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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트해의 주역

조영필

by 조영필 Zho YP

유럽사에서 발트해를 개척한 주인공은 바이킹이다. 바이킹은 발트해를 지중해만큼 중요하게 만든 주인공이다. 바이킹의 뒤를 이어 한자상인이 나타나 교역을 이끌었다. 그리고 그 주도권은 다시 네덜란드로 넘어간다. 네덜란드는 발트해 유산의 상속자로서 북해를 장악하고 뒤이어 대항해시대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교역품들을 처리함으로써 세계사의 주도권을 쥐게 되었다.



지구상에서 북해와 발트해보다 거친 바다는 거의 없다. 이곳은 일 년 중 절반 이상이 수온이 영도 이하로 떨어지는 황천이다. 대구가 돌아오는 1월에서 4월엔 거친 폭풍이 바다에 휘몰아치고 이때 극권은 낮이 거의 밤처럼 보인다... 바이킹시기 스칸디나비아인들은 발트해를 '동쪽 호수'라 불렀는데 이로 인해 스칸디나비아에서는 지금까지도 이 바다를 '동해'라고 부른다고 한다. (돈의 바다로 나온 '노스페이스', 부산일보, 2011.11.8)


(바이킹족은) 본래 알타이에서 그리고 3500년 전에는 우랄지방에서 이동해온 핀우그르어족으로 스스로를 '삼' 또는 '사아미'라고 부르던 '랩족'에 병합된 게르만족이다. 로마의 역사가 타키투스는 이들을 페니라고 불렀는데 이는 켈트어로 '바다의 전사' 또는 '모험하러 가다'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고 한다... 바이킹의 어원은 '작은 만', '후미'를 뜻하는 고대 노르드어 vik에 접미사 '거주자-ingr'가 붙은 것이라는 설도 있다. 이 말에 따르면 바이킹이라는 말은 '협만의 거주자'라는 뜻으로 특히 덴마크와 스웨덴 사이의 카테카트만 쪽 비켄Viken 지역의 거주자라는 뜻이다... (바이킹, 교역중심 경제·자유와 평등 가치 퍼나르다, 부산일보, 2011.2.28)


... 탁월한 조선기술로... '롱쉽'과 '크나르'를 만들고... 한자도시의 상인들은... '코그'선을 만들어내었다... 스웨덴의 비르카예테보리, 노르웨이의 베르겐, 덴마크의 하데비로스킬드 등의 도시는... 물류중심으로 등장한다. (돈의 바다로 나온 '노스페이스', 부산일보, 2011.11.8)


바이킹의 대양항해는 눈대중으로 한 것이 아닌 과학의 밑바탕이 있어 가능했다. 그들은 바람에 따라 방향을 바꾸는 돛을 발명했다... 계기장치 없이도 대서양을 항해할 정도로 파도와 바람을 읽어냈는데 여기에도 3가지의 훌륭한 도구 즉, △태양위치표지판, △태양그림자판, △태양석sunstone의 과학이 있었다. 그들은 구름이 잔뜩 낀 북구의 바다에서도 태양석이라고 부르는 수정crystal을 이용해 해의 위치를 찾아 배의 방향을 잡았다. 태양이 안개나 구름 속에 가려져 보이지 않아도 수정은 태양광선의 편광을 반사해준다. 수정의 특정 방향이 빛난다면 그쪽이 태양이 있는 곳이라는 사실을 고대 바이킹들이 알고 있었던 것이다. 바이킹들은 이 수정을 '시구르트'라고 불렀다.


대서양으로 나간 바이킹들은 교회/ 왕/ 부자들의 창고에 잠자고 있던 보물을 약탈해 재분배한 뒤 소비함으로써 결과적으로 중세 경제의 숨통을 틔워주었다... 바이킹 덕분에 우크라이나의 키예프에서 아일랜드의 더블린까지, 잉글랜드의 요크에서 프랑스의 노르망디까지 곳곳에서 도시가 발달하게 된 것은 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노브고로드(레닌그라드의 남쪽)는 도시의 구조에서도 알 수 있듯이 바이킹에 의해 건설되었다...(바이킹, 교역중심 경제·자유와 평등 가치 퍼나르다, 부산일보, 2011.2.28)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의회는 바이킹이 만들었다고 알려진다. 바이킹 사회에선 왕이 입법권이나 사법권이 없었다. 그런 권한은 공회에 있었다. 공회는 자유민들의 회의체로 부락, 지역 단위로 있었다. 이런 공회는 연간 한두 번 열렸고 공개적으로 민주적인 토론이 이뤄졌다... 독일인들은 "그들은 왕이 없으나 법이 있다"고 말하였다. 노르웨이사람들은 아이슬란드를 점령한 다음 서기 930년에 '알싱'이란 의회를 열었다.


모험과 정복의 시대가 끝나고... 상인길드가 만들어졌고... 11세기 스웨덴의 시그투나에서는 상인길드가 존재하였다... (돈의 바다로 나온 '노스페이스‘, 부산일보, 2011.11.8)


바이킹들은 롱십을 타고 약탈이나 무역을 하다가 한자동맹이 생긴 뒤 코그선이 보급되자 점차 쇠퇴하기 시작했다. 키가 작고 얕은 롱십은 훨씬 튼튼한데다가 선수에서 선미까지 성곽 같은 구조물이 있는 코그선을 이길 수 없었다... (강영민, 뉴콤파스 '물류로 읽는 세계사', 해양한국, 2023.12.28)


... 1158년 뤼벡시 건설은 한자(한자라는 말은 원래 '집단'을 뜻하며...) 상인들의 발걸음을 더욱 재촉한다... 뤼벡의 등장에는 중요한 변수가 있었다. 다름 아닌 '왕 청어King Herring'와 '소금'이다... 지구의 온난화와 더불어 청어가 북유럽의 바다로 몰려온 것... 뤼벡의 상인들은 방부처리에 필요한 암염이 남쪽으로 95km 떨어진 뤼네부르크에서 생산된다는 사실에 주목한다. 뤼네베르크에서 뤼벡으로... '옛 소금길'이라고 부른다. '북쪽의 금' 또는 '백색의 금'이라던 소금. 13세기에 소금 한 통에 집 반 채 값이었다고 한다. (돈의 바다로 나온 '노스페이스', 부산일보, 2011.11.8)


12세기 이후 발트 및 북해의 무역은 주로 뤼베크를 통해 이루어졌다. 아울러 뤼베크뿐만 아니라 함부르크예테보리, 단치히 등도 함께 번창했다. (강영민, 뉴콤파스 '물류로 읽는 세계사', 해양한국, 2023.12.28)


14세기 들면서 대상조합의 힘보다 도시들의 힘이 커지면서 상인한자에서 도시한자로 변신이 이루어진다 한자의 중심도시 뤼벡을 가운데 두고 서쪽 런던브뤼헤, 동쪽 노브고로드, 북쪽 베르겐으로 대표되는 네 개의 상관(Kontor) 체제가 확립되었다... (돈의 바다로 나온 '노스페이스', 부산일보, 2011.11.8)


한자동맹도시들은... 염장 청어를 담는 통 자체를 규격화해서 한 통에 최소 860마리를 담아야 했고 현장감독관이 통안에 든 청어의 품질을 검사한 뒤 검수표시를 했다. 이렇게 검수표시가 된 청어들만 유통됐다. 청어 통에는 생산지가 표시돼 있어서 문제가 발생하면 생산지로 돌려보내서 이를 배상하게 했다. (반도체 전쟁 이전에 청어전쟁이 있었다, 매일경제, 2023.6.14)


뤼베크가 유럽의 유통거점이던 시대는 15세기말로 끝났다. 그 무렵 네덜란드가 그동안 항해의 난관이었던 외레순 해협을 지나가는 경로를 개척함으로써 발트해 무역의 주도권을 쥐게 되었다. 이로써 발트해 지방의 상품들이 네덜란드배에 실려 지중해로 보내졌다. 발트해가 지중해를 삼켜버린 것이다. (강영민, 뉴콤파스 '물류로 읽는 세계사', 해양한국, 2023.12.28)


1350년경 빌럼 뵈켈스존(Willem Beukelszoon)이라는 젤란트 출신 어부가 개발한 새로운 청어절임기술... 뵈켈스존의 방식에 따르면 하링바위스haringbuis라는 아래가 둥근 배가 먼 바다에 머물면서 청어를 잡으면 동시에 넓은 갑판 위에서 청어의 내장을 딴 뒤 소금으로 염장했다. 이렇게 염장한 뒤 통에 포장하면 연락선이 이를 가져갔다.


청어산업을 통해 네덜란드는 다가올 대항해시대를 위한 완벽한 준비를 마칠 수 있었다... 우선 청어무역이 발전하면서 이를 뒷받침하는 금융제도도 네덜란드에서 발전했다... 또 청어산업은 네덜란드의 조선업을 획기적으로 발전시켰다. 특히 1595년 암스테르담 인근 호른Hoorn조선소에서 개발한 플류트선이 해운산업의 일대혁신을 가져왔다... 갑판의 크기를 줄이는 대신 흘수선waterline 아래를 최대한으로 키웠다... 플라이트선은 적재공간이 거의 정사각형이라 대량의 물건을 실을 수 있는 데다가 무게도 가벼웠다. (반도체 전쟁 이전에 청어전쟁이 있었다, 매일경제, 2023.6.14)


출처:

바이킹상인 휘저은 바다 한자상인이 대를 잇다, 부산일보, 2011.11.8.

바이킹, 교역중심 경제·자유와 평등 가치 퍼나르다, 부산일보, 2011.2.28.

반도체 전쟁 이전에 청어전쟁이 있었다, 매일경제, 2023.6.14.

강영민, 뉴콤파스 '물류로 읽는 세계사', 해양한국, 2023.12.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