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춘욱
37/... 1545년 볼리비아 포토시(Potosi)에서 사상 최대규모의 은광이 발견되었고, 이로부터 채 1년도 안된 1546년 9월 8일... 멕시코 사카테가스(Zacatecas)에서 풍부한 은맥의 존재를 확인하기에 이른다.
... 1540년 이탈리아의 기술자인 바노초 비링구초(Vannoccio Biringguccio)가 '열 기술'이라는 논문에서 수은을 이용해 광물에서 금속을 추출하는 새롭고도 대단히 효율적인 공법을 제시했는데... 시에라 모레나(Sierra Morena) 산맥 북쪽 기슭에 있는 알마덴의 풍부한 수은 광산을 활용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포토시 광산, 단 한곳에서 채굴된 은의 양은 연 5만 kg에서 많게는 28만 kg에 이를 정도였다.
38-40/ ... 생산업무에 종사해야 할 많은 젊은 남성이 전쟁터에 투입됨으로써 스페인의 생산능력은 바닥으로 추락할 수밖에 없었다.
... 테르시오(Tercio) 방진으로 무장한 스페인 육군은 공포의 대상이었다. 테르시오 방진이란 약 250명의 병사가 단일 대형을 만들어 적을 공략하는 것으로, 창병이 적의 기병대를 저지한 후 총병이 일제사격으로 적의 예봉을 꺽은 다음 다시 창병의 공격으로 적을 궤멸시키는 정교한 전략을 지칭한다. 이 전술은 창병을 이용하여 재장전에 시간이 걸리는 총병을 보호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 테르시오를 비롯한 혁신적인 전술이 개발되면서 기사단은 이미 경쟁력을 잃어버렸고 점점 용병에 대한 의존도가 높아지고 있었다...
물론 네덜란드의 군사 천재, 마우리츠(Maurits) 백작이 테르시오 방진을 무너뜨리는 혁신적인 전술을 창안한 것이 네덜란드 독립을 이끄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49/ 일반적으로 물가가 상승하는 시기에는 경제호황과 인구증가가 동반된다... 무엇보다 통화가 충분히 공급되면서 '물물교환' 경제로의 회귀 가능성이 사라졌을 뿐만 아니라, '화폐환상(money illusion)'이 출현했기 때문이다. 화폐환상이란, 임금이나 소득의 실질적인 가치는 변하지 않았는데 인플레이션이 발생하면서 자신의 임금이나 소득이 늘어났다고 받아들이는 현상을 말한다.
87-88/ ... 역사학자들은 '은과 금의 교환비율'에 주목해야 한다고 말한다. 즉 다른 지역에 비해 중국이 은의 가치를 높이 쳐주었다는 것이다... 16세기에 금과 은의 교환비율을 보면 유럽에서는 대체로 1:12 수준이었던 반면, 중국에서는 1:6 수준이었다...
... 또다른 요인으로는 동아시아에서 상대적으로 금이 많이 생산됐다는 점을 들 수 있다. 가장 대표적인 경우가 일본의 사도 금광으로, 여러 역사기록에 따르면 금의 연 생산량이 6-9만 킬로그램에 이를 정도였다고 한다...
93/ ... '군사혁신'이다. 북방민족은 강력한 신무기인 등자(Stirrup)의 발명 덕분에 '중기병(Heavy Cavalry)'이 압도적인 무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등자가 발명되기 이전에는 기마병의 주된 무기는 활이었다... 등자가 발명되면서 기병의 전투법은 긴 창을 활용한 돌격전법으로 바뀐다. 실제로 8세기경 서양에 등자가 전해진 이후 본격적으로 중세 시대가 열렸음을 감안할 때, '등자로 인해 북방유목민족이 우위를 점했다'는 분석은 꽤 그럴듯하다.
그런데 중국문헌에 등자가 처음 실린 것이 477년이나, 삼국시대(3세기초)에는 북방민족이 강력한 군사적 우위를 가지기 힘들었던 것으로 보인다...
95/ ... 한나라 때 황금 한 근이 동전 1만 개에 해당했는데, 대략적인 금과 동의 교환비율은 130:1이었다. 현재 가격에 비하면, 놀라울 정도로 금의 가격이 저렴한 편이었음을 시사한다...
135/ ... 사람의 노동력을 줄이고 기계에 대한 의존도가 높아진 것이 산업혁명(industrial revolution)이라면, 근면혁명(industrious revolution)은 값싼 노동력을 최대한 활용해 경제의 외형을 키우는 전략이라고 할 수 있다.
138-140/ ... 1800년을 전후해 영국에서 산업혁명이 일어나기 전 이미 각 도시 근로자들 간의 임금격차가 크게 벌어졌음을 보여준다. 하루 임금 기준으로 1800년 영국 런던은 (은화) 17그램을 넘어선 반면, 인도 델리나 중국 베이징은 하루 (은화) 3그램에도 미치지 못하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다른 지역에 비해 인건비가 압도적으로 높다 보니, 런던은 '인건비를 절감해주는 기계'의 발명이 절실했다. 반면, 영국에서 발명된 기계는 다른 유럽 국가나 아시아로 보급되기 힘들었다... 영국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나라가 '고금리' 부담을 지고 있는 상황이었기에 투자에 따른 수익이 낮으면 투자를 꺼리는 것은 당연했다. 실제로 프랑스혁명(1789-1794년) 이전 영국에는 제니 방적기만 2만 개가 설치된 반면, 프랑스에는 900개 그리고 인도에는 단 하나도 설치되지 않았다.
그럼 왜 유럽은 동아시아에 비해 인구압이 낮았을까? 직접적인 이유는 유럽에서 주로 재배되던 작물인 밀의 생산성이 동양의 쌀에 비해 훨씬 낮았다는 데 있다. 밀과 호밀 농사는 지력을 떨어뜨리기 때문에 생산성이 저하될 수밖에 없다... 유럽 대부분의 지역에서 씨를 뿌린 후 기대할 수 있는 수확량의 비율(파종량 대 수확량)이 1:4 내지 1:6에 불과했다. 낟알 4알을 거둘 경우, 다음 농사에 쓸 종자를 따로 보관해야 하므로 실제 빵을 만들 수 있는 낟알은 3알에 불과한 것이다. 만일 흉년이 들어서 비율이 1:3 이하로 떨어지면 기근이 시작된다. 1:2 정도의 비율이 2-3년 지속되면 아사자가 나오게 된다. 따라서 유럽은 기본적으로 아시아에 비해 '인구 과잉'이 발생하기 쉽지 않았다.
그러다 18세기 네덜란드 농부들이 클로버, 순무 등의 사료작물을 휴경지에 재배함으로써 지력을 회복하면서도 가축 수를 크게 늘릴 수 있는 방법을 발견하게 된다. 이 농법은 곧 영국에 전해졌고, 영국 사람들은 이를 더욱 발전시켜 이른바 '요크셔 농법'의 기반을 마련했다. 15세기까지만 해도 1톨의 씨앗으로 겨우 3-4알을 수확했는데, 18세기에는 10알 이상의 수확을 기대하게 된 것이다...
그럼 어떻게 영국 런던 근로자들의 임금이 높은 수준을 유지할 수 있었을까? 많은 유럽인, 특히 잉글랜드 및 아일랜드 사람들이 신대륙으로 이동했기 때문이다. 16세기 스페인이 신대륙을 개척할 때를 돌이켜보자. 당시 식민지 경영을 위해 본토의 젊은 사람들이 빠져나간 탓에 경제 전반에 강력한 인플레가 나타났다. 반면, 18세기 영국에서는 이와 정반대 일이 벌어졌다...
155/ 1853년 발생했던 크림전쟁에서 연합군은 막강한 육군을 보유한 러시아를 쳐부쉈는데, 제해권을 가진 영국 해군이 흑해를 자기집처럼 드나들면서 신형 라이플 소총을 끊임없이 보급한 게 결정적 요인이었다. 러시아군은 구식 머스킷총을 사용하고 있었는데, 머스킷총은 부싯돌을 장착해 사격하는 재래식 총으로, 숙련된 총사는 1분에 2발 내외를 발사할 수 있었다. 그런데 머스킷총은 총대안에 강선이 없어서 상대를 살상할 수 있는 유효 사거리가 180미터에 불과했다. 그러나 프랑스와 영국 연합군이 보급받은 신식 라이플총은 강선이 있어서 유효 사거리가 약 900미터에 달했다. 또한 머스킷총은 9단계에 달하는 구분동작이 필요할 정도로 조작이 힘든 반면, 신형 라이플총은 표준화된 탄환을 장전하는 것만으로 바로 사격을 가할 수 있다는 이점도 있었다.
그런데 크림전쟁에 사용된 신형소총을 제조한 곳이 바로 미국 매사추세츠 주 스프링필드의 미합중국 조병창과 코네티컷 강 유역의 민간 기업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