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영필
장기에 관해 생각해볼 만한 이슈는 다음과 같다.
1. 세계의 장기
의외로 세계 각지에 장기의 종류가 다양하다. 각국의 환경과 문화에 따라 기물의 형태와 또 행마가 다르다. 규칙도 다르며, 기반도 약간씩 차이가 난다. 그렇지만, 이 모든 게임이 결국 하나의 공통조상에서 유래한다는 것을 알 수 있는 무언가가 있다. 이러한 공통의 DNA와 각국의 역사와 문화에 따른 다양성의 요소를 확인하는 것은 얼마나 재미있는가? 그리고 서유럽에서는 체스로 통일되었다. 기타 지역에서는 각각 자신의 장기를 둔다.
2. 세계지도와 장기의 족보
세계지도 위에 각국의 장기 그리고, 지금은 두어지지 않아도 역사적으로 존재했던 장기를 함께 놓아보면, 정말 흥미진진하다. 내가 좋아하는 지도와 내가 좋아하는 장기가 함께 어우러진 그림을 보는 것만큼 나를 즐겁게 해주는 것은 거의 없을 듯하다. 세계의 장기는 그 옛날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사라진 장기들과 현재 두어지는 장기들의 계보가 있다. 이를 정리하는 것 또한 너무 재미있을 것이다.
3. 차투랑가
장기의 조상은 '차투랑가'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이 차투랑가는 2사람이 두는 2인 차투랑가와 4사람이 두는 4인 차투랑가가 있다. 현재 정설은 2인 차투랑가가 먼저라는 것이지만, 내가 생각하기에는 장기의 진화의 논리를 구성할 때 4인 차투랑가 선행이 보다 합리적이다. 이와 관련한 제반 논란 및 증거들을 살펴보는 것은 역시 흥미진진한 두뇌의 쟁패이다.
4. 4인차투랑가 선행과 쌍으로 존재하는 대기물(왕의 짝인 재상(여왕, 사士)을 포함하여)
차투랑가에는 없던 기물인 재상이 출현하기 위해서는 4인 차투랑가 선행이 필수적이다. 그리고 4인 차투랑가가 2인 차투랑가로 발전해야 여러 주요 기물들이 한 쌍씩 존재하는 이유를 설명하기가 자연스럽다.
5. 체스의 퀸과 장기의 사士
체스의 퀸과 장기의 사士가 같은 기원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의 놀라움이란 지금까지도 가슴 떨리는 것이다. 그리고 중국의 옛날 장기말이 출토되었을 때, 그 사士의 상형이 여성이었을 때의 놀라움이란...
6. 기반의 형태
체스의 말들은 면으로 움직이나, 장기의 말들은 선의 교점으로 움직인다. 왜 그럴까?
7. 기물의 형태
체스의 기물은 입체적 형상이나, 장기의 말들은 단순히 문자로 표현된다. 옛날에는 뒷면에 그림이 그려져있기도 하였다.
8. 궁宮의 존재
체스에는 궁이 없으나, 장기에는 궁이 있다. 그렇지만, 체스에도 장기의 안궁安宮에 해당하는 캐슬링이 있다. 체스가 아닌 일부 다른 장기에도 X자의 표시가 있어 장군을 위치시킨다. 이것은 차투랑가의 아슈타파다 기반에도 그려져 있다. 그 X가 있는 면이 존재하는 이유는 달랐지만... 이것이 이미 존재했기 때문에 장기는 무언가 여기에 착상을 해서 그 표시에 기능을 부여했다. 그것은 옥좌이다.
9. 대포의 존재
중국 상치와 한국 장기에는 대포(포)가 존재한다. 대포는 현재 우리가 생각하기에는 화약으로 장전하는 대포로 생각하기 쉬우나, 상치가 기록상 나타나는 9세기 경에는 화약무기의 실용화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물론 그 상치의 첫 기록인 우상유의 <현괴록>에서도 포는 단지 돌화살을 쏠 뿐이다. 이 포가 쇠뇌라고 하는 얘기도 있지만, 오늘날 상치에서의 포는 그 묵직함으로 견주어 볼 때, 절대 휴대용 무기는 아니다. 아마도 공성전에 사용하는 무기체계로 여겨진다. 다시 말하면, 체스가 야전의 전투라면, 상치는 공성전의 느낌이 물씬 풍긴다. 장기의 포가 한쪽에서는 포砲이고 다른 편에서는 포炮로 표현한다. 어린 시절에는 이렇게 그려진 장기를 둔 기억이 나는데, 요즈음에는 모두 포包로만 쓴다. 그래서 상치를 찾아 보았더니, 역시 砲-炮로 표현하고 있다. 때로는 어린 시절의 기억이 현재의 화장발과 성형의 외양을 꿰뚫고 간다. 그리고 그 한 쌍의 부수가 서로 다른 두 한자는 투석기(catapult)에서 화약대포로 변신해가는 과정을 보여주는 듯하다.
상치의 포의 행마는 매우 합리적이다. 포를 이동시키는데 그 무거운 포를 도약시킨다는 것이 가능할까? 장기의 대포가 껑충껑충 뛰어다니는 것은 홍의장군도 아니고 상상하기 힘든 불합리성이다. 따라서 한국의 포는 포가 대형무기가 되기 전의 무기체계일 것이다. 즉 한국장기에서의 행마를 생각해보면 포는 쇠뇌 정도 느낌이다. 그렇지만 파괴력은 점차 무거운 대포로 변신하였다. 다만 행마는 함께 변화되지 않았다.
10. 폰의 행마
체스에선 폰의 행마가 특이하다. 이동하는 행마와 포획하는 행마가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이동시에는 앞으로 한 칸 나아가지만(처음에는 두 칸도 간다), 포획시에는 사선으로 한 칸 간다. 이를 두고 그리스(마케도니아)의 방진의 영향을 거론하는 설이 많다. 상치에서도 포의 행마가 이동하는 행마와 포획하는 행마가 서로 다르다. 이동은 차처럼 움직이나, 포획은 도약한다.
11. 초하한계
상치의 두 진영 사이에는 초하한계가 그려져 있다. 일종의 강인데, 그 강으로 인해 상치의 코끼리(상)는 상대 진영으로 건너가지 못한다. 한국장기에는 초하한계가 없는 대신에 양 진영이 초와 한으로 명명되었다. 중국보다 한국이 더 초한지를 좋아하는 것일까? 중국의 상치의 초하한계와 상의 행마 제한 등을 보노라면, 무언가 진화가 덜된 게임을 보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12. 한국에서 장기가 두어진 시점
중국에서 장기가 기원전에 두어졌는데, 한국에 장기가 먼훗날 전래되었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중국에서 10세기경에 상치가 두어지고 그 비슷한 시기에 한국에서도 장기가 두어졌을 것이다. 장기와 상치는 서로 형제간이다. 유사한 여러 종류의 장기가 경쟁하다가 중국에서는 상치가 살아남고, 한국에서는 장기가 선택되었을 것이다. 그 진화적인 생존 선택의 과정 또한 드라마틱할 것 같다.
13. 한국 장기 졸의 운명과 보수성
다른 나라 장기에서는 졸이 보통 적진에 진입시 또는 적진의 끝에서 '승진'을 하게 된다. 전쟁은 낮은 계층의 사람이 출세를 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이다. 하지만 한국의 장기에서만큼은 그런 출세는 있을 수 없다. 한국은 가장 보수적인 나라이다. 전쟁에서도 신분이동은 차단되었다.
14 상(코끼리부대)
상은 가장 보수적인 기물이면서 또한 가장 개방적인 기물이다. 그 보수성은 정렬 위치이고, 그 개방성은 그의 행마이다.
15. 마(기마부대)
마는 가장 일관된 행마를 보인다. 어떤 장기에서든 말(Knight)의 행마는 T자 형태를 가진다. 그리고 기마부대는 고대와 중세를 가로질러, 문화의 동서를 불문하고 가장 확실하게 존재했으며 그만큼 유용한 공격수단이었다.
16. 차(전차부대)
그 존재가 가장 의심스러운 기물이다. 따라서 지역 문화에 따라서 여러 변형이 많다. 해양문화에서는 배로 사막에서는 낙타로 바뀌기도 한다. 그런데 체스에서 루크(차)는 성벽의 형상이다. 움직임은 빠른 전차인데, 그 형상이 성벽인 것은 의외이다. 원래 기마부대와 전차부대는 역사상 동시에 존재한 기간이 매우 짧다. 그러므로 마와 차가 함께 존재하는 것은 그리 자연스럽지 않다. 그런데 포가 또 있다. 그렇다면, 차는 포가 나타나기 이전에 공성전을 담당하던 부대를 표상하는 기물이 아닐까? 상치의 발굴 유물에서 차의 뒷면에 그려진 그림형상을 살펴볼 때 그 단서를 발견할 수 있다. 그 그림에서 차는 포를 옮기는 기능으로 표현되고 있다. 무언가 차의 기능에서의 분열이 일어났고 그러한 과정에서 포가 생겨났을 수 있다.
17. 체스와 장기의 결합 포진도
P P P P 졸 졸 졸 포 졸
R N B Q K 사 상 마 차
18. 칠국장기의 독특한 특징
행인行人은 먹지도 먹히지도 않는다. 다만 걸거칠 뿐이다. 백성을 전쟁에 고려하는 중국의 미친 스케일.
편偏(차), 비裨(Bishop)가 장군의 좌우에 위치하는데, 이는 쇼기의 비차와 각행을 연상시킨다.
장군의 앞에 전방에서부터 궁弓-노弩-포砲가 위치한다. 가벼운 무기에서부터 무거운 무기로 배치되었다.
노弩의 좌우에 도刀가 포砲의 좌우에는 검劍을 배치하였는데, 양날이 있는 검劍은 +행마를 하고 한쪽에만 날이 있는 도刀는 x행마를 한다. 검과 도의 궤적과 흡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