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교황 헌금

젬선생

by 조영필 Zho YP

교황이 각국 군주나 제후에게 배정한 헌금액이 있었나?


역사적으로 교황이 각국 군주나 제후에게 특정 헌금액을 '배정'하여 납부를 강제한 직접적인 제도는 없었습니다.


다만, 중세 시대에 교황과 교회는 다양한 방식으로 세속 군주나 제후들과 재정적 관계를 맺었으며, 이 과정에서 세속 통치자들이 교회나 교황에게 재정적으로 기여하거나, 반대로 교회가 군주들에게 재정적 지원을 요청하는 경우는 있었습니다.


다음은 교황과 세속 권력 간의 재정 관계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요소들입니다.

십일조(Tithe)와 교회의 수입: 기독교 교회는 전통적으로 신자들로부터 **십일조(소득의 1/10을 교회에 바치는 것)**를 거두었습니다. 이 십일조는 주로 지역 교구와 주교구의 운영에 사용되었지만, 일부는 교황청으로 보내지기도 했습니다. 십일조는 신자 개인이 교회에 내는 것이었지, 군주나 제후가 국가적으로 교황에게 '배정받아' 내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다만 군주들은 십일조 징수에 협력하거나, 때로는 자신들이 십일조 수입의 일부를 가져가기도 했습니다.


봉건적 의무와 봉신 관계: 중세 서유럽에서는 봉건 제도가 발달하여 영토나 직책에 대한 봉신(vassal)의 의무가 있었습니다. 일부 영토는 직접적으로 교황의 봉신이 되어 연공(tribute)이나 충성 서약을 바치기도 했습니다. 예를 들어, 시칠리아 왕국이나 잉글랜드 왕국 일부가 한때 교황의 봉신이 되어 재정적 의무를 진 적이 있습니다. 이는 특정 영토에 대한 봉건적 관계에 따른 것이지, 모든 군주에게 일괄적으로 '배정된 헌금'은 아니었습니다.


십자군 헌금 (Crusader Taxes/Tenths): 십자군 운동이 활발했던 시기(12세기 후반 ~ 13세기)에 교황청은 십자군 원정을 재정적으로 지원하기 위해 특별 헌금을 걷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이는 주로 성직자들(교회 재산에 부과되는 세금 형태)에게 부과되었지만, 때로는 세속 통치자들에게도 십자군 참가를 위한 재정적 지원을 요청하거나, 통치자들이 자발적으로 기부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것도 정기적으로 '배정된 헌금'이라기보다는 특정 목적(십자군)을 위한 임시적인 모금의 성격이 강했습니다.


성직 매매와 면벌부: 교황청이 재정난을 겪거나 대규모 사업(성 베드로 대성당 건축 등)을 추진할 때, **성직 매매(Simony)**나 면벌부(Indulgence) 판매와 같은 방식으로 수입을 올렸습니다. 이는 성직이나 죄에 대한 속죄를 금전과 연결시킨 것으로, 직접적으로 군주에게 '배정'된 것은 아니지만, 국가나 지역 사회에 큰 영향을 미쳤고 군주들 역시 이에 관여하거나 반발하기도 했습니다.


교황의 세속적 영지 수입: 교황은 로마를 중심으로 한 **교황령(Papal States)**이라는 상당한 규모의 영토를 직접 통치했습니다. 이곳에서 발생하는 세금과 수입은 교황청의 주요 재원이었습니다. 이는 군주들에게 '배정'받는 것이 아니라 교황 자신의 영지에서 나오는 수입이었습니다.


결론적으로, 교황이 현대 국가들처럼 각국 군주에게 국가 재정의 일부를 정기적으로 '헌금액'으로 '배정'하고 강제하는 시스템은 없었습니다. 대신 봉건적 관계, 특별 목적의 모금, 그리고 성직 매매나 면벌부 판매와 같은 다양한 경로를 통해 교황청의 재정을 충당했으며, 이 과정에서 세속 군주들과의 복잡한 재정적, 정치적 관계가 형성되었습니다.


중세 후기, 특히 르네상스 시대에 교황청의 재정적 요구가 늘어나고 면벌부 판매 등이 과도해지면서 각국 군주들과의 갈등이 심화되었고, 이는 종교개혁의 한 원인이 되기도 했습니다.



잉글랜드와 시칠리아는 왜 봉신이 되었는가?


잉글랜드와 시칠리아 왕국이 교황의 봉신이 된 것은 각기 다른 역사적 맥락과 이유가 있습니다. 이는 중세 유럽에서 교황의 권위가 절정에 달했을 때, 세속 군주들이 정치적, 군사적, 혹은 종교적 필요에 의해 교황에게 종속적 관계를 맺게 된 대표적인 사례들입니다.


1. 잉글랜드 왕국

잉글랜드가 교황의 봉신이 된 것은 존 왕(King John, 재위 1199-1216) 시대의 특수한 상황과 교황 인노첸시오 3세(Innocent III)의 강력한 교황권 때문입니다.


배경: 캔터베리 대주교 서임권 분쟁 (1205년 이후)

존 왕은 캔터베리 대주교 자리를 놓고 교황 인노첸시오 3세와 심각한 분쟁을 겪었습니다. 존 왕은 자신의 후보를 대주교로 임명하려 했으나, 교황은 이를 거부하고 스티븐 랭턴(Stephen Langton)을 캔터베리 대주교로 임명했습니다. 존 왕이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랭턴의 입국을 거부하자, 교황 인노첸시오 3세는 강력한 조치를 취했습니다.


교황의 제재

성무 금지령 (Interdict, 1208년): 교황은 잉글랜드 전체에 성무 금지령을 내렸습니다. 이는 성례(세례, 결혼, 장례식 등)가 중단되어 사실상 교회의 기능이 마비되는 것을 의미했으며, 신자들에게 엄청난 심리적 압박을 주었습니다.

파문 (Excommunication, 1209년): 존 왕은 개인적으로 교황으로부터 파문당했습니다. 파문은 왕의 통치권을 약화시키고, 봉신들이 왕에 대한 충성 맹세를 지키지 않아도 된다는 명분을 주어 반란의 가능성을 높였습니다.

폐위 위협과 십자군 선포 (1212년): 교황은 존 왕의 폐위를 선언하고, 프랑스 국왕 필리프 2세에게 잉글랜드를 침공하여 존 왕을 몰아낼 십자군을 조직하도록 독려했습니다.


존 왕의 굴복 (1213년):

내부적으로 귀족들의 불만(나중에 마그나 카르타로 이어짐)이 높아지고, 외부적으로 프랑스의 침공 위협에 직면하자, 존 왕은 결국 교황에게 굴복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존 왕은 잉글랜드와 아일랜드 왕국을 교황에게 바치고, 교황의 봉신으로서 연공(매년 1,000 마르크의 은)을 바치겠다고 서약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왕관을 교황의 특사에게 넘겨준 후 다시 돌려받는 상징적인 의식을 거행하기도 했습니다.

이로써 잉글랜드 왕국은 교황의 봉신국이 되었고, 존 왕은 교황의 보호를 받게 되었습니다. 비록 이 상태는 오래가지 못했지만, 당시 교황권의 강력한 위상을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2. 시칠리아 왕국

시칠리아 왕국이 교황의 봉신이 된 것은 남부 이탈리아에서의 노르만족의 정복 활동과 교황청의 정치적, 군사적 필요성이 얽혀 발생했습니다.


노르만족의 남부 이탈리아 진출 (11세기):

11세기 초, 노르만족 모험가들은 용병으로 남부 이탈리아와 시칠리아에 진출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지역은 당시 비잔티움 제국, 롬바르드족, 이슬람 세력 등 여러 세력이 복잡하게 얽혀 있던 곳이었습니다. 노르만족은 뛰어난 군사력으로 이 지역을 점차 장악해나갔고, 이는 교황청에 새로운 정치적, 군사적 문제로 다가왔습니다.


교황과 노르만족의 관계 형성:

초기에는 교황청이 노르만족의 확장을 경계하여 대립하기도 했습니다(예: 1053년 치비타테 전투에서 교황 레오 9세가 노르만족에게 패배하고 포로가 된 사건).

그러나 교황청은 노르만족의 세력을 완전히 제어할 수 없음을 깨닫고, 오히려 그들을 교황청의 봉신으로 삼아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의 남부 이탈리아 개입을 견제하려는 전략을 취하기 시작했습니다. 교황은 강력한 노르만족을 자신의 영향력 아래 두어 잠재적인 적을 동맹으로 바꾸려 했습니다.


로베르 기스카르와 시칠리아 백작 로제 1세 (11세기 후반):

교황 니콜라스 2세는 1059년 멜피 조약을 통해 로베르 기스카르를 아풀리아, 칼라브리아, 시칠리아의 공작으로 공식 인정했습니다. 그 대가로 기스카르는 교황의 봉신이 되고, 교황청에 대한 충성과 연공을 약속했습니다.

기스카르의 동생 로제 1세(Roger I)는 시칠리아를 이슬람으로부터 정복하는 데 성공했고, 그의 아들 **로제 2세(Roger II)**는 남부 이탈리아의 모든 노르만 영토를 통합했습니다.


시칠리아 왕국의 탄생과 봉신 관계 확립 (12세기 초):

로제 2세는 강력한 통치력을 바탕으로 시칠리아, 아풀리아, 칼라브리아를 아우르는 시칠리아 왕국을 건설하려 했습니다.

그는 교황 인노첸시오 2세(Innocent II)로부터 왕위 승인을 받기 위해 노력했고, 결국 1130년 교황의 승인을 받아 시칠리아의 왕으로 즉위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시칠리아 왕국은 교황의 봉신국임을 공식적으로 인정하고, 교황청에 대한 재정적, 군사적 의무를 지게 되었습니다.

이는 교황청이 이탈리아 남부에 직접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고, 동시에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의 이탈리아 내 영향력 확대를 견제하려는 의도가 결합된 결과였습니다.


요약하자면, 잉글랜드의 경우는 교황과 왕 사이의 직접적인 권력 다툼에서 교황이 승리한 결과였고, 시칠리아의 경우는 교황청이 새로운 강자인 노르만족을 봉신으로 삼아 전략적 이점을 확보하려 한 결과였습니다. 두 사례 모두 중세 교황권의 강력한 영향력을 보여주는 중요한 예시입니다.



존왕의 1000마르크는 당시 세수나 십일조에 비교할 때, 어느 정도의 금액인가? 교황은 십일조도 받고 존왕의 연공도 동시에 받았는가? 존왕의 연공이나 봉신관계는 어느 정도 지속되었는가?


존 왕이 교황에게 바치기로 한 연공 1,000 마르크는 당시 잉글랜드의 재정 규모와 비교할 때 상당한 금액이었습니다.


1. 존 왕의 1,000 마르크는 당시 어느 정도의 금액인가?

환산: 1,000 마르크는 잉글랜드와 아일랜드의 몫으로 나뉘어 잉글랜드 700 파운드, 아일랜드 300 파운드에 해당했습니다. 1마르크는 12실링(144페니), 1파운드는 20실링(240페니)이었습니다. 따라서 1,000 마르크는 750 파운드에 해당합니다 (1000 마르크 * 12 실링/마르크 = 12,000 실링; 12,000 실링 / 20 실링/파운드 = 600 파운드). 다만 존 왕의 연공에 대한 자료는 1000 마르크를 700파운드 + 300파운드로 언급하기도 하므로, 파운드와 마르크 간의 환산은 맥락에 따라 약간의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검색 결과는 1000 마르크를 잉글랜드 몫 700 파운드, 아일랜드 몫 300 파운드로 언급하여 총 1000 파운드라고도 해석될 여지가 있습니다. 여기서는 일반적인 마르크-파운드 환산에 초점을 맞추겠습니다.)


당시 왕국의 세수와 비교: 정확한 13세기 초 잉글랜드 왕국의 연간 세수 자료를 찾기는 어렵지만, 14세기 초 영국 국가예산 세입을 기준으로 보면 연간 수천만 페니에 달했습니다. 예를 들어 1307-1337년 영국 국가예산 세입은 관세가 1,520,000 페니에서 5,840,000 페니, 일반 세금이 3,840,000 페니 등이었고, 직할령 수입이 1,200,000 페니였습니다. 1,000 마르크 (약 600파운드 또는 144,000 페니)는 당시 잉글랜드의 전체 세입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매우 크다고 할 수는 없지만, 왕실 직할령 수입의 상당 부분(약 10분의 1 이상)에 해당할 수 있는 금액이었습니다. 이는 교황에게 굴복하고 상당한 재정적 부담을 지게 되었다는 상징적인 의미가 컸습니다. 참고로, 당시 하급 귀족의 1년 생활비가 2600 페니 (약 10파운드), 부유한 농민의 1년 생활비가 1080 페니 (약 4.5파운드) 정도였음을 고려하면, 1,000 마르크(144,000 페니)는 매우 큰 금액이었습니다.


십일조와 비교: 중세 잉글랜드의 십일조 총액은 1307-1337년 기준 연간 4,440,000 페니 (약 18,500 파운드)에 달했다고 합니다. 십일조는 기본적으로 교회 운영과 성직자들에게 귀속되는 세금이었으며, 교황청이 이 십일조 전체를 직접 가져간 것은 아닙니다. 교황청은 특별한 경우(십자군 원정 등)에만 십일조의 일부 또는 특별세(예: 20분의 1세, 40분의 1세)를 성직자들에게 부과했습니다. 존 왕의 연공 1,000 마르크는 이 십일조 총액에 비하면 적은 금액이지만, 이는 군주가 직접 교황에게 바치는 '봉건적 의무'로서의 연공이었다는 점에서 성격이 달랐습니다.


2. 교황은 십일조도 받고 존왕의 연공도 동시에 받았는가?

네, 교황은 십일조와 존 왕의 연공을 동시에 받는 것이 가능했습니다.


십일조: 십일조는 기본적으로 교회의 수입원이었고, 주로 지역 교구나 수도원의 재정으로 사용되었습니다. 교황청은 이 십일조의 전체가 아닌, 일부 또는 특별한 경우에만 십일조의 특정 비율을 교황에게 바치도록 규정했습니다. 예를 들어, 1199년 교황 인노첸시오 3세는 성직자들에게 40분의 1세를 징수하기도 했습니다.


존 왕의 연공: 존 왕이 바친 1,000 마르크는 십일조와는 별개로, 잉글랜드와 아일랜드 왕국이 교황의 봉신국으로서 지는 봉건적 의무였습니다. 이는 국가의 군주가 직접 교황에게 충성의 대가로 바치는 연금의 성격이 강했습니다.


따라서 교황은 교회 전체의 수입원인 십일조(의 일부)와 함께, 특정 국가의 봉건적 종주로서 받는 연공을 동시에 받음으로써 재정적 기반과 권위를 확대했습니다.


3. 존 왕의 연공이나 봉신 관계는 어느 정도 지속되었는가?

존 왕의 봉신 관계와 연공 납부는 법적으로는 이후에도 계속 유지되었지만, 실제적인 이행은 점차 약화되거나 중단되는 경향을 보였습니다.

존 왕의 서약은 그의 아들인 헨리 3세(Henry III, 재위 1216-1272) 시대에도 이어져, 헨리 3세는 교황의 강력한 지원을 받으며 왕권을 유지했고 연공을 비교적 성실히 납부했습니다.

그러나 에드워드 1세(Edward I, 재위 1272-1307) 이후부터는 잉글랜드 왕들이 교황의 봉신임을 인정하는 것을 점차 거부하고 연공 납부도 소홀히 하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14세기에는 백년 전쟁 등으로 왕실 재정이 어려워지면서 교황에게 연공을 보내는 것을 더욱 꺼리게 됩니다.


공식적으로 이 봉신 관계가 법적으로 완전히 폐지된 것은 아니었으나, 실질적으로는 14세기 중반 이후 그 중요성과 이행이 크게 퇴색했습니다. 잉글랜드 왕들은 더 이상 교황의 봉신임을 자신들의 통치에 필요한 요소로 여기지 않았고, 오히려 국왕의 주권을 침해하는 것으로 보았습니다. 이는 중세 말 교황권이 약화되고 민족 국가의 왕권이 강화되는 전반적인 흐름과 일치합니다.


즉, 존 왕이 맺은 봉신 관계는 약 100년 정도는 어느 정도 효력을 가졌으나, 이후에는 점차 유명무실해졌다고 볼 수 있습니다.



시칠리아의 연공은 어느 정도이었는가?


시칠리아 왕국이 교황에게 바치기로 한 연공(tribute)의 액수는 역사적으로 여러 차례 변화했으며, 시대와 교황에 따라 다소 차이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가장 잘 알려진, 그리고 중요한 액수는 노르만족이 시칠리아와 남부 이탈리아를 정복하고 교황의 봉신이 되면서 약속한 연공입니다.


11세기 노르만 정복 시기의 연공

1059년 멜피 조약 (Treaty of Melfi): 교황 니콜라스 2세가 노르만족 지도자 **로베르 기스카르(Robert Guiscard)**를 아풀리아, 칼라브리아, 시칠리아의 공작(Duke)으로 인정하면서, 기스카르는 교황의 봉신이 되고 매년 12 데나리우스(denarii)의 연공을 교황에게 바치기로 서약했습니다. (이 금액은 매우 적은 상징적인 금액입니다.) 이때는 아직 시칠리아가 완전히 정복되지 않은 상태였고, 교황은 노르만족의 군사력을 이용하여 남부 이탈리아의 다른 세력(특히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을 견제하려는 목적이 컸습니다. 연공의 액수보다는 봉신 관계를 확립하는 것이 더 중요했습니다.


1130년 시칠리아 왕국 수립 이후: 로베르 기스카르의 조카이자 시칠리아를 완전히 정복한 **로제 2세(Roger II)**가 교황 인노첸시오 2세로부터 시칠리아 왕국의 왕위 승인을 받으면서, 더욱 의미 있는 액수의 연공을 약속했습니다. 이때의 연공은 주로 600 쉬크(schifati) 금화로 언급됩니다. 쉬크(schifati)는 비잔틴 금화인 솔리두스(solidus)에서 유래한 시칠리아의 독자적인 금화로, 상당히 가치 있는 화폐였습니다. 일부 자료에서는 이 연공이 연간 1,000 쉬크로 언급되기도 합니다. 액수는 문헌에 따라 다소 차이가 있을 수 있지만, 금화 기준의 상당한 금액이었습니다.


시칠리아 연공의 상대적 가치

당시 왕국의 수입과 비교: 중세 시칠리아 왕국은 노르만족의 효율적인 행정 체제와 비옥한 토지, 지중해 무역의 요충지라는 이점 덕분에 유럽에서 가장 부유한 왕국 중 하나였습니다. 특히 13세기 중반에는 시칠리아 왕국이 연간 100만 플로린(florin)을 넘는 조세 수입을 거두었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이는 동시대 잉글랜드나 프랑스보다 훨씬 많은 금액이었습니다). 이러한 막대한 수입에 비추어 볼 때, 600~1,000 쉬크의 금화 연공은 결코 무시할 수 없는 금액이었지만, 왕국 전체 수입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압도적으로 크다고 보기는 어려웠을 것입니다. 오히려 봉신으로서의 상징적 의미와 교황과의 정치적 유대 관계 유지에 대한 대가로서의 성격이 강했습니다.


시칠리아의 봉신 관계 지속 기간

시칠리아 왕국과 교황청의 봉신 관계는 상당히 오랫동안 지속되었으며, 왕국의 정통성을 위한 필수적인 요소로 여겨졌습니다.


노르만 왕조 (1130-1194): 로제 2세 이후 노르만 왕조는 교황의 봉신으로서 연공을 바치고 교황의 승인을 받는 관계를 유지했습니다.


호엔슈타우펜 왕조 (1194-1266):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하인리히 6세가 시칠리아를 상속받아 호엔슈타우펜 왕조가 시작되었을 때도, 시칠리아는 형식적으로는 교황의 봉신국 지위를 유지했습니다. 하지만 이 시기 교황과 황제 간의 갈등이 심화되면서 봉신 관계의 의미와 연공 납부는 더욱 복잡한 정치적 협상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앙주 왕조 (1266-1282): 교황청은 호엔슈타우펜 왕조를 몰아내기 위해 프랑스의 앙주 공작 샤를(Charles of Anjou)을 시칠리아의 왕으로 추대했습니다. 이때도 샤를은 교황의 봉신으로서 연공과 충성을 약속했습니다.


아라곤 왕조 (1282년 이후): 1282년 시칠리아 만종 사건으로 시칠리아 섬이 아라곤 왕조의 지배를 받게 된 후에도, 이론적으로 시칠리아 왕국은 교황의 봉신이라는 법적 관계는 유지되었습니다.


즉, 시칠리아 왕국과 교황의 봉신 관계는 잉글랜드의 경우보다 훨씬 더 오래, 왕조가 여러 번 바뀌는 동안에도 지속된 중요한 정치적, 법적 관계였습니다. 이는 교황이 남부 이탈리아 지역에 대한 자신의 주권을 주장하고 신성 로마 제국의 간섭을 막기 위한 중요한 방편이었기 때문입니다. 연공은 이러한 종주-봉신 관계를 상징하는 중요한 요소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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