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을상
이을상 (2016), 행복의 역설: 행복에 대한 신경과학 ·생물학적 성찰과 철학적 반성, 철학연구, 140.
개요
... 신경과학에서는 행복의 반대가 (불행이 아니라) '우울'이다... 우울은 신경전달물질과 호르몬의 불균형으로 인해 초래된 질병이다...
1. 머리말: 행복 권하는 사회
프로작이라는 이름으로 널리 알려진 플루옥세틴(Fluoxetine)은 '선택적 세로토닌 재흡수 억제제'(SSRI) 계열의 항우울증 제제인데... '인공행복'(Artificial Happiness)이라 부른다... 예를 들어 엑스터시(Ecstacy), 코카인(Cocaine) 비아그라(Viagra), 엠비엔(Ambien) 등은 -비록 불법적이지만- 쾌락생활을 위해 사용되는 약물이다.
인공행복은 엄밀한 의미에서 '쾌락'을 얻으려는 것이라기보다 그저 약물에 대한 '갈증'을 유지시키려는 것뿐이다. 바로 '중독' 현상이 그렇다...
... 정서적 느낌이 신경연결망에 의존한다는 사실은 전통적인 행복 개념을 훼손시키지 않는다. 행복은 행위의 결과로 주어진다... 최상의 마음 상태가 곧 행복이다. 이에 도달하는 방법으로서 아리스토텔레스는 '덕'의 실천을 역설했고, 이것은 '인간조건의 이상적 실현'을 의미한다. 이러한 인간조건의 실현이 신경전달물질과 호르몬의 균형적 분비에 의존한다는 점을 오늘날 신경과학이 밝혔다. 이에 따르면 행복은 '유기체의 이상적인 상태'를 유지하는 것 외에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 오늘날 신경과학은 행복과 불행을 서로 배타적인 것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공존하는 -아니 공존해야만 하는- 것으로 본다. 이 점은 쾌락과 고통을 느끼는 뇌 부위가 다르다는 사실로 확인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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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쾌락은 뇌의 좌반구가 고통은 뇌의 우반구가 느끼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Stephan Klein(김영옥 옮김), 『행복의 공식』(서울: 웅진지식하우스, 2006), 58쪽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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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신경과학과 새로운 이념의 탄생
... 1980년대 중반... '긍정심리학'(positive psychology)... 첫째로 행복은 제3자의 시각이나 잣대가 아닌 1인칭 주어의 주관적 판단이나 느낌이다...둘째로... 마음의 낙관적 태도를 가리키는데... 셋째로... 나의 내면적 가치에 의해 평가된 삶이야 말로 '참된 행복'(authentic happiness)이라고 셀리그만(M. Seligman)은 불렀다.
... 낙관적(optimistic)이라는 말을 처음 사용한 사람은 라이프니츠(G. W. Leibniz)이지만 (본래 '가능한 한 최상'을 뜻하는 라틴어 optimum에서 유래한 이 말을 라이프니츠는 신이 최상의 세계를 만들었고, 이 최상의 세계가 더 이상 개선이 불가능하다는 의미에서 사용했다), 오늘날에는 현실 긍정적인 삶의 태도, 믿음을 나타내는 말로 사용된다...
... 감정을 통한 의사소통... '변연계 공명'(limbic resonance)... 고등동물의 경우에는 변연계를 통해 다른 동물의 내면상태를 감지하고, 자신의 생리 반응을 그 상황에 맞게조절한다. 그런 만큼 고등동물의 변연계는 일종의 사회적 감각기관이라 할 수 있다... 여기서 이른바 '정서'(pathos)가 생겨난다...
행복도... 우리 뇌에서 즐거운 감정을 만들어내는 신경전달물질은 도파민(dopamine)과 아편유사체(opioid)이고, 그 작용점은 대뇌 변연계의 중격의지핵(Nucleus Accumbens, NAcc)이라는 것이다... 올즈(J. Olds)와 밀너(P. Millner)의 실험... 쥐는 소량의 전기 충격에 만족하지 못하고 반복해서 버튼을 눌렀다. 심지어 한 시간에 2,000번이나 누를 때도 있었고, 버튼을 누르기 위해 먹고 마시고 교미할 기회까지 포기했다... 이 작은 부위는 '보상 중추' 또는 '쾌락 중추'로 불리게 되었다.
... 히스(R. Heath)는... 쾌락중추를 다시 활성화하면 다양한 정신장애를 치료할 수 있을 것으로 보았다... 하지만... 한계가 있었다... 자극하면 강렬한 효과가 나타나는 것이 분명하지만, 그 효과는 오래 지속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참된 행복'에 이를 수 있는가? 그것은 신경세포의 시냅스 강화, 다시 말해 신경세포의 끝자락인 수상돌기에 옹이가 자라 이웃 신경세포의 돌기와 접속하여 새로운 시냅스가 생겨남으로써 가능해진다. 이를 위해 이른바 '신경성장요소'(Nerve Growth Factor, NGF)라 불리는 물질들이 필요한데, 이 물질의 생산에 특별히 관여하는 것이 바로 '세로토닌'(serotonin)이다. 세로토닌은 우리가 평정심을 유지하는데 필요한 호르몬이다. 따라서 우리가 우울한 기분을 느낄 때는 세로토닌 수치가 감소한다. 반대로 우리가 쾌활한 기분을 느끼게 하는 것은 도파민인데, 도파민은 대뇌피질의 각성과 관련있는 신경전달물질이고, 쾌락과 긍정적 마음, 성욕과 식욕 등을 관장하는 호르몬인 (노르)에피네프린의 전구체이다. 이 두 신경전달물질, 즉 세로토닌과 도파민이 상호작용하여 긍정적이고 생동적인 느낌을 만들어낸다... 우울증은 신경성장요소가 없기 때문에 시냅스 연결망을 만들지 못해 생긴 질병이다. 아니 신경세포가 근본적으로 죽어버렸기 때문에 우울증 환자는 아무리 행복하고 싶어해도 행복을 느낄 수 없다...
3. 욕망하는 뇌: 인공행복
... 우울증은 도파민과 세로토닌의 화학적 불균형으로 일어나는데... 다양한... 요인들로 인해 생겨나는 뇌의 '스트레스 반응'이 우울증의 직접적 원인이 된다는 것이 지금까지 정설이다.
하지만 인간의 뇌는 본래 스트레스에 즉각 반응하도록 만들어져 있고... 구석기시대의 수렵·채집인들로부터 물려받은 유산이다... '투쟁-도주'(fight or flight) 반응... 구석기적 시대환경에서 스트레스는 격렬한 신체활동이 즉각 필요하다는 일종의 신호이다...
... 구석기인들과 달리 현대인들은 적이나 자연재해로부터 비교적 안전이 확보된 곳에 살고 있다. 이러한 현대인들에게 스트레스를 주는 것은 사회 내부에서 일어나는 실연이나 이혼, 실직, 질병, 실패, 거절, 신체적 폭력, 이주 등이지만, 이것은 결코 투쟁-도주 반응에 의해 해소될 수 없는 일들이다. 이렇게 해소되지 않는 스트레스 상황이 현대인들을 우울증에 걸리게 한다...
... 우리의 정서는 욕망과 느낌으로 만들어져 있다. 엄밀히 말해 내가 무엇을 원한다는 것과 내 마음에 드는 무엇을 얻고 좋아하는 것은 다르다. 원한다는 것은 다가올 미래에 대해 기뻐하는 것, 즉 '욕망'이고, 좋아한다는 것은 미래의 사실을 현실적으로 향유하는 것, 즉 '느낌'을 갖는 것이다. 이렇게 본래 하나인 마음을 두 개의 작용으로 나누는 것은 그때마다 활성화되는 뇌 영역이 다르기 때문이다. 이 점을 브라이터(H. Breiter)가 밝혔다. 즉 전자의 욕망하는 마음은 대뇌 변연계의 중격의지핵의 활성화로 생겨나고, 이곳은 전적으로 쾌락유발 물질인 도파민의 조절을 받는다... 반대로 후자의 향유하는 마음은 의식적 감각을 만들어내는 대뇌가 활성화되면서 일어난다. 여기에 기여하는 호르몬은 도파민이 아닌 '아편유사체'이다...
... 도파민의 역할을 클라인(S. Klein)은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 첫째로 도파민은 우리가 특별히 흥미로운 상황에 주목하게 만든다. 즉 우리의 정신을 각성시킨다. 둘째로 도파민은 좋은 경험을 기억하도록 신경세포들을 부추긴다. 즉 학습 과정을 촉진시킨다. 셋째로 도파민은 근육을 조절하여 신체가 의지에 복종하게 만든다. 즉 행동을 가능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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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지만 도파민이 우리의 흥분과 욕망에 영향을 미치는 유일한 물질이 아니라 다른 호르몬들도 관여한다. 예를 들어 (노르)아드레날린은 스트레스에 관여하는 중요한 호르몬이지만, 감각과 신진대사 촉진에도 중요한 역할을 하고, 글루타마트는 학습과정에 가담한다. 또한 도파민의 상대역을 맡고 있는 아세틸콜린은 도파민의 자극적인 영향에 제동을 건다. 그렇다 하더라도 도파민은 이 모든 과정의 중심에 있는 말하자면 욕망의 화학적 '주개폐기'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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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향락은 '도취'이다... 독서의 즐거움과 같은 정신적 쾌락도 모두 이러한 도취 현상... 여기에는 도파민이 아닌 화학물질, 즉 아편유사체가 관여한다. 이러한 아편유사체에는 좋은 감정을 생산하는 엔도르핀(endorphine)과 엔케팔린(enkephaline)이 있고, 반대로 혐오의 감정을 생산하는 다이노르핀(dynorphine)이 있다...
좋은 느낌이란 이렇게 아편유사체 때문에 생기는 것이지만, 이 느낌이 곧 '행복'은 아니다. 행복이 우리 뇌가 느끼는 '쾌락'이라는 사실에는 틀림이 없지만, 좋은 느낌과 행복 사이에는 일종의 시간적 구별이 있다... 이 좋은 느낌에서 문제인 것은 점점 더 큰 것, 더 오래, 더 자주 할 것을 요구한다는 점, 즉 '중독'이다... 유감스럽게도 도파민이나 아편유사체에는 자기 통제 능력이 없다... 여기에 세로토닌이 작용한다. 세로토닌은 좋은 느낌을 행복으로 만들어준다... 환희는 엔도르핀이 주고, 행복은 세로토닌이 준다. 그래서 세로토닌을 이른바 '행복의 물질'이라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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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로토닌은 뇌줄기(brainstem)의 솔기핵(raphe nucleus)에서 생성되어 중추신경계 및 신체 각 부위에 광범위하게 영향을 미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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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세로토닌은 다른 신경전달물질 없이 그 자체만으로는 행복을 만들어내지 못한다... 도파민과 아편유사체가 욕망의 정열적 움직임, 긍정적 마음가짐, 성욕과 식욕을 관장한다면, 아드레날린은 불안과 부정적인 마음가짐, 스트레스 반응을 관장한다. 세로토닌은 이러한 두 화학물질의 작용을 억제하여 너무 흥분하지도 않고 불안한 마음을 갖지도 못하게 하여 '마음의 평온'을 유지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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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세로토닌 분비를 증가시키는 방법에는 지속적인 운동과 식사(유제품, 바나나, 콩 식품, 탄수화물)조절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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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인공행복의 위기
... 1970년대 이후 미국에서 항우울증 제제 처방량의 급속한 증가...
... '의료화' 현상을 권력의 관점에서 해석한 사람은 푸코(M. Foucault)이다...
이러한 생명 권력을 오늘날에는 임상 의사들이 갖게 되었다... 이 금지조항을 위반하고... ADHD 치료제로 알려진 '리탈린'을 집중력을 필요로 하는 수험생들에게 처방하는 것이 그것이다. 이것은 명백한 권력 남용이다... 1990년대에 조사된 '우울증과 1차 진료'에 관한 맥아더 재단(MacArthur Foundation)의 보고서에 따르면 의사는 환자에게 우울증에 걸렸다는 것을 설득하기 위해 항우울증 제제를 처방했다고 한다. 이 점을 지적하자 의사는 환자가 항우울증 제제를 먹고 기분이 나아졌다면, 그것은 애초부터 우울증에 걸린 상태임을 증명하는 것이라는 황당한 주장을 폈다... 의료는 한갓 기술공학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 헉슬리(A. Huxley)가 『멋진 신세계』(Brave New World)에서 적나라하게 묘사했다. 신세계에서는 시민들이 소마(soma)라는 약을 먹는다... 야만인인 존(John)은... 소마를 '영혼의 독'이라 부르고, 이를 먹지 못하게 한다.
5. 맺는 말
... 삶의 의료화를 투기자본과 벤처자본이 장악함으로써 인간의 신체는 자본의 각축장이 되어 버렸다... 의사들은 질병 진단의 범위를 확대하고, 제약회사들은 한층 고도화된 항우울증 제제의 개발로 이에 화답했다... 종래의 행복개념은 인간의 이상을 실현하는 하나의 방법이었지만, 오늘날 인공행복은 자본주의가 만들어 놓은 하나의 상품에 지나지 않는다.
... 신체를 훌륭한 '인격체'로 이해할 것을 요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