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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사기에서 신라를 괴롭히는 왜의 정체

조영필

by 조영필 Zho YP

삼국사기에 보면 신라 초기의 기록에서 왜의 침입 기사를 꽤 자주 볼 수 있다. 50번 이상 나온다고 하는데, 초기 신라의 커다란 외환이었다. 그런데 그 옛날 항해술이 발달하기 이전에 어찌해서 왜는 그렇게 대규모 병력을 신라 경주에 자주 보낼 수 있었을까? 의문이 들지 않는다면 그것이 이상할 것이다.


삼국사기 기사의 맥락으로 유추해보건대 왜는 꽤 신라에 근접한 곳에 있는 세력이었다. 주로 바다로 오지만 육지로도 침공하므로 신라 가까운 곳 남쪽 어딘가에 왜의 영토가 있을 것으로 느껴진다. 금관가야 정도의 위치라면 적당할 것이다.


그래서 나의 생각으로는 가야가 한때 왜가 아니었을까 하는 의구심을 버릴 수가 없었다. 아닌게 아니라, 고구려군의 도움으로 왜를 물리친 기사를 보면 왜와 가야는 거의 한 통속이기 때문이다. 혹자는 신라나 백제나 가야가 왜와 함께 큐슈에 그 영토가 있었으며, 그 지역에서의 전쟁이 오늘날 또는 고려초 시점에서 아무런 사전 배경 설명없이 기록으로 나타난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런데 다음의 신문 기사는 왜가 영산강 하류에 있었다는 논문의 주장을 담고 있다. 영산강 하류는 경주와는 꽤 멀다. 그 먼 거리에서 굳이 신라를 그렇게 자주 처들어왔을까 하는 생각은 든다. 그러나 영산강 하구의 왜가 남해안의 가야 제국의 항구를 거쳐 김해 금관가야의 도움을 받아 침공하였다면 현실성이 좀 있어보인다.


알 수 없는 과거의 역사이지만 조각조각 편린을 모아보다 보면 언젠가 그 전모가 드러나지 않을까?



출처: 김현민, '한반도에 왜가 있었나', 아틀라스뉴스, 2019.5.19~21.


삼국사기의 모호성…삼국지 동이전 해석 통해 호남 지역에 왜가 존재했을 가능성

사서를 뒤적이다 보면 의문이 드는 대목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그중 하나가 한반도 남쪽에 왜족(倭族)가 있었었던 게 아닌가 하는 의문이다. 그게 사실이라면, 일본이 주장하는 임나일본부설이 맞다는 얘기인가.


질문은 의문에서 시작한다. 완전하게는 아니지만, 가능한 한 납득할만한 수준까지 사료의 혼선에서 빚어지는 의문을 풀려고 여러 역사전문가들의 견해를 찾아보았다. 그래서 내린 결론은 삼국시대 초기에 한반도 남쪽에 왜가 큰 세력으로 존재했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

첫째, <삼국사기>에 나오는 왜와 관련한 기사에 이해하기 어려운 대목이 나온다.


① 벌휴 10년(193년) 6월, 왜인이 크게 굶주려, 식량을 구하러 온 사람이 천여 명이나 됐다.

② 아달라 5년(158년) 3월, 죽령(竹嶺)을 열었더니, 왜인이 사신을 보내 예방했다. (開竹嶺 倭人來聘) (신라본기)


벌휴이사금 시기의 왜인 구걸 기사는 바다에서 건너온 것 같지 않다. 1천명이나 되는 많은 왜인이 식량을 구걸하기 위해 육지에서 왔을 가능성이 크다. 물론 바다를 건너 올 가능성도 열려 있다. 의문이 남는다.


아달라이사금조의 왜인 사신 기사는 경북 풍기와 충북 단양 사이에 있는 죽령 길을 개척했는데, 백제나 고구려가 사신을 보냈어야 하질 않을까. 그런데 이 기사는 ‘죽령이 열렸다’는 기사와 ‘왜인이 사신을 보내 예방했다’는 별도의 사건으로 분리하면 이해가 된다. 하지만 해석에 따라 왜의 사신이 죽령을 넘어 예방한 사실의 기사임을 배제할 수 없다.


<일본서기>는 한반도에서 왜의 움직임을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다. 하지만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나오는 40여개 이상 왜 관련 기사와 <일본서기>의 기사가 일치하는 것이 거의 없다. 비미호(卑彌呼), 박제상(朴堤上), 석우로(昔于老)의 기사 정도가 <삼국사기>와 <일본서기>에서 공동으로 나오지만, <삼국사기>에 등장하는 왜 관련 기사는 <일본서기>에 나오지 않은 것들이 많다. 그렇다면 일본 야마토 (大和) 정권의 지시를 받지 않은 왜족이 어딘가에서 신라를 공격한 것이다.


중국 서진(西晉)시대 중국인 진수(陳壽)가 편찬한 <삼국지> 위서 동이전을 보면, 이런 의문의 답을 구할수 있다. 몇구절을 보자.


① 한(韓)은 대방(帶方)의 남쪽에 있다. 동서는 바다로 경계를 삼고 남쪽은 왜와 경계를 접하니(南與倭接), 면적이 사방을 4천리쯤 된다. 세 종족이 있는데 그 첫째는 마한이고, 둘째는 진한이며, 셋째가 변한이다. 진한은 옛 진국(辰國)이다.

② 지금 진한 사람들은 모두 머리가 편평하다. 왜(倭)에 인접한 곳의 남녀들(男女近倭) 또한 문신을 한다.

변진의 독로국(瀆盧國)은 왜와 경계를 접하고 있다. (其瀆盧國與倭接界) (삼국지 동이전)


<삼국지 동이전>은 3세기 후반에 중국인이 동이족 곳곳을 돌아다니며 보고 들은 기행담을 모은 사서로, 12세기에 사료를 모아 쓴 <삼국사기>보다 사실에 근접해 서술했다고 볼수 있다. 당대의 기록이 1천년 후의 기록보다 정확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삼국지 동이전>에서 한(韓)의 남쪽에 왜와 접(接)해 있고, 진한과 왜가 가까이(近) 있으며, 독로국은 왜와 경계를 접하고 있다(接界)고 하질 않는가. 그렇다면 3세기에 한반도에 왜가 존재했다는 얘기가 된다.


<삼국지 동이전> 왜조에는 “왜인들이 문신을 하는데, 나라마다 각기 다르다”는 기사가 있는데, 왜와 가까이 있는 진한의 남녀가 문신을 따라했다는 기사에 설득력이 있다.


상식적으로 왜는 일본 열도에 있어야 한다. <삼국지 동이전> 왜조에서 “왜인은 대방의 동남쪽 큰 바다 가운데에 있고, 산과 섬을 의지해 국읍을 이루고 있다”고 해, 일본 열도가 왜인의 본거지임을 말해준다. 그렇다면 <동이전> 한조에서 말하는 왜는 일본 열도의 왜와 별도로 존재했다는 뜻이다.


<삼국지 동이전>의 기사가 맞다고 가정하자. 그렇다면 한반도에 존재한 왜의 위치는 어디일까.


마한은 서쪽에 있다(馬韓在西)고 했고, 진한은 마한의 동쪽에 있다(辰韓在馬韓之東)고 했다. 마한은 경기도와 충청도, 전라도 일부 지역이고, 변한은 부산 경남 지역이며, 진한은 경상북도 지역과 대체로 겹친다. 그러면 한(삼한, 즉 마한 진한 변한)과 남쪽으로 접하고, 변한의 한 국가인 독로국과 접하며, 진한과 가까운 곳은 바로 전라도 지역이다. <삼국지 동이전>은 호남 일대에 왜가 존재했음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나주는 한반도 왜의 중심?…한반도에서 일본식 전방후원분 존재 논란

<삼국지 동이전>과는 별도로 국내 사학계에서도 영산강 유역에 일본식 무덤이 대량으로 발굴되고 있다는 조사보고서가 나와 파문을 일으킨 적이 있다.


1972년 고려대박물관 주임으로 근무하던 윤세영이 충남 부여 규암면 합송리의 구릉 네곳을 조사한 결과를 토대로 “한국에도 일본식 무덤인 전방후원분(前方後圓墳)이 있다”는 내용의 기고문을 실었다.


전방후원분은 4~6세기 일본에서 성행했던 무덤양식으로, 평면도 상으로 보면 원형(圓形)과 방형(方形)의 분구가 붙어있는 모습을 하고 있다. 열쇠구멍 모양을 하고 있다고 해서 영어로는 ‘keyhole-shaped tomb’이라고 번역하며, 국내에서는 장고 같이 생겼다고 해서 ‘장고형 고분’이라고 한다.


윤세영의 주장으로 국내 고고학계는 벌집 쑤신 듯 시끄러웠고, 정부는 전문가들을 불러 문화재위원화를 개최했다. 위원회의 반응은 냉랭했다고 한다. <고고학자 조유전의 한국사 미스터리>


또다시 일본식 무덤 논쟁의 불을 지핀 사람은 1983년 강인구 영남대 교수였다. 강인구 교수는 경남 고성과 함안, 경북 고령, 전남의 나주, 영암, 무안, 함평의 고분들이 장고분이라고 주장했다. 한국고고학계는 “외형만 전방후원분일뿐, 실상은 자연구릉”이라며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지만, 일본 학계에서 뜨거운 관심을 일으켰다고 한다.


논쟁의 대상이 됐던 고분 중에서 부여와 고성의 고분은 나중에 장고형 고분이 아니라는 학계의 결론이 났다.


1980년대 후반엔 전남 함평 일대, 영암 일대, 광주 일대등 영산강 유역에서 장고형 고분이 연이어 발견됐다. 한국고고학계에서도 더 이상 장고형고분, 즉 일본식 정방후원분이 한국에 다수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기에 이른다. 영산강 유역에서 10여기 이상의 장고형 고분이 발견됐다. 이제는 일본식 무덤이니, 단순한 자연구릉이니 하는 논쟁도 사라지고, 그 무덤의 주인이 누구인가로 초점이 넘어갔다.


전라도 일대 전방후원분에 대한 조사는 일제때부터 시작됐다. 전라남도 나주군 반남면 자미산 일대에 30여기의 고분군이 산재해 있다. 반남고분군이다.


그곳의 고분이 겉모양에서 일본식과 비슷하다고 해서 일본인들이 관심을 갖고 조사에 착수했다. 조선총독부 고적조사위원회는 1917~1918년 고고학자들을 동원해 반남고분군에 대한 조사를 벌이고 1차 보고서를 냈다.


보고서는 이렇게 서술한다.


“반남면 자미산 주위 신촌리, 덕산리, 대안리 대지 위에 수십기의 고분이 산재하고 있다. 겉모양은 원형 또는 방대형(方臺形)이며, 한 봉토 내에 1개 또는 여러개의 도제옹관을 간직하고 있다. (중략) 이들 고분은 그 장법(葬法)과 유물 등으로 미루어 아마 왜인(倭人)의 것일 가능성이 크다.”


일본 조사단은 1차 조사후 오랜 기간 동인 정밀 조사를 미루었는데, 그 사이에 도굴이 발생해 나중에 2차 조사를 할 때 부장품을 거의 찾지 못했다고 한다. 국사학자 이덕일은 이희근과 함께 쓴 <우리 역사의 수수께끼>에서 일본이 ‘아마 왜인일 가능성’만 제기하고 정밀 조사를 미루어 도굴을 조장했는데, 그 이유는 임나본부설을 뒤집는 유물이 출토될 가능성을 두려워했기 때문일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덕일은 앞의 책에서 김부식의 <삼국사기>, 안정복의 <동사강목>, <당서>등의 지리지를 종합해 왜와 나주고분의 상관관계를 설명했다.


그에 따르면 당나라는 백제를 멸망시키고 그 지역에 웅진 마한 동명 금련 덕안등 5도호부와 대방주(對方州)를 설치했는데, 대방주가 과거 왜의 세력이 설치한 주(州)였다. 대방주의 중심현은 나주 회진현이며, 반나현이 지금의 반남현이다. 따라서 반남고분군의 주인공이 바로 한반도 왜의 지배자일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영산강 일대의 한반도 왜가 실재했다는 증거가 쌓이면서 <삼국사기>의 의문점이 조금은 풀린 듯하다. 벌휴이사금 때 호남지방에 가뭄이 들어 식량이 부족해 굶주린 한반도 왜인 천여명이 영남지방으로 몰려가 유민으로 떠돌았고, 영산강 유역의 왜가 소백산을 넘어 사신을 보냈을 가능성이 있다. 아울러 신라를 침공해 수백, 수천의 신라인을 잡아 육로로 끌어와 노비로 부렸을 가능성도 있지 않을까.



신라를 가장 괴롭히던 왜…광개토대왕 남정 이후 한반도에서 손 떼

서기 6세기 이전에 신라를 가장 많이 괴롭힌 나라가 왜였다.


<삼국사기>에는 시조인 혁거세 8년부터 왜의 침입 기사가 나온다. 왜와 관련한 기사는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무려 50차례 가까이 나온다. 이중 대다수가 침략 기사다.


신라를 괴롭힌 왜가 한반도 왜인지, 일본열도 왜인지에 대한 뚜렷히 구분하기 어렵다. 별도로 움직였을 때도 있었고, 서로 연락을 취해 공동으로 행동할 때도 있었을 것이다.


신라에게 왜는 매우 강력한 존재였다. 네차례나 수도 금성(金城)을 포위하고, 백성 1천명을 끌고 가는 침략 세력이었다. 임금의 동생을 볼모로 잡았고, 툭하면 대신의 딸을 왜왕에게 시집오라고 했다. 신라 임금이 왜의 공격을 받고 고민하는 장면을 <삼국사기>를 통해 들어 보자.


유례 12년(295년), 임금이 신하들에게 말했다.

“왜인이 자주 우리 성읍을 침범해 백성들이 편히 살 수가 없다. 백제와 도모해 일시에 바다를 건너 그 나라를 공격하고자 하는데 어떠한가?”

서불한 홍권이 대답했다.

“우리나라 사람은 물에서의 싸움은 익숙하지 않은데, 위험을 무릅쓰고 멀리까지 가서 정벌한다면 뜻하지 않은 위험이 있을까 걱정스럽습니다. 하물며 백제는 거짓이 많고 늘 우리나라를 집어 삼키려는 마음을 가지고 있으니 또한 함께 도모하기는 어려울 듯합니다.”

임금이 받아들였다.

흘해 37년(346년), 왜병이 갑자기 풍도(風島)에 이르러 변방의 민가를 노략질했다. 또 진군해 금성을 포위하고 급하게 공격했다. 임금이 싸우고자 하자 이벌찬 강세가 말했다.

“적은 멀리서 왔습니다. 그들의 날카로운 기세를 당해낼 수가 없으면 공격을 늦추어 그 병사들이 피로해지기를 기다리는 것만 못합니다.”

임금이 받아들여 성문을 닫고 나가지 않았다. 적들이 식량이 떨어져 물러가려 하니, 날쌘 기병으로 추격토록 해 쫓아버렸다.

실성 7년(408년), 임금은 왜인이 대마도(對馬島)에 군영을 설치하고 무기와 군량을 쌓아두고는 우리를 습격하려 한다는 말을 듣고서, 일이 터지기 전에 먼저 정예 병사를 뽑아 적의 군영을 격파하고자 했다.

서불한 미사품이 말했다.

“무기는 흉한 도구이고 전쟁은 위험한 일이라고 들었습니다. 하물며 큰 바다를 건너서 다른 나라를 정벌하는 것은 어떠 하겠습니까? 이기지 못하면 후회해도 돌이킬 수 없을 것이니, 지세가 험한 곳에 관문(關門)을 만들고 적들이 오면 막아, 그들이 침입하여 어지럽히지 못하게 하다가 유리한 시기가 되면 나가서 그들을 사로잡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이것은 이른바 남은 끌어당기고 남에게 끌려 다니지는 않는 것이니, 최상책이라 하겠습니다.”

임금이 그 말에 따랐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왜의 공격에 신라는 속수무책이었다. 수도인 금성을 지켜 농성하고, 왜군이 지치기를 기다렸다가 역습하는 수세적인 방법을 취했다. 신라는 물의 싸움(水戰)에 약했다. 임금도 이를 인정했다. 바다를 건너가 선제 공격하는 것은 생각지도 못했다. 그저 관문을 지켜 왜병이 수도로 들어오지 못하게 하는 것이 최선이었다.


마냥 당하기만 하던 신라는 5세기 들어 해상 전략을 강화해 나갔다.


자비 임금은 즉위 6년(463년)에 담당관에 명해 전함을 대대적으로 수리케 하고, 지증왕 6년 (505년)엔 선박이용의 제도(舟楫之利)를 정비했다.


그리고 이제는 내륙이 아니라, 해안에서 왜의 침공을 저지했다. 실성 14년(415년), 신라 수군이 풍도(風島)에서 싸워 이겼다.


512년 이사부 장군이 바닷길을 건너가 우산국을 정벌한 것은 물을 두려워 하던 신라 수군으로선 엄청난 발전이며, 신라군에 바닷 싸움(해전)에서 자신감을 얻게 한 전투였다.


왜는 고구려와 신라의 힘이 강해지면서 서서히 한반도에서 빠져 나갔다.


한반도 왜의 첫 번째 타격은 고구려 광개토대왕이었다. 광개토대왕은 영락 10년(400년) 보병과 기병으로 무려 5만 병력을 보내 신라를 구원케 했다. 고구려군이 서라발에 이르러, 그곳에 가득한 왜군을 쳐 퇴각시키고, 왜의 동맹세력인 임나(任那)가야의 종발성(從拔城)까지 진군해 성주의 항복을 받아냈다. 고구려의 공격으로 한반도 왜는 심대한 타격을 받은 것 같다.


두 번째 타격은 신라 이사부였다. 이사부는 지증왕 13년(512년) 우산국을 정벌하고, 동해 제해권을 쥐면서 동해안 일대에 대한 왜의 노략질을 차단했다. 아울러 이사부가 왜의 동맹세력인 금관국을 정벌해 구해왕이 신라에 항복하자, 남해안 일대에 대한 해상 지배력도 확보하게 됐다.


신라가 남해안의 제해권을 확보하게 되자, 열도와 한본도 왜 사이에 수송로가 끊기고, 이에 따라 한반도 왜는 퇴로 차단에 앞서 열도로 넘어갔다고 추측된다.


삼국사기에서 왜와 관련한 기사는 신라 소지왕 19년(497년), 백제 비유왕 2년(428년) 이후 사라진다. 5세기말쯤 한반도 왜가 거의 대부분 일본으로 건너가고, 잔류한 왜인들은 백제, 나중엔 신라에 동화돼 간 것으로 보인다.


160년간 우리 사서에서 사라졌던 왜가 662년 다시 나타난다. 백제가 멸망하고, 일본열도의 왜는 백제부흥세력을 지원하기 위해 5만 수군을 동원해 상륙하려다 백마강(금강) 어귀에서 전멸했다.


문무왕 2년(662년), 손인사와 유인원과 신라왕 김법민(金法敏)은 육군을 거느리고 나아가고, 유인궤와 별수(別帥) 두상(杜爽)과 부여융(扶餘隆)은 수군과 군량을 실은 배를 거느리고, 웅진강으로부터 백강으로 가서 육군과 합세하여 주류성으로 갔다. 백강 어귀에서 왜국 병사를 만나 네 번 싸워서 모두 이기고 그들의 배 4백 척을 불사르니, 연기와 불꽃이 하늘을 덮고 바닷물도 붉게 물들었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삼국사기>에는 백강전투 장면을 짧게 소개하며, “연기와 불꽃이 하늘을 덥고 백마강이 붉게 물들었다”며 전투의 치열함을 짧게 표현했지만, <일본서기>에는 울분을 삼키며 백촌강 전투(白村江の戦い) 상황을 자세하게 소개하고 있다.


백제부흥운동마저 수포로 돌아가자, 왜는 더 이상 한반도에서 손을 떼고 나라 이름을 일본(日本)으로 바꾸며 영토를 열도로 국한시켰다.


삼국을 통일한 신라 문무왕은 왜의 침입에 대비해 죽을 때 자기 무덤을 동해 바다에 묻으라는 유언을 남겼다. 용이 되어 동해로 침입하는 왜구를 막기 위해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