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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영필 Zho YP Jul 14. 2023

과학의 반쪽사

제임스 포스켓

시작하는 글


13/... 코페르니쿠스가 책을 저술하던 무렵 유럽은 아시아와 새로운 관계를 형성하고 있었다. 갈레온선(16세기에 등장한 대형범선)이 인도양을 가로지르며 항해했고 대상이라 불리는 교역상들이 실크로드를 따라 이동했다. 코페르니쿠스의 과학 연구는 아랍어와 페르시아어 문헌에서 가져온 수학적 기법에 의존했는데, 이 가운데 상당수가 유럽으로 들어온 지 얼마 안되는 내용이었다. 비슷한 종류의 과학적 교류가 아시아와 아프리카 전역에서 이루어졌다. 이 시기는 오스만제국의 천문학자들이 이슬람의 과학지식에 기독교와 유대교 사상가들로부터 가져온 새로운 아이디어를 결합하며 지중해를 넘나들던 무렵이기도 했다. 서아프리카 팀북투와 카노의 궁정에서 수학자들은 사하라 사막을 가로질러 수입된 아랍어 문헌을 연구했다. 동쪽에서는 베이징의 천문학자들이 중국의 고전과 함께 라틴어로 적힌 과학 문헌을 읽었다. 그리고 인도에서는 부유한 마하라자가 힌두교, 이슬람교, 기독교 출신 수학자들을 고용해 지금까지 만든 것 가운데 가장 정확한 천문표를 편집해 만들어냈다.


17/... 근거없는 믿음의 상당수가 그렇듯, 근대과학이 유럽에서 태동했다는 생각은 우연히 생겨나지 않았다... 1949년 저명한 케임브리지 대학의 역사학자 허버트 버터필드Herbert Butterfield는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다. "과학 혁명은... 서구의 창조적인 산물로 간주해야 한다."



1부 과학 혁명(1450-1700)


1장 신대륙에서


23/ 황제 목테수마 2세는 멕시코의 태양 아래서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를 들었다...

1467년에 지은 이 아즈텍 제국의 식물원은 유럽보다 거의 한 세기나 앞선 것이었다. 이 식물원은 단지 관상용이 아니었다. 아즈텍인은 이곳을 통해 자연계를 더 정교하게 이해했다. 예컨대 이들은 장식용 식물과 약용식물을 구분하면서 구조와 용도에 따라 식물을 분류했다.


24/ 테노치티틀란은 공학적으로도 경이로운 도시였다. 1325년 텍스코코 호수 한가운데에 있는 섬에 건설된 이 아즈텍 제국의 수도는 3개의 둑길 중 하나를 건너야 도달할 수 있었는데, 각각의 둑길은 수 마일에 걸쳐 호수를 가로질러 뻗어 있었다... 15세기 중반까지 테노치티틀란은 전례없는 대도시로 성장했다. 인구가 20만 명도 넘는 이 아즈텍의 거대 도시는 런던과 로마를 비롯한 대부분의 유럽 수도보다 훨씬 컸다...


25/ ... 아즈텍 제국은 당시 전 세계에서 가장 발달된 의료 체계를 갖췄다. 테노치티틀란 주민들은 '티시틀'이라 불렸던 내과 의사는 물론이고 외과 의사, 조산사, 약제사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의료 종사자와 상담할 수 있었다...


... 1519년 11월 8일, 스페인의 정복자 에르난 코르테스Hernan Cortes가 처음으로 이 도시에 들어왔다... 베르날 디아스 델 카스티요Bernal Diaz del Castillo는 자신의 저서 <누에바에스파냐 정복의 진정한 역사>(1576)에서 목테수마 황제의 정원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27/ 과학의 역사를 서술할 때 멕시코의 아즈텍 제국에서 시작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전통적으로 근대과학의 역사는 흔히 '과학 혁명'이라고 불리는 16세기 유럽에서 시작된다. 약 1500년에서 1700년 사이에 과학의 역사에서 놀라운 변화가 일어났다는 것이다...


29-30/ ... 아메리카 대륙의 식민지화는 과학지식을 가장 잘 획득하는 방식에 대한 오랜 가정에 도전하면서 근대과학의 발전을 근본적으로 모양 지운 사건이었다. 16세기 이전에는 과학지식이 거의 고대문헌에서만 발견된다고 여겼다. 이런 생각은 특히 유럽에 퍼져 있었지만 다음 장에서 볼 수 있듯 비슷한 전통이 아시아와 아프리카 전역에도 존재했다. 오늘날의 관점에서는 퍽 놀라운 일이지만, 중세 사상가들에게는 관찰을 하거나 실험을 수행하는 방식이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스콜라 학파로 알려진 전통이었다. 당시에 일반적으로 읽던 텍스트에는 기원전 4세기에 쓰인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학Physics>과 1세기에 플리니우스가 저술한 <자연사Natural History>가 포함되었다. 중세 유럽의 대학에서는 의학을 공부하는 학생이라도 실제 인체와 거의 접촉하지 않았다... 대신 중세의 의대생들은 고대 그리스의 의사 갈레노스의 저작을 읽고 암송했다.


그렇다면 어째서 1500년대에서 1700년대 사이에 유럽학자들은 기존 고대 문헌을 외면하고 스스로 자연 세계를 조사하기 시작했을까? 그 답은 아즈텍과 잉카의 지식을 이용하고 신대륙을 식민지로 만든 일과 많은 관련이 있으며, 이는 전통적인 과학사에서 설명하지 못하는 부분이다. 초기의 많은 유럽 출신 탐험가가 재빨리 알아차렸지만, 그들이 아메리카 대륙에서 마주친 동식물과 사람들은 고대의 저작 가운데 어디에도 묘사되지 않았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아즈텍의 궁전이나 잉카 사원은 물론이고 토마토를 본 적이 없었다. 이런 사실이 드러나면서 유럽인들이 과학을 이해하는 방식에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났다.


31-43/ ... 아메리고 베스푸치Amerigo Vespucci는 콜럼버스의 자연사적 발견의 의미를 가장 먼저 인식한 사람 가운데 한 명이다. 1499년에... 편지를 썼다... 그의 지적에 따르면 "플리니우스는 아메리카 대륙에서 발견된 앵무새와 여러 새를 비롯한 동물 종 가운데 1,000분의 1도 언급하지 않았다."


... 가장 영향력 있는 기록 가운데 하나는 호세 데 아코스타Jose de Acosta라는 스페인 신부가 쓴 것이다... 책 제목은 <서인도제도의 자연사와 도덕의 역사Natural and Moral History of the Indies>(1590)였다.


...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지구는 3개의 기후대로 나뉘었다... 아고스타는... 이렇게 썼다.


내가 아리스토텔레스의 기상학 이론과 철학을 비웃고 조롱했다는 걸 고백해야겠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설명에 따르면 모든 것이 불길에 휩싸여 타고 있을 장소에서 나와 동료들 모두는 덜덜 떨었다.


... 아코스타에 따르면 페루의 나무늘보에서 멕시코의 벌새에 이르기까지 "이름이나 생김새가 이전에는 전혀 알려지지 않았던 새와 가금류, 숲속 동물이 수천 종이나 있었지만 라틴이나 그리스 문명을 비롯해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그동안 여기에 대해 몰랐다." 확실히 플리니우스의 <자연사>는 불완전했다.


... 처음에는 신대륙에서 경험한 여러 가지가 고대학문에 대한 완전한 거부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대신 유럽학자들은 새로운 경험에 비추어 고전 문헌을 다시 읽고 이해해야 했다.


베르나르디노 데 사아군Bernardino de Sahagun은... 1529년에... 대서양를 건너 누에바에스파냐에 도착해... 여생을 아메리카 대륙에서 보내다가 90세의 나이로 멕시코시티에서 사망했다... 그 저작에 <누에바에스파냐의 일반 역사General History of the Things of New Spain>(1578)라는 제목을 붙였다. <피렌체 고문서Florentine Codex>로 더 잘 알려진 이 기념비적 기록은 신대륙의 동식물뿐만 아니라 아즈텍 제국의 의학과 종교, 역사까지 아울렀다...


... 사아군은 멕시코시티 외곽의 틀라텔롤코에 자리한 산타 크로스 왕립 대학에서 라틴어를 가르치기 시작했다. 이 왕립 대학은 아즈텍 귀족의 자제들이 성직자가 되기 위해 훈련받는 학교로 1534년에 설립되었다... 왕립대학에 다니는 아즈텍 학생들은 라틴어 글자로 자국어인 나우아틀어 쓰는 방법을 배웠다... 나우아틀어는 문자라기보다는 특정 이미지가 단어나 구를 나타내는 그림 언어였다...


하지만 사아군은 동시대의 다른 여러 사람보다 아즈텍 문화의 가치를 더 크게 인식했다. 그는 나우나틀어를 배웠으며 1547년부터 <피렌체 고문서>를 저술하기 시작했다...


아코스타와 마찬가지로 사아군은 옛것과 새것을 융합했다. <피렌체 고문서>는 플리니우스의 <자연사>를 모델 삼아 작성되었다... 플리니우스의 저작과 마찬가지로 지리학, 의학, 인류학, 동식물, 농업, 종교를 망라하는 여러 권의 책으로 구성되어 있다...


... 아즈텍인은 식물을 보통 식용, 장식용, 수익용, 약용이라는 네 가지 그룹으로 나누었고 이러한 구분을 식물의 이름에 반영했다...


... 사아군은 아즈텍인의 지혜에 대한... 자신의 저작을 통해 유럽의 기독교인에게 아즈텍인이 신의 말씀을 받들 만큼 '문명화된 종족'이라는 점을 설득하고자 했다. 하지만 신대륙을 보다 상업적인 견지에서 바라본 사람들도 있었다... 페르디난도 데 메디치에게 <피렌체 고문서>는 상품 카탈로그나 다름없었다.


신대륙에 대한 이런 상업 중심적인 태도는 자연사 연구를 크게 변화시켰다. 상인과 의사는 고전의 권위보다는 수집과 실험을 훨씬 더 중요시하는 경향이 있었다... 1545년 파도바 대학은 유럽 최초의 식물원을 설립했고 곧이어 피사와 피렌체에도 정원이 생겼다.


유럽인들이 신대륙 식물의 의학적 활용법에 대해 알고 있던 것 중 많은 지식이 아즈텍에서 왔다... 1570년에 스페인의 펠리페 2세는... 주치의인 프란시스코 에르난데스Francisco Hernandez가... 이후 7년에 걸쳐 에르난데스는 누에바에스파냐 지역을 돌아다니며 약초를 수집하고 아즈텍의 의술을 배웠다.


... 에르난데스는 고대 그리스의 의사인 갈레노스와 디오스코리테스의 저작을 읽었다. 디오스코리테스의 <약물지On Medical Meterial>는 다양한 질병에 대해 약초로 치료하는 방법을 나열해 정리했으며, 갈레노스의 방대한 저작은 고대 그리스 의학의 기초가 되는 기본 이론을 담았다. 피와 점액, 검은 담즙, 노란 담즙이라는 네 가지 체액 사이의 균형을 이루는 데 중점을 두는 이론이었다. 이때 과도하게 많은 노란 담즙을 제거하기 위해 월계수 잎을 섭취하고 열을 낮추기 위해 피를 흘리게 하는 사혈법이 권장되었다.


... 당시 많은 의사가 고대 저작들의 권위를 외면하고 해부와 실험에 중점을 두었다. 해부학에 기초해 인체에 대해 새로운 설명을 제공한 안드레아스 베살리우스Andreas Vesalius의 저작 <사람 몸의 구조에 관해On the Fabric of the Human Body>(1543)에서 새로운 영감을 받은 사람들도 많았다. 또 온갖 종류의 새로운 약초와 광물을 활용한 치료법을 퍼뜨려 논란이 많았던 스위스의 연금술사 파라켈수스의 연구를 이어가는 사람들도 있었다...


... 에르난데스는 이전에 유럽인들에게 알려지지 않았던 식물을 3,000종류 넘게 확인했다. 이것과 비교하자면, 고대 그리스의 의사 디오스코리데스가 <약물지>에 실은 식물은 500종류뿐이었다. 에르난데스의 작업은 고대인들이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는 생각에 대한 전면적인 도전이었다.


... 1577년에 에르난데스는 손으로 직접 쓰고 그림을 곁들인 16권의 책을 가지고 스페인에 돌아왔다. 나중에 <누에바에스파냐의 의학적 보고The Treasury of Medical Matters of New Spain>(1628)라는 제목으로 출간된 에르난데스의 원고는 마드리드 외곽에 자리한 에스코리알 궁전 도서관에 보관되었다...


44-45/ 마르틴 데 라 크루스Martin de la Cruz는 스페인이 아메리카 대륙을 정복하기 전에 멕시코에서 태어났다... 1552년 5월 22일, 크루스는 <서인도제도의 약초에 대한 작은 책The Little Book of the Medicinal Herbs of the Indians>이라는 제목의 원고를 대학 학장에게 제출했다. 이 원고는 원래 나우아틀어로 작성되었지만 대학의 또 다른 원주민 출신 교수 후안 바디아노Juan Badiano가 라틴어로 번역했다...


... 이 책 전반에 걸쳐 크루스는 신체에 대한 아즈텍의 전통적인 지식을 반영했다. 아즈텍인은 흔히 사람의 몸에 머리, 간, 심장에서 나오는 세 종류의 힘이 존재한다고 여겼다. 질병은 이러한 힘의 불균형에서 비롯되며, 신체 특정 부위의 과도한 열기나 냉기가 그런 불균형을 일으킨다.


50-51/ 유럽인들에게 아메리카 원주민의 존재는 인류의 본성에 대한 심각한 의문을 불러일으켰다... 고대문헌의 유용성이 다시 한번 한계가 드러나는 지점이었다... 16세기에 최초로 인간에 대한 과학이 발전하기 시작한 것은 유럽의 종교적, 지적 변화에 대한 반응이라기보다는 아메리카 대륙과의 만남에 대한 반응이었다...


... 1537년 교황 바오로 3세는 ... "서인도제도 주민들은 제대로 된 인간이며 가톨릭 신앙을 이해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우리가 알아본 바에 따르면 그렇게 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란다."


67/ "멀리 여행할수록 더 많이 배운다." 1500년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세 번째 신대륙 항해에서 돌아온 직후에 쓴 글의 일부다... 우리는 자연사, 의학의 발전과 지리적 발견이 아메리카 대륙을 식민지로 만든 스페인 제국의 정치적, 상업적 목표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탐험가들이 귀중한 식물과 광물을 찾는 동안 식민지가 자국 영토임을 주장하기 위해 지도를 활용했다. 아메리카 대륙을 정복하고 식민지화하려는 이러한 노력은 지식적 측면뿐만이 아니라 과학이 행해지는 방식에 대한 변화를 촉발했다.


16세기 이전까지만 해도 유럽의 학자들은 거의 전적으로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문헌에 의존했다... 하지만 아메리카 대륙이 식민지가 된 이후로 새로운 세대의 사상가들은 과학 지식의 주요 원천으로 경험에 더 많은 중점을 두었다. 이들은 실험을 하고 표본을 수집했으며, 지리와 관련해 현장 조사를 실시했다. 이런 방식은 오늘날 우리 눈에는 과학을 수행하는 당연한 방법론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당시만 해도 엄청난 변화였다.



2장 천상과 지상 세계


75/ 이때 크게 활약한 인물이 알리 쿠시지Ali Qushji다. 1403년 사마르칸드에서 태어난 그는 왕궁에서 안락하게 자랐다. 왕궁에서 매 키우는 일을 하는 사람의 아들이었던 그는... 울루그 베그 역시... 초대했다...


79/... 9세기 바그다드에서는 한 무리의 이슬람 학자들이 클라우디우스 프톨레마이오스의 저작을 고대 그리스에서 아랍어로 처음 번역했다. 원래 2세기에 이집트에서 저술한 프톨레마이오스의 <알마게스트Almagest>는 중세 유럽과 이슬람 세계 모두에서 놀랄 만큼 큰 영향력을 발휘했다...


81/... 11세기에 카이로를 중심으로 활동했던 천문학자 이븐 알하이삼은 <프톨레마이오스에 대한 의문Doubts on Ptolemy>(1028)이라는 제목의 비판서를 쓰기도 했다. 알하이삼은 프톨레마이오스의 수학적인 속임수에 속지 않았다... 알하이삼은 행성들이 완벽한 원을 그리며 운동하지는 않는다고 명확히 추론했다... 1201년에 태어난 나시르 알딘 알투시는 당시 몽골제국의 일부였던 페르시아 북부에 자리한 마라게 천문대를 이끄는 천문학자였다... 1258년에 몽골군이 바그다드를 공격한 이후로는 많은 고대 그리스어와 아랍어 저작을 접할 수 있었다.


82-83/... <천문학에 대한 회고Memoir on Astronomy>(1261)에서 알투시는... '투시 조합'으로 알려진 기하학적 도구를 발명했다...


12세기까지 피타고라스의 수학부터 플라톤의 철학에 이르는 고대 그리스 저작의 대부분이 아랍어로 번역되었다. 중세 유럽 학자들이 고대인의 사상을 처음 접하게 된 것도 이런 아랍어 판본을 비롯해 알하이삼과 알투시의 비평서를 통해서였다. 1175년에는 카스티야 왕국에 살던 이탈리아 사람인 크레모나의 제라르드가 프톨레마이오스의 저서를 라틴어로 번역했다. 이 작업은 무슬림이 지배하던 스페인에서 가져온 아랍어 원고를 하나하나 모아 이뤄졌다. 이때 제라르드는 저서의 아랍어 제목인 '알마게스트'를 그대로 두기로 했는데, 알마게스트는 '가장 위대한'이라는 뜻이 있는 단어였다... 1400년대까지만 해도 유럽의 천문학자들은 오랫동안 연구를 하려면 라틴어로 번역된 아랍어 판본을 통할 수밖에 없다고 여겼다. 많은 학자가 고대 그리스의 원래 판본은 영원히 사라졌다고 믿었다. 하지만 그들의 생각은 틀렸다.


84-85/ 1453년 말, 이스탄불은 폐허가 되었고... 기독교인은... 이들 가운데 대댜수가 아드리아해를 건너 이탈리아의 도시 베네치아와 파도바에 정착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수 세기 동안 교회금고에 보관되어 밖으로 드러나지 않았던 귀중한 책과 필사본을 함께 가지고 왔다... 곧 많은 사람이 고대 그리스어 저작의 아랍어 번역본에만 의존하는 연구방식에 의문을 품었다... 원본으로 돌아가 충실하게 살피는 것이 낫지 않을까? 바로 이런 생각이 '인본주의'로 알려진 르네상스 운동을 뒷받침했다. 인본주의자들은 유럽 문명을 되살리는 유일한 방법은 고대로 돌아가는 것이라고 믿었고, 이 생각은 머지 않아 과학 분야로 확산되었다. 1456년에 크레타에서 태어난 비잔틴 사람 트레비드존스의 조지는 프톨레마이오스의 책 <알마게스트>에 대한 새로운 라틴어 번역본을 완성했다. 기존의 아랍어 번역본을 무시하고 고대 그리스어 원본에 기초한 번역이었다.


... 오늘날 귀중한 아랍과 비잔틴 필사본이 베네치아와 바티칸의 도서관에 상당수 소장되어 있다. 르네상스 시기의 천문학자들은 동양과 서양의 이런 자료들을 결합해 천상 세계에 대한 사람들의 이해를 변화시켰다.


86-87/... 베사리온은 <알마게스트>를 새로 번역하도록 포이어바흐를 이스탄불에 초청했다...

... 1461년, 번역작업을 시작한 지 1년만에 포이어바흐는 큰 병에 걸렸다... 젊은 레기오몬타누스에게 이 일을 마무리해달라고 부탁했고, 레기오몬타누스는 약속을 지켰다...


레기오몬타누스의 주요 혁신 가운데 하나는 사마르칸트 천문대를 이끄는 천문학자 알리 쿠시지의 결과를 직접 차용해서 이뤄졌다... 1471년에 쿠시지는... 이스탄불에 도착했다... 이렇게 이스탄불과 오스만제국이 연결되면서 알리 쿠시지의 연구는 유럽 천문학자들의 주목을 받게 되었다. <알마게스트의 요약>에서 레기오몬타누스는 알리 쿠시지가 원래 1420년대에 사마르칸트에서 저술했던 원고 속 도표를 베껴서 실었다... 알리 쿠시지는 모든 행성의 운동은 궤도의 중심이 지구가 아닌 다른 지점에 있다고 추정해 모형화할 수 있다고 여겼다. 물론 쿠시지와 레기오몬타누스 둘 다 이 지점이 태양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암시하지는 않았다...


88/ 니콜라우스 코페르니쿠스는... 1497년에 볼로냐 대학에 보내 교회법 학위를 취득하게... 볼로냐에서 코페르니쿠스는 레기오몬타누스에게 가르침을 받던 논란 많은 점성술사 도메니코 마리아 노바라Domenico Maria Novara의 강의를 들었다...


89/ ... 코페르니쿠스는 페르시아의 학자들로부터 철학사상을, 이슬람이 지배하던 스페인에서 천문표를, 그리고 이집트 수학자들로부터 행성 모형을 빌렸다...


... 코페르니쿠스 역시 <천구의 회전에 관하여>에서 프톨레마이오스에 비판적인 이슬람 학자들을 5명 넘게 인용했다. 9세기 시리아의 수학자 타비트 이븐 쿠라와 12세기 무슬림 스페인의 천문학자 누르앗딘 알비트루지가 여기에 포함되었다...


96-97/ ... 스프링을 사용한 기계식 시계는 14세기 말에 유럽에서 발명되었고, 주로 교회 탑에 설치되거나 웅장한 궁전에서 장식용으로 쓰였다. 그런데 타키 알딘은 이 새로운 발명품을 천문학 연구에 사용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16세기 내내 네덜란드와 프랑스의 시계 제작공은 기계장치에 대한 오스만 제국의 수요에 부응하기 위해 튀르키예 숫자로 시계를 만들었다... 그는 우주 자체가 거대한 시계와 같다고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102/... 이스탄불은 실크로드에 자리했다는 점 덕분에 라틴어와 그리스어, 페르시아어, 아랍어 등 여러 언어로 된 과학저술을 쉽게 접할 수 있었다. 그뿐 아니라 유럽 르네상스의 핵심에 놓인 아이디어 또한 이슬람 세계에서 비슷하게 존재했다. 아랍어에서는 그런 흐름을 '타지디드(갱신, 부활)'라고 불렀다. 전통적으로 타지디드란 종교 학자들이 이슬람교의 개혁을 가리키는 용어였다. 하지만 15세기부터 타지디드는 종교뿐 아니라 이슬람 과학을 부흥시키는 운동의 일환을 가리키는 용어로 훨씬 더 광범위하게 쓰였다...


119/ 그런데 이 문제는 중국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1582년에는 교황 그레고리 13세가 예수회에 유럽 기독교 달력을 개혁하도록 도와달라고 요청한 바 있었다... 마테오 리치의 로마 대학 지도교수 크리스토퍼 클라비우스가 개혁을 주도했다. 클라비우스는 코페르니쿠스의 천문표에서 가져온 자료와 최신 수학 기법을 통합했다. 그 결과 탄생한 결과물이 그레고리력이며, 오늘날까지 전 세계 여러 지역에서 사용되는 달력이다.



2부 제국과 계몽주의(1650~1800)


3장 뉴턴과 노예무역


134/... 이렇듯 뉴턴이 금융업에 종사했다는 사실은 종종 간과되는 18세기 과학의 한 측면을 암시한다. 바로 노예제, 식민지 무역, 전쟁이다...


136/... 베이컨은 과학의 성장이 세계에 대한 탐험에 의존한다고 여겼다. 그리고 과학적 발견과 지리적 발견을 직접적으로 비교하며 베이컨은 이렇게 주장했다.


지구 곳곳의 지리적인 새로운 영역이 널리 드러나고 있는 오늘날, 지적인 영역이 오래되고 협소한 범위 안에서 계속 제한되어야 한다면 분명 부끄러운 일이다.


... 베이컨이 염두에 둔 사례는 15세기와 16세기의 스페인 제국이었다. 과학에 대한 그의 비전은 세비야에 있는 무역청에서 직접 가져왔다... 베이컨은 신대륙 여행에 대한 스페인의 기록을 읽고 여기서 받은 영감과 생각을 과학연구와 조직으로 통째로 옮겼다. 심지어 세비야의 한 우주론자가 쓴 항해에 관한 초기 스페인어 도서의 삽화를 빌려 <신기관The New Organon>(1620) 표지를 장식했다...


139-140/... 뉴턴은 머리에 떨어진 사과에 영감을 받은 것이 아니다. 대신 <자연철학의 수학적 원리Mathematical Principles of Natural Philosophy; 프린키피아Principia>(1687)의 핵심 구절에 장 리셰르Jean Richer라는 프랑스 천문학자의 실험을 인용했다. 1672년, 리셰르는 남아메리카에 있는 프랑스 식민지 카이엔으로 항해 여행을 떠났다...


카이엔에 머무는 동안 리셰르는 전자시계로 여러 실험을 했다. 이것은 1653년 네덜란드의 수학자 크리스티안 하위헌스Christiaan Huygens가 만든 비교적 새로운 발명품이었다... 카이엔에서 연구하던 리셰르는 신중하게 보정을 거친 진자가 느리게 조금 느리게 운동한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 1681년, 리셰르는... 오늘날 세네갈의 세네감비아 해안 바로 앞에 있는 고레섬에 도착했다... 카리브해의 과들루프로 향했다... 리셰르가 발견한 바에 따르면 고레섬과 과들루프 둘 다에서 진자를 계속 제대로 작동시키려면 길이를 약 4밀리미터 줄여야 했다.


141/... <프린키피아>에서 뉴턴은 중력이 실제로 행성의 각 구역에 걸쳐 다양하게 작용한다고 주장했다...


... 만약 중력이 가변적이라면, 지구는 완벽한 구가 아닐 것이다...


142/ ... 데카르트는 자신의 저서 <철학의 원리Principles of Philosophy>(1644)에서 중력 같은 눈에 보이지 않는 힘이 존재할 가능성을 부인했고, 대신 힘은 직접적인 접촉을 통해서만 전달될 수 있다고 주장 했다. 또 물질에 대한 데카르트의 이론에 따르면, 지구는 호박처럼 위아래로 납작한 형태가 아니라 반대로 달결처럼 길쭉해야 했다.


151/ 1742년 1월이 되어 결과가 나왔다... 극지방에서는 눌리고 적도에서 불룩 튀어나온 '회전 타원체'였다. 뉴턴이 옳았다...


158/ 1771년에 엔데버호가 마침내 영국에 돌아오자 쿡은 자신의 연구결과를 왕립학회에 제출했다... 최종 결과는 9,372만 6,900마일이었다. 이 값은 오늘날의 계산 값인 9,295만 5,807마일과 1퍼센트 이하로 차이가 나는 놀라울 만큼 정확한 수치였다...



4장 자연의 경제


215/ <본초강목>(1596)은 유럽과 중국에서 자연사 분야가 밀접하게 서로를 반영하며 발전했다는 점을 상기시키는 중요한 자료다. 결국 이시진은 칼 폰 린네와 그렇게 다르지 않았다...



3부 자본주의와 갈등의 시대(1790~1914)

 5장 생존을 위한 투쟁

 6장 산업의 발전과 실험

4부 이데올로기 전쟁과 그 여파(1914-2000)

 7장 빛보다 빠른 것

 8장 유전학의 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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