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종성·이남형 (2019), 왜 버찌씨를 받을까?: 하이에크 경쟁 화폐이론의 재구성, 질서경제저널, 22(1), 151-166.
상품화폐론(the commodity theory of money) 대 신용화폐론(the credit theory of money) 또는
금속주의(metalism) 대 명목주의(nominalism)
화폐의 기본적인 특징은 보편적인 수용 가능성이다. 즉 어떤 한 경제의 교환 과정에서 모든 교환의 당사자가 언제 어디에서나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 화폐가 된다.
상품화폐론은 거래와 교환을 경제활동의 기본으로 파악한다. 물물교환이 교환의 출발이지만, 물물교환에는 욕망의 우연한 일치(want of coincidence), 그리고 교환되는 상품의 종류가 많아짐에 따라 결정해야 하는 교환 비율도 증가하는 문제, ... 모든 종류의 상품이 교환을 위해 분할될 수 없는 문제가 있다. 따라서 교환의 매개 기능을 충실히 수행할 수 있는 물건이 필요하다(Jevons, 1875, Chs. 1-3). 또한 교환이 이뤄지기 위해서는 화폐와 여타 경제재와의 교환비율이 안정되어야 한다(Mises 1953). 즉 화폐는 교환비율의 기준(numeraire)이라 할 수 있다. 교환의 매개로 쓰이기 위해 화폐는 자체적으로 가치를 가져야 하는데, 바로 귀금속, 금속 주화, 태환 지폐 등이 대표적이다.
교환 과정에서 화폐의 본질을 찾는 이 관점은 교환비율과 교환에서의 협상, 그리고 가격체계의 문제로 연결된다. 자생적 질서(spontaneous order)로서의 시장을 상정하고 그 핵심으로서 다양한 개인들의 상이한 행동을 조정하는 가격체계의 역할을 중시한 하이에크의 주장(Hayek 1945, 1988)을 화폐에도 적용하여, 경쟁을 통해 한 사회에서 널리 받아들여지는 어느 하나의 화폐가 선택되거나 화폐 간의 교환 비율이 나타나는 것으로 확장시켜 생각해볼 수도 있다... 정부는 시장에서 대두된 화폐를 승인하는 역할을 수행하는 것에 그쳐야 한다.
신용화폐론... 경제적 교환이 아닌 사회적 관계에서의 화폐의 역할에 주목하며, 상품이 아닌 신용으로서 화폐를 이해한다.... 잉햄은... 사회제도로서 화폐는 시장이 아닌 경제주체에 의해 생산되며 상품의 생산과 교환의 법칙에 따라 결정되지 않는다는 점, 사회적 관계에서 화폐적 교환은 순수한 물물교환 경제에서의 교환과 질적으로 상이하다는 점, 그리고 현대 자본주의 체계에서 화폐 자체는 국가나 은행의 지불 약속의 상징에 불과하다는 점이 그것이다(Ingham 2002)... 아글리에따는... 짐멜(Georg Simmel)을 거론하며... 사회적 신용 관계에 기반하고 있음을 지적했다(Aglietta 2002; Ingham 2004).
... 경제주체가 발행한 자용증서(IOU)가 지불수단으로 통용되는 측면에 주목하며, 부채에 대한 청구권으로서 화폐를 본다(Goodhart 1998; Ingham 2004; Schumpeter 2014)... 신용에 의해 창출된 하나의 증표이다(Schumpeter 2014). 왜냐하면, 부채나 계약의 청산 과정에서 계산화폐(the money of account), 즉 척도로서 기능하기만 하면 되기 때문이다(Keynes 1930)...
따라서 화폐는 그것으로 변제하여야 하는 채무와 동시에 존재하며, 본질적으로 지불에 대한 약속이다(Ingham 2004). 모든 경제주체는 화폐 매개를 통해서 교환을 실현하므로, 모든 교환은 지불을 내포하고, 화폐는 지불을 통해 가치를 획득한다. 각 경제주체는 수많은 채권-채무의 네트워크로 연결되어 있으므로, 이는 경제 내에 다양한 화폐, 즉 지불수단이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Aglietta 2018).
... 청구권에 기반한 접근이 교환 관계와 이를 둘러싼 교환비율과 가격체계의 문제를 완벽히 설명하지 못한다는 미제스의 비판이 있었고(MIses 1953), ... 청구권에 기초한 신용화폐론이 (물권 외) 채권관계에만 초점을 두고 있다는 점에서 화폐의 본질을 잘 드러내지 못한다는 지적도 있다(Kim 2015).
신용화폐론을 포함한 명목주의 이론은 신용의 위계(the hierarchy of credit)라는 개념에 기반하고 있다는 점에서 화폐와 신용을 구분하는 상품화폐론과 차별화된다(Bell 2001)... 신용의 위계에서 높이 위치할수록 다른 경제주체들에 의해 더 잘 받아들여진다... 신용의 위계는 경기변동 과정에서 분명히 드러나게 된다. 확장기에는 신용과 화폐 간의 질적 차이가 약해지며, 신용이 확대되지만, 수축기에는 더 화폐 같은 신용과 덜 화폐 같은 신용 간의 구분이 확대되며, 신용이 수축된다(Mehrling 2012)...
... 아글리에따의 주장처럼 권위를 가진 주체가 화폐에 대한 규율과 통제의 권력을 보유하고 있으므로, 위계적 신뢰(hierarchical trust)가 일반적인 신뢰보다 우월할 수 있다(Aglietta 2002). 즉 사적 채무의 최종 변제를 보장하기 위해서는 신뢰가 요구되는데, 혁신이나 이윤 추구와 같은 화폐의 내재적 힘으로 인해 신뢰의 규칙이 약화될 수 있으므로, 조세 부과와 지출에 대한 권력을 가진 정부의 정치적 권위가 화폐에 부여되는 위계적 신뢰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초인플레이션 상황에서 확인할 수 있듯, 국가 또한 항상 권위를 유지할 수 있는 주체로 보장받지 못한다...
우리는 화폐의 역사를, 계산 단위로서의 추상화와 비물질화, 지불 방식으로서는 청산체계의 집중화와 지불시스템의 분권화, 그리고 사회적 관계로서는 규제와 거버넌스의 강화 과정으로 이해할 수 있다(Aglietta 2002; Birch 2017)...
계산 단위로서의 화폐는 귀금속과의 연결에서부터 출발하여 귀금속으로부터 분리되어 비물질화하는 과정을 겪었다. 화폐의 기원은 기원전 3000년경 수메르 문명에서의 화폐 주조에 관한 문헌 기록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화폐 변조(debasement)는 주조소 화폐의 무게 감소, 귀금속 함량 변화, 공식적 회계 단위의 가치 변화라는 세 가지 방식으로 일어난다(Munro 2015)...
... 17세기에는 복본위제에서 태환제로 바뀌는 화폐혁명이 진행되었다. 17세기 초 신생 네덜란드 공화국은 위변조된 외국 주화의 유입에 대응하여, 금속 주화를 양도증(assignations)으로 대체하는 효과적인 해결책을 제시하게 된다. 모든 상인은 모든 해외 주화를 비셀방크(Wisselbank)에 예금했다. 이 주화는 무게와 함량이 측정된 후, 고정된 순은의 양을 기반으로 하는 네덜란드 길드(guilders) 단위로 환산되어 비셀방크의 잔고로서 기록되었고, 예치된 해외 주화는 네덜란드 길드의 함량에 맞추어 재주조되었다. 비셀방크의 양도증은 이 예금 계좌와 원장(deposit accounts and ledgers)에 따라 발급되었다. 이 양도증은 상인의 요청에 따라 지정된 양도인에게 이전될 수 있었지만, 최종대부자로서 발행하는 화폐의 지위를 획득하지는 못했다(Munro 2015, Ch. 5).
1660년대 영국에서 금세공업자는 상인으로부터 금을 예금으로 받고 대신 영수증을 내어주었는데, 이 영수증이 지불수단으로 유통되며, 이러한 은행권의 역할이 확대된다. 이를 통해 고품질 금속 주화의 태환이 계산단위와 연결되고 금 보유량에 기초한 개인 은행(private bank)의 통화 발행 시스템이 시작되었다... 금에 기반한 화폐 발행은 지폐의 보급을 촉진시켰다(Neal 2015, Ch. 5-7).
화폐의 비물질화 과정은 지불 방식의 변화, 특히 채무에 기반한 지불 방식의 확산에 큰 영향을 받았다. 채무 기록은 상품 화폐보다 휴대성이 높아 편리함은 있지만, 채무의 이전과 계약 이행에 대한 신뢰가 높아져야지만 지불 수단으로서 활용될 수 있다. 채무 기록은 이미 5천년 전 아시리아와 바빌로니아의 점토판에서도 확인된다(van de Mieroop 2005). 채무 기록을 통한 거래 관계의 청산은 환어음에서 새로운 변화를 겪는다. 환어음은 13세기 도입되기 시작하여 15세기에 이르러 현금, 양도증서 등과 같이 유럽 전역에서 널리 지불 결제 수단으로 이용되었다(Lane and Mueller 1985). 기본적으로 환어음의 유통은 환어음의 발행자, 최초 채권자, (환어음을 제출한 사람에게 명시된 가치를 지불하는) 지불자, 그리고 (환어음을 제출하고 명시된 가치를 받는) 수령인의 네 주체 사이에서 이뤄진다. 하지만 부채를 기반으로 누구나 환어음을 발행할 수 있었으므로, 환어음의 전체적인 유통 체계에서는 환어음 간 청산 문제가 중요해졌다. 상인과 은행가 길드는 다양한 환어음 간의 교환 비율 그리고 환어음과 화폐와의 태환성을 평가했다. 환어음의 환류는 청산소 조직화로 이어졌다.
청산소의 취소불능 보장(the principle of irrevocability) 기능이 중앙은행의 최종대부자(lender of last resort) 기능과 결합하면서, 중앙화된 전 국가적 청산 시스템이 확립되었다(Aglietta 2002; Ferguson 2013). 잉글랜드의 경우... 결국 영란은행이 청산과 최종대부자 역할을 수행하게 됨으로써 해결되었다.
이강호, 문명과 역사 ④ 돈, 이자, 그리고 문명 - 돈이 사라진 자리에는 권력과 특권이 들어선다, 월간조선, 2023년 4월호.
돈을 없애버린다면…
... 돈 자체를 없애버리면 어떨까? 영국의 로버트 오웬도 그런 꿈을 꾼 사람 중 한 명이다. 1832년 ‘노동중개소’라는 것을 열었다. 물품영수증과 노동증서를 교환했다. 노동가치만의 물물교환으로 돈을 없앤다는 시도였다. 2년도 안 돼 실패로 끝났다. 오웬은 전 재산의 80%를 잃었다. 마르크스는 오웬을 ‘공상적 사회주의자’라고 부르고 자신은 ‘과학적 사회주의자’라고 했다. 그러나 오웬의 ‘공상’은 차라리 다행이었다. 개인적 실패로 그쳤다. 하지만 마르크스를 뒤이은 소위 과학적 사회주의자들의 집요한 시도는 인류 역사에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의 상처를 안겼으며 그 후유증은 아직도 진행 중이다. 역사는 돈을 없앤다는 게 무엇을 뜻하게 되는지를 보여주었다. 돈이 사라진 자리에는 권력과 특권(特權)이 들어선다. 원시적 완력과 다를 바 없는 힘의 행세가 사람들의 생사여탈을 쥐게 된다. 경제적 고민이 사라진 자리에 충성심 강요의 공포가 자리한다. 그런 가운데 물질적 삶도 나락으로 치달아 간다. 경제적 어려움이 엄습하면 원망이 앞서기 일쑤다. 그래서 부자를 욕하고 돈에 시달리지 않는 세상을 만들겠다 떠드는 자들이 행세를 한다. 그런데 요즘 한국인들은 적어도 한 가지는 확인하고 있다. 그런 자들이 사실은 그 누구보다도 돈을 밝힌다는 것이다. ‘대장동’의 ‘아수라’가 보여주었다. 문제는 돈이 아니다. 범죄는 돈이 아니라 사람이 저지른다. 길을 닦아놓으면 도둑놈과 범죄자도 오간다. 하지만 그것은 길의 탓이 아니다. 돈도 마찬가지다. 돈을 없애야 한다는 건 나쁜 놈도 오간다고 길을 없애자는 것과도 같다. 돈에는 죄가 없다. 뿐만 아니라 돈은 문명적 역할을 한다. 돈의 등장과 발전의 역사는 문명적 성숙의 역사이기도 하다...
돈은 능력이다
고대 중국의 은(殷)나라는 조개껍데기를 대표적 화폐로 사용했다. 자안패(子安貝)다. 다른 쓸모는 없다. 교환의 매개물이요 부의 척도로 사용될 뿐이었다. 나중에는 청동으로 ‘동패(銅貝)’를 만들었다. 중국 최초의 금속화폐다... 수메르는 처음에는 밀 다발을 화폐로 사용했다. 밀은 셰(she) 다발은 켈(kel), 밀 다발은 셰켈(shekel)이다. 셰켈은 그 무게의 단위이자 화폐 단위였다. 수메르인들은 기원전 3000년경에는 동전을 제조해 사용했다.(?) 수메르인들은 이 동전도 셰켈이라고 불렀다. 그런데 셰켈은 성경에도 나온다. 구약 창세기 아브라함이 부인 사라를 위한 묘지를 살 때의 화폐 단위가 셰켈이었다. 큰 거래에는 금과 은을 사용했다. 그 단위도 만들어졌다. 셰켈(shekel), 미나(mina), 달란트(talent) 등이다. 모두 성경에도 나온다. 60셰켈이 1미나, 60미나가 1달란트였다. 고로 3600셰켈이 1달란트다... 예수 당시 이스라엘의 성전세 납부 은화의 단위가 셰켈이었다. 그런데 오늘날 이스라엘의 화폐 단위도 셰켈이다. 수메르에서 시작된 셰켈은 최초이자 최장의 화폐 단위인 셈이다...
수메르, 이자와 채권거래 존재
... 수메르에선 이자가 인정됐다. 수메르의 한참 후대인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돈은 새끼를 낳지 못한다”는 말로 이자를 부정했다. 하지만 수메르인은 달랐다. 수메르인은 이자를 마스라고 했는데 본래 뜻은 송아지였다. 수메르인은 돈의 출산 능력, 즉 이자를 당연시했다. 수메르는 그냥 이자가 있었던 정도가 아니라 채권거래 시스템도 있었다. 수메르인은 채무를 설형(楔形)문자로 기록한 뒤 점토상자에 봉인하고 표면에 채무자의 인장을 찍었다. 채권자는 그 점토상자를 갖고 있다가 채무자가 빚을 다 갚으면 봉인을 뜯어냈다. 그런데 그 전에 채무자의 상환약속 문구와 인장이 새겨진 점토판을 제3자에게 판매하기도 했다... 수메르문명의 경제시스템은 주화에만 의존하지도 않았다. 중요한 것은 셰켈이라는 단위 자체였다. 그 단위를 기준으로 거래를 점토판에 설형문자로 기록하고 약속하여 이루어지도록 했다. 이 같은 거래의 안정성을 국가가 뒷받침했다... 이것은 후대의 바빌로니아로도 이어졌다. 함무라비 법전의 주된 내용은 거래의 안정성을 뒷받침하는 것이었다. 이자에 관한 규정도 명시돼 있었다.
중세 유럽, 화폐경제의 후퇴에서 상업혁명까지
중세를 암흑시대라고 하는 건 더 이상 적절한 표현으로 간주되지 않는다. 하지만 로마 몰락 이후 중세 초기 유럽은 한동안 경제적으로 확실히 후퇴해 있었다... 자크 르 고프는 《중세와 화폐》(2010)에서 “중세 초기에는 화폐, 다시 말해 주화를 사용하는 사람의 수가 점점 더 줄어들었다”고 지적한다. 상업과 교역이 쇠퇴하게 된 게 원인이었다... 봉건시대가 무르익어가면서 화폐경제는 다시 확산돼갔다. 11~13세기 무렵이다. 가장 큰 변화는 상업의 발전과 도시의 성장이었다... 십자군 원정의 영향으로 물자의 이동도 활발해지면서 그 거점 역할의 도시는 더욱 성장했다. 십자군전쟁을 계기로 동로마제국 및 이슬람권과의 교역이 본격화된 것도 중요했다. 해상교역의 요지 역할을 하게 된 베네치아의 성장은 특히 괄목했다... 이를 일컬어 ‘13세기 상업혁명’이라 한다... 로버트 로페즈는 《중세의 상업혁명》(1971)에서 “유럽 역사에 있어 중세의 중요한 기여는 상업경제의 창출”이라고 했다. 그는 이 시기의 경제적 팽창이 18~19세기 산업혁명에 비길 만큼 중요했다고 얘기했다. 상업이 발전하고 도시가 성장하면서 화폐경제는 비약적으로 성장하기 시작했다. 그런 가운데 경제적 관념에도 중요한 변화가 나타났다. 이자에 대한 것이었다. 중세의 가톨릭은 이자를 죄악시하고 금지했다. 상업이 활발하지 않고 화폐 사용도 전면적이지 않았던 중세 초기에는 그것은 큰 문제가 아니었다. 그러나 상인과 수공업자가 중심이 된 도시가 성장하고 화폐 사용이 본격화하면서 더 이상 그럴 수만은 없게 되어갔다. 수공업자는 수익이 완전히 실현되기 전에도 일꾼에게 품삯을 지불해야 했다. 상인은 판매이익 실현에 앞서 먼저 판매할 상품을 구매해야 했다. 그 간격을 메꾸기 위해 먼저 돈을 빌리고 나중에 수익이 실현되면서 빌린 돈을 갚았다... 고리대금을 뜻하는 영어 단어 유주리(usury)는 우수라(usura)라는 라틴어에서 나왔다. 준 것보다 더 많이 돌려받는다는 뜻이다. 따라서 본뜻은 그냥 이자 대부 정도다. 그러나 아무리 낮은 이자라도 받는 자체를 부당하게 간주했다...
스콜라 철학자들의 이자에 대한 고민
... 토마스 아퀴나스는 그가 천착한 그리스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와 마찬가지로 “돈은 돈을 낳지 않는다”며 고리대금을 단죄했다... 아퀴나스의 스승 알베르투스 마구누스... 그도 당연히 원칙적으로는 이자를 인정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도시를 찬양하고 상인과 부자의 역할을 강조했다. 탐욕을 죄악이라 했지만 그것을 첫 번째가 아닌 세 번째 자리에 두었다. 알베르투스의 또 다른 제자 질베르는 《고리대금론》에서 “의구심과 위험이 고리대금을 정당화할 수는 없지만 확신하지 못하고 전혀 예상하지 못할 때 의구심과 위험은 정의의 형평성과 대등한 가치를 지닐 수 있다”고 했다. 고리대금을 비난한 아퀴나스도 결국 그랬다. 그는 대금업이 적법하지는 않으나 현실적으로는 존재할 수밖에 없음을 인정했다. 스콜라 철학은 이와 관련해 논리를 조심스럽게 다듬어갔다. 첫째, 빌려준 돈은 더 유리한 투자를 했을 때 벌어들일 수 있었던 합법적인 이득을 포기(lucrum cessans, 중단된 이익, 즉 기회비용)한 의미가 있다. 둘째, 빌려준 돈은 과거에 힘들게 번 결과물이므로 그때의 노동에 대한 보수(stipendium laboris)가 주어져야 한다. 셋째, 위험을 안고 불확실성을 헤쳐나가는 복잡한 계산을 하는 행위는 아무나 할 수 없는 힘든 일(ratio incertitudinis, 불확실성에 대한 계산)이다. 따라서 이에 대한 ‘보상’이 주어지는 것은 부당하지 않은 것이었다. 중세 가톨릭교회와 스콜라 철학이 공식적으로 이자를 인정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이제 거기에는 새로운 단서가 붙었다. 당연한 ‘이익’ 추구로 인정되지는 않았지만 부당하지 않은 ‘보상’으로서는 인정받는 논리였다. “일꾼이 품삯을 받는 것은 당연하다”(누가복음 10장 7절)는 원칙이 대부업자에게도 적용되게 된 것이다.
결국 이자를 인정하게 되다
... 종교개혁이 왔다. 루터도 ‘고리대금업’에 대해선 반대했다. 하지만 일정한 이자를 받는 것은 인정했다. 칼뱅은 더 나아가 이자의 정당성을 교리상으로 공식적으로 인정했다. 칼뱅은 “아무것도 바라지 말고 꾸어 주라”(누가복음 6장 36절)는 예수의 말이 이자의 전적인 금지가 아니라고 해석했다. 모든 이자를 반대한다면 상거래 활동은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칼뱅은 가난한 사람에게는 이자를 부과해서는 안 되지만 더 많은 이윤을 위한 생산적인 대부에 대한 이자는 정당하다고 했다... 리처드 헨리 토니는 《종교와 자본주의의 발흥》(1926)에서 “칼뱅은 영원한 것은 이자를 받지 않는다는 규칙이 아니라 공정과 정의라고 해석했다”고 말했다. 칼뱅은 공정과 정의의 기초를 예수가 언명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마태복음 7장 12절)는 황금률에서 찾았다. 칼뱅은 이자에 대해서도 그 황금률이 적용돼야 한다고 했다.
중국, 전당업에서 지폐의 탄생까지
... 중국문명권은... “무릇 화폐가치가 높아지면 물가는 떨어지고, 화폐가치가 떨어지면 물가는 높아지며, 양식 가격이 올라가면 황금의 가치는 떨어집니다. 군주께서는 양식·화폐·황금을 저울질하는 권력을 통제해야 천하를 안정시킬 수 있습니다. 이것이 천하를 지키는 방법입니다.” 기원전 7세기 제나라 관중(管仲·기원전 725?~645년)이 쓴 《관자(管子)》 제76편의 구절이다... 중국 나름의 대금업도 등장했다. 전당업(典當業)이라 했다... 당(唐)나라(618~907년) 시대는 또 한 번 큰 번영을 맞았다. 행(行)이라는 상인조합도 생겼다. 원거리 교역에는 비전(飛錢)이라는 어음까지 사용됐다. 송(宋)나라(960~1279년) 시대가 왔다... 송도 비전을 사용했다. 그러다 드디어 지폐가 탄생했다. 세계 최초였다. 10세기 말 사천(四川) 상인들이 사용한 ‘교자(交子)’였다. 교자 사용이 활발해지자 송은 직접 지폐를 발행했다. 그러자 금나라도 송을 본받아 지폐를 사용했다. 교초(交鈔)라 했다... 몽골은 우구데이 칸 때 금나라를 정복한 뒤 금의 화폐제도를 이어받아 1236년에 교초를 발행하였다... 원나라 교초는 동판으로 인쇄해 황제의 옥새를 날인해 발행되었다. 교초는 고려부터 시리아까지... 세계 역사상 최초의 국제적 지폐 통화 체제였다. 당시 원을 방문한 마르코 폴로는 지폐제도에 깊은 인상을 받아 《동방견문록》에 이에 대한 설명을 남겼다. 당시 유럽인들로선 종이가 돈 구실을 한다는 건 놀라운 일이었다. 유럽의 지폐 발행은 1661년 스웨덴이 최초였다. 1694년에는 영국이 잉글랜드 은행권을 설립해 근대적 은행권을 발행했다.
윤리와 금리
중세 이래 유럽의 대금업자는 한편으로는 이자를 인정받길 원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종교적 부담을 늘 갖고 있었다. 종교적 긴장은 얼핏 보면 경제와 무관한 듯 여겨진다. 그러나 도덕적 압박에 따른 금리이득에 대한 부담감은 경제적으로 긍정적 역할을 한다. 금리가 없으면 금융은 작동을 하지 않는다. 이자를 부정하는 이슬람권의 수쿠크(Sukuk)라는 채권제도도 따지자면 다른 방식의 복잡하게 구사되는 금리제도다. 그러나 금리 이득에 탐닉하게 하는 고금리는 생산적 투자를 외면하게 만든다. 새로운 부의 창출을 추구하지 않는 지대추구(地代追求·rent-seeking) 양상이다. 하지만 유럽세계에선 대금업자들은 죄를 두려워하고 스콜라 철학자들은 교리와 현실 사이에서 치열한 고민을 했다. 종교개혁가들은 그 긴장을 종교적으로 매듭지었다. ‘기독교적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이 긴장 속에서 조화를 이루었다. 그래서 이자제한법이 효력을 발휘했다. 영국은 산업혁명기 전 시기에 걸쳐 최고 이율이 연 5%를 유지하였다. 돈이 생산적 투자로 향하게 했다. 산업혁명기 자본주의는 그러면서 성장했다.
돈은 문명적 성취다
... 노벨경제학상을 받은 미국 경제학자 토드 부크홀츠는 《러시!》(2011)에서 “금리가 인간을 화합하게 한다”고 했다. 오늘날 사람들은 은행을 매개로 모르는 사람끼리도 신용(credit)을 전제로 돈을 빌려주고 받는다. 신용에는 믿음(trust)의 의미도 있다. 부크홀츠의 표현을 빌리자면 신용은 직접적으로 알지 못하는 사람 사이에도 믿음을 형성시키고 화합이 이루어지게 하는 것이다... 문명(文明)은 시빌라이제이션(civilization)의 번역어다. 일본의 개화사상가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가 1867년 《서양사정 외편(西洋事情 外篇)》에서 ‘civilization’을 문명(文明)으로 번역했다. ‘civilization’은 도시라는 의미를 가진 라틴어 ‘civitas’에서 비롯된 말이다. 문명은 그 본뜻과는 조금 다르다. 그러나 많은 걸 헤아리게 하는 매우 좋은 번역이다... 문명세계는 밝은 세계다. 그런데 낮이 그렇듯 문명의 밝음도 항상 그늘을 동반한다. 갈등이 있고 때로는 고통의 신음도 있었다. 그러나 그늘을 없애기 위해 밝음 자체를 없애자는 건 어리석다. 더욱이 돈의 논리는 결코 그늘도 아니다. 오히려 문명적 밝음을 구성하는 핵심의 하나다. 돈의 논리가 작동한다는 것은 힘에 의한 강탈의 정지를 함축한다. 그것은 문명적 성취다.
송문현 (1998), 주화의 기원과 용도
... 1950년대 이후... 토대매장물(foundation deposit)이나 비장(hoard)들에 대한 화폐학적 연구는 최초 주화의 시기와 용도 따위에 대한 과거의 낡은 견해를 바꾸기에 이르렀다...
전통적인 문헌자료가 늦어도 기원전 7세기 전반기 이전에 그리스에 최초로 주화가 도입되었음을 시사함에도 불구하고 고고학적 화폐학적 증거는 그것과 상당한 거리가 있음을 보여준다. 오늘날 화폐학자들 사이에선 주화의 기원은 일러야 기원전 7세기 후반의 어느 시기로 잡혀지고 있으며, 그리스 본토에서는 기원전 6세기에 들어와서야 주화가 도입되었다. 그에 따라 이제 페이돈(Pheidon)에 의해 아이기나(Aegina) 은 주화가 그리스 최초로 도입되었다거나 솔론의 시대는 이미 주화체계가 확립된 시기라고 믿는 사람은 많지 않다...
초기 주화의 용도에 대해서도 확실한 정설이 없는 형편이다. 일찍이 아리스토텔레스는 상업상의 교환을 촉진시키기 위하여 초기의 주화가 도입되었다고 하였지만,(Politics, 1257a)... 어떤 다른 목적, 이를테면 국가나 왕이 개인에게 지불을 위한 목적으로 도입되었다는 설도 유력하다... 금은의 자연합금인 호박금(electrum, 그리스인들의 이른바 '창백한 금leukos dhrysos')으로 주조한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자연상태의 호박금은 금과 은의 함량이 일정치 않기 때문에 동일한 내재적 가치를 지닌 주화를 만드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다. 이처럼 그 고유한 가치가 가변적이었던 호박금은 애초부터 화폐의 재료로서 부적당한 금속이었던 것이다.
호박금 주화는 수세대 동안 주로 소아시아를 중심으로 주조되다가 뤼디아(Lydia) 왕 크로이소스(Croisos)의 시대에 은 주화로 이행하였다... 기원전 6세기 전반기에 그리스 본토에서 최초의 주화가 등장한 이래 주화관행이 급속히 전파되어 50여년 이내에 그리스 본토는 물론 이탈리아 남부, 시칠리아, 마케도니아에 이르기까지 주화가 일반화되었다. 그처럼 많은 도시들이, 그처럼 빠른 속도로 주화를 도입한 것에 설명도 필요한 듯이 보인다...
헤로도토스는 뤼디아인들이 금과 은 주화들을 사용할 줄 알았던 최초의 사람들이라고 하였다(Herodotos I, 94. 주화가 뤼디아의 창안물이라는 뤼디아 기원설에 대한 최초의 문헌자료는 기원전 6세기의 크세노파네스인데, 그의 언급은 기원후 2세기의 폴록스(Pollux)에 의해 인용되었다. Pollux IX, 83 = Xen, F4D.)... 최초의 주화들이 발견된 곳도 소아시아 연안의 그리스 도시인 에페소스(Ephesos)였기 때문이다.
1904-5년 호가트(Hogarth)에 의해 발굴된 에페소스의 아르테미스 신전(Arthemision)의 토대 부분들에서 수많은 다른 유물들과 함께 93개의 초기 주화들이 수습되었다...
... 처음엔 각인이 없는 일정한 무게의 귀금속 덩어리였다가, 그것에 보다 큰 신뢰성을 부여하기 위해, 다시 말해 그 금속의 속 부분까지 확인하기 위해 펀치를 찍은 것이 그 다음 단계요, 그리고 펀치만으로는 부족하여 앞면에 의도적으로 특정한 무늬(즉 의장)를 넣게 되었던 것이다... 펀치와 아울러 일정한 방향으로 줄무늬가 있는 것은 주화로 이행하는 최후의 원시주화들인 셈이다.
에페소스의 초기 주화들은 그 모두가 상당히 정확한 무게 표준을 따르고 있다. 수습된 93개 가운데 포카이아 무게표준(포카이아 스타테르는 약 16.5그램)의 2개만 제외하고 모두 밀레투스 (또는 뤼디아) 무게표준의 스타테르(약 14.1그램)를 기초로 주조되었는데, 1/2스타테르로부터 1/9(약 0.13그램) 스타테르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크기이다... 주화이전에 관례적인 무게표준이 확립되어 있었음을 말해준다.
귀금속화폐의 전통은 오리엔트 문명의 중심지들에서 오랜 유래를 가지고 있다. 특히 메소포타미아에서는 은을 화폐로 사용하는 전통은 기원전 24세기까지 소급된다. 예컨대 북부메소포타미아 지방의 에쉬눈나(Exhnunna)왕의 법전(기원전 2천년기 초)에 따르면, 다른 사람의 코를 물면 벌금 1미나(약 1/2킬로그램)를 물어야 하고 얼굴을 때리면 그 1/6인 10셰켈을 내야 했다. 또한 그 법전에는 1셰켈의 값어치에 해당하는 상이한 물품들의 무게와 양을 열거하고 있거니와 이자율(이 경우 20%)도 은으로 표시하고 있다. 은은 종종 또 다른 종류의 일반적인 화폐로 사용된 곡물과 함께 일종의 표준화폐로 사용되었던 셈이다. 그러나 그것은 주화의 형태가 아닌 은덩이였기 때문에 지불되거나 교환될 때마다 저울로 달아서 가치를 측정해야만 했다. 메소포타미아의 셰켈과 미나, 이집트(신왕국)의 데벤(deben: 91그램), 그 1/10인 키테(kite), 그리고 탈렌트와 같은 단위들은 화폐의 단위라기보다는 다만 중량단위였던 점이 이를 뒷받침한다...
주화가 상업활동을 촉진시키기 위한 것이라는 경제적 설명은 고대 이래로 오랫동안 선호된 이론이다. 그리하여 헤로도토스는 함축적으로, 아리스토텔레스는 명시적으로, 주화는 교역과 소매거래를 촉진시키기 위해 도입되었다고 언급한다. 라움(Laum)은 화폐의 종교적 기능에 초점을 맞추어 그것을 주화의 기원으로 생각하였다. 윌(Will)은... 주화는 새로운 유형의 지배자가 정치적 종교적 분열의 시기에 자신의 권력을 강제하고 정치질서를 재수립하는 수단이었다. 쿡(Cook)은... 그리스 용병들에게 급료를 지급할 필요성이었다는 의견을 내놓았다... 프라이스(Price)는 주화가 그리스에서 최초로 정치적, 군사적, 법률적 관직이 보상되는 수단이었다고 보았다. 그것은 한편으로 권위의 상징으로서 개인적 기장 및 인장의 전통과, 다른 한편으로 정치적 법률적 관직에 대해 귀금속을 선물 주는 전통이 결합된 것이다...
호박금은 금과 은의 자연합금으로서 소아시아지역, 특히 뤼디아의 하천들에 사금형태로 존재하였다. 그것은 채광당시부터 금은의 비율에 상당한 차이가 있었기 때문에 똑같은 무게라 하더라도 금 함량에 따라 그 고유가치가 서로 달랐다. 또한 그 같은 함량의 차이는 시각적으로나 어떤 단순한 테스트로도 정확히 판정할 수 없었다.(오늘날 자연합금에 대한 테스트는 은 함량이 10-30%가 됨을 보여준다. 그러나 초기 호박금 주화들의 은 함량은 대략 20-75%의 범위인데, 45%이상의 수준에 많이 치우쳐 있다.)
... 자연상태의 호박금이 갖는 이 같은 취약성이야말로 역설적으로 그것을 주화로 각인할 필요성과 유용성을 동시에 충족시킬 수 있게 만들었다. 주화의 발행자와 사용자는 암암리의 묵인하에 다양한 함량(가치)을 가졌지만 일정한 무게체제와 발행자의 의장을 가진 호박금 주화를 모두 동일한 것 혹은 평균화된 것으로 인정하고 그것을 수용하였던 것이다.(R.W. Wallace(1987), The origin of electrum coinage, AJA 91, 385-397.)
알렉산더 대왕때까지 호박금은 동일한 무게인 은의 10배 가치였으며, 그래서 초기 호박금 주화의 가장 흔한 액면가인 '1/3(스타테르)'은 솔론의 앗티카 무게표준으로 1드라크마인 4.25그램의 10배 이상의 값어치이다. 그런데 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솔론의 시대에 1드라크마는 양 1마리 값어치(Solon 23)라고 하므로 호박금 '1/3'짜리는 양 10마리 값인 셈이다. 1/96짜리도 양 1/3마리 값에 해당한다(Cook, 260).
주화 발행이 그리스세계에 보급된 속도는 주목할 만한 것이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발행의 사실을 말하는 것이지 사회의 일반적 가치척도요 교환수단으로 확고하게 자리잡는 과정은 또 다른 문제이다. 이를테면 주화가 다른 형태의 원시 화폐를 단기간에, 혹은 철저히 대체한 것은 결코 아니었다. 화폐라는 혁신과는 별도로 여러가지 전통적인 가치물이 화폐와 함께 사용되었다. 각종의 벌금, 배상금, 혼수, 경기와 경연에서의 상품(상금), 신전 봉헌물 등등이 주화들과 나란히 사용되었음을 볼 때, 그들과 화폐는 대립적 관계라기보다는 상호보완적이요 대체 가능한 관계였다. 화폐를 통한 사회적 가치의 일반화는 완만하고도 불완전한 과정이었다...
... 자연상태의 호박금은 그 내재적인 가치가 매우 가변적이었으며, 또한 개개 호박금의 금 혹은 은의 비율을 일일이 알아내기란 사실상 불가능하였다. 그것이 일반에게 수용가능한 가치를 실현하는 유일한 방법은 일정한 무게의 호박금에 발행자의 각인을 찍어 그것의 임의상환(redeemability)을 보장하는 것이었다. 호박금 주화가 대체로 국내적 범위를 크게 벗어나지 않았던 이유는 이처럼 그 발행의 맥락이 애당초 특정한 보증자의 재량과 관련되었기 때문이다. 그 점은 또한 소아시아의 호박금 주화가 그리스에서는 통용될 수 없었던 이유이기도 하다. 그러나 호박금 주화의 관행으로부터 영향을 받은 그리스 본토의 도시들이 은 주화를 발행하기 시작하자 호박금은 국제적 용도로서 그 부적합성이 드러나게 되었고 그런 이유로 크로이소스는 호박금 주화를 포기하고 은 주화를 도입하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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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박금의 중량을 알아내는 방법에는 세 가지가 있다. 즉 특정한 비중을 재는 방법, 검은 돌(touch stone)이 문질러 테스트하는 방법, 세멘테이션(cementation)이라 불리는 가열과정을 통해서 금은 성분을 분리해내는 방법 등, 세멘테이션 방법은 기원전 6세기의 2/4분기 이전에는 알려지지 않았다는 것이 논자들 사이의 대체적인 견해이다. 기원전 6세기의 전반기 동안에 서부 아나톨리아의 상이한 주화들은 오직 매우 다양한 조성의 합금인 호박금으로만 주조되었다. 반대로 호박금 주화들이 은 주화들로 공히 대체되었으며, 극소수의 잔존한 호박금 주조들(주로 포카이아, 퀴지코스, 후에는 뮈틸레네와 카르타고)은 그와 반대로 합금에 있어서 훨씬 더 일관된 것이었다. (Wallace, 386-3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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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철 (2015), "자본주의 화폐(money)의 본질과 기원"에 대한 정치학적 설명, 국제정치논총, 55/3, 157-191.
자본주의 화폐는 특정 법체제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 이 특정 법체제는 고대 로마법에 기반... 그 특징은 소유법이 계약법과는 별도의 법으로 독립... 자본주의 화폐는 기본적으로 소유권을 확장하고 강화하기 위해 고안되었으며, 그 소유권을 확장하는 방법은 소유권과 계약권을 교묘히 섞어서 둘 다의 이점은 취하여 책임은 최소화하고 권한은 확대하는 것이다. 이러한 소유권과 계약권의 융합은 자본주의 이전 시대에는 불법이었으나, 17세기 후반 영국에서 합법적 제도로 정착된다...
... 본 논문은 영미권의 대표적인 포스트케인지학파 화폐론자 제프리 잉햄(Geoffrey Ingham)과 랜달 레이(Randall Wray)의 이론을 비판적으로 검토하고자 한다.
포스트케인즈학파의 화폐론은 화폐(money)와 신용(credit)을 동일한 것으로 취급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으며 이로 인해 자본주의 화폐와 금융시스템을 설명하는데 개념적 혼란을 초래하고 있다. 본 논문에서 살펴보겠지만, 화폐와 신용이라는 두 이질적인 것을 조합해서 자본주의 화폐가 만들어진다... 화폐를 신용과 동일하게 취급하는 포스트케인즈학파는 이러한 정치적·법적 조합 과정을 설명하지 못한다... 같은 이유에서 포스트케인즈학파는 이러한 기원을 포착하지 못한다.
... 두 역사적 시기... 첫 번째 시기는 고대 로마제국으로... 두 번째 시기는 17세기 후반 영국... 첫 번째 시기의 화폐 탄생의 주역은 왕과 군인들이었고, 두 번째 시기의 주역은 금세공은행업자들(goldsmith-bankers)과 왕 그리고 자산소유자들이었다.(Kim (2011))
... 첫 번째 고대 로마 시기에는 화폐의 본질이 신용의 본질로부터 확연히 구분되기 시작한 때이다... 두 번째 시기, 17세기 후반 영국에서는 신용과 화폐가 조합이 되어서 독특한 형태의 화폐가 등장한 때이다. 자본주의 화폐의 탄생의 시기인 것이다.
... 포스트케인즈학파는 화폐의 본질은... 첫 번째 정의는 추상적인 계산단위... 가 화폐의 본질이라는 것이다... 두 번째 정의는 신용과 화페는... 양적 차이만 있다는 것이다. 어음 등의 신용수단을 소지한 사람은 이것을 발행하고 유통한 "몇몇" 사람들에게만 채무이행을 요구할 수 있다면, 화폐를 소지한 사람은 이 화폐가 통용되는 사회의 "모든" 사람들에게 채무이행을 요구할 수 있다는 것이다.
... 화폐와 신용의 관계는 소유권과 계약권의 관계와 같다. 소유권은 절대권 권리로 사회의 "모든 불특정 다수"를 상대로 행사되는 권리인 반면, 계약권은 "몇몇" 계약 당사자들에게 행사되는 권리인 것이다. 본 노문은 "화폐-신용"과 "소유권-계약권" 간의 밀접한 관계를 포착함으로써 화폐와 신용의 차이점과 공통점을 설명할 것이다. 포스트케인즈학파는 이러한 관계를 포착해내지 못하고 있다.
... 화폐와 신용을 뚜렷이 구별해주는 화폐의 부채청산 기능이 "정치적 수단"으로 발생했음을 역사적으로 고찰할 것이다. 이는 교환수단으로 역할하기 위한 경제적 동기로 인해 화폐가 탄생했던 것이 아니라, 부채위기라는 공동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정치적 동기"로 인한 것임을 보일 것이다.
우선 신용수단과 화폐는 몇 가지 공통점이 있다... 동일한 계산단위로 표현된다. 또한 둘 다 교환수단으로 쓰인다... 하지만 신용과 화폐에는 본질적으로 다른 점이 있다. 신용발행은 채권채무관계를 일정기간동안 만들어 내지만, 화폐는 채권채무관계를 청산한다...
... 통념에 따르면, 경제시스템의 역사적 발전의 순서는 물물교환경제, 화폐경제, 신용경제 순이다... 그레버네 따르면... 실제 경제시스템의 역사적 발전 순서는 인간경제(상호부조), 신용경제(빚 관념), 화폐경제(부채 위기 해결) 순이다. 이후 신용경제와 화폐경제는 순환적으로 교체되어 왔는데...
그레버에 따르면, 인간경제에서는 현대적인 의미의 화폐는 없었다고 한다. 즉, 교환수단으로 사용되면서 부채를 청산할 수 있는 화폐는 없었던 것이다... 부채위기는 신용경제의 모순을 보여준다. 신용경제는 대부계약 당사자들 간의 평등한 관계가 있어야 유지된다. 하지만 부채위기는 이 평등한 관계를 훼손시켜 신용경제의 토대를 무너뜨릴 수 있는 것이다.
... 주기적인 빚 탕감이었다... 왕이 처음 왕위에 오를 때나 오른 후 30년이 되었을 때 주로 행해졌다고 한다... 기원전 6세기경에 이르러 이러한 빚 탕감 대신에 부채 위기를 해결하는 새로운 방법이 등장했는데 화폐의 도입이 바로 그것이다... 과거 신용경제에서 귀금속인 금, 은, 동은 신전에 쌓여 보관되어 있었다. 로마는 다른 이웃 나라의 이 금과 은과 동을 약탈해서 화폐로 주조한 후에 군인들에게 월급의 형태로 나눠주었던 것이다...
빚 탕감이라는 해결책과 화폐라는 해결책은 몇 가지 큰 차이점이 있다. 우선 전자에서는 채권자가 돈을 돌려받지 못하지만 후자에서는 채권자가 돈을 돌려받을 수 있다. 두 번째로 후자는... 폭력과 전쟁... 화폐의 재료가 되는 금, 은, 동을 다른 나라로부터 수탈해야... 반면 빚 탕감 정책은 종교를 매개로 공동체 내에서 갈등을 해결하는 평화적인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세 번째 차이점은, 빚 탕감과 달리 화폐에 의한 해결책은 임시방편에 가깝다는 것이다... 수탈해서 모을 수 있는 귀금속의 양이 제한되어 있기 때문에...
그리고 화폐의 부채청산 능력은 "정치적" 수단으로 쓰였지 경제적 수단으로 쓰이지 않았다... 기원후 33년경에 로마의 대부업자들이 빌려준 돈을 한꺼번에 회수하려 하자 부채위기가 발생했다... 티베리우스가 직접 개입해서... 해결한다. 흥미로눙 사실은 기원전 63년, 49년, 44년에 통화부족 사태가 벌어져서 상업에 큰 지장을 초래되었을 때는 위와 같은 정치적 개입이 없었다... 고대 로마제국에서 화폐는 교환수단으로 중요한 역할을 했지만, 이런 경제적 기능은 화폐의 일차적 기능이 아니었던 것이다. 역사학자 크로포드가 말했듯이, 이 경제적 기능은 "화폐라는 존재의 우발적인 결과였지, 화폐가 존재하는 이유는 아니었다."
... 자본주의 화폐의 독특한 점은 이중의 중첩 구조라는 데 있다. 금, 은, 동 등의 원료를 제국주의 정책을 통해 수탈해 와서 국가가 주조해서 발행하는 국정화폐(현금)가 한 층이다... 다른 한 층은 국가가 주조한 이런 현금과 언제든지 태환될 수 있는 은행권을 사은행이 발행하는 것이다. 언제든지 태환되었기 때문에 상인들 사이에 현금과 동일하게 취급되었다. 이 은행권은 17세기 후반 런던 금세공은행업자들이 최초로 제도화시킨 것이었다.
... 어음과 은행권은 다음의 세 가지 점에서 구별된다. 첫째는 부채청산능력, 두 번째는 요구불 지불(payable on demand), 그리고 세 번째는 화폐창조가 그것이다.
... 금세공은행업자의 은행권에도 화폐와 유사한 부채청산능력이 있었는데... 암스테르담의 배서제도를 17세기 후반 영국의 보통법 법원이 적극적으로 도입했던 것과 밀접하게 관련이 있다. 법원은 어음의 신뢰성을 높이기 위해 배서제도를 도입하고자 했는데... 법원은 배서된 어음은 대부로 취급하고, 배서되지 않은 어음은 판매로 취급했던 것이다... 런던 금세공은행업자들... 발행한 은행권은 익명화된 증서였기 때문에 이것으로 대금을 지불한 사람들은 채무변제에 대한 의무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 있게 된 것이다. 이것은 결국 은행권이 화폐로 통용되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어음과 은행권의 두 번째 차이는 "요구불 지불"과 관련된다... 이 특징은 "만기일"이 있는 어음과 대조된다...
... 세 번째 특징은... "화폐가 창조"가 된다는 점이다. 이 화폐창조 기능을 경제학자들은 "신용창조"라고 부르는데 엄밀히 말해서는 "화폐창조"가 맞다...
현대 은행업 이전에는 예금업과 대부업(신용업)이 분리되어 있었다... 전통적인 로마법에 의하면 예금을 보관해주는 사람은 예금을 본인 명의로 사용할 수 없었고 100% 지급준비율을 유지해야 했다... 현대은행업 이전에는 예금자의 권리는 소유권자의 권리였고... "요구불 지불"이라는 예금의 주요한 특징이었다.
... 금세공은행업자들이 이런 융합을 서비스했던 17세기 후반 당시, 로마법 전통이 강하게 남아있던 유럽대륙의 경우 이런 형태의 은행업은 횡령으로 간주되어 불법이었다...
... 채권에서는 소유권이 채무자에게 양도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현대은행업에서 예금의 소유권은 은행에 양도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은행이 이 예금을 자기 명의로 타인에게 대부하기 때문이다...
어떻게 돈의 소유권이 양도되기도 하고 양도되지 않기도 한 것일까? 이런 모순이 현대은행업의 본질이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하나의 예금에 대해 소유권이 이중으로 생기기 때문에 뱅크런 등의 금융위기가 발생하는 것이다...
... 1609년에 세워진 암스테르담은행은 이중소유권의 행위를 불법으로 간주했다... 설립 이후 150년간 100% 지급준비율을 유지하였다...
반면 영국에서는 일찍이 13세기부터 물권과 대인권을 섞는 것을 허용하는 법이 점차로 생기기 시작하다가, 17세기 후반 현대은행업이 제도화되는 같은 시기에 "신탁법"으로 확립되었다... 신탁은 매우 영국적인 법으로 당시 유럽대륙의 시민법 전통에서는 용납될 수 없는 법개념이었다. 신탁법은 영국 귀족지주계급의 요구를 반영한 것이었다. 이들은 자신의 재산 특히 땅에 대한 배타적인 소유권을 강화하고자 했다. 국가의 간섭이나 공동체에 대한 책임으로부터 면제된 소유권을 누리기 위해 귀족계급이 취했던 방식은 실질적인 소유권(물권)을 포기하지 않으면서도 법적으로는 이를 대인권(채권)으로 간주되도록 하는 것이었다.
예를 들어 어떤 귀족이 범법행위를... 이 귀족은... 미리... 자기 땅의 소유권을 제삼자인 A씨에게 양도해버린다. 법원에서는 이 땅이 그 귀족의 소유가 아니기 때문에 더 이상 몰수할 수 없게 된다 (J.E. Martin, Modern Equity, London: Sweet & Maxwell, 2001). 이 때 귀족은 소유권을 양도했지만 A씨와 일종의 신탁계약을 맺는다. 그 땅의 소유권은 A씨의 것으로 영원히 남는 대신, 일종의 배당금 형태로 매달 얼마씩을 그 귀족이 받기로 하고 또한 그 땅을 그 귀족의 허락 없이 함부로 처분하지 못하도록 합의를 하는 것이다. 그 귀족이 죽으면 그 귀족의 자녀들이 그 배당금을 계속 받는 것도 합의한다... 그 귀족은... 그 땅의 처분에 대해 통제력을 발휘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권리를 신탁법은 "형평법적 권리(equitable rights)"로 규정하고 보호해준다...
... 예금보관을 목적으로 대부업을 이용하는 것은... 17세기 중반에 스페인의 세비야의 예금업자들은... 예금을 상인들에게 대부해주는 일이 이미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세비야의 예금업자와는 달리, 런던금세공업자들은 현금을 직접 빌려줘서 자신의 금고를 비우지 않았다. 이들은 현금을 빌려주는 대신, 추가적인 영수증, 즉 은행권을 발행해서 빌려줬던 것이다... 그래서 왕이 그 예금을 몰수하려고 하면 그 수많은 이해당사자들이 저항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이렇게 소유권과 계약권을 교묘히 섞어서 탄생한 자본주의 화폐는 이후 1694년에 영국은행(the bank of England)이 설립되면서 완전히 합법화된다. 의회는 영국은행에게 은행권을 발행할 권리를 주는 대신, 영국은행이 발행한 주식만큼 영국은행으로부터 돈을 빌렸다. 이것이 영구부채의 시작이다...
자본주의 화폐는 소유권 개념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이 소유권 개념은 고대 로마공화정 후기에 탄생... 소유권은 property rights라고 불리기도 하고 rights in rem(물권)이라고 불리기도 하고, dominium라고도 불리기도 한다.이런 소유권 개념은 로마법의 고유하고 독특한 개념인 듯하다. 로마법 이외의 법체제에서 절대적인 소유권 개념을 찾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반면 계약법의 대인권(rights in personam)은 역사적으로 여러 문명권에서 재산배분과 거래를 다루는 분야에서 매우 흔히 나타나는 법개념이다.
... 대인권이란 타인과의 어떤 사회적 협의의 산물이며, 이러한 협의는 얼마든지 다시 할 수 있기 때문에 대인권도 그만큼 변경 가능한 것이다. 반면, 물권은 물건과 그 소유자의 직접적 관계 때문에 생기는 것으로 사회적 합의와는 전혀 관계가 없다... 물건은 다른 사람들이 간섭할 수 없는 절대적 권리이다... 물권은 소유물을 통해 다른 사람과 관계를 맺고, 대인권은 직접 다른 사람과 관계를 맺는다는 본질적인 차이를...
법학자 올란도 패터슨은 물권 개념이 형이상학적 허구라고 지적한다. 내가 어떤 물건을 내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다면 이는 다수의 사람들이 내가 그럴 수 있도록 암묵적이든 명시적이든 합의해주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대인권과 구분되는 물권 개념이 생겼다는 것은 모종의 사회적 필요를 반영하는 것이라는 게 패터슨의 설명이다. 그에 따르면 물권이라는 독특한 법개념은 로마 공화정 후기에 발명된다... 노예가 비록 사람이지만 사람과 다른 무엇으로 정의될 필요가 있었고... rights in rem에서 rem(thing)이란 바로 노예를 지시했다.
... 법적으로 예금자는 채권자로, 은행은 예금자에게 돈을 빌린 채무자로 규정되어 있다. 1848년 영국법원의 결정으로 규정되었는데 이후 모든 나라가 이 관례를 따르게 된다... 예금자의 법적 권리는 채권으로 규정되어 있지만 "요구불 지불" 덕분에 소유자의 지위도 함께 누리고 있는 것이다...
... 이러한 주기적인 경기 확장 과정에서 금융기업과 금융투자자들은 자신의 소유권의 혜택을 마음껏 누리면서도 금융위기 때는 자신들이 마땅히 입어야 할 피해를 사회에 전가해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