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훈
(8)고대인이 상상한 로봇은 자기조절력 갖춘 ‘탈로스’…오늘날의 AI와 닮았다, 경향신문, 2019.10.15.
■ 미노스 문명의 청동 로봇 ‘탈로스’
탈로스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청동인간이다. 이 이야기는 대장장이신 헤파이스토스가 만들었다는 무쇠 기계인간에 대한 고대인들의 상상력을 보여준다. <아폴로도로스 신화집>에 따르면 탈로스는 크레타 섬 해안가를 감시하고 방어한다. 고전 시대 작가들 가운데 혹자는 헤파이스토스가 만들었는데 제우스가 크레타 섬의 미노스 왕에게 선물하였다고도 하고, 혹자는 미궁을 만든 다이달로스가 제작하여 미노스에게 바쳤다고도 한다. 청동 재질의 이 기계는 외부 선박이 침입할 때 바위를 던져 공격하고, 수상한 선박이 상륙한다면 자신의 청동 본체를 달구어 침입자들을 끌어안고 타죽게 만든다.
사실 탈로스에겐 치명적인 급소가 하나 있다. 신이 만들어 준 무쇠팔과 무쇠다리로 천하무적일 것 같지만, 뒤꿈치가 너무 약하다. 뒤꿈치에는 나사 하나가 고정돼 있는데, 그것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연결된 관의 밸브 역할을 한다.
신화에 따르면 아르고호 사람들이 크레타 섬을 지날 때 탈로스와 대격전을 벌이게 된다. 아르고호의 메데이아가 청동인간을 잠들게 한 사이 이아손을 비롯한 아르고호 사람들이 그의 뒤꿈치에서 나사를 뽑아 버려 청동인간을 물리쳤다.
탈로스에 대한 이야기는 기원전 5세기에 조각글 형태로만 남아 있지만 아마도 많은 얘기들이 떠돌았던 것 같다. 동전과 도기에 탈로스의 상들이 많이 발견되기 때문이다. 청동기 시대에 크레타 섬은 미노스 문명의 중심지였다. 미노스 왕은 청동기 시대 전설적인 인물로 이미 트로이전쟁 전에 크레타를 통치하였고 해군력을 강화한 인물로 알려졌다. 현대 고고학자들은 미노스 왕의 이름을 따서 기원전 3000~1100년의 문명을 미노스 문명이라 부른다.
미노스 문명의 3대 도시 중 하나였던 파이스토스(Phaistos)에서 출토된 은화(기원전 350~280년)에 탈로스 상이 있다. 탈로스가 날개까지 달고 위협적으로 앞으로 향하거나 옆으로 향해 돌을 던지는 모습을 보여 주는 형상이다. 이 날개는 아마도 크레타 섬을 하루에 세 번 돌면서 순찰하는 데 큰 도움을 줬을 것으로 추측되는데, 시속 240㎞의 속도로 가야 순회할 수 있는 거리라고 한다.
또한 도기에 나타난 그의 모습을 보면 갑옷인 듯 보이는 선들을 통해 청동의 접합 부분과 몸통의 해부학적 구조를 알 수 있다. 몸체는 금속성 갑옷을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얼굴은 공감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하다. 한 고전학자는 탈로스의 오른쪽 눈에 보이는 자국이 떨어지는 ‘눈물방울’이라 분석하기도 한다.
이런 일련의 묘사들을 종합해 볼 때 탈로스는 현대의 로봇 조건을 충족하고 있다. 머리에서 발끝까지 하나로 연결된 관은 동력과 관계된 전기회로라든지 ‘합성 전자유체’ 가스관으로 이해할 수 있다. 상당히 빠른 속도의 이동장치에 에너지를 사용하고, 주변을 감시하도록 프로그램되었을 뿐만 아니라, 접근하는 물체의 정보를 분석하여 공격하는 ‘지능형’ 로봇에 속한다.
■ 청동기 시대 자기조절 로봇
청동기 시대 미노스 문명은 다리와 성문, 항구와 같은 경계 지역에 거대한 청동상을 세웠다. 이 동상이 재앙을 물리친다는 미신을 갖고 있었는데, 이렇게 청동으로 동상을 만들기 위해서는 상당한 제련 기술이 필요했다. 희랍 전설에 따르면, 산불이 난 후 뜨거운 액체 금속 물질이 식으면서 바위의 구멍 난 형태로 굳어진 것을 보고는 도가니에 금속을 녹이는 기술을 발견했다.
철기 시대에 살았던 고대 작가와 예술가들은 이전 청동기 문화에 대한 초자연적 상상력을 갖게 된다. 그 상상력을 보자. 플라톤의 <국가>에 등장하는 ‘귀게스의 반지’에 청동말이 등장한다. 이 ‘기계말’은 창문들을 갖고 있으며 내부에 일반인보다 더 큰 시체가 있었다. 그 시체의 손가락에 있었던 게 ‘투명반지’였다. 이 에피소드는 내부에서 인간이 조종하는 거대 로봇을 연상케 한다. 그에 비해 탈로스는 상당히 진보된 지능형 로봇이다. 이 청동인간은 침입자를 인식하고 추적한다. 탈로스는 바위를 찾아 들어 올리고 멀리까지 조준하여 던진다. 또한 손이 닿는 근거리 적들에게는 본체를 가열해 육탄으로 제지하고 섬멸한다.
고대 작가들은 탈로스를 인간의 ‘대체기계’ 정도가 아니라 ‘자기조절력’을 갖춘 지능형 로봇으로 상상했다. 그도 그럴 것이 탈로스는 몸통 전체에 연결된 관 속에 있는 액체를 통해 작동하는 내부 메커니즘을 소유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메데이아는 로봇의 내부 시스템에 대한 해박한 지식으로 로봇의 물리적 결함을 악용할 수 있었다. 더구나 메데이아가 탈로스에게 ‘완전한 불사신’으로 만들어 주겠다고 약속하자 이 로봇은 그 말에 과도하게 긍정적인 반응을 보인다. 결국 탈로스는 자신을 속이는 인간에게 몸통을 맡겼다. 이것은 연료를 계속 보충해야 하는 이 로봇의 부담감이 얼마나 컸는지를 보여 준다. 연료 공급을 받을 수밖에 없던 무쇠로봇은 영원한 동력원을 갖고 싶었던 것이다.
이것 때문에 로봇은 파괴되지만 그만큼 자기조절능력을 갖추고 있다는 점을 보인 셈이다. 고대인들은 단순 작업을 반복하는 ‘대체기계’를 넘어 ‘자기조절력’을 갖춘 로봇을 상상했음에 틀림없다. 20세기 이후 많은 소설과 영화에서 로봇들이 소개되고 있지만 오늘날 우리 눈에 보이는 로봇의 모습은 고대인들이 품었던 상상력을 현실화한 정도에 불과하다. 아마도 헤르메스가 신은 ‘날개신발’과 같은 드론도 곧 만들어질 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거리와 건물에 설치된 터치스크린으로 손쉽게 정보를 얻고 정산할 수 있다. 어느 날 이런 무인단말기들은 친근한 인간형 로봇으로 전환될 것이다. 앞으로 기술이 더 발전한다면 과연 사회는 그 로봇에 대해 어떤 자세를 취할까?
(9)하늘 훨훨 ‘비행 판타지’, 고대 그리스인도 품었다, 경향신문, 2019.10.23.
■ 고대인이 상상한 자율주행 삼발이
랫동안 사람들의 상상력을 사로잡은 플라잉카는 그리스신화 시대부터 있었다. 청동으로 만든 세 개의 다리를 가진 삼발이(tripod)가 바로 그것. 이 물건이 처음에는 세면대나 가마솥을 받치는 용도였다. 아주 고급스러운 것은 신전에 봉헌되기도 했다. 그 가운데 델포이에 있던 뱀이 휘감긴 세발의자가 특이할 만하다. 아폴론신전의 여사제 피티아는 삼발이에 앉아 몰아에 빠져 혼미한 말로 신탁을 내렸다. 피티아는 이아손이 황금양피를 찾아 모험을 떠날 때 델포이 신전에 있던 삼발이 두 개를 건네주기도 했다. 귀환 중 위기에 빠졌을 때 이아손은 삼발이 중 하나를 제단에 봉헌해 위기를 모면하기도 한다. 삼발이가 움직이진 않아도 영험함이 그 자체에 있었다.
그런데 고정된 삼발이가 사람이나 신을 태우고 하늘을 날아간다는 표현도 있다. 신기한 것은 삼발이가 자율주행용이 아닌 비행용으로 그려진다는 점이다. 그렇다고 고대인들이 자율주행을 상상하지 못했던 것은 아니다. 주행은 아니지만 스스로 운행하는 삼발이가 나타난다.
헤파이스토스는 튼튼한 마루의 벽에다 세워 두기 위하여
전부 스무 개의 삼발이를 만들고 있었는데
그 하나하나마다 밑에 황금 바퀴를 달아
저절로 신들의 회의장으로 갔다가 다시 그의 집으로
돌아올 수 있도록 해놓았으니 보기에도 장관이었다.(호메로스, <일리아드> 18권에서)
헤파이스토스는 스무 개의 삼발이 밑에 황금 바퀴를 장착하고 신들의 식사 때마다 자신의 궁전에서 자동으로 음료를 배송하고 서빙한 후 돌아오게 하였다. 한마디로 물류용 자율운행 삼발이의 모습이다.
바퀴 달린 삼발이는 호메로스의 글에서만 나타날 뿐 고대 그리스 예술에서는 나타나지 않는다. 기원전 13세기에서 12세기에 발굴된 유물 중에서 물건을 나르는 용도로 쓰인 것은 네 개의 다리를 가진 것이 고작이었다. 또한 이 시대를 지나서도 지상의 운반용 삼발이는 나타나지 않는다.
바퀴 달린 삼발이는 기원전 3세기 헬레니즘 시기에 이르러 만들어졌지만 작동하지 않는 모형에 불과했다. 아마도 세대를 거듭하면서 수많은 발명들은 헤파이스토스의 자율운행 삼발이에 대한 도전이었을 것 같다. 하지만 자율운행 삼발이에 대한 상상은 지상에서의 자율주행 삼발이로 발전하지 못하고 바로 하늘을 나는 자율비행 삼발이로 넘어간다.
■ 고대인들도 자율비행 삼발이를 선호했다
그리스신화 시대 삼발이, 자율주행용 아닌 비행용으로 그려
‘베를린 화가’ 도기에 자주 등장…당시 ‘상상’에 대한 증거
자율비행 삼발이는 고대 그리스 도기에 다수 나타난다. 특히 ‘베를린 화가(the Berlin Painter)’의 도기 그림이 유명하다. 베를린 화가란 기원전 505년부터 465년경까지 아테네가 자리한 아티카 반도에서 예술성이 뛰어난 도기 화가였다. 하지만 당대 화가들은 관례적으로 도기에 서명을 하지 않아 이름이 알려지지 않았다. 후대 학자들은 이 특별한 재능을 가진 도기 화가 한 명에게 이름을 붙이게 되는데, 이때 ‘베를린 화가’란 이름이 붙는다. 그 화가가 그린 물주전자(hydra) 그림 중에 자율비행 삼발이가 나타난다.
이 삼발이는 의자인 것 같은데 아폴론 신이 앉은 데다 날개까지 달려 있다. 바다를 날고 있다는 것을 표현하기 위해 삼발이 양옆으로 돌고래가 뛰어오르는 모습까지 그려져 있다. 영락없는 자율비행 삼발이를 그린 것이다. 고대인들이 가진 자율비행 기계에 대한 상상의 증거인 셈이다.
어쩌면 아폴론의 여사제인 피티아가 앉았던 세발의자는 아폴론이 타고 있는 이 삼발이를 상징할지도 모른다. 아니면 아폴론과 같이 피티아 자신도 하늘을 날고 있다는 상상 속에서 예언을 했을 것이다. 하지만 아폴론이 삼발이를 타고 비행한다는 것은 도기의 그림으로만 전할 뿐 문자 기록으로는 확인할 수 없다.
신화에 나오는 또 하나의 자율비행 기계는 비록 삼발이는 아니지만 트립톨레모스가 타고 다녔던 전차다. 신화에 따르면 날개 달린 뱀 두 마리가 끄는 이 전차를 타고 트립톨레모스는 대지에 씨를 뿌리고 농사를 가르쳤다고 전한다.
그런데 도기 그림을 자세히 보면 날개 달린 뱀 두 마리가 이 전차를 날아가게 했다고 보기에는 날개가 너무 작다. 오히려 전차 자체가 스스로 날아다니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전차는 아폴론이 앉은 세발의자처럼 단순하게 그렸고 마치 프로펠러와 같은 커다란 바퀴가 달려 있다. 그저 단순한 의자에 불과한 이 전차는 큰 바퀴의 자율비행에 맡기고 날아가는 것으로 표현된다. 도기 화가들은 이 그림에서처럼 자율비행 삼발이를 흉내 낸 자율비행 의자를 상상했던 것이다.
■ 아테네 ‘삼발이거리’는 플라잉카에 대한 ‘상상마당’이다
기원전 5세기 그리스 고전기로 들어오면서 삼발이는 비극경연대회 시상품이 되었다. 아니, 경연대회 시상품이 고작 삼발이라니? 더군다나 그 시상품들을 전시하는 ‘삼발이거리(the Street of Tripods)’까지 만들었다니 그 의도는 대체 무엇이었을까?
아테네의 아크로폴리스 동쪽 플라카(Plaka) 지역에 ‘삼발이거리’가 있다. 신화의 시대가 끝나면서 아테네에서는 성대한 디오니소스축제가 있었다. 그 축제의 하이라이트는 비극경연대회였는데, 우승한 코러스의 후원인에게는 삼발이가 수여됐다. 그런데 특이하게도 모든 시민들이 오고가는 거리에 시상받은 삼발이를 12m 원통으로 된 기둥 위에 전시해 놓았다고 한다. 오늘날 원통 기둥만 남았지만 삼발이까지 맨 위에 올려놓으면 13m가 넘는 고공 전시물들로 즐비했다.
그리스인들은 지금의 4·5층 정도 높이에 전시된 삼발이를 보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그것은 신들이 있는 올림푸스 연회에 자율배송하고 서빙하는 물류용 삼발이기도 했겠지만 그것보다 더 기발한 상상을 했다. ‘삼발이거리’를 걸었을 고대 아테네인들 머릿속에는 자신들 13m 상공 위로 날아다니는 자율비행 삼발이, 플라잉카가 윙윙거렸다. 정작 본인들은 어디를 가더라도 도보로 힘겹게 걸었을 테지만 비행 판타지를 포기할 수 없었던 것이다.
(10)금속 덩어리가 감정·지능·음성·힘까지 장착 …고대 서사시 속 ‘황금비서’는 오늘날의 AI 로봇, 경향신문, 2019.10.29.
■ 호메로스가 전하는 인공지능의 요소들
......
호메로스의 <일리아스> 18권에도 인간을 닮은 ‘황금비서’가 나온다.
그러자 황금으로 만든 비서들이 주인을 부축해 주었다.
이들은 살아 있는 소녀들과 똑같아 보였는데
감정을 지닌 지능, 음성, 힘이 장착되었으며
불멸의 신들에게 작품도 배워 알고 있었다.
아무리 황금이라 해도 금속 덩어리에 불과한 이 기계는 생기발랄한 소녀 스타일인 데다 ‘감정을 지닌 지능, 음성, 힘, 학습 기능’까지 두루 갖췄다......
■ 음성 서비스
고대 그리스인들의 음성 서비스에 대한 상상은 당연했는데, 그 흔적은 목소리만 따로 있었던 에코 신화를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호메로스가 말하는 ‘황금비서’는 금속임에도 음성 서비스를 한다. 오늘날로 치자면 ‘인공지능 스피커’다......
■ 학습 기능
호메로스는 음성 서비스 이상의 비서를 원했던지 ‘황금비서’들이 학습 기능을 가졌다고 한다. 그는 인공지능이 “신들의 작품”을 학습했다고 묘사한다......
■ 감정 인식
마지막으로 호메로스식 ‘황금비서’는 “감정을 지닌 지능”을 장착했다 한다. 감정으로 번역한 ‘프렌(phren)’의 원래 의미는 ‘횡격막’이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횡격막에 오늘날 우리가 감정, 성벽, 기질로 여기는 것들이 자리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 의식인공지능(conscious AI)
호메로스는 ‘프렌’을 ‘황금비서’의 한 요소로 말하지만, <일리아스>의 다른 곳에서는 사슴에게도 있다고 말한다.
넓은 들판을 쏘다니다 지쳐 우두커니 서 있는,
‘프렌’ 속에 용기라고는 전혀 없는 사슴 새끼들처럼.(호메로스, <일리아스> 4권)
인간뿐만 아니라 동물의 횡경막에도 있는 이것. 보통 감정, 마음으로 이해한 이 단어는 호메로스가 사슴에게도 있다고 언급하면서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게 된다.
......
호메로스가 인간이나 동물에게 있다고 한 횡격막에는 ‘의식’이 깊이 자리하고 있다. 그는 그 ‘의식’을 “불멸의 신들의 작품”으로 보고 있다......
(17)‘호기심의 나침반’ 베스트셀러 두 권 들고 대서양 건넌 콜럼버스, 경향신문, 2019.12.16.
......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1492년부터 1504년까지 네 차례 대서양 횡단에 나섰을 때, 그가 들고 간 것이 세 개 있었다. 프톨레마이오스의 <지리학> 최신판,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 토스카넬리의 편지. 이것들을 통해 근대의 신세계가 열리기 전 그 바탕이 되는 지도의 황금기를 통과하게 된다. ‘대항해’는 르네상스인들의 ‘상상의 지도’가 구체화된 결과물이었다.
■ <지리학>, 볼로냐에서 만들어낸 베스트셀러
프톨레마이오스의 ‘지리학’,
앙겔루스 번역본 이후 나온 지도 포함된 볼로냐 판본 ‘베스트셀러’로
지도에 특별한 관심을 보이지 않던 사람들이 지도 제작에 가속도를 붙인 것은 15세기 초 한 권의 책이 발견되면서부터다. 피렌체의 야코부스 앙겔루스(1360~1411)는 그리스 고서적을 찾기 위해 콘스탄티노플의 서적상을 찾아다녔다. 우연히 프톨레마이오스(90~170)의 <지리학>을 발견하고서 그는 황급히 라틴어로 번역해 1406년 세상에 내놓았다. 이 번역본은 이후 수백권의 필사본이 있을 정도로 인기가 높았다.
이미 2세기에 최대 항구도시 알렉산드리아에 살았던 프톨레마이오스는 <지리학>을 통해 지도 제작의 기준을 제시했었다. 위도와 경도의 좌표 체계를 구축한 뒤 지구를 일곱 개의 ‘기후대’로 구분한 후 도시 지명 8000곳을 거론했다. 그는 지도 제작을 위해 삼차원 구 표면의 정보를 이차원 평면이 투영하는 ‘원통형 도법’을 제시했다. 이후 지도 제작자들은 프톨레마이오스가 만든 체계를 확장하여 동서로 연결돼 있는 유라시아가 하나의 대륙이라 확신하였고, 동쪽 끝은 말레이반도까지 다다르며 인도양은 대륙과 바다로 둘러싸여 있을 뿐만 아니라 대서양도 인도를 접한 바다 중 하나라 여겼다.
프톨레마이오스의 <지리학> 번역본은 1475년 인쇄술의 도움으로 대량 보급되었으며, 2년 뒤 26쪽의 지도가 포함된 볼로냐 판본이 나오면서 베스트셀러가 됐다. 이전까지만 해도 이 번역본에는 설명만 있었고 어떤 지도 그림도 포함되지 않았는데, 지도가 추가되자 폭발적인 반응이 있었다. 지도 제작자들은 계속적으로 프톨레마이오스의 <지리학>에 지명과 지도를 보충한 증보판을 선보였다. 그중 1482년 아름샤임의 요한네스가 울름에서 인쇄한 지도가 가장 훌륭한 작품으로 손꼽힌다. 이것은 당시 <지리학> 최신판에 다섯 장의 목판인쇄 지도가 추가된 것인데, 인쇄된 세계지도로서는 처음으로 그린란드를 포함했다. 이후 지도책이 일대 유행이 된 것은 베네치아에서였다. 지도 판매상들은 ‘맞춤형 지도’라는 탁월한 발상으로 고객이 원하는 용도에 맞춰 지도책을 만들었다. 지도는 르네상스인의 호기심을 더욱 자극했다.
■ <동방견문록>, 베네치아의 경제 분야 베스트셀러
1300년부터 필사본으로 전해진 마르코 폴로 ‘동방견문록’,
150년 뒤 나온 인쇄본 ‘베스트셀러’
지중해의 해양 네트워크를 통해 베네치아는 이미 중세 말부터 동서양 물류의 거점으로 떠올랐다. 우선 수많은 상선을 확보하고 있었다. 오늘날 ‘베네치아비엔날레’가 개최되는 장소인 아르세날레는 원래 조선소였다. 이 조선소는 8세기에 지어져 1320년 확장된 이후 하루 만에 배 한 척씩 건조할 수 있는 생산시설과 1만6000여명의 작업자들을 갖추고 있었다. 당시 지중해 무역은 연안 항로를 중심으로 펼쳐져 있었기 때문에 선박이 육지를 시야에서 놓치는 경우는 거의 없었고, 베네치아 출신의 토지 소유주는 지나가는 모든 선박들에 통행세를 부과할 수 있었다.
베네치아 상인들, 견문록 속 지역 특산물 정보 참고…
최신판 지도 만들고 상업 활동 이용
베네치아 상인들은 멀리 말레이반도로부터 동양의 향신료와 진귀품들이 시리아나 알렉산드리아의 항구들로 모이면 지중해를 통해 가져다가 다시 육로로 유럽에 공급했다. 하지만 이런 중개무역에 머물지 않고 보다 경제적인 물류 거점들을 새롭게 확보하기를 원했다. 자신들 손에 지도도 있으니 이제 필요한 것은 그 거점들을 표시하는 일뿐이었다. 프톨레마이오스의 최신판 <지리학>이 거듭 인쇄될 때마다 지역들이 추가된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르네상스기의 여행담은 더 나아가 최신판 지도 제작에 불을 댕겼다고 할 수 있다.
당시까지 가장 인기 있던 여행기는 단연 마르코 폴로(1254~1324)의 <동방견문록>이었다. 폴로는 상업을 위해 아버지를 좇아 원나라에 갔다가 그곳에서 관리(1271~1292)가 되었다. 이후 고향 베네치아로 돌아왔지만 제노바와의 전쟁에 참여하였다가 포로가 돼 감옥 생활을 한다. 거기서 1년간 감방 동료들에게 자신의 아시아 여행담을 들려주었는데, 마침 그 동료 중에 작가 한 사람이 있었다. 루스티켈로 다 피사(1249~1312)가 마르코 폴로로부터 들은 이야기를 기록한 것이 바로 <동방견문록>이다. 이 책은 1300년부터 필사본 형태로 전해졌고 150년 뒤 베네치아 출판사들이 인쇄본을 내면서부터는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베네치아 상인들은 이 책을 참고하여 최신판 지도를 만들고 상업활동을 하였다. 마르코 폴로의 여행담에 담긴 것은 탐험 자체가 아니라 그 지역 특산물에 대한 상업 정보였다. 폴로의 책은 아랍 세계를 넘어 인도와 중국, 멀리는 금으로 가득 찬 일본에 대한 상상력까지 부추겼다.
■ 신세계 ‘세계지도’의 탄생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을 참고하여 1457년 당시로서는 아주 획기적인 세계지도를 제작한 사람이 베네치아의 수도사 프라 마우로(1400~1464)였다. 그는 베네치아 무라노섬에 지도 공방을 만들고 앞서 제작된 프톨레마이오스의 세계지도를 비롯해 ‘포르톨라노 해도’ 등 포르투갈이나 이슬람 등지에서 제작된 수많은 지도들로 지도의 틀을 구상해 놓았다. 그뿐만 아니라 베네치아를 자주 방문하는 많은 상인과 선원, 각국 사절들을 통해 얻은 온갖 정보를 참고해 거대한 세계지도를 만들어냈다.
이전까지는 지중해가 항상 세계의 중심에 있었지만 프라 마우로의 지도는 아프리카 남단 및 인도, 중국, 일본, 인도네시아의 자바섬까지 포함하였다. 이 지도를 주문하게 된 포르투갈의 항해왕 엔히케 왕자(1394~1460)는 이것을 보고 지중해를 거치지 않고 아프리카 남단을 통해 인도까지 항해하는 게 가능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때는 포르투갈 출신 바르톨로 메우 디아스(1451~1500)가 아프리카 대륙 최남단에 위치한 희망봉을 처음 항해하기 30년 전이었다. 프라 마우로의 지도는 인도로 가는 신항로를 찾던 디아스에게 큰 자극과 도전 의식을 주었다.
수학자 토스카넬리 “아시아 최단 경로는 대서양 횡단”…
콜럼버스에 보낸 편지에도 담겨
또 한 명의 인물에게 인도로 가는 신항로에 대한 기발한 착상이 떠올랐다. 당시 천문학자, 수학자로 이름이 높았던 파올로 달 포초 토스카넬리(1397~1482)는 아시아에 가기 위한 최단 경로를 ‘대서양 횡단’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콜럼버스에게 보낸 편지에서도 이 주장을 되풀이하는데, 서두에서 말한 것처럼 콜럼버스가 대서양을 횡단할 때 그의 손에 있었던 것이 바로 토스카넬리의 이 편지였다.
토스카넬리는 이런 주장을 뒷받침하는 지도를 제작하여 포르투갈 리스본의 대성당평의원에게 보낸다. 그는 유럽 중에 가장 서쪽에 있는 포르투갈이 대서양 횡단에 유리한 나라라고 설명하면서 아프리카의 희망봉까지 돌아갈 필요 없이 서쪽으로만 항해하면 된다고 주장했다. 별자리와 지도책만 의지하여 지구 둘레를 너무 짧게 생각했던 토스카넬리는 콜럼버스로 하여금 신대륙의 바하마제도를 중국이나 일본으로 착각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콜럼버스는 토스카넬리의 생각이 자신의 생각인 양 스페인을 설득해 후원을 얻어내는 데 성공한다.
콜럼버스의 대서양 횡단 이후 1507년 마르틴 발트제뮐러(1470~1520)는 세계지도를 펴내며 직접 제작한 목판화 지도 스무점을 추가하였다. 그 지도의 제목은 바로 ‘신세계 지도’였고, 구세계에는 프톨레마이오스의 전통을, 신세계에는 제노바의 탐험가 콜럼버스가 카스티야 왕의 명을 받아 항해했다고 설명하는 문구도 넣었다. 지도책에 실린 지도로서는 최초로 아메리카만을 다룬 지도가 등장한 것이다.
■ 지도의 일상화
......
내가 여러 해 동안 보아 온 해도의 여백에 빽빽하게 그려져 있는 것들이야말로 그렇게 유혹당한 항해자들이 남긴 증거다. (…) 항해자들은 궁극적인 목적지가 자기들이 상상하고 묘사한 세계의 모습과 일치하는지 확인하고 싶어 했다.(제임스 코완, <프라 마우로의 세계 지도>에서)
인도로 가는 신항로 개척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프라 마우로도 베네치아 무라노섬의 한 수도원에 박혀 있었지만, 그의 머릿속에는 ‘새 하늘과 새 땅’이 그려져 있었다. 그는 자신의 상상에 걸맞은 지도를 먼저 그려놓고 확인하고 싶었을 뿐이다. 지도는 실제 공간의 반영물이라기보다는 머리 공간의 자극제다. 지도가 사람들 머리 안에 공간을 그려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