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인리히 찬클
은으로 만들어진 진짜같은 그림
독일의 의사 요한 하인리히 슐체Johann Heinrich Schulze는 1727년 처음으로 빛을 쬐면 염화수은이 검게 변한다는 사실을 관찰했다.
카를 빌헬름 셸레Carl Wilhelm Scheele*가 빛에 검게 변하는 염화수은이 암모니아 속에서 완전히 사라지지 않고, 검은 빛의 은침전물을 남긴다는 것을 발견하기까지는 50년이 더 걸렸다.
*산소 발견의 영예는 프리스틀리나 라부아지에가 아닌 스웨덴의 약제사 카를 빌헬름 셸레가 차지했다. 그는 프리스틀리가 수은 실험을 하기 1년 전에 이미 갈석을 농축 황산액으로 가열한 뒤 가스가 발생하는 것을 관찰했다.
프랑스인 조제프 니세포르 니에프스Joseph Nicephore Niepce(1765-1833)는 최초로 카메라 옵스큐라**에 잡힌 상을 염화수은 종이에 고착시키는데 성공했다. 하지만 이 상은 햇빛에 퇴색하기 때문에 니에프스는 은 대신 등유에 녹인 아스팔트를 동판 위에 감광층으로 발랐다. 빛을 받지 않은 아스팔트는 용해제를 쓰면 떨어지는 반면 빛을 받은 아스팔트는 단단해졌다... 니에프스는 자신이 발전시킨 재현방식을 헬리오그라피로 명명했다. 이 단어는 두 개의 그리스 단어가 결합한 것으로 대략 '햇빛 그림'으로 번역된다. 이 과정은 아주 실용적이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햇빛에 노출시키는 데 몇 시간이나 걸렸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이러한 아스팔트 사진은 훗날 발전될 성공적인 인쇄판 방식의 토대가 되었다.
**카메라 옵스큐라 Camera Obscura 暗箱子
사진기의 기원이 되는 것으로, 라틴어로 '어두운 방'을 뜻한다. 캄캄한 암실 한 곳에 작은 구멍을 뚫으면 이 구멍을 통해 빛이 들어와 반대쪽의 하얀 벽이나 막에 옥외의 정경이 거꾸로 맺히게 된다.
프랑스의 성공적인 극장화가인 루이 자크 망데 다게르Louis Jacques Mande Daguerre(1787-1851)는 헬리오그라피 사진들에 큰 관심을 가졌다... 다게르는 이 방식을 실용화시키려면 무엇보다도 노출시간을 단축해야만 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다시 은을 사용하는 방법으로 되돌아갔다. 그는 은도금 동판으로 실험을 했는데, 이 동판에는 요오드 증기로 감광성을 부여했다. 다게르는 이렇게 만들어진 요오드화은층 위에 카메라 옵스큐라로 찍은 형상들을 새길 수 있었지만 상이 너무 흐릿했다.
다게르는 형상들이 더 선명하게 보이도록 여러 방법을 시도했다... 어느 날 그는 실험이 실패한 뒤에 빛에 노출시켰던 판을 몇 가지 화학약품이 들어 있는 장 속에 넣어두었다. 며칠 뒤 새로운 실험에 사용하기 위해 이 판을 꺼냈는데 놀랍게도 판 위에 아주 선명한 이미지가 새겨져 있는 것이었다... 매일 장에서 화학약품 하나씩을 꺼내고 빛에 노출시킨 새로운 요오드화은판을 집어넣었다... 하지만 약품을 전부 다 끄집어냈는데도 장 속에 넣어둔 판에 여전히 선명한 상이 생겼다. 장을 샅샅이 다시 조사한 다게르는 깨진 온도계에서 나온 수은 몇 방울이 바닥에 떨어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는 여기서 나온 수은증기가 상을 선명하게 하는 데 작용했을 것이라고 추측했다...
1835년 그는... 이 방식을 '다게레오타입'이라는 이름으로 소개했다. 하지만 아직 상을 안정적으로 지속시키는 데까지는 성공하지 못했다. 마침내 2년여의 시도 뒤 이를 위해서는 묽은 티오황산나트륨용액을 사용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다게르는 민감한 상들을 보호하기 위해 금염화물용액으로 한 번 더 처리를 했다.
다게레오타입이 급속하게 전파된 데는 국가의 힘이 큰 역할을 했다. 프랑스는 국가 차원에서 이 기술을 사들여 특허사용료를 지불하지 않고 누구나 사용할 수 있도록 했다... 다게르는 현명하게도 영국에 이 기술에 대한 특허를 신청해둠으로써 프랑스 정부에서 받은 종신연금 외에도 부수적으로 많은 돈을 벌 수 있었다.
양화·음화·상의 뚜렷한 질적 향상은 영국의 의사 리처드 리치 매독스Richard Leach Maddox에 의해 이루어졌다. 그는 브롬화은 유제를 입힌 사진건판을 사용했다. 이 건판들은 곧 공장에서 생산되었고 사진술을 아주 간단한 기술로 만들어주었다.
미국의 은행원이며 아마추어 사진사인 조지 이스트먼이 롤필름을 발명하고 그체 맞는 카메라가 개발되자, 사진은 대중적인 취미로 발전했다. 이스트먼이 창립한 회사 '코닥'은 이를 통해 세계적인 기업이 되었다.
1990년에 디지털사진기로 인해 완전히 새로운 국면이 전개되었다. 코닥은 니콘 반사경 리플렉스 카메라에 쓰일 새로운 셔터막을 개발하는 과정에서 이를 위한 첫걸음을 내딛었다...
유령의 손을 찍은 과학자
독일 물리학자 빌헬름 콘라트 뢴트게Wilhelm Conrad Roentgen(1845-1923)
뢴트겐은... 새로운 영역인 기체방전 물리학에 몰두했다. 이것은 '가이슬러관'에 유체가 흐를 때 그곳에 작용하는 가스의 압력에 따라 나타나는 다양한 물리적 현상을 연구하는 분야였다...
... 1895년... 그는 음극광선을 보다 잘 관찰할 수 있도록 가스관들을 두꺼운 종이로 막았다. 그리고 불꽃유도 코일에 스위치를 넣자 갑자기 1m쯤 떨어진 책상 위에서 무엇인가가 반짝였다. 그는 자신이 막은 것에 틈새가 있어서 그 빛이 거울에 반사된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책상을 살펴보니 거울은 없고 형광물질로 코팅된 종이가 있었다. 앞선 실험을 하고 나서 그곳에 놓아둔 것이었다... 그후에 그는 형광물질이 코팅된 종이를 사진건판으로 바꾸어보았는데, 사진건판이 검게 변한다는 것을 확인했다...
... 미국인 굿스피드는 뢴트겐보다 5년 전에 우연히 기체방전을 통해 사진건판을 검게 만들었다. 그러나 그는 그 현상을 설명하지 못했으며, 이에 대해 더 이상 깊이 생각하지 않고 사진건판을 치워버렸다...
... 뢴트겐 자신은 실험을 할 때 대부분 관들을 납으로 막았다. 사진건판이 의도하지 않게 광선에 노출되는 것을 막기 위해 취한 조치였지만, 그가 생명을 잃지 않은 것은 그 덕분이었다. 다른 많은 과학자들은 납을 사용한 보호장치를 설치하지 않았고, 그 때문에 아주 비싼 대가를 지불해야만 했다.
... 그는 자신의 발견에 대한 특허 신청을 하지 않았다. 그 덕분에 뢴트겐선은 매우 빠르게 전 세계에서 의학적 목적에 사용될 수 있었다... "학문은 모든 인류의 것이기 때문입니다"라고 대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