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영필
가톨릭을 개신교 신자가 비판하는 논점은 여러 가지이지만, 그 중의 하나가 제사 참배이다. 우리 나라와 같이 조상 제사가 보편화된 나라에서 개신교 신자는 명확히 구별된다. 그들은 제사 예절에 참여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상가에서도 절을 하지 않는다. 그런데, 가톨릭 신자로서 나는 개신교 신자의 자세가 정당하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가톨릭 신자들이 교황청의 제사 훈령 내 일부 금지 조항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한 채 제사 의식을 수행하기 때문이다. 그 문제란 제사를 지낼 때 조상의 신위를 모셔놓고 의식을 행하는 것이다. 제사를 허용하는 명분은 제사를 조상에 대한 추모와 효의 전통문화로 이해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조상의 위패에 '신주'나 '신위'를 쓰고 축문을 읽어 초혼하는 행위는 조상을 신으로 섬기는 것이므로 일신교인 기독교에서는 결코 수용될 수 없다.
여기서 잠깐 이상한 지점이 있다. 그것은 우리 천주교가 그렇게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천주교에 대한 4대 박해와 순교의 역사가 신앙 선조들의 단호한 제사 철폐로 인해서 발생했다는 사실이다. 천주교를 스스로 받아들인 우리 선조들은 조상 제사에 대한 교황청과 교단의 판단을 구해 그 지침에 따라 제사를 공공연히 철폐하여 그로 인한 가혹한 박해로 순교하였는데, 어째서 그 후예인 우리들은 당연히 없앴어야 마땅한 제사 예절을 아직도 버젓이 거행하고 있느냐는 것이다. 또 그로 인해, 서릿발 같았던 조상들의 기개와는 너무나도 다르게, 100년이나 뒤에 진입한 후발 개신교인들에게 항상 두루뭉실한 적응주의적 관점을 설파해야 하느냐는 것이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그것이 신사참배와 관련된 문제였다는 것이다. 천주교와 교황청이 스스로 비유럽지역의 문화에 대해 공감을 하여 제사를 허용한 것이 아니라, 일제의 실력행사에 의해 일부 원칙을 포기한 실용주의적 접근을 한 여파라는 것이다. 망해가는 중국 청조의 효경사상은 무시할 수 있었으나, 아시아 태평양 일대를 호령하던 떠오르는 일제의 압박에는 어쩔 수 없었기에 그들은 신사참배를 허용하였고, 또 그 수용 논리의 연장선상에서 조상제사를 허용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우리는 박해받은 선조들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게 제사를 지내는 기독교인이 되었다. 그런데, 묘한 것은 만약 제사를 허용하지 않았다면, 우리 집안은 절대 기독교를 신앙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점이다. 내가 생각하기에 우리나라에서는 대한민국 건국 이후 제사와 기존 전통을 포기할 수 있었던 사람들은 개신교로 가고, 제사와 기존 전통을 결코 포기할 수 없었던 사람들은 천주교로 왔다고 생각한다. 전혀 기독교인답지 않은 내가 기독교인이 될 수 있었다는 것도 어쩌면 교회와 세속권력 간의 줄다리기로 인한 틈새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그렇기에 믿음이란 꽤 아슬아슬한 문화 변용의 과정이기도 하다.
출처: 가톨릭평화신문, 2020.3.2., 민족문제연구소.
한국 교회와 일본 교회의 신사 참배 문제에 관하여
우상숭배로 규정하고 참석 금했지만 군국주의 막지 못한 교회
... 신사(神社) 참배는 한국 천주교회에 ‘트라우마’로 남았다... 55년 세월이 흐른 뒤에야 교회는 2000년 대희년 12월 과거사 참회 예식을 거행, 신사 참배와 함께 일제 침략 전쟁에 협력하고, 독립운동에 앞장선 신자들을 단죄한 잘못을 참회했다.
한국외방선교회 유가별 신부는 교황청립 그레고리오대학교에서 학부 통합과정과 석ㆍ박사과정에서 교회사를 전공한 뒤 ‘1882년부터 1936년까지 한국 교회와 일본 교회의 신사 참배 문제에 관하여’를 주제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신사 참배를 주제로 한국과 일본 교회, 교황청 등지의 사료를 기초로 쓴 최초의 박사 학위 논문이다...
1920~1930년대 한ㆍ일 교회
1932년 5월, 일본 예수회가 운영하는 도쿄 조치대 학생들이 야스쿠니 신사 참배를 거부한다. 이에 조치대에 파견됐던 교관은 격분해 이 사건을 일본 육군성에 보고하고 대학에서 전격 철수한다. 이 사건으로 장교 임용이나 군 복무 기간 단축 혜택을 받지 못하게 된 조치대 입학 지원자가 격감하고 조치대는 존폐 기로에 선다. 그뿐만 아니라 일본 내에선 사회적으로 반가톨릭 분위기가 조성됐다. 대학 측은 다시 교관을 영입하려 했지만, 1933년 12월이 되기까지 불발했다. 신사 참배 허용을 비롯해 일본 국가주의에 충성하겠다는 구체적 조치를 취하지 않고서는 교관 재임명을 허용하지 않았다.
1934년 12월 일본 규슈 최남단 가고시마현 오시마에서 일본 국가주의와 신사 참배 요구가 강화되는 또 다른 사건이 발생한다. 오시마에서 선교 중이던 캐나다 출신 작은 형제회(프란치스코회) 선교사들이 신사 참배를 거부, 반국가주의적 행위를 했다는 오명을 썼다. 오시마 주민들은 성당을 약탈했고, 온갖 위협과 폭력에 시달린 끝에 오시마 선교사들은 결국 철수했다. 또한, 오시마의 거의 모든 가톨릭 신자들이 배교를 선언하자 나가사키 주교는 가톨릭 신자들의 신사 참배를 허용했고, 일본 주교단 또한 이 지침을 뒤따랐다.
조선은 어땠을까? 1924년 10월 강경공립보통학교(현 강경중앙초등학교)에 다니던 나바위본당 신자 학생들이 신사 참배를 강요하는 교장 지시에 불응해 퇴학당했다. 또한, 1925년 10월 서울 조선신궁(현 서울 남산공원과 안중근의사기념관 일대) 진좌제(鎭座祭, 신령이 내려와 위패에 깃들게 하는 제사 의식)를 전후해 대구 효성여학교(현 효성초등학교)를 비롯한 가톨릭 학교들이 진좌제 관련 행사에 불참하는 사건이 벌어지기도 했다. 이 사건과 관련, 서울대목구장 뮈텔 주교와 대구대목구장 드망즈 주교는 문부대신을 만나 “가톨릭교회는 신사 참배를 할 수 없다”는 입장을 분명히 했다. 1920년대까지만 해도 이처럼 한국 교회는 일관되게 신사 참배를 우상숭배로 봤고, 참배를 막았다. 1931년 전국 대목구장 공동명의로 발표한 「한국 천주교 공용 지도서」도 신사 참배를 미신으로 규정하고, 신자들의 참석을 금지했다.(466항)
한ㆍ일 교회는 왜 신사 참배를 금했나
일본과 한국 교회는 당시 왜 신사 참배를 금지했을까? 신사는 일본인들이 자신들의 신을 모셔놓고, 그 신을 재장(齋場)ㆍ교장(敎場)의 성스러운 터전으로 믿고 제사를 지내는 곳이었기 때문이다. 제사 대상이 된 ‘카미’(神)는 자연신을 총칭한 것으로, 포괄적으로는 신화적, 역사적 인물이나 위인, 조상의 영들도 카미로 숭배했고, 이를 ‘야오요로즈노카미’(八百万の神)라고 불렀다.
메이지유신 초기, 일본 정부는 ‘신도 국교화’ 정책을 추진했으나 종교계 반발에 부딪히자 ‘신사신도’(神社神道)의 비종교화를 추진한다. 메이지 정부는 1882년 ‘국가 신도화 법령’을 반포, “신사 신도는 국가 제사이지 종교가 아니다”라고 주장하며, 신도를 종교에서 분리했다. 이후 내무성 산하에는 종교국을, 문부성 산하에는 신사국을 두어 행정적으로 신사신도를 일반 종교의 범주에서 구분시켰다. 동시에 국가 신도는 더는 종교에 해당하지 않기에 정치와 종교 분리 원칙에 속하지 않는다고 주장할 근거를 마련했다.
그러나 1910년대로 접어들며 신사 참배가 가톨릭교회와 얽히면서 문제가 발생한다. 처음에는 국가 공무원의 의례 행위로만 봤기에 큰 문제가 되지 않았지만, 일본 정부가 1911년 모든 학교 학생들에게 교사 인솔 하에 신사 참배를 할 것을 의무화했기 때문이었다.
교황청의 입장
이에 따라 교황청과 일본 간 신사 참배 문제에 대한 교섭이 이뤄진다. 1916년 필리핀 교황사절 주세페 페트렐리 주교는 늦게나마 1912년 즉위한 다이쇼 일왕의 즉위를 축하하고 일본과 바티칸 간 수교를 이루기 위한 목적으로 일본에 파견됐다. 그의 파견 보고서에서 처음으로 일본 신사 참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교황청 개입 필요성이 언급됐다.
이어 이듬해 2차로 신사 참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일본에 건너간 페트렐리 주교는 방일 중 나가사키ㆍ도쿄ㆍ하코다테 등지 교구장 주교들과 만나고 일본 외무대신 모토노 이치로(本野一)와도 접견하지만, 가톨릭 신자들에 대한 신사 참배 관면은 별다른 진전 없이 논의로만 끝나고 만다.
신사 참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일본 교회의 노력은 계속됐다. 1919년 일본 해군 제독이자 가톨릭 신자였던 야마모토 신치로(山本進次郞)는 파리강화회의에서 바티칸과 일본 수교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그는 신사 참배 문제를 해결하려면 바티칸과 일본 당국자 간 대화가 필요하다고 밝히며 20여 가지의 청원을 담은 편지를 교황청에 보낸다.
이에 따라 교황사절이 파견된다. 초대 주일 교황사절은 이탈리아 출신 푸마소니 비온디 주교(1919∼1921년 재임), 제2대는 같은 이탈리아 출신의 마리오 자르디니 주교(1922∼1931년 재임)였다. 제3ㆍ4대 주일 교황사절은 미국 출신 에드워드 무니 주교(1931∼1933년 재임)와 파올로 마렐라 대주교(1933∼1948년 재임)이다. 이 두 주교가 일본의 신사 참배를 허용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다.
제사 허용 문제
그래도 1920년대까지는 신사 참배 문제가 그리 심각하지는 않았다. 1931년 일제가 만주사변을 일으킨 데 이어 신사 참배에 반대하는 가톨릭 신자들을 처벌하기 시작하면서 가톨릭 학교에서 문제가 커졌다. 이에 주일 교황사절 파올로 마렐라 대주교는 초대 중국 교황사절인 첼소 콘스탄티니 주교에게 요청, 베네딕토 14세 교황이 1742년 7월 반포한 「조상 제사 금지에 대한 회칙」(Ex quo singulari)과 관련해 조상 제사의 문화적 측면을 다시 한 번 논의해 달라고 요청한다. 중국의 공자 의례 문제와 한ㆍ일 신사 참배 문제는 서로 긴밀히 연결돼 있어 신사 참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공자 의례 문제가 먼저 해결돼야 한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한ㆍ중ㆍ일 가톨릭교회에서 신사 참배가 허용되는 데 실마리가 되는 회의는 1935년 3월 12일 만주국 수도 신징(현 창춘)에서 만주국 주재 교황청 대표 오귀스테 가스페 주교가 참석한 가운데 열린 만주국 주교단의 공자 의례에 관한 회의였다. 신사 참배를 허용하는 데 가장 문제가 됐던 것은 제사 중 위패(位牌)에 절하는 문제였는데, 만주국 주교들은 위패에 절하는 문제를 문화적 행위로 보고 허용하는 게 바람직하다는 결정을 내리고 교황청에 보고했다. 비오 11세 교황은 이에 따라 1935년 5월 28일 만주국 주교단의 결정을 인준하고, 공자 의례 예식에 일부 금지한다는 단서 조항을 달아 신자들의 참여를 허용했다. 이어 1936년 5월 26일 교황청 포교성성(현 인류복음화성) 훈령을 통해 제사와 함께 신사 참배를 전격 허용한다.
한ㆍ일 교회의 신사 참배 허용
만주국 주교단의 이 같은 결정은 한ㆍ일 주교단의 신사 참배 허용에 결정적 영향을 미친다. 독일 출신으로 일본 히로시마대목구장으로 있던 요한네스 로스 주교도 1932년 ‘신사 참배에 관한 교회법적 허용 가능성’이라는 주제의 논문을 발표, 일본 교회가 신사 참배를 허용하는 데 교회법적 근거를 제시한 것도 영향을 줬다. 그는 1983년 개정 이전 구 교회법 1258항 ‘가톨릭 신자의 비가톨릭적 종교예식 참여에 관한 규정’에서 신사 참배 참여 허용 원리를 찾아냈고, 주일 교황사절 에드워드 무니 주교는 이 논문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신사 참배의 길을 열었다. 무니 주교는 이 논문을 한ㆍ일 주교단에 모두 보내고, 논문을 본 소감을 달아 회신하라고 요구한다. 이어 도쿄대교구장은 논문의 결론을 도출하고, 주일 교황사절은 신사 참배가 허용될 수 있다는 규정을 만들어 제시한다. 이 논문을 접한 서울대목구장 라리보 주교는 1933년 10월 신사 참배 반대 입장을 바꿔 대구대목구장 드망즈 주교와 같이 신사 참배에 긍정적 입장을 표명할 정도로 신사 참배 허용에 결정적 문건이 되었다.
한국 교회 내 갈등
당시 한국 교회는 신사 참배 문제를 놓고 첨예한 갈등을 빚고 있었다. 이에 앞서 서울대목구장 뮈텔 주교는 1926년에 펴낸 교리서 「천주교요리」(天主敎要理)를 통해 신사 참배를 금지했다. 또 1931년 조선대목구 설정 100주년을 맞아 전국 공의회를 개최하고 발표한 사목 지침서에서도 신사 참배는 금지됐다. 하지만 1932년에 내놓은 「천주교요리」 개정판에서는 입장이 확 달라져 신사 참배를 허용했다.
1932년만 해도 서울ㆍ대구ㆍ원산대목구와 평양ㆍ연길지목구 주교단 중 대구의 드망즈 주교를 빼고는 모두 신사 참배를 반대했지만, 나중에는 다른 주교들도 입장을 바꾼다. 신사 참배를 지속적으로 반대하던 평양지목구장 모리스 몬시뇰이 1935년 갑작스레 찬성하는 입장을 표명해 한국의 모든 지역 교회는 신사 참배 찬성 입장으로 돌아선다.
끝까지 반대하던 메리놀회 선교사 월터 콜만 신부와 레오 스위니 신부는 미국으로 소환됐다. 콜만 신부는 탄원서를 교황청 성무성성(현 신앙교리성)에 보냈지만, 초대 주일 교황사절을 지낸 포교성성 장관 푸마소니 비온디 추기경이 이를 묵살했다.
1933년에 결정된 신사 참배 반대 번복을 교회가 곧바로 공개한 것은 아니었다. 주교회의 안에서만 공유하다가 번복 사실을 공개한 것은 3년 뒤 「경향잡지」 1936년 4월 호를 통해서였다. 이어 한 달 뒤 포교성성 훈령이 발표되자 한국 주교회의는 신사 참배와 관련된 사목 지침서 조항을 개정, “신사 참배는 애국 행위의 표명”이라고 규정했다. 한편 일본 정부도 1936년 ‘신사 참배의 종교성 여부 조사위원회’를 꾸려 신사 참배의 종교성 여부에 대한 논쟁을 벌였지만, 이 위원회 역시 종교와 관련이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신사 참배 종언
1945년 8월 15일 낮 12시 쇼와 일왕이 무조건 항복을 선언하면서 신사 참배는 사실상 종언을 알린다. 그해 12월 5일, 연합군 총사령부는 “국가 신도와 관련된 모든 교육과 지지, 홍보 등을 엄격히 금지하는 조처를 내린다”고 발표한다.
신사 참배가 공식 금지된 지 이제 75년이 지났다. 1868년 메이지유신을 통해 일본에서 ‘신사신도’가 ‘국가신도’가 되면서 비롯돼 군국주의 망령 속에서 횡행했던 신사 참배는 이제 공식적으로는 수면 아래 잠겨 있다.
1995년 일본 주교회의 정의평화평의회가 “일본 교회가 신사 참배를 애국주의라는 미명하에 수용했고, 아시아와 태평양 주변 국가 신자들에게 씻을 수 없는 큰 아픔을 줬다”고 고백하며 공식적으로 신사 참배 허용이 잘못이었다고 인정한 것은 그래서 의미가 깊다.
출처: 가톨릭신문, 신의식, 2021.6.27.
전통과 신학의 100년 다툼 - 중국의례논쟁
제사 허용 여부 따라 전교 활동도 ‘갈팡질팡’
효경의 표현으로 제사 허용한 예수회 적응주의 선교와 달리 도미니코회 등 다른 수도회는 미신적 종교의례로 금지 요청
‘제사 금지’ 교회 결정에 따라 선교사 추방되고 선교 금지돼
중국의례논쟁(中國儀禮論爭, Controversia de ritibus)은 예수회와 예수회를 제외한 여러 수도회(도미니코회, 프란치스코회, 아우구스티노회, 파리 외방 전교회) 간에 1634년부터 1742년까지 있었던 ‘Deus’의 용어사용, 조상제사(祭祖), 공자제사(祀孔)의 현지 적응주의와 신학적 차원에서의 논쟁을 말한다.
■ 예수회 내부의 중국의례문제
마테오 리치 사후 예수회 중국지구 회장 직무를 계승한 롱고바르도(N. Longobardo)는 조상제사 허용 여부와 ‘Deus’에 대한 중국어 용어 사용 여부에 대해 수도회 내부에서 공식적으로 문제를 제기했다. 1628년 1월 롱고바르도는 가정(嘉定)회의를 개최했고, 두 가지 결론을 내렸다. 하나는 ‘Deus’에 대한 용어로 ‘천’(天), ‘상제’(上帝), ‘두사’(斗斯, Deus의 중국어 음역)를 금지시키고, ‘천주’(天主)라는 용어로 통일했다. 다른 하나는 효경의 표현이라는 의미에서 조상제사를 허용했다.
■ 중국의례논쟁의 전개-수도회 간의 갈등
도미니코회 선교사인 모랄레스(J. B. Morales)는 복건성 복안에서 전교 선생이었던 중국인 왕다두(王達竇)를 통해 본 조상 제사는 모두 미신적인 종교의례라 단정하고 17개 조항의 문제점을 교황청에 제기하면서 논쟁은 시작됐다. 모랄레스는 1643년 직접 로마로 건너가 당시 우르바노 8세 교황에게 예수회의 적응주의적 전교 방법의 가부 결정을 요청했다. 그러나 교황의 급서로 후임 인노첸시오 10세 교황이 1645년 9월 12일 종교재판소의 의견을 받아들여 중국의례를 금지한다는 훈령을 내렸다.
이에 예수회에서는 1651년 마르티니(M. Martini)를 로마로 파견해 공자와 조상에 대한 제사는 종교적 의미가 없음을 강조했고, 만약 금지시킨다면 중국 선교도 불가능해진다는 이유로 해제시켜 줄 것을 요청했다. 이에 알렉산데르 7세 교황은 1656년에 “중국의 신자들은 공자와 조상을 기리는 의식에 참여할 수 있다”는 훈령을 내렸다. 1659년 도미니코회 선교사 폴랑코(J. Polanco)가 어느 훈령을 따라야 하는지를 교황청에 질의하자, 1669년 클레멘스 9세 교황은 “모두 동일한 효력을 가지고 있으며, 각각 구체적 환경에 따라 적용돼야 한다”는 절충안을 발표했다.
이후 중국 교계제도의 변화로 파리대학 신학박사인 메그로(C. Maigrot)가 1684년 복건 종좌대목(주교)에 임명되자, 1693년 3월 20일 그는 자신의 교구에서는 중국의례를 엄금할 것을 천명했다. 이에 북경에 거주하는 그리말디(P. Grimaldi), 토마스(A. Thomas), 페레이라(T. Pereira), 제르비용(J. F. Gerbillion) 등 예수회 선교사는 강희제에게 의례문제에 대해 잘못된 부분을 지적해 달라는 청원서를 올려 황제의 의중을 파악했다. 황제는 “아무것도 고칠 것이 없다”며 예수회 생각과 같음을 분명히 밝혔다. 이후부터 중국의례논쟁은 수도회 간 문제에서 교황과 황제와의 문제로 발전했다.
■ 교황과 황제 간 중국의례논쟁
1704년 11월 20일 클레멘스 11세 교황은 ‘천주’ 호칭만을 허락하고, 공자와 조상에 대한 제사를 금지할 것을 선포하면서, 교황특사 투르농(C. Tournon)을 파견해 강희제를 설득하고자 했다. 1705년 12월 4일 북경에 도착한 투르농은 강희제 설득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하고, 1706년 유럽으로 돌아가고자 했다. 대신 자신을 보필하고 있던 ‘중국통’이라 불리던 복건대목 메그로를 황제에게 추천했다.
그러나 투르농이 12월 17일 남경에 도착했을 때, 강희제가 “한자도 제대로 모르는 자가 감히 중국의 도를 논한다”며 메그로를 쫓아냈다는 소식을 듣게 됐다. 투르농은 1707년 1월 25일 ‘남경 명령’을 공포했는데, 그 내용은 중국의례 금지 명령과 황제가 천주교에 대해 묻는 것에 어떻게 대답해야 하는지에 대한 것이었다.
이와 같이 거듭된 일로 격노한 강희제는 투르농 일행을 마카오로 추방함과 동시에 중국에서 전교를 희망하는 선교사들은 인표(印票)를 소지하도록 했다. 인표(印票)에는 “영원히 서양으로 돌아가지 않는다”는 등의 내용이 기재돼 있었고, 선교사는 마테오 리치의 규율을 따를 것을 선서한 후에야 발급받을 수 있었다.
1715년 3월 19일 클레멘스 11세 교황은 칙서 「그날들」(Ex illa die)을 통해 ‘중국의례에 대한 7개 조항’을 선포했다. 내용은 ‘천주’이외의 용어 사용금지, 전통식의 조상제사 및 공자제사 금지였다. 단, 망자의 이름 위에 반드시 ‘천주교효경부모지도리’(天主敎孝敬父母之道理)라고 적어야만 위패사용이 허락됐다.
클레멘스 11세 교황은 메차바르바(C. A. Mezzabarba)를 2차 교황특사로 중국에 파견했다. 1720년 12월 25일 북경에 도착한 메차바르바 특사는 강희제에게 전교 허용 및 의례 금령을 실시하게 해 달라는 것이 자신이 온 목적임을 밝혔다. 강희제는 “천주교 전교 금지는 교황 칙서 「그날들」(Ex illa die) 때문”이라고 말하자, 메차바르바 특사는 칙서를 변형시켜서라도 강희제와의 타협을 모색하기에 이르렀다. 이것이 메차바르바 특사가 남긴 ‘준행8조’(准行八條)다.
메차바르바 특사는 1721년 1월 14일 ‘준행8조’로 황제의 호감을 사려고 했으나, 황제의 생각에 변함이 없음을 확인하고는 지체 없이 중국을 떠났다. 1722년 강희제의 서거로 다음 황제가 된 옹정제는 1724년 과학 분야에 종사하던 선교사만을 남기고 모두 중국 밖으로 추방시키고 선교 금지 명령을 내렸다.
■ 중국의례논쟁의 종결 및 이후
1742년 7월 11일 베네딕토 14세 교황은 칙서 「경우에 따라서」(Ex quo singulari)를 선포해 1715년의 칙서 준수와 함께 더 이상 의례에 대한 논란을 금지시킴으로써 의례논쟁을 종식시켰다. 이 여파로 인해 예수회는 1773년 7월 21일 클레멘스 14세 교황에 의해 수도회가 해산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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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경향잡지, 2009년 11월호, 조광 이냐시오.
한국 교회사 열두 장면 - 박해시대 교회사와 조상제사 문제
... 지난날 교회에서는 동양의 조상제사를 미신의 일종인 조상신에 대한 숭배행위로 규정했고 신자들에게 이를 금지시켰다. 반면에, 1939년 이후 오늘의 교회는 조상제사를 용인한다...
조상제사에 대한 이해
조상제사 문제는 원래 중국 교회에서 불거진 문제였다. 중국에 파견된 마테오 리치(Matteo Ricci, 利瑪竇, 1552-1610년)를 비롯한 예수회 선교사들은 현지의 관습을 존중하며 그리스도교 신앙을 중국에 전하고자 했다. 이들은 중국의 지배적 사상을 유교로 파악하고, 그리스도교가 유교를 보완해서 더욱 완벽하게 해준다는 보유론(補儒論)을 선교신학으로 제시했다. 이에 따라 교회는 중국의 제천의식(祭天儀式), 공자숭배, 조상숭배와 같은 관행을 인정했다.
그러나 1632년 이후 중국에 도착한 설교자회(도미니코회), 작은 형제회(프란치스코회), 파리 외방 전교회 등 선교단체들은 예수회의 선교신학에 대한 재검토를 하고, 조상숭배 등을 교리에 어긋나는 이단적 행위라고 규정했다. 이들의 반론에 따라 중국에서는 신학적 논쟁이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이에 로마 교황청에서는 1715년의 교령을 통해서 조상제사 등 중국 전례를 금지시켰지만, 예수회가 반론을 제기하자 제사를 다시 허용했다. 그러나 도미니코회 등의 재반론 결과, 교황청은 1742년에 새로운 회칙을 반포하여 조상제사를 미신으로 규정하며, 이 문제에 대한 논의가 더 이상 전개되는 것을 금지시켰다.
그러므로 우리나라에 천주교가 세워진 1784년 당시 교회는 조상제사를 공식적으로 금지하였다. 그러나 우리나라 교회를 세운 이들은 마테오 리치 등이 저술한 서학서적을 통해서 천주교 신앙에 접근하고 있었다. 따라서 그들은 조상제사 문제 등으로 갈등할 까닭이 없었다. 우리나라 교회를 일군 당대의 양반 지식인 출신 신자들은 그리스도교 신앙에서도 제사라는 의식을 통해 조상에 대한 효도를 실천할 수 있다는 데에 별다른 의심을 하지 않았다.
사실, 조선후기에는 조상에 대한 제사의 관행은 조상과 부모에 대한 효행을 중시하던 우리의 전통문화와 사상과 직결되어 있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효행 · 효도의 관념은 원래 불교와 샤머니즘의 전통에서도 함께 존중해 왔던 정신적 가치였다. 유학을 지도이념으로 삼았던 조선왕조에서 조상제사는 바로 유교적 형식을 통해서 구현되었지만, 거기에는 효를 중시하던 우리 전통문화적 관념이 내포되어 있었다. 조상제사는 당시 가장 중요한 가치로 인정되던 효심의 자연스런 표현으로까지 이해되고 있었다.
또한 조선왕조에서 제사문제는 단순한 관념상의 문제였다기보다는 사회적 의미를 갖는 행위이기도 했다. 우리나라에서 맏아들의 제사상속권이 강화되고 양반사족들이 본격적으로 사대봉사(四代奉祀)를 하게 된 시기는 17세기 이후였다. 이 사대봉사는 양반 신분층의 상징이었다.
양반사족들은 사대봉사를 통해서 제사에 같이 참여하는 ‘팔촌 이내의 친족’[八寸親]으로 공동체를 형성해서 변동하는 사회에 대처해 가고 있었다. 조상에 대한 제사는 양반가문에게 사회적 결속과 존립의 기반을 마련해 주었다. 이처럼 조상제사는 우리 사회의 주요한 정신적 가치였고 사회적 관행이었다.
제사 금지에 따른 박해
우리나라 천주교회를 이끌던 이들은 1789년경 최신판 천주교 서적을 탐독하던 과정에서 천주교에서는 조상제사를 금지한다는 사실을 읽게 되었다. 이는 자신들이 읽은 예수회 계통에서 간행한 책들과는 다른 내용이었다. 이에 교회 지도자들은 베이징에 있던 구베아 주교에게 윤유일(尹有一) 등을 파견하여 천주교 서적 자체 안에서 드러나는 이와 같은 상위점에 관해 문의했다.
당시 조선 교회의 지도자들은 조상제사가 효심의 발로이며 표현이라는 점에 거의 모두가 동의하고 있었다. 그래서 베이징에 파견되었던 윤유일은 구베아 주교에게 조상제사가 “죽은 이를 섬기기를 산 이와 같이 한다.”[事死如事生]는 일임을 설명했다. 그는 가능한 한 조상제사를 계속해서 드릴 수 있다는 주교의 지침을 얻고자 한 듯하다. 그러나 구베아 주교는 이미 1742년에 결정된 교황청의 지침에 따라 조상제사를 지낼 수 없다는 사실을 알려주었다.
이렇게 전해진 조상제사 금지령은 양반사족 출신 신도들에게 매우 심각한 문제를 제기했다. 조상제사가 금지됨으로써 양반 가문의 신도들 중 상당수가 교회를 멀리하게 되었다. 조상제사의 포기는 곧 조상과 부모에 대한 아름다운 효도를 포기하는 행위로 인식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은 효행을 충성보다 소중히 여기던 양반으로서 그 명망과 특권을 버리고, 가문을 존립시키는 사회적 기반을 무너뜨리는 일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조상제사 금지령이 조선교회에 전해지자 일대 혼란이 일어났다. 지도적 신자들 가운데 일부는 전통 제사의 양식을 변형하여 간소화하여 지내거나 허배(虛拜)를 하기도 했다. 그리고 이 때문에 천주교 신자에 대한 정부의 탄압에 앞서서 양반 문중의 박해가 심각하게 일어났다. 이 과정에서 양반층 신도 가운데 적지 않은 사람들은 새롭게 터득한 천주교 신앙을 버리고 자신이 원래 속했던 유교문화로 재편입되었다.
박해시대 교회사를 보면 천주교 신자들은 조상제사도 드리지 않는 불효막심한 존재로 규탄되고 있다. 조상제사에 대한 교회의 금지령은 교회에 대한 탄압정책을 표면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물론 당시 박해가 발생한 데에는 여러 복합적 요소가 작용하고 있지만, 제사금지 정책은 박해의 주요 명분을 제공해 주었다. 이 때문에 적지 않은 교회의 지도자들이 양심의 갈등을 겪으며 교회를 떠나야 했다.
박해시대 내내 조선정부에서는 제사를 거부하며 조상에 대한 효심을 저버린 신자들을 ‘사람 낯바닥에 짐승마음[人面獸心]을 가진 불효한 집단으로 매도했다. 이 때문에 국가에서는 천주교 신앙을 가진 사람들을 양반사족의 반열에 끼워주지 말라고 명령했다. 정부는 천주교 신앙에 물든 불효한 ‘어리석은 백성들’을 바로 잡아주고자 천주교에 대한 탄압을 단행했다.
당시 교회에서 제사를 금지한 까닭은 조상신에 대한 숭배로 파악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박해과정에서 어느 누구도 조상신을 섬기지 않는다는 이유로 탄압받은 바가 없다. 그들은 불효자로 규탄당했고 처형되었다. 이 점에서 우리는 중국 교회의 제사문제와 우리의 제사문제가 전적으로 동일한 선상에서 파악되기는 어렵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지난날 교회에서 제사를 금지시킨 데에는 복음과 문화의 상호관계에 대한 신학적 태도와도 관련된다. 유럽중심주의가 성행하던 시절, 그리스도교의 복음은 유일한 가치를 가진 문화였고, 다른 모든 문화를 극복해 나갈 요소라고 생각해 왔다. 그러나 오늘날의 신학에서는 복음과 문화는 서로 다른 것으로서, 복음은 모든 문화에 적응할 수 있다고 규정한다. 이로써 우리 교회는 전통문화에 대한 재평가의 기회를 보장받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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