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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영필 Zho YP Jul 12. 2023

무기전 보급전

도현신

18/ 기원전 1만 2000년~8000년경... 발명되었다. 그것은 활이었다...


20-21/ 말이 끄는 전차가... 기원전 2000년 무렵부터였다. 중앙아시아에 살던 백인계통의 유목민 아리안족은 바퀴살이 여섯 개 달린 바퀴를 만들어, 두 마리 이상의 말이 끄는 전차에 붙였다...


아리안족에게 전차 제조기술을 배운 서아시아의 유목민 힉소스족은 기원전 17세기 무렵... 이집트를 침략했다...


22/ 강력한 전차부대를 갖춘 이집트는 기원전 1275년 팔레스타인 북부의 카데시 전투에서 중동의 패권을 놓고 현재 터키를 지배하던 히타이트 왕국과 충돌했다. 이때 이집트와 히타이트군은 각각 보병 2만 명과 전차 2,000대를 동원했다. 이집트의 전차는 말 두 마리가 전차를 끌고 마부 한 사람과 활을 가진 병사 한 사람이 탑승했다... 반면 히타이트의 전차는 말 세 마리가 전차를 끌고, 마부 한 사람과 방패와 창을 든 병사 두 사람이 탑승하여 적진으로 정면 돌격했으며 무게가 무거웠다.


23/... 또한 전차 바퀴와 바퀴 축은 나무로 만들어져 한참 달리다가 방향을 바꾸려고 하면 때때로 부러졌으며, 바위나 자갈이 많은 거친 지형으로 들어가면 망가지기 쉬웠다... 결정적으로 전차가 사라지게 된 계기는 두 가지였다. 하나는 사람을 태우고 다니기에 충분히 크고 힘센 품종의 말이 등장한 것, 다른 하나는 전차에 맞서는 보병 전술이 발달한 것이었다.


기원전 9세기에 들어, 중동의 아시리아 왕국은 오랜 노력 끝에 사람을 태우고 다닐 수 있는 큰 말을 개량했다. 이 말은 아시리아 왕국과 대적하던 그루지야 지역의 유목민인 킴메르족을 통해 빠른 속도로 중앙아시아와 몽골 초원의 다른 유목민들에게 전해졌다. 이런 이유로 유목민들은 정착민들보다 더 일찍 전차를 버리고 기병이 되어 신속한 기동력으로 전장을 지배할 수 있었다.


24-25/ 기원전 331년, 가우가멜라 전투에서 서남아시아의 전차는 무너졌다. 당시 페르시아 황제 다리우스 3세는 전차 200대를 투입했다. 네 마리의 말이 끄는 전차에는 마부 한 사람과 병사 한 사람이 탑승했다... 그로부터 564년 뒤인 서기 233년, 다리우스 3세의 후손임을 자처하던 페르시아 황제 아르다시르는 무려 1,800대나 되는 전차를 동원하여 로마제국을 공격했으나 끝내 이기지 못하고 패주해야만 했다...


동양에서 전차는 기원전 2세기 중국 한나라 무렵까지 사용되었으나 한나라가 흉노족과 전쟁을 치르며 문제점이 드러났다...

... 한나라의 전차는 네 마리의 말이 끌고 마부 한 사람과 각각 활과 창을 가진 병사 두 사람이 탑승했다...


기원전 1세기가 되자 전차는 비용이 훨씬 덜 들고 효율적인 기병에 밀려 마침내 동양의 전쟁터에서 사라졌다...


26-28/... 기원전 4000년 전부터 가축으로 길들여진 말은...

초기의 말은 체구가 작고 힘이 약해 사람을 직접 태우지는 못하고 수레를 끌어 사람을 실어 나르는 용도로 쓰였다...


... 기원전 9세기 무렵, 아시리아의 국왕인 투쿨티-니누르타 2세는 사람의 몸무게를 견뎌낼 만한 크고 힘센 품종의말을 개량하는 데 성공하여 본격적으로 기병을 편성했다.

... 초기의 아시리아 기병부대는 창기병이 자신의 말과 궁기병의 말고삐를 잡고 움직이는 2인 1조 전략으로 운영되었다...


페르시아 제국의 창시자인 키루스 2세는 우수한 품종의 말 산지인 메디아와 아르메니아를 점령했다...


키루스 2세를 동경했던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드로스 3세는... 3.5미터에 이르는 긴 창으로 무장한 기병부대 '헤타이로이'를 편성했다. 헤타이로이 부대는 페르시아 기병들이 멀리서 적을 향해 창을 던지는 식으로 싸웠던 것과는 달리, 창을 들고 적의 측면이나 후방을 노리고 맹렬한 돌격전을 감행했다.


... 기원전 4세기 무렵이다. 중국 조나라의 무령왕이... 호복기사胡服騎士를 추진하면서, 중국에 기병이 본격적으로 도입되었다.


50-52/ 춘추전국시대부터 등장한 노弩(쇠뇌)


노는 순전히 사람의 힘만으로 시위를 당기는 활에 금속 방아쇠와 나무로 된 틀을 얹은 무기이다. 발명된 시기와 장소는 대체로 기원전 5세기, 양쯔강 유역에 있던 초나라로 본다...


서양에도 노와 같은 무기가 있는데 이는 석궁crossbow이다. 공교롭게도 석궁 역시 노와 같은 시기인 기원전 5세기 그리스에서 발명되었다. 초기의 석궁은 가스트라페테스gastraphetes라 불렸는데, 활의 몸체 뒷부분을 사람의 배에 대고 시위를 당겨 사용했다...


... 중국의 패권을 다투는 진나라와 초나라 등 각국은 노로 무장한 군대를 앞다투어 훈련시켰다....


55-56/ 1279년 송나라가 망하자 노의 사용빈도는 줄어든다. 송나라 이후에 들어선 원나라 시대부터 총과 대포 같은 화약 무긱가 등장했는데, 화약 무기들은 파괴력에서 노보다 더 뛰어났기 때문이다... 그러나 1840년 영국군이 중국을 침입하여 아편 전쟁을 일으켰을 때 이에 맞서 청나라군이 사용한 무기들 가운데는 노도 있었다...


59/... 페르시아 전쟁(기원전 490~449년) 당시, 그리스군의 주력 병과는 호플라이트hoplite라 불리던 중무장 보병이었다. 호플라이트는 청동제 창날이 달린 2.7~3미터 내외의 창 도리dory를 오른손에 들었고, 1미터 크기에 3킬로그램쯤 되는 방패 호플론hoplon 또는 아스피스aspis를 왼손에들었다. 호플론은 가죽을 댄 나무 표면에 청동을 입힌 삼중구조고 되어 있었으며, 안에 고리가 두 개 있어 팔을 단단히 걸 수 있었다. 창 이외에 보조무기로는... 쇠로 만들어진 칼 사이포스xiphos가 있었다...


호플라이트는 서로 모여 팔랑크스phalanx라는 밀집대형을 이루고 싸웠다...


62-64/... 기원전 4세기에 들어... 마케도니아의 왕 필리포스 2세는... 테베의 보병 전술을 눈여겨보고... 창을 6미터 정도로 대폭 늘려 보다 먼 거리에서 적을 공격할 수 있게 했다... 그리스의 보병대열은 3열까지만 동시에 공격할 수 있는데 반해, 창의 길이가 늘어난 만큼 마케도니아의 보병 대열은 5열까지 공격할 수 있어, 공격력이 더욱 증대되었다...

...서기 17세기 초까지 그 유용함이 입증되어 널리 사용되었다. 스위스 용병부대나 독일용병 부대 란트크네흐트Landsknecht, 에스파냐의 테르시오Tercio는 모두 갑옷과 투구를 단단히 착용하고 긴 창을 든 중무장 보병으로, 그리스 호플라이트의 먼 후손뻘이었다...



65-66/... 기원전 326년... 히다스페스 전투가 일어났다. 이 전투에서 포로스 왕은 전투용 코끼리 85마리를 앞세워 마케도니아군을 압박했으며, 전차 300대와 보병 3만 명, 그리고 기병 4,000명이 그 뒤를 따랐다...


알렉산드로스 3세에게 항복한 포로스는 남쪽의 크산드라메스 제국(마가다 왕국)은 전투용 코끼리를 무려 6,000마리나 거느리고 있다고 전했다... 마케도니아 병사들은 더 이상 원정을 계속할 용기를 잃었다...


67/ 카르타고의 명장인 한니발은 2차 포에니 전쟁 당시 코끼리 37마리와 보병 8만 명, 기병 1만 2,000명으로 구성된 군대를 이끌고 만년설과 추위가 몰아치는 알프스 산맥을 넘었다...

... 하지만 2차 포에니 전쟁은 로마의 명장인 스키피오의 활약으로 로마가 끝내 승리했다. 다만 한니발이 내세운 코끼리 부대가 상당한 정신적 충격을 주었는지, 카르타고인들에게 두 번 다시 코끼리 부대를 보유하지 못하도록 하는 조항을 넣기도 했다.


68-70/ 서기 232년 사산 가문의 아르다시르 1세는... 전투용 코끼리 700마리를 동원했다...

... 636년 카디시야 전투에서도 페르시아군은 선두에 코끼리 30마리를 앞세워 이슬람군에 큰 피해를 입혔다...


... 전투코끼리가 마지막까지 활용된 곳은 인도와 동남아 등지였다... 인도는 17세기까지 전투코끼리가 군의 주력부대였다...


... 미얀마는... 1277년 중국 원나라와의 전쟁에서 코끼리 2,000마리와 군사 6만 명을 동원했다. 그 뒤로도 18세기까지 미얀마군은 전투코끼리들을 주력부대로 사용했다...


... 중국에서는 크메르를 진랍眞臘이라 했는데, 송나라의 역사를 기록한 사서 <송사> 진랍전에는 "진랍은 전투용 코끼리를 무려 20만 마리나 거느리고 있다"라는 구절이 보인다.


88/ 1272년 지지부진한 전황에 고민하던 쿠빌라이는 동생 훌라구가 페르시아를 정복하고 세운 일 칸국에 사신을 보내 강력한 무기를 만드는 기술자를 보내줄 것을 요청했다. 이에 일 칸국에서는 알라우딘과 이스마일 같은 기술자들을... 그들은 회회포를 만들어 쿠빌라이에게 바쳤다.

회회포回回砲는 본래 중세 유럽에서 만들어진 투석기 트레뷰셋trebuchet이 서남아시아에 전해진 무기였다. 물론 그 이전에도 캐터펄트catapult난 오나거onager 같은 투석기가 있었지만 트레뷰셋은 기존의 투석기들과 다른 점이 있었다. 트레뷰셋은 추의 원리로 돌을 날려 보냈는데, 들어 올린 추가 아래로 떨어질 때 발생하는 위치에너지를 이용했다. 기존의 투석기는 돌을 날려 보내기 위해 끈을 잡아당기는 사람 수를 늘려야 했지만, 크레뷰셋은 추만 무겁게 하면 되었다...


마침재 1273년 1월, 원나라군은 번성을 노려 회회포를 배치하고 14일에 걸쳐 집중 포격했다...


104-105/... 최초의 총은 서기 1290년 중국에서 개발된 화총火銃이었다...

... 화약과 관련해 가장 오래된 기록은 중국의 의원 손사막孫思邈(541-682년)이 쓴 <단경丹經>에 실려 있다. 손사막은 목탄과 초석과 유황의 배합방법을 화류황법化硫黃法이라 불렀는데, 그가 적은 화류황법 덕에 탄생한 것이 흑색 화약이다. 흑색화약은 1884년 프랑스인 폴 마리Paul Marie가 발명한 무연화약이 등장하기 전까지 전 세계 군대가 무기로 사용했다.


당시 중국을 지배하던 원나라는 금나라와 송나라를 정복하면서 그들이 만든 화약 무기 제조기술을 습득하여 이를 더욱 발전시켰다. 그러한 노력의 산물이 바로 화통이었다.


106-107/ 서양의 화약 제조는 1260년 영국의 수도사인 로저 베이컨Roger Bacon이 최초로 기록을 남겼다. 그리고 1375년 무렵에 중국의 화총이난 신쟁과 같은 원리로 작동되는 무기인 권총이 등장해 보급되었고, 1411년에는 아쿼버스라 불린 화승총이 등장했다.


아쿼버스arquebus는 먼저 총안에 화약을 넣고 총구로 총탄을 넣어 심지에 불을 붙인 뒤 방아쇠를 당겨 총알을 발사하는 구조였다...

... 16세기에 이르자 유럽인들은 그전까지 써왔던 석궁 등을 버리고 보편적으로 아쿼버스를 사용하게 되었다.


1525년 2월 24일... 파비아 전투에서 아쿼버스의 위력이 증명되었다... 이때 에스파냐군이 사용한 창병과 화승총 부대를 혼합한 전술을 테르시오Tercio라고 한다...


아울러 1528년에는 아쿼버스보다 더 파괴력과 관통력이 우수한 머스킷musket이 등장했다...


108-109/ 파비아 전투에서 위력을 발휘한 아쿼버스는 그로부터 18년 뒤 뜻하지 않은 계기로 먼 동양에까지 전해진다. 1543년 일본의 다네가섬種子島에 상륙한 포르투갈 선원은 일본인들에게 아쿼버스 두 정을 전파했다. 이 신무기의 놀라운 성능을 목격한 일본인들은 아쿼버스를 철포鐵砲라 부르며 개발에 혼신의 힘을 기울였다.


110/ 18세기 말에 들어 총기는 더욱 혁신되었다. 당시 프랑스의 장군 나폴레옹은 총안에 강선(나선형으로 판 홈)을 활용한 라이플rifle이라는 총을 배포했다...


19세기 초인 1835년에... 프로이센에서 기존의 머스킷을 개량한 드라이제 니들 건Dreyse needle gun이 개발되었다. 드라이제 니들 건은 총탄을 총의 뒤쪽으로 장전하는 구조였다... 이러한 드라이제 니들 건으로 무장한 프로이센군은 1866년 자도바 전투에서 오스트리아군은 상대로 압승을 거두었다.


119-121/ 큰 배에 대포를 싣고 중국을 최초로 방문한 서양인들은 16세기의 포르투갈인들이었다...


중국 명나라의 역사를 기록한 사서인 <외국전> 불랑기佛狼機평에는 당시 포르투갈인들이 가져온 대포의 위력에 놀란 명나라인들의 반응이 기록되어 있다. 1520년 명나라 조정의 회의에서 어사 하오는...


... 13세기 말 원나라에서는 청동으로 대포를 만들었으며 명나라도 14세기부터 대포를 무기로 사용했다. 그러나...


1523년... 공동성 서초만을 침범한 포르투갈군이 명나라군에 격퇴된 사건이 발생했다. 이때 명나라군은 포르투갈인들이 쓰던 대포를 노획했는데 이를 불랑기Frank인들의 포라고 하여 불랑기포라 불렀다. 불랑기포의 뛰어난 위력을 본 명나라군은 서둘러 복제품을 만들고 정식 무기로 채택했다.


122/ 불랑기포 이후에 도입된 홍이포紅夷砲는 네덜란드인들이 명나라에 전해준 화포로 불랑기포보다 더욱 성능이 뛰어났다.


166/ 현대 모든 나라의 육군이 주력 장비로 운용하고 있는 탱크tank는 1차세계대전 무렵인 1916년 9월 15일 솜 전투에서 최초로 등장했다. 탱크를 고안한 사람은 영국 육군의 소장을 지낸 어네스트 둔롭 스윈튼Ernest Dunlop Swinton이었다...


영국군은 마크I Mark I 탱크를 만들어 솜 전투에 투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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