하고 배의 측면에 일렬로 뚫린 포문을 통해 포탄을 발사하는 유럽식 범선이 남아시아 및 동아시아의 바다와 이 일대의 무역 대부분을 주름잡기 시작했다.
632-633/... 국가통치자들은 13세기부터 전쟁에 자금을 대기 위해 신용거래에 의존했는데 여기에는 두 가지 주요 원천이 있었다. 하나는 유럽의 커다란 무역 도시들에 축적된 막대한 자본이었다...
근대초기 유럽국가는 부유한 엘리트층 개개인에 기반을 두는 신용거래의 다른 원천에도 의존했다. 국가는 주로 민간과 군대의 직위를 팔아서 이 자원을 이용했다...
639/... '군사혁명'이 유럽의 상업혁명 및 재정혁명과 밀접히 연관되었던 까닭은 유럽이 지구적 식민/무역 체제의 허브로 변모하면서 막대한 자본을 집중적으로 축적했고, 그 자본이 해마다 멀리 떨어진 전장에서 더 큰 규모의 상비 육군과 해군을 유지한 강대국들의 경쟁에 연료를 공급했기 때문이다...
644/... 인쇄술은 사회사가 베네딕트 앤더슨Benedict Anderson이 '상상의 공동체'라 부른 것, 즉 작고 전통적인 공동체에서 얼굴을 마주보며 상호작용하지는 않더라도 문화와 이념을 공유하는 세계에 참여하고, 예전보다 대폭 강화되었고 계속 강화되는 정보망-책/팸플릿/잡지/신문 같은 인쇄 매체가 형성하는-으로 연결되는 사람들의 대규모 집합체를 만들어냈다...
645/... 종이와 목판인쇄 둘 다 중국에서 발명되었으나, 중국에는 소수의 문자로 이루어진 알파벳 표기체계가 없었던 까닭에 가동可動 인쇄의 발달이 지체되었다... 오스만 통치자들이 인쇄술을 금지한 이슬람 세계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이와 관련해서도 유럽은 정치적 파편화 때문에 새로운 발명을 차단하고 그 산물을 검열하는 일을 유라시아의 다른 곳만큼 포괄적이고 유효하게 할 수 없었다...
제16장 풍족한 자유민주주의 국가들, 최종 무기 그리고 세계
736/... 정치적 자유주의는 잉글랜드에서 존 로크가... 경제적 자유주의는... 애덤 스미스가 추가했으며... 토마스 페인은... 계몽주의 사상을 표현했고... <영원한 평화>(1975)에서 칸트는 대의제 정부와 권력분립, 법에 의한 개인의 권리보장을 포함하는 공화정 체제의 확산이 전쟁발발을 억지할 것이라고 말했다... 수가 늘어남에 따라 공화국들은 서로 간의 차이를 중재하고 전쟁을 방지할 국제 기구를 창설할 수 있을 것이라고 칸트는 믿었다.
맨체스터 학파가 구체화한 자유주의의 경제적 평화주의는 산업 시대인 19세기 동안 크게 득세했지만, 제1차세계대전 이후 보호주의와 식민주의가 되살아나자 움츠러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