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중세 교황 과세

by 조영필 Zho YP

안상준 (2009), 중세 유럽의 교황군주제와 십자군, 서양사론, 제101호.



1095년 11월 27일 교황 우르바누스 2세(1088-1099)는 프랑스 남부 오베르뉴 지방의 클레르몽에서 개최한 공의회에서 이슬람을 향한 전쟁을 선포하였다...


십자군 전쟁은 형식적인 측면에서 본다면 비잔티움 황제의 군사적 지원 요청에 따른 교황 우르바누스의 군대 파견으로 일어난 전쟁이었다. 그러나 이미 전임 그레고리우스 7세(1073-1085) 시절에 같은 형식과 내용의 군사적 지원 요청이 있었고, 교황은 군대 파견을 시도하였다. 그러나 교황의 시도는 호응을 얻지 못했다...


... 전쟁 호소문으로 돌아가 보면 교황이 대중들을 전쟁으로 끌어들이는 두 가지 유인책은 죄 사면과 토지다. 즉 대중의 신앙심과 세속적 가치를 동시에 자극하면서 전쟁 참여를 충동했다...


... 교황 이노켄티우스 3세(1198-1216)의 '영구적인 십자군' 개념에서 찾을 수 있다... 종교적으로 보편교회를 실현하고 정치적으로 라틴 그리스도교 세계 군주들의 조정자가 되고자 하는 교황의 궁극적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십자군은 필요하고 유용한 수단이 되었다...


그레고리우스의 후계자로서 우르바누스의 교황직 수임은 일종의 정치적 모험으로 보인다...

... 첫 번째 시도는 비잔티움 사신이 참석한 가운데 이탈리아의 피아첸차 공의회에서 이루어졌다. 그러나 교황의 호소는 허공을 맴돌았다...

... 자신이 성장하고 정치적·정신적 유대가 강한 프랑스에서 제후들을 향해 대이교도 전쟁을 선포한 것이다...

... 실제로 교황이 클레르몽에서 전쟁호소를 위한 연설을 할 수 있었던 결정적인 배경은 당시 남프랑스의 가장 유력한 세력이었던 툴루즈의 백작 레이몽 4세와 르 퓌의 주교 아데마르가 연설에 앞서 지지를 보냈다는 사실이다.


... 서유럽 정치구도 속에서 수위권을 주장하는 교황은 신앙적 에너지와 폭력적 에너지를 융합시켜 '성전'의 개념을 만들고 '순례'로 가장시켜 폭력을 수출한 장본인이었다...


1차 십자군은 예루살렘을 탈환했고 팔레스타인에 십자군 국가를 건설했다...


2차 원정(1146-1148)부터 십자군은... 프랑스 왕 루이 7세가 십자군을 지휘했다는 사실은... 서유럽의 유력한 국왕들-신성로마제국 황제 프리드리히 1세 바바롯사, 프랑스왕 필립 2세 오귀스트, 영국 왕 리처드 1세 사자심왕-이 참가한 3차 원정(1188-1190)은 부분적인 성공에 그쳤으나, 예루살렘 재탈환의 가능성을 남겨주었다.


1198년 제위에 오른 교황 이노켄티우스 3세는 예루살렘 탈환을 외치며 전임 교황이 선포하고 실현하지 못한 4차 십자군(1202-1204)을 재차 선포했다... 제위 기간 중 이노켄티우스 3세는 4차 라테란 공의회를 통해 또 한 번의 예루살렘 십자군을 선포하였다... 후임 교황은 공의회의 결정을 받들어 5차 십자군(1217-1221)을 결행했다.


... '개혁된 교회'의 수장으로서, '평신도의 영혼을 인도하는 목자'로서 교황은 신의 왕국을 지상에 건설하고, 십자군을 통해 신앙을 검증받는 시스템을 기획하고 있었다.


... 교황 에우게니우스 3세(1145-1153)는 최초로 십자군 교서를 내려 프랑스와 이탈리아 주교와 성직자에게 십자군 동원을 위한 전도 활동을 과제로 부여했다...


... 그레고리우스 8세(1187)와 클레멘스 3세(1187-1191)는 사신을 파견하여 각 지역 주교에게 전도 활동 과제를 담은 교서를 전달했다...


1차 원정의 참가자는 모든 비용을 스스로 부담했다... 2차 원정부터 십자군 조세가 등장했다... 3차 원정의 재원 충당은 본격적인 조세정책으로 전개되었다... 교황 클레멘스 3세... 이노켄티우스 3세의 성직자 조세 도입... 1188년 각국의 군주와 제후들에게 허용된 이른바 '살라딘 십일조'...


과세를 통한 십자군 재정 정책은 교황의 핵심과제였다. 이노켄티우스 3세는 기존의 조달방식에 의존하면서 면벌부 발행을 활용한 십자군 기금 확보에 주력했다... 1199년 4차 십자군을 위해 전체 교회로부터 수입의 1/40을 징수했고, 1209년 알비 십자군의 재정 조달을 위해 프랑스 교회에 수입의 1/10 납부를 명했고, 1215년 라테란 공의회는 5차 십자군을 위해 3년 단위로 교회 수입의 1/20 징수를 공포했다...



박은구 (2011), 중세 유럽 교회의 부패 : 어떻게 볼 것인가, 숭실사학, 26, 391-416.



알비 파(카타르 파)

11세기 남프랑스에서 알비 시를 중심으로 번성했던 이단주의자들. 유럽의 다른 지역에서는 이들을 카타르 파라 불렀다. 고대 마니교적 이원론을 수용했던 이들은, 성서에 대한 자구적 해석을 주장했던 가톨릭과는 달리 비유적 해석을 주장하고, 교회 재산 및 신도들의 결혼생활을 부정하는 등 가톨릭 교회로부터 자신들을 교리적 사회적으로 구분하였고, 독자적인 공동체 생활을 추구하였다. 12세기에 와서 교회 건축에 반대했던 이들의 주장은 남프랑스 전역으로 확산되었으며, 1167년에는 '카타르 성서'(Cathar Bible)라 불린 이들 나름의 경전도 가지게 되었다. 마침내 1184년 베로나 공의회에서는 이들의 근절을 위해 이단법정(Inquisition)이 공식적으로 설립되기도 하였다. 이들에 대한 본격적인 군사적 원정 즉 알비파 십자군은 1208년부터 1226년까지 계속되었는데, 초기에는 시몽 드 몽포르에 의해서 그리고 나중에는 루이 8세에 의해서 주도되었다. 잔존해 있던 알비 파조차 1244년의 학살 이후로는 크게 그 세력을 잃게 되었다.

이 십자군은 교회가 승인했던 문화적 대량학살에 해당하는데, 이 알비 파 교도들에 대한 탄압이 결과적으로 중세 이단법정(the Inquisition)**의 설립을 낳게 되었다.


이단법정(the Inquisition, 종교재판소)

원래 중세 교회가 이단들과 싸우기 위해서 사용했던 수단은 이단 심문(heresy inquest)과 이들에 대한 파문(excommunication), 그리고 이들에 대한 징벌을 세속정부에 맡기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같이 온건한 방법이 알비 파, 왈도 파 등과 같은 이단운동의 확산을 막는데 실패하자, 1184년 교황 루키우스 3세는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프리드리히 바바로싸와 함께 이단법정을 설치하기로 합의하였다. 13세기 이단법정은 주로 주교 및 도미닉 수도사들로 구성된 이단심문관에 의해 운용되었으며, 1252년 이후로는 고문이 허용되었고, 중죄에 대한 징벌로는 재산몰수, 투옥, 세속법정에로의 이관, 그리고 화형 등이 있었다. 그러나 이단법정은 그리스도교 이단들을 문제 삼았을 뿐, 비그리스도 교도들을 대상으로 한 사법조직은 아니었다... 중세 이단법정은... 교황 이노센트 3세(1198-1216)에 의해 설립되었다.


스페인 종교재판소(the Spanish Inquisition)

스페인의 페르드난드와 이사벨라의 요청에 의해 교황 식스투스 4세(1471-1484)가 1478년 세웠던 새로운 이단재판소. 처음부터 스페인의 완전한 종교적 통일성 확보를 목표로 세워졌던 만큼, 유대인, 모슬렘 등 정통파 가톨릭으로부터 벗어난다고 판단된 모든 움직임들을 엄격히 탄압하였다.... 오직 스페인 군주에게만 책임을 지는 독자적인 조직... 그러니까 이것은 중세 이단법정과는 판이하게 다른 것이었다.


서유럽 교회의 대 분열(the Western Schism, 1378-1417)... '교회의 분열' 기간은 중세가 포괄하는 오랜 기간 가운데 비교적 짧은 막간기였다... 이같은 상황은 한편으로는 공의회주의(Conciliarism)를 성장시킨 직접적인 토양이 되었다. 교회법적인 판결 권한은 교황이 아니라 공의회의 모든 주교 공동체에게 있다는 사상이 이로부터 움트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 결과 피사(1409-1411)와 콘스탄스(1414-1417) 그리고 바젤(1431-1439)에서 열렸던 전체 공의회 모임들에서 성직자의 권위 및 교회정부에 관한 일반인들의 생각도 근본적으로 바뀌게 되었다. 이와 같이 공의회주의 이론은 "모든 신도들의 사제권"이라는 획기적인 이념을 배태함으로써 후대의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에도 심대한 영향을 미쳤던 것이 사실이다...


성직록(Ecclesiastical Benefice) : 교회직에 수반되었던 금전적 급여.



이영재 (2020), 교황 요한 22세의 재정 제도의 정비, 숭실사학, 44, 223-239.



... 법률가 출신의 교황(요한 22세)은 이러한 부족한 세수를 마련하기 위해 성직록세에 대한 개혁과 이를 잘 운용하기 위한 교황청 재무성(Camera)의 제도적 정비를 단행하게 되었다. 교황 요한 22세는 오히려 오래된 로마에서는 하기 어려웠던 교황청의 행정과 재정 제도를 새로운 도시인 아비뇽에서 체계적으로 정비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이 시기에 교황청의 행정적인 중앙집권화가 이루어졌으며, 재정제도의 발달 등 관리체계의 발전을 가져올 수 있었다. 이러한 교황청의 재정 체계 및 행정 제도의 정비는 다음 시기에 절대군주체제로 나아가던 유럽 각국의 군주들에게 하나의 모델을 제공하는 것이 되었다.


... 앙주 샤를 1세가... 1265년 교황청의 봉토였던 남부 이탈리아와 시실리를 정복함으로서... 시실리 군주로서 1279년 일찍이 지방의 양모 공급을 통해 국제적으로 성공적인 그 자신의 섬유산업을 발전시켜... 살레르모에서와 같은 그러한 중심지들에서 염료산업이 있었고, 이곳에서 유대인들이 특별한 역할을 수행하였다는 것이다(D. Abulafia, "The Italian South", The New Cambridge Medieval History, Vol VI c. 1300-c. 1415, Ed M. Jones, (Cambridge Univ. Press, 2000), pp. 497-498.). 그리하여 14세기 아비뇽 교황청은 프랑스 앙주 가문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교황청의 적극적인 지지자로서 이들의 역할을 기대하였다. 결국 교황청은 로마를 떠나 아비뇽에 정착하게 되는데, 이는 아비뇽이 주는 이점 가운데 그곳이 앙주가의 영토였다는 점에서 교황청이 이들의 보호를 받을 수 있다는 점도 작용하였다고 볼 수 있다.


교황청의 주요 세입원은 첫째, 교회 영지로부터 나오는 세금, 둘째, 교황의 봉건 가신으로서 다수의 그리스도교 왕국들이 납부하는 부과조 및 주교들의 관할로부터 면제된 수도원들과 교회들이 납부하는 세금(census), 셋째, 성직록에서 나오는 세금들(전체 수입 가운데 대략 절반가량), 넷째, 교황청 법정에서의 수수료, 다섯째, 선물, 유산증여, 다양한 저술로 인한 세금 (이영재 (2014), 중세 말 아비뇽 교황청은 유폐인가? 아니면 성장인가?, 서양사론, 120, p139.)


요한 22세는 교황이 직접 지급하거나 또는 지명하는 성직록을 크게 확대하였고, 성직록을 두 개 이상 소유하는 것을 금지시켜 이용가능한 물자를 확대했던 것이다. '교황령 국가들'로부터 세금을 전혀 거둘 수 없었기에 요한은 부족한 재원을 충당하기 위해 그동한 임시적이거나 부정기적인 형태의 성직자들에 대한 세금을 정기적인 세수로 만들고자 했다.


먼저 교황청은 기존의 세수원을 개발하였고 확대하였다. 이는 봉직료(servitia)라 불리는 것으로 교황에 의해 고위직 성직록을 받는 자리에 임명된 성직자들 즉 대주교들, 주교들, 수도원장들이 지불하는 것이었다. 봉직료의 주된 구성요소로서 일반 봉직료(common services)는 성직록의 거대한 연소득의 3분의 1에 해당하는 것이다...


또한 봉직료와 비교할 수 있는 세금으로 성직록 취득 첫해 봉헌금(annates)이 있었다. 이는 하위 성직록을 받는 성직자들이 지불하였다... 성직록을 받은 첫 해의 수입을 세금으로 내는 것을 의미하였다... 1316년 요한 22세는 그리스도교 세계의 방대한 지역에서 3년 안에 공석이 될 모든 성직록에 대한 첫해 수입을 확보하였다.


임시취득 봉헌물(fructus medi temporis)은... 관습적인 권리에 따라 고위성직자들이 전용할 수 있었으나, 교황 요한 22세는 처음으로 그러한 전용들을 교황의 세금으로 만들었다...


성직록 십일조세는... 성직자에게 성직록의 10분의 1세를 부과하는 것이었다... 이를 처음 사용한 교황은 인노켄티우스 3세이며, 그는 이슬람과의 십자군을 위해 일명 '살라딘 세'를 거두었던 것에서 유래하게 되었다...

인노켄티우스 교황이 1199년 성직자들에게 40분의 1세를 징수할 때 그는 성직자들에게 그러한 징수에 대해 동의를 구하지 않았다... 16년이 지나서... 20분의 1세를 거두었는데... 전체 공의회에서 성직자 징수에 대한 동의를 얻도록 하였다... 교황 호노리우스 3세와 그레고리우스 9세는 세속인에게도 십자군 세를 강제로 지불하도록 하려고 하였으나 실패하였던 이후, 그 세금은 성직자들에게 한정되었다.

교황 그레고리우스 9세는 1228년에 성직자에게 성직록 십일조세를 부과하였는데 이는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프레드리히 2세와 전투하기 위한 것으로... 비난의 대상이 되었다... 적어도 영국의 성직자들에게서... 왜냐하면 그레고리우스 9세는 성지를 방어하기 위해서보다 교황령의 국가들과 이탈리아 도시들의 독립을 보존하기 위해 십자군을 출정하였기 때문이었다.

이후 성직자 성직록의 십자군 십일조세에 대한 동의는 전반적으로 가능한한 추구되었다. 전체 그리스도교 왕국에 대한 십자군 십일조세는 리용에서 열린 공의회에서 인준되었으며, 순수하게 지방적으로 적용되는 십자군세는 왕왕 지역적 혹은 관구 시노드에서 논의되었다... 주교 윌리엄 두란이 비엔느 공의회에서 성직록 십일조세에 대한 인준을 위한 조건으로서 공의회의 동의를 구하는 것을 확립하고자 하였으나 실패로 돌아갔다...


교황의 몰수권(jus spolii)은 사망한 성직자에게 그가 살아있을 때 소유하고 사용하던 물품들(동산 재산)을 수합하는 교황의 권리를 표현한 것이다... 교황 전능권 사상은 교황의 몰수권이 나올 수 있었던 최고의 법률적 원리였던 것이다...


넷째, 교황청이 그것의 재정적 거래를 위해 고용하였던 상사들(firms)은 재무성과 긴밀한 관계를 지녔으며, 이들을 재무성 상인들(mercatores camerae)이라 명명했다. 이들은 교황청에서 대표직을 유지했으며 교황청의 구성원들이었고 유럽의 주요한 화폐 중심지들에 지부들 혹은 대리국을 두었다. 화폐를 수합할 때 징수관들은 안전한 장소로 일반적으로 수도원들 내부에 그것을 보관했는데, 교황청으로부터 그것을 재무성 상인들에게로 전달하라는 명령을 받을 때까지 그곳에 두었다. 재무성 상인들은 자신들이 맡고 있는 금액에 대해 영수증을 주었는데, 그들이 징수관 혹은 교황의 공식 대리인의 요구에 따라 어떤 지정된 장소에 그 금액을 가져다 놓겠다는 서약을 하였다. 그들은 강도와 배의 파선과 같은 모든 위험을 감수하였고 재지불을 위한 담보물로서 전체 상사의 재산을 저당 잡혔다. 화폐는 즉시 로마로 보내지도록 명령되어지거나, 혹은 은행가들이 잠시동안 그것을 예금으로 넣어두는 것이 허용되어졌을 것이다. 화폐를 은행에 예치한 경우에 그들은 다른 사업가들에게 그것을 자금으로 이용하도록 하여 이자수익을 거두었다.(남종국, 이탈리아 상인의 위대한 도전, 2015년, 359-365.)


다섯째, 정금 그 자체가 왕왕 로마로 보내졌다. 다른 경우에 이동은 환전소에 의해 이루어졌다. 재무성 상인들은 또한 환전의 일을 하였다. 징수관들은 그들이 징수하였던 나라의 현행화폐로 세금을 받는 것이 의무였는데, 그렇게 걷힌 화폐는 교황청에서 사용하는 화폐로 환전해야만 했다... 재무성 상인들의 세 번째 일은 교황 세입의 안정성을 위해 대부를 진전시키는 것이었다. 대부를 갚는 방법은 특정 세금들이 징수되어질 때 그들에게 지불되어지도록 할당되어 징수 그 자체가 그들의 수중에 놓이게 하였다...



서원모, 교회 재정과 헌금의 역사.



초대교회 교부들은 헌금의 용도에서 가난한 자의 구제를 특히 강조했다. 하지만 이러한 가르침은 헌금이 교역자의 생활을 위해 사용된다는 것을 이미 전제하는 것이었다. 교황... 겔라시우스에 따르면 교회 수입은 넷으로 나누어, 4분의 1은 감독을 위해, 4분의 1은 지역 성직자를 위해, 4분의 1은 교회 건물과 예배 기물을 위해, 4분의 1은 가난한 자들을 위해 분배되어야 했다. 하지만 4분법 이외에도 다양한 형식의 3분법이 통용되었다. 예를 들면 스페인에서는 감독, 지역 성직자, 교회건물로 분배되었고, 잉글랜드에서는 지역 성직자, 교회건물, 가난한 자들을 위해 헌금이 사용되었다.


사유교회는 초기 중세에서 평신도, 수도원, 사제 혹은 주교가 사적으로 소유한 교회이다... 8세기에 완전히 발전된 사유교회에서는 교회의 소유자가 교회의 토지와 수입에 속하는 모든 것을 마음대로 처분하고 상속할 수 있었다... 사유교회에서는 십일조 수입의 3분의 2를 사유교회의 주인이 전유했으며(decimae dominicae), 3분의 1은 사유교회의 성직자에게 분배되었다(decimae parrochiales).


1187년 살라딘이 예루살렘을 정복했을 때, 교황은 제3차 십자군의 재정을 충당하기 위해 성전에 참여하지 않은 모든 자들에게 "살라딘세"라고 하는 특별 십일조를 부과했다...


... 베드로의 은전(Peterspfennig)은 원래 로마에 모인 잉글랜드 순례자의 여관을 위한 자발적인 사랑의 연보였지만, 일부 국가들에서는 교황의 봉토에 기초한 교회세가 되었다. 많은 세속군주들, 이를테면 잉글랜드와 폴란드, 노르웨이, 스웨덴, 나폴리, 아라곤, 포르투갈의 왕들은 왕의 칭호나 왕국을 교황청으로부터 봉토로 받았기 때문에 일시적으로 국세를 바쳤다. 또한 이들 나라에서는 모든 가정에서 베드로의 은전이 베드로의 데나리온(denarius St. Petri)으로 거둬들여졌다.(Hans Liermann, "Abgaben, Kirchliche", Theologische Realenzyklopaedie, Band 1, 33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