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영필
바둑사이트의 게시글에 장기와 바둑을 비교하는 글이 있는데, 약간 장기의 수준을 낮게 보고있다. 경우의 수라는 측면에서 장기의 범위가 바둑보다 적은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사람의 인지 수준에서는 바둑이 무한의 세계인 것만큼 장기 또한 무한의 세계이다. 즉 장기는 바둑 보다 저급한 수준의 게임이 결코 아니다. 장기의 묘리를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이라면, 장기의 수를 함부로 평가하는 일은 절대 있을 수 없다.
여담이지만 필자는 약 2년 전에 카카오톡 장기에 입문하여 2달에 걸쳐 1단의 레벨에 도달한 바 있다. 더 상위로 도전하려면 생업을 포기해야 하겠기에 잠시 접어두었지만, 장기의 수읽기와 승부호흡은 바둑과는 또다른 세계라고 감히 얘기할 수 있다.
장기와 바둑의 본질적 차이는 무엇인지 생각해보았다. 그것은 바둑은 생사(生死)의 세계임에 반해, 장기는 생이 아니라 재(在)로 바뀐 재사(在死)의 세계이다라는 것이다. 무슨 말인고 하니, 바둑에서는 돌이 계속하여 투입되면서 바둑판 속 세계의 환경속으로 바둑알들이 살을 입어 태어나게 되나, 장기에서는 그러한 투입의 태어남은 없다. 빅뱅의 순간부터 이미 가지런히 정렬된 각16개 말의 움직임과 사라짐만이 있을 뿐이다.
바로 그러한 태초부터 세계의 구성요소로 부여된 존재들은 또한 저마다의 특유한 기능을 가지고 있어, 자부심 또한 대단하다. 차는 쾌속질주의 차두리가 상대진영을 흔들고, 마는 포지션을 가리지 않는 박지성처럼 부지런하며, 상의 이을용이 멋진 센터링을 날리면, 안정환은 포처럼 날아올라 역전골을 터트린다. 사는 철통같은 수비로 붕대투혼을 불사하는 최진철, 절대 장군의 위험을 허용치 않는 이운재, 이처럼 2002년 기적의 주인공들이 갑자기 오버랩된다.
바둑은 이름없는 무명용사들의 숲이다. 한번 태어나면, 죽기전에는 그 자리를 떠날 수 없다. 그럼에도 전장은 격변하고 요동치는 데 그것은, 소리없이 격렬하고, 움직임도 없이 진군한다. 처음에 전인미답의 장소에서 아득히 깃발을 꼽고, 역사를 시작하는 바둑과 달리, 장기에선 최초 기물차림의 순간부터 이미 전운이 무르익는다. 각 기물은 잘 훈련된 사수처럼 명령이 떨어지면, 바로 돌진해나간다. 여기서 행마란 말 그대로 역동적이다. 전략의 숙지에 따라 신속하며 한치의 틈도 용납되지 않는 경묘함의 세계이다. 통상 승부는 찰나에 결정된다. 두뇌와 두뇌의 불꽃이 기물의 스텝 스텝 마다 번뜩인다.
장기는 나라마다 약간씩 서로 다르다. 그런데 가장 공통적인 특징 중의 하나는 왕을 중심으로 배열되는 대기물 상(비숍) - 마(나이트) - 차(루크) 의 배치이다. 상은 어느 장기에서나 왕의 다음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신성한 코끼리의 위상이다. 한국장기 특유의 규칙도 있다. 초반 상차림시에 마와 상의 자리를 바꿀 수 있다. 포석의 개념이 있는 것이다.
상차림이 완전히 자유인 나라도 있다. 미얀마 장기 시투린이 그러하다. 졸을 최전선에 배치하는 것만 정해져 있고 나머지 기물은 자유 배치이다. 포진시 참고하는 32가지 포진법이 전해져 내려온다고 한다. 북한에서는 차를 상자리에 포진하는 기동차 포진이라는 것이 있는데, 혹시 한국장기는 미얀마 장기가 차마고도을 타고 흘러온 것인지도 모르겠다.
다시 장기의 오묘함으로 넘어가면 세계에서 가장 복잡한 장기는 일본의 쇼기이다. 쇼기에선 죽었던 말도 환생한다. 포로로 잡은 말을 자기 말로 삼아 전장 어디로나 공중에서 낙하 투입이 가능하다. 이렇게 까다로우니 아직도 컴퓨터가 쇼기의 최고기사와 대진기회를 잡지는 못했다. 대신 나머지 세계의 다른 장기들은 컴퓨터에 다 먹혔다. 물론 주지하다시피 바둑은 아직 컴퓨터가 프로에게 석점으로는 진다.
그러나 9점 바둑은 컴퓨터가 이긴다고 한다. 결국 바둑세계도 컴퓨터에 언젠가 자리를 내어줄 거라면 컴퓨터의 정복 여부가 바둑의 우수성을 보장하지는 못한다고 생각된다. 바둑은 사활을 수단으로 계가를 내는 정(靜)의 게임인데 반해 장기는 기능을 수단으로 장군의 사활이 승부인 동(動)의 게임이다. 장기는 전쟁을 모방하여 게임이 구상되었고, 점차 발전하고, 분기해나간 것이 합리적으로 추론도 가능하고, 증거도 많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모방의 단서도 보이지 않을 만큼 추상도가 높은 이 바둑이라는 보드게임의 발명은 어디에서부터 기원한 것일까? 장기 이야기 하다가 바둑으로 삼천포 왔다. 바둑의 기원은 참으로 궁금하고 또 궁금하다.
(2015.12.06 사이버오로 게재)
Note:
지금 보니, 2016년 3월의 알파고 혁명을 예상도 못하고 있던, 전전고요의 시기이었다. (2024.6.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