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영필
신라 관등 이찬(伊飡)에서 '찬'이 칸이나 군주를 뜻하는 것이라면, '이(伊)'는 대체 무슨 뜻일까? 이것은 나의 오랜 궁금증의 하나이다. 그리고 아직 해결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그리하여 '이(伊)'가 두음으로 오는 인명과 지명을 내가 아는 한 모두 모아본다. 이것을 가끔씩 처다보고 자료를 축적하다 보면 언젠가 해결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신라시대의 관등. 17관등 중의 두번째로 이척찬(伊尺飡) 혹은 이간(伊干)·일척간(一尺干)·이찬(夷粲)·乙粲(을찬)이라고도 한다. 진골(眞骨)만이 될 수 있는 관등으로, 특히 이찬은 상대등이나 집사부(執事部)의 중시(中侍 : 뒤의 侍中), 그 밖에 병부(兵部)를 비롯한 중앙의 제1급 관청의 장관직인 영(令)에 보임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한국사데이터베이스] 삼국사기 잡지 제7 직관상 신라경위17관등
註) 022
이척찬(伊尺飡): 신라 경위(京位) 17관등(官等) 중 제2등에 해당하는 것이다. 본서 권제38 잡지제7 직관(상)과 본서 권제1 신라본기제1 유리이사금 9년(32)조의 17관등 설치 기사에는 이척찬(伊尺飡)이 대표 이름으로 되어 있고, 이찬(伊飡)이 이칭으로 적혀 있다. 그러나 신라본기 기사들에서는 모두 이찬으로 표기된다. 금석문에서는 일간지(壹干支), 이간지(伊干支), 일척간(一尺干), 이간(伊干), 을찬(乙粲) 등으로 나온다. 이중 「포항냉수리신라비(浦項冷水里新羅碑)」에 나오는 일간지를 이찬이 아니라 일길간지(一吉干支)로 보는 견해도 일부 있지만, 이찬의 원형으로 보는 것이 다수설이다. 그 외에 중국 문헌 『남사(南史)』 신라전에 일한지(壹旱支)가, 『일본서기(日本書紀)』 권제30 지통천황(持統天皇) 3년(689) 5월 22일조에 예찬(翳湌)이 확인된다. 앞의 일(壹·一)·이(伊)·을(乙)·예(翳) 등은 동일한 발음의 이표기이며, 그 뒤에 붙는 글자는 시기에 따라 바뀌었다. 시간순으로 볼 때, 일간지(일한지)→이간지→이간→일척간·이척간→이찬(을찬·예찬)으로 변화하였다고 정리할 수 있다.
신라 경위 17등 중 고위 관등이라 할 수 있는 소위 ‘간군(干群) 경위’는, 신라 건국세력이자 핵심지배층이라 할 수 있는 6부 수장들의 위계호인 간지(干支)에서 출발하여, 그 세력의 대소 혹은 지위의 상하를 구분해 줄 필요에 의해 분화되면서 성립했다고 이해된다. 이들 17관등은 본서에 의하면 유리이사금 9년(32)에 모두 만들어졌다고 되어있지만, 금석문들에 나타난 경위의 양상을 볼 때, 법흥왕 7년(520) 율령 반포를 전후하여 완비되었을 것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찬은 그중에서 가장 이른 시기부터 확인되는 간군 경위로, 신라를 구성하던 여러 독자 세력들 중 가장 큰 세력의 수장에게 부여된 위호(位號)였던 것으로 여겨진다.
이찬 위에 이벌찬(서불한)이 있지만, 본서의 초기 기록들에서 두 관등의 역할은 거의 동일하다. 따라서 사실상 이찬은 17관등이 모두 갖추어지기 이전에는 사실상 최고 관등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리고 한국 고대 국가의 초기에 관등은 관품(위)로서의 성격 이외에 관직, 작위로서의 성격도 가지고 있었다.
이 기사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이 이찬은 최고위 지배층의 신분을 나타내는 위계호의 성격과 함께 군사와 정치를 총괄하는 최고 관직의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고 보아야 한다. 그리고 그 성격은 여러 지역 정치체의 연합체적인 국가였던 신라의 최고 지배층, 곧 큰 지역 정치체의 수장이 연합체 전체에서 중요한 직무를 수행하는 것과 관련있는 것이라 하겠다. 이런 점에서 본서 직관지에 나오는 초기 직위 대보(大輔)와 유사하며, 중고기 이후 관등과 관직이 분리되는 과정에서 최고 관직으로 설치되는 상대등(上大等)에도 연결될 수 있을 것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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悅己縣一云豆陵伊城一云豆串城一云伊城 (삼국사기 지리지4)
......
또 별칭에 '伊城'이 있는데, bag-(悅, 백제)과 같은 뜻을 가진 kür-(喜, 백제 : kul-微笑하다, O.Turk)이 따로 있기 때문에 그것으로 별칭한 것이다. 즉 kür(喜 : 깃다, 백제)의 발달형 kir-(>kiz- >kis- )과 gayr(彼·伊, Turk)의 동근의 백제어 kər(>kïr >kï '그')이 유음인 데서, 그 정확한 어원을 모르고 kür-(悅) 대신 ker(伊=彼)을 가지고 표기한 것으로 추정된다. "伊山郡本百濟馬尸山郡"(삼국사기 지리지3)에서도 '伊'을 kar(馬尸)과 유음 대비시킨 점으로 미루어서도 '伊'을 ker(백제)이라고 한 것이 틀림없다(kare'伊', Jap).
(204쪽, 강길운, <고대사의 비교언어학적 연구>)
伊城(전북 완주의 옛 지명): 본래 백제의 두이현(豆伊縣, 또는 杜城縣)이었는데, 신라 경덕왕 때 두성으로 고쳐 전주의 영현으로 하였다. 940년(태조 23) 이성으로 바꾸었고, 현종 때도 그대로 전주에 속하게 하였다.
이성이라는 지명의 유래는 이(伊)가 두(豆)와 같은 뜻으로 ‘크다’는 뜻을 가지므로 ‘큰 고을’이라는 데서 나왔다. (이상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3은 무산 대수촌(茂山 大樹村)이니, 마을 어른은 구례마(俱禮馬, 구를 仇로도 씀)라고 하여, 처음에 이산(伊山, 개비산(皆比山)이라고도 함.)에 내려왔으니 이가 점량부(漸梁部, 양(梁)을 탁(涿)으로도 씀) 또는 모량부(牟梁部) 손씨의 조상이 되었다. 지금은 일러서 장복부(長福部)라고 하니 박곡촌(朴谷村) 등 서촌(西村)이 여기에 속한다.(한국사데이터베이스, 삼국유사 권제1 신라시조혁거세왕)
有隣郡本高句麗于尸郡(삼국사기 지리지2)
위에서 '隣=于尸'의 등식을 얻을 수 있는데, 여기서 '于尸'는 ur이므로 고구려지역에서 ur(隣)이라는 말이 쓰인 것으로 추정되며, 이것들은 orci-n(隣, W.Mo)과 대응될 것으로 믿어진다(orci > urji > uryi > uri > ur).
隣豊縣本高句麗伊伐支縣(삼국사기 지리지2)
'隣'=伊伐支'의 등식을 얻을 수 있는데, 여기서 '伊'는 [ci]로 음독될 것이고, '伐支'는 [byʌt-cie > bəji]로 음독할 것이어서 '伊伐支'는 cibəji(cibəji > sibəji > hibəji > iβuji > iwuji)의 표기로 믿어지므로 고구려 지역에서는 ur(隣)과 더불어 cibəji(隣)가 함께 쓰인 것으로 추정되며, 이 cibəji(隣)는 dalbade(傍邊·隣, Ma)나 jivar(隣, Turk)과 대응될 것으로 생각된다.... (255쪽, 강길운, id)
다테(伊達) 씨: 일본의 유명한 무사 가문인 다테(伊達)씨는 후쿠시마현의 다테군(伊達郡)에서 유래한다. 이 다테군의 이름은 그 지역의 이달신사(伊達神社)에서 따왔고, 이 이달 신사는 하리마국(播磨國, 현재의 효고현 일부)의 인달리(因達里)에 있던 이달신사(伊達神社)가 이주해온 것이다. 그리고 이 이달신사를 모신 사람들은 모노노베(物部)씨의 일원으로서 궁정 12門 중 내측 이순문(伊楯門)을 수호하던 이순(伊楯)씨이다.(나의 글, 다테에 대하여)
누란(樓蘭)은 타림분지(타클라마칸 사막: 북은 천산산맥, 남은 곤륜산맥)와 하서주랑(하서4군-돈황, 주천, 장액, 무위-이 설치된 북은 흑산과 남은 기련산맥 사이의 길게 난 복도 같은 지형)의 사이에 있는 롭 호수 서안에 있던 나라이다...
누란성(크로라이나) 남쪽에 있는 지역(이순성伊循城: 차르클릭)으로 천도 강행. 국명도 선선(鄯善)으로 바꾸었습니다.(선선: 체르첸강의 음역이라는 설이 있다.)...미란(우니성) (김영종, <실크로드 길 위의 역사와 사람들>, 85-94쪽)
누란고성(樓蘭故城)은 뤄챵현의 콘체강(孔雀河) 하류 로프노르 호수 서북쪽 기슭에 위치하고 있다. 기원전·후-기원후 4세기경의 한, 위, 서진(西晉) 시기의 유적이다. 중국은 한 무제 때 누란을 공격하여 복속시키고 기원전 77년인 원봉 4년 누란국왕을 암살한 후에는 선선국(鄯善國)이라고 칭하였다. 누란은 전한(前漢) 시기의 서역 개척과 흉노와의 전쟁에서 실크로드의 중요한 교통 요지를 차지하여 신흥 오아시스 도시로 성장 발전하였다. 그러나 4세기 이후 이 성은 실크로드 교통로 및 환경, 수로의 변화에 따라 점차 몰락하여 역사에서 완전히 사라지고 기록에도 보이지 않게 되었다.
미란고성(米蘭古城)은 챵현 미란향(米蘭鄕) 옛 미란강 부근에 위치한다... 미란고성은 지리적으로 볼 때, 둔황으로 왕래하는 대로변에 위치한다.
미란 불교사원지: 미란은 고대 선선국(鄯善國)의 이순성(伊循城)이 소재한 곳으로도 추정되며, 미란 불교사원지의 건립연대는 기원후 1세기 말-2세기 말 유형과 4세기 간다라 양식의 시기이다. 2세기부터 미란지역은 불교가 성행하기 시작하여 불법이 계속해서 흥성하였다. 그러나 5세기 중반 선선국은 북위의 공격을 받아 쇠퇴하기 시작하였다. 미란의 15개 불교사원지 가운데 제3사지와 제5사지에서 주목할 만한 벽화가 발견되었다. 이들 가운데 <꽃줄을 멘 동자>, <부처와 승려>, 그리고 <비슈반타라 왕자 본생도>가 가장 많이 알려져 있는데, 현존하는 서역 회화 가운데 이른 시기인 3-4세기에 제작한 것이다. (제주불교신문, 안종국, 2024.4.24.)
[동북아역사넷, 중국정사외국전, 구당서 권194, 열전 제144, 돌궐]
을비사발라엽호가한(乙毗沙鉢羅葉護可汗)이 즉위한 이후에 [아]정을 휴합수(睢合水)의 북쪽에 세우고, 이를 남쪽 아정[南庭]이라 불렀다. 동쪽으로는 이렬하(伊列河)를 경계로 구자(龜茲)부터, 선선(鄯善), 차말(且末), 토화라(吐火羅), 언기(焉耆), 석국(石國), 사국(史國), 하국(何國), 목국(穆國), 강국(康國)까지 모두가 그의 통치를 받았다. [을비사발라엽호가한이] 누차 사신으로 보내 조공하자 태종이 새서(璽書)를 내려 위로하고 격려했다.
伊列河: 지금 新疆維吾爾自治區 서북과 카자흐스탄 동북에서 발하쉬 호로 유입되는 일리(泥犁, Ili) 하를 지칭한다. 달리 伊麗河, 혹은 亦列河, 依列河, 帝帝河라고도 한다.
鄯善: 타림 분지에 있는 오아시스 국가의 하나로 본래 國名은 樓蘭이었다. 중앙아시아 사람들은 ‘차르클릭(Charklik)’이라고 불렸는데, 扜泥城(지금 新疆維吾爾自治區 若羌縣)에 도읍이 있었다. 주민들은 유목에 종사했고 兵器의 제조에 능했다. 前漢 元封 3년(전108)에 내부해 이듬해에 尉屠耆가 王으로 봉해졌고, 국명이 樓蘭에서 鄯善으로 바뀌었다. 三國時代 曹魏에 속했고, 西秦은 鄯善의 王을 歸義侯에 봉했다. 東晉時代 前涼에 복속했다가 후에 前秦에 왕이 입조해 봉작을 받았다. 北魏 太延 4년(438) 鄯善王이 아우 素延耆를 보내 入侍했다. 후에 鄯善이 여러 번 北魏가 西域에 파견한 사자들을 공격하자 太武帝가 萬度歸에게 涼州의 군대를 징발해 鄯善을 토벌하자 王 眞達이 항복했다. 太平眞君 9년(448) 北魏가 韓拔을 西戎校尉 鄯善王으로 삼아 鄯善의 땅을 鎭守하게 하자 郡縣의 지위와 같게 되었다.
且末: 타림 분지에 있는 오아시스 국가의 하나로 ‘차르찬(Charchan)’이라고 했는데, 지금 新疆維吾爾自治區 且末縣이다. 漢代 西域 36國의 하나로 後漢 初에 鄯善에 합병되었다가 다시 독립했다. 北魏 末에 吐谷渾에 兼倂되었다.
吐火羅: 인도 동북부 지역의 명칭으로 ‘토하라(Toqara)’의 음사이다. 『希臘古地誌』에는 ‘토차리(Tochari)’라 표기했고, 『景敎碑』에서는 ‘타후리스탄(Tahuristan)’이라 표기했다. 『魏書』에서는 吐呼羅, 『隋書』와 『北史』, 『舊唐書』에서는 吐火羅, 『新唐書』에서는 土豁羅, 『雜阿含經』에서는 兜沙羅로 표기했다. 中國에서는 大月氏라 칭했다. 河西回廊 지역에 있다가 匈奴에 쫓겨 서쪽으로 이주했다. 전130년 후에 大月氏가 大夏를 공격해 臣屬시켰고 후에 大夏를 멸했고 貴霜王朝를 세웠다. 서방에서는 吐火羅(Tuqara)라 표기했다. 5세기 이후 토하라의 땅은 에프탈의 근거지가 되었다가 560년대에는 突厥의 땅이 되었다. 顯慶년간에 이 땅에 月氏都督府가 설치되었다.
焉耆: 梵語 Agni의 음역인 阿耆尼國으로, 漢代 이후 焉耆 지역의 말인 Argi 혹은 Arki의 음역이다(『大唐西域記校注』, 2000). 동서로 600여 리, 남북으로 400여 리가 되며, 도성은 둘레 6리가 되며 산으로 막혀있어서 길은 험하고 지키는 수월하였다. 경사에서 서쪽으로 4,300리 떨어져 있었으며, 동쪽으로는 고창(高昌)과 접하고, 서쪽으로는 구자(龜玆)와 이웃하였는데 즉 한(漢)나라의 옛 땅이었다. 그 나라 왕의 성은 용씨(龍氏)이며, 이름은 돌기지(突騎支)였다. 전투를 치를 수 있는 병사는 2,000여 명이었으며, 항상 서돌궐(西突厥)에게 복속되었다. 그 나라의 땅은 비옥하고, 포도가 많이 생산되고, 생선과 소금으로 꽤 이익을 얻었다.
카라샤르 (Qarasheher) 또는 언기(焉耆), 얀키는 오늘날 타림분지내의 타클라마칸 사막의 북쪽에 위치하던 토하라인들의 도시국가이다. 한나라 시절에 그것은 중요한 왕국이었다.
현재의 도시 얀치는 바그라시쿨 또는 바그락 호수의 서쪽 24 km에 있다. 호수는 동서쪽으로 81 km 남북쪽으로 48 km이며 면적은 1000평방 킬로미터로 중아아시아 최대의 호수이다. 한나라 시절에는 고기가 많다고 기록되어있다. 호수는 카이두 강과 코를라를 지난 콘체(공작) 강에서 물이 유입된다. 그리고 사막을 가로질러서 로프 누르로 흘러간다. 지역에는 수많은 작은 호수가 있다.
石國: Tashkent를 지칭한다. 약살수(藥殺水, Yaxartes를 옮긴 것이며 시르다리아를 지칭)가에 있으며 도성은 사방이 각각 10여 리이다. 그 왕의 성은 석(石)이며 이름은 열(涅)이다. 나라의 도성 동남쪽에 집을 짓고 그 가운데에 왕좌를 두었다. 정월·6월·7월 15일에는 왕의 부모의 태우고 남은 뼈를 황금 항아리에 담아 상(床) 위에 올려놓은 뒤, [도성 안을] 돌아다니며 행진하고, 화향(花香)과 여러 과일들을 뿌리며 왕은 신하들을 이끌고 제사를 올린다. 예식이 끝나면 왕은 부인과 함께 따로 설치된 천막으로 가고 신하들은 서열에 따라 착석하여, 연회를 베푼 뒤 끝난다. 조와 밀이 있고 좋은 말이 많다. 풍속은 전투에 능하며 일찍이 돌궐에 배반하였다가 사궤가한(射匱可汗)이 군대를 일으켜 그들을 멸하고, 특근(特勤, tegin, 王子) 전직(甸職)으로 하여금 그 나라의 사무를 통할케 하였다. 남쪽으로 발한(鏺汗)과는 600리 떨어져 있고, 동남쪽으로 과주(瓜州)와는 6천 리 떨어져 있다.
史國: 중앙아시아에 있던 소그디아나[昭武九姓]에 있었던 오아시스 국가의 하나로 지금 우즈베키스탄 사마르칸드(Samarkand)의 남쪽 샤흐리 세비즈(Shahri-Sebz)이다. 『隋書』와 『舊唐書』, 『新唐書』에서는 史國, 『西域記』에서는 羯霜那(Kasanna)라 했으며 달리 케쉬(Kesh)라고도 한다. 故地는 隋 大業年間 왕 狄遮가 처음으로 中國과 통교했다. 貞觀 16년(642)에 沙瑟畢이 唐에 들어와 토산품을 바쳤다. 顯慶年間에 佉沙州가 설치되고 그 왕이 刺史로 임명되었다. 天寶年間에 唐朝에서 조서를 내려 來威國으로 이름을 바꾸도록 했다.
何國: 중앙아시아에 있던 소그디아나[昭武九姓]에 있었던 오아시스 국가의 하나로 지금 쿠샤니아(Kushania)이다. 『隋書』와 『舊唐書』, 『新唐書』에서는 何國, 혹은 貴霜匿, 『西域記』에서는 屈霜你迦라고 했다. 貞觀 15년(641)에 사자를 보내 入朝했다. 高宗 永徽年間에 그 땅에 貴霜州이 설치되고 何國의 王 昭武婆達地가 刺史로 임명되었다.
穆國: 중앙아시아에 있던 소그디아나[昭武九姓]에 있었던 오아시스 국가의 하나로 지금 아무다리야 중류 西岸에 있었다. 穆國王의 姓은 昭武이었다.
康國: 중앙아시아에 있던 소그디아나[昭武九姓]에 있었던 오아시스 국가의 하나로 지금 우즈베키스탄의 사마르칸드(Samarkand)이다. 薩末鞬, 혹은 颯秣建라고 달리 표기하기도 하는데, 國都는 阿祿迪城(지금 우즈베키스탄 사마르칸드 북쪽)에 있었다. 康國의 王은 본래 溫氏이며 月氏人이었다. 예전에는 祁連山 북쪽의 昭武城에 거주하다가 匈奴에게 격파되어 서쪽으로 파미르 고원을 넘어 그 땅으로 옮겨왔다. 여러 일파들이 각지의 王이 되었고, 永徽년간에는 康居都督府가 설치되기도 했다. 中國의 기록에 康의 성을 갖고 있는 소그드 인[胡人]은 모두 이 나라 출신이었다.
이순성(伊循城)은 고대 실크로드 상에 위치했던 중요한 도시이자 선선국(鄯善國)의 수도였다. 한나라 때 이 지역에 둔전(屯田)이 설치되었으며, 군사적, 경제적으로 중요한 거점 역할을 했다.
실크로드 상의 롭 호수(Lop Nur) 서안에 위치했으며, 현재는 중국 신장 위구르 자치구의 루오취앙현(若羌縣) 차르클릭(若羌縣恰爾魯克鎮) 지역으로 추정된다.
기원전 77년 한나라가 樓蘭(누란)을 점령하고 국명을 鄯善(선선)으로 바꾸면서 수도를 이순성으로 옮겼다.
한나라는 이순성에 군대를 주둔시키고 둔전을 설치하여 군량 확보와 지역 통치를 강화했다.
차르클릭은 타클라마칸 사막 남쪽, 쿠차-호탄(우전)-돈황을 잇는 실크로드 남로의 요충지로, 동서 교역과 문화 교류의 중심지였다. 미란 유적(불교 유적)이 위치해 있어 역사적으로도 매우 중요한 곳이다.
고대 실크로드 남로의 주요 거점이었던 누란이 사막화와 정치적 변화로 쇠퇴한 뒤, 그 기능과 역할이 차르클릭(현재의 若羌)으로 옮겨간 역사적 사실을 반영한다. 합니다.
선선국(鄯善國)의 왕도였던 이순성은 오랜 시간 동안 그 위치가 명확하지 않았으나, 20세기 초 영국의 탐험가 스타인(Aurel Stein)의 미란(米蘭) 유적 발굴을 통해 이순성이 미란 지역에 있었음이 유력하게 제시되었다.
"Qarqilik"의 어근 qar- 혹은 *charkh-*는 "수레", "바퀴", 또는 **"회전", "운동"**을 의미하는 **페르시아어 또는 투르크계 어휘 "چرخ (charkh)"**와 관련 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즉, **"차르클릭"**은 "바퀴가 있는 곳", "움직이는 도시", 또는 **"교통의 요지"**를 뜻했을 수 있다.(각종 검색 및 생성형 AI 종합)
『삼국사기』지리지 고령군조에 따르면 대가야국의 시조를 이진아시라고 하고, 내진주지(內珍朱智)라고도 한다고 하였다.
『동국여지승람』고령현조에는 최치원(崔致遠)이 지은 「석이정전(釋利貞傳)」을 인용해 가야산신(伽耶山神) 정견모주(正見母主)가 천신(天神) 이비가지(夷毗訶之)에 감응되어 대가야왕 뇌질주일(惱窒朱日)과 금관국왕 뇌질청예(惱窒靑裔)의 두 사람을 낳았다고 하였다. 그리하여 뇌질주일은 이진아시왕의 별칭이고, 뇌질청예는 수로왕의 별칭이라고 하였다. 위와 같이 대가야국의 시조는 이진아시라고 했으며, 일설에는 내진주지 또는 뇌질주일이라고도 했음을 알 수 있다. 내진주지와 뇌질주일은 같은 이름이 구전되어오는 동안에 다소 와전된 것이며, 와전된 이름을 문자로 기록할 때에 서로 다른 한자로 표기된 것이다.
이진아시의 ‘진(珍)’은 우리말 고어의 ‘들’ 또는 ‘돌’의 한자표기이다. ‘아시(阿豉)’는 우리 고어의 ‘아기’·‘아지’로서 ‘아지(阿只)’·‘알지(閼智)’로도 표기되었다. 그것은 고대에 있어서 여신(女神) 또는 성모(聖母)를 뜻하는 말이었으며, 뒤에는 여성 또는 모성에 대한 존칭으로 쓰였다. 『삼국유사』에 인용된 「가락국기」에서 금관가야의 제5대 이시품왕(伊尸品王)의 어머니를 아지(阿志)라고 한 것도 그 예이다.
앞의 대가야 시조신화는 오랫동안 구전되어오던 것을 최치원이 문자로 기록한 것으로서 귀중한 자료이다. 가야산신을 정견모주라고 한 것으로 보아, 그것이 여신·모신임을 알 수 있으며, 이 시조신화의 원형을 전한 것이다. 그러므로 대가야의 시조 이진아시도 ‘아시’가 ‘아기’·‘아지’와 같은 말로 여신 또는 모신을 말한 것이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伊珍'은 음독할 것이 아니고, acin(父, 가야)로 읽어야 할 것으로 믿는다. 그런데 그것이 향찰식 표기임을 잊고 음독함으로 말미암아 '夷畛', '夷餐', 'izana(伊邪那)'와 같은 표기나 독법이 생겨난 것으로 본다...
(73쪽, 강길운, <고대사의 비교언어학적 연구>)
그 방증으로서는 고령가야의 조상 '惱窒朱日'을 '內珍朱智'(伊珍阿豉)라고도 이기하였는데, 여기의 '內珍'은 icin의 향찰식 표기로 볼 수 있지만 icin'內'(古터키)는 신라인의 표기로 보인다. 후기 신라의 지배층은 터키족인데, 이들은 자음으로 시작되는 외래어를 표기할 때 어두에 i를 첨가하는 현상이 있기 때문이다. [i-stasyon '정거장'(터키), i-skec '스케치'(터키)] 따라서 본디말은 cin(金)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107쪽, id)
이사부(異斯夫)는 6세기 대에 활동한 신라의 장군이다. 우산국(于山國)을 정복하고 가야(加耶)를 정복하는 등 전장에서 눈부신 전공을 세웠고, 중앙 정부의 고관(高官)이 되어 신라 정치의 실력자로 활약하였다.
이사부는 신라의 제17대 왕인 나물왕(奈勿王의 4대손이며 훼부(喙部) 출신이다. 정확한 생년과 몰년은 알려져 있지 않다. 이사부라는 이름은 태종(苔宗), 혹은 이종(伊宗)이라고도 표기되는데, ‘태(苔)’는 이끼를 말하므로, 태종을 훈독하면 ‘잇부’가 된다. 단양적성비(丹陽赤城碑)에는 이사부(伊史夫), 『일본서기』에서는 이질부례(利叱夫禮)로 표기되기도 한다.
[한국사데이터베이스] 삼국사기 잡지 제7 직관상 신라경위17관등
註) 016
이벌찬(伊伐湌): 신라 경위 17관등 중 제1관등이다. 이 기사에서 제1관등의 대표 이름은 이벌찬이며, 그 이칭으로 이벌간(伊罰干), 우벌찬(于伐湌), 각간(角干), 각찬(角餐), 서발한(舒發翰)이 있다고 되어 있다. 본서 신라본기에 추가적으로 서불한(舒弗邯)과 일벌찬(一伐湌) 및 주다(酒多)가 있고, 중국 사서인 『양서(梁書)』와 『남사(南史)』에는 자분한지(子賁旱支), 『일본서기』에는 조부리지간(助富利智干), 벌한(伐旱)이라는 명칭으로 기재되어 있다. 신라 금석문인 「창녕 신라 진흥왕 척경비(昌寧新羅眞興王拓境碑)」에서는 일벌간(一伐干)가 확인된다.
이 제1관등의 이름은 한자 발음상으로 크게 두 가지 유형이 있다. 하나는 서불한(각간) 유형이고, 다른 하나는 이벌찬 유형이다. 이 기사의 대표 명칭으로 나오는 이벌찬의 원형은 「창녕 신라 진흥왕 척경비」에 나오는 일벌간이 분명하다. ‘찬’은 후대에 관등명의 ‘(척)간’을 일괄 수정한 것이다. 그에 비해 서불한 유형은 본서 권제1 신라본기제1 지마이사금 즉위년조에 나오는 ‘주다(각간)’에서 그 유래를 찾을 수 있다. 이 두 가지 유형을 동일한 발음의 다른 표기법으로 보는 경우가 많지만, 고대 한자어 음운을 볼 때 이 두 유형의 이름이 같은 발음일 가능성은 없다. 그리고 본서 신라본기에서는 두 유형의 명칭이 이른 시기부터 혼용되어 쓰이고 있지만, 6세기 법흥왕대 이후로는 서불한 유형으로만 쓰이고 있고, 신라 하대 금석문들에서도 이벌찬 유형은 나타나지 않는다. 이러한 점들을 볼 때, 처음부터 이 두 유형의 이름이 같은 위호의 이표기라고 보기 힘든 측면이 있어서, 원래는 두 개의 다른 위계호(位階號)였으나, 그 역할과 지위의 유사성이 있어서 제1관등의 이름으로 같이 사용된 것으로 추정하기도 한다(홍승우, 2018).
본서 권제1 신라본기제1 지마이사금 즉위년(112)조에 나오는 각간은 처음에 주다(酒多)라 적었는데, 『계림유사(鷄林類事)』를 참조하면 술[酒]은 ‘수블’ 곧 ‘ㅅ불’이고 지금의 ‘뿔’과 동일한 발음이다. 그리고 ‘다(多)’는 훈독을 ‘한’으로 할 수 있다. 따라서 주다는 대략 지금 발음으로 ‘수블한’ 정도로 읽을 수 있고, 이 발음을 다르게 표기하면 서불한이 되며, 그 뜻을 한자로 적으면 각간이 된다. 당시 ‘한[간(干)]’은 신라와 가야 등에서 집단의 수장을 의미하는 위호였으므로, 서불한은 우두머리인 수장보다 더 위의 수장이라는 의미로 볼 수 있다.
각간(서불한)은 초창기 신라 6부를 구성하는 핵심 지배집단의 수장들을 대표하는 지위였던 것으로 보이나, 이벌찬의 이칭으로 사용되는 시점에서는 왕권 중심의 중앙집권체제가 정비되어 가면서 왕 아래 가장 높은 지위에 해당하는 관등으로 성격이 변화한 것으로 여겨진다.
〈참고문헌〉
韓國古代社會硏究所編, 1992, 『譯註 韓國古代金石文 Ⅱ·Ⅲ』, 駕洛國史蹟開發硏究院.
하일식, 2006, 『신라 집권 관료제 연구』, 혜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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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장희, 2000, 「‘-干支’系 신라관명의 변화」, 『언어과학연구』 18.
노중국, 2003, 「三國의 官等制」, 『강좌 한국고대사 2』, 駕洛國史蹟開發硏究院.
權仁瀚, 2003, 「신라 관등 이표기와 한국한자음의 관계」, 『震檀學報』 96.
전덕재, 2010, 「6세기 금석문을 통해 본 신라 관등제의 정비과정」, 『木簡과 文字』 5.
윤선태, 2015, 「신라 京位干群官等의 語源과 성립과정」, 『新羅文化』 45.
홍승우, 2018, 「6세기 신라 干群 경위의 구성과 성립과정」, 『사학연구』 131.
註) 016
이벌간(伊罰干): 신라 경위 제1관등 이벌찬(伊伐湌)의 별칭이다. 『수서(隋書)』 신라전(新羅傳)과 『북사(北史)』 신라전에 나온다.
註) 017
우벌찬(于伐湌): 정덕본 『삼국사기』에는 간벌찬(干伐飡)이라고 나온다. 우(于)와 이(伊)가 발음상 통하기 때문에 보통 우벌찬(于伐湌)이 맞는 것으로 보는 편이다(李丙燾, 1977, 『원문 三國史記』, 乙酉文化社). 그러나 『양서(梁書)』 신라전(新羅傳)에 나오는 자분한지(子賁旱支)를 고려할 때, 우(于)는 자(子)의 오기일 가능성도 있다.
註) 018
각간(角干): 신라 경위 17관등 중 제1등에 해당하는 관등인 ‘이벌찬(伊伐飡)’의 이칭 가운데 하나로, 고유어 ‘서불한’을 한자의 뜻을 빌려 아화(雅化)한 명칭이기도 하다. 각간(서불한)은 초창기 신라 6부를 구성하는 핵심 지배집단의 수장들을 대표하는 지위였던 것으로 보이나, 이벌찬의 이칭으로 사용되는 시점에서는 왕권 중심의 중앙집권체제가 정비되어 가면서 왕 아래 가장 높은 지위에 해당하는 관등으로 성격이 변화한 것으로 여겨진다. 여기에서 각간은 신라 제1관등의 성격이라기보다는 초기 6부 연합체적 국가였던 신라를 구성하던 핵심 지배집단의 수장이자 다른 수장들을 대표하는 지위에 해당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본서 신라본기제1 지마이사금 즉위년(112)조의 기사에 처음 나온다. 주다(酒多)라고도 쓴다.
註) 019
각찬(角粲): 신라 경위 17관등 중 제1관등 이벌찬(伊伐湌)의 이칭 가운데 하나이다. 다만 이 표기가 확인되는 다른 기록은 없다. 본서 신라본기에서는 ‘각찬(角湌)’으로 기록된 예가 다수 보인다. ‘찬’에 대해서는 앞의 ‘이벌찬’에 대한 주석 참조.
註) 020
서발한(舒發翰): 신라 경위 17관등 중 제1관등 이벌찬(伊伐湌)의 이칭 가운데 하나이다. 이벌찬의 이칭은 크게 두 가지 유형이 있는데, 하나가 이벌찬(일벌간) 유형이고 다른 하나가 각간(서불한, 서발한) 유형이다. 자세한 내용은 앞의 ‘이벌찬’에 대한 주석 참조.
註) 021
서불한(舒弗邯): 신라 경위 17관등 중 제1관등 이벌찬(伊伐湌)의 이칭 가운데 하나이다. 이벌찬의 이칭은 크게 두 가지 유형이 있는데, 하나가 이벌찬(일벌간) 유형이고 다른 하나가 각간(서불한) 유형이다. 자세한 내용은 앞의 ‘이벌찬’에 대한 주석 참조.
Erkin(Erkyn 또는 Erqin)은 고대 중앙아시아 언어, 특히 튀르크어족에 뿌리를 둔 흥미로운 단어입니다. 주로 다음과 같은 여러 가지 의미를 지닙니다.
자유 / 자유로운 (Freedom / Free): 현대 튀르크어족 언어에서 가장 흔하고 지속적인 의미입니다. 어떤 사람이 'Erkin'하다면, 그들은 자유롭고 독립적이며 구속받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힘 / 권위 (Power / Authority): 오래된 맥락, 특히 칭호로 사용될 때 'Erkin'은 권력, 권위 또는 영향력을 가진 사람을 의미할 수 있었습니다. 이는 특정 수준의 자율성과 통제력을 암시했습니다.
귀족 / 왕자 (Noble / Prince): 역사적으로 'Erkin'은 다양한 튀르크 및 중앙아시아 국가(예: 위구르 카간국, 카를룩 등)에서 부족장, 지역 통치자 또는 귀족 구성원과 같은 특정 고위 인물에 대한 칭호로 사용되었습니다. 이 'Erkin'들은 비록 명목상 더 큰 제국의 지배를 받았더라도, 자신들의 영역 내에서 상당한 독립성을 가졌습니다.
개인 이름: 'Erkin'은 오늘날 우즈베키스탄, 카자흐스탄, 키르기스스탄, 신장(중국), 터키 일부 지역을 포함한 많은 튀르크어권 국가 및 지역에서 매우 흔한 남성 이름입니다. 자유와 고귀함이라는 긍정적인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역사적 칭호: 위에서 언급했듯이, 이는 다양한 고대 튀르크 정치체에서 중요한 역사적 칭호였습니다. 예를 들어, 일부 위구르 통치자나 지역 총독은 이 칭호로 알려져 있었습니다.
현대적 용법: 일상 언어, 특히 중앙아시아 튀르크어에서 'erkin'은 '자유로운' 또는 '독립적인'을 의미하는 형용사로 사용됩니다.
결론적으로, 'Erkin'을 인명으로 듣든, 역사책에서 읽든, 현대 중앙아시아 담론에서 접하든, 이는 거의 항상 자유, 권위, 고귀함이라는 핵심 개념과 연결됩니다.(생성형AI)
황종(荒宗) 또는 거칠부지(居七夫智), 거칠부지(居柒夫智)라고도 한다... 일본서기 권17 계체기 23년조에 등장하는 구지포례(久遲布禮) 혹은 구례이사지간내사마리(久禮爾師知干奈師磨里)*로 비정된다.
이사지(爾師知)는 분질수이질(分叱水爾叱)의 이질(爾叱)과 같은 이사금(尼師今)의 이사(尼師)가 아닐까 싶다. 금관총에서 출토된 보검에 새겨진 이사지왕(尒斯智王)의 이사지(尒斯智)도 같은 단어일 가능성이 있다. 尒는 爾의 이체자다. 한편 구례(久禮)는 구지포례(久遲布禮)를 축약 표기한 것으로 생각된다.
이사지왕의 이사(尒斯)가 이사금(尼師今)의 이사(尼師)와 같은 단어일 가능성은 높은 편이다.
*해당 인명이 거칠부일지 아닐지에 대해서는 여러 의견이 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나무위키)
일부 기록에서 伊伐飡을 一伐干, 伊飡을 一尺干, 阿飡을 阿尺干으로 쓰고 있는 경우가 발견된다*. 이는 이들 관등들이 干(干支) 예하 관등인 一伐, 一尺, 阿尺에다 단지 干(干支)字만을 덧붙인 것임을 유추케 해준다.**
*일벌간, 일척간은 진흥왕순수비 창녕비에 나오고, 아척간은 대구 무술오작비에서 발견된다.
**외위 彼日에다 干자를 붙인 것이 波珍飡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으나(武田幸男, 1965)...
(46쪽, 전덕재, <신라육부체제연구>)
... 6세기 초반에 6부 가운데 喙部와 沙喙部세력의 압도적 우세가 확연해지고, 일부 다른 여타의 부들은 국정운영에서 배제될 정도로 그 세력이 약해진 상태, 즉 6부간 세력관계의 불균형이 심화된 상태에서 6부체제가 운영되었다고 할 수 있겠다... 냉수리비문과 봉평비문에서 훼부의 장을 寐錦王이라고 하였다는 사실과 사훼부를 대표한다고 추정되는 사람이 모두 葛文王을 칭하였다는 점이다... 봉평비문에서 보듯이 사훼부 소속의 徙夫智(立宗)갈문왕이 매금왕인 牟即智의 친동생이었다... (62-63쪽, id)
... <삼국유사>에서 눌지왕대에 2명의 갈문왕이 존재하였다고 전하는 사실이다... 현재까지 전하는 기록에 의하는 한 訥祗王대를 제외하고 한 왕대에 2인의 갈문왕을 책봉하였다는 기사가 보이지 않기 때문에... (67쪽, id)
... 첫번째는 김씨집단이 원래부터 사훼부를 지배하고 있었기 때문에 김씨왕실이 훼부와 사훼부를 직접적으로 관할하는 것이 가능하였을 경우를 생각해볼 수 있다. 이럴 경우 먼저 김씨인 閼英이 沙梁里의 蘿井에서 태어났다고 하였고... 麻立干시기에 김씨들이 사훼부지역에 거주하였던 사실... 두번째로 金閼智설화가 尼師今시기보다는 김씨집단이 왕권을 완전히 장악한 뒤인 마립간시기나 그 이후 어느 시기에 만들어졌을 가능성이 매우 많은 바, 알지가 鷄林에서 출생하였다는 설화 내용 역시 당시 김씨왕실의 소속 부와 연결시켜 부회하였던 것으로 볼 수도 있겠다. 이렇다고 한다면, 알영과 관련된 설화에서 보듯이 원래 김씨집단의 거주지역은 사훼지역이었고, 또 마립간시기에 왕이 훼부 소속이었다는 사실은 훼부에 거주하던 昔씨집단과의 권력투쟁에서 그들이 승리한 후에 거주지를 훼지역으로 옮긴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겠다. 만약 이것이 사실이라고 한다면, 훼부와 사훼부가 통합된 것은 奈勿王대로 볼 수 있다... (68-69쪽, id)
내물왕대부터 마립간이란 왕호를 사용한 것이 확실하고... 늦어도 눌지왕대부터 사훼부가 국왕의 직접적인 관할하에 있었다고 할 때... 국왕은 6부 가운데 이들 2부의 정치적 기반을 확대하는 방식으로 국정운영에서 그의 영향력을 증대시켜 나감과 동시에 다른 부대표들의 영향력을 약화시켜 나갔다고 추론할 수 있겠다... (69-70쪽, id)
... 干支란 칭호가 530년대 이후에 보이지 않음을 확인하였다. 이것은 530년대에 이미 本彼部와 岑喙部인들이 17관등체계에 편제되었던 것과 무관하지 않았을 것이다... (121쪽, id)
其官名有 子賁旱支 齊旱支 謁旱支 壹告支 奇貝旱支 (양서, 제이전 동이 신라)
위의 자료는 신라가 법흥왕 8년(521년) 梁나라에 사신을 파견할 사실과 관련이 깊다... 위의 자료는 520년을 전후한 시기의 官等體系를 전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겠다... 그런데 <梁書>에 보이는 관등과 대비되는 것이 <南史>에 나오는 신라의 관등이다.
其官名有 子賁旱支 壹旱支 齊旱支 謁旱支 壹吉支 奇貝旱支 (남사, 이맥전 동이 신라)
... 子賁旱支는 舒弗邯(伊伐飡), 壹旱支는 伊飡, 謁旱支는 阿飡, 壹吉支는 一吉飡에 대응되는 것에 대해서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 기존에 齊旱支는 迊飡(蘇判)에, 奇貝旱支는 級飡에 대응되는 것으로 보았다. 최근에 발견된 비문에 급찬에 해당하는 居伐干支가 나오는 것으로 보아 기패한지는 거벌간지라고 보는 편이 무난하다. 그러나 제한지에 대응된다고 하는 잡찬(소판)의 관등을 수여받은 관리들이 <삼국사기>나 금석문에서 보이기 시작하는 시기는 진흥왕 12년 이후이다. 이를 토대로 유추해 볼 때, 잡찬은 17관등이 정비되었던 520년 무렵에 증설된 관등으로 생각되는 바, 제한지를 잡찬에 비정하는 것은 재고의 여지가 있다고 하겠다. 대아찬 역시 이 무렵에 아찬에서 분화되어 정비된 관등이었다고 추정되는데, 이 관등이 <양서>의 기록에 나오지 않으므로 잡찬도 역시 그러하였다고 보는 것이 순리적일 것 같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제한지를 波珍飡에 대응된다고 보기는 더욱 어렵다.
... 실제로 <남사>의 신라관계 사실은 <양서>의 서술을 그대로 베끼었다고 보아도 과언이 아니다... <양서> 편찬자의 착오라고 볼 수도 있겠으며, 일단 편찬자가 壹旱支의 壹자를 齊자로 잘못 표기하였을 가능성을 한번 생각해 볼 수 있겠다. <양서>에서 壹吉支를 壹告支로 잘못 표기하였음을 생각하면, 그러하였을 가능성도 전혀 배제하기 어렵다... (122-125쪽, id)
삼국사기 신라본기 지증왕대 이전 기록에 보이는 관등 일람표
이벌찬 이찬 파진찬 아찬
4 탈해: 순정, 우오 길문 길문
5 파사: 명선, 윤량, 6부 이찬 윤량, 계기 길원
6 지마: 허루 허루, 마제, 창영, 익종, 옥권 옥권, 흔련 임권
7 일성: 웅선, 대훤 근종
8아달라: 계원, 흥선 구도 길선
9 벌휴: 구추 국량
10 내해: 진충, 이음, 충훤, 연진 훤견, 강훤 강훤
11 조분: 우로 연충, 우로
12 점해: 장훤, 익종 장훤, 양부 부도
13 미추: 양부 홍권 정원
14 유례: 홍권, 말구 지량
15 기림: 장흔
16 흘해: 강세 급리 급리
17 내물: 말구 대서지
18 실성: 미사품 석등보
19 눌지: 미사흔
20 자비: 벌지
21 소지: 내숙, 오함, 비지 실죽
계 21 23 (+6) 8 10
인명계 62 - 10(승진) + 6(6부촌) = 52+6 명
(124-125쪽, id)
12. 일본의 지명: 伊予, 伊勢, 伊賀, 伊豆, 伊吹山 (和泉, 出雲)
이요국(伊予国 이요노쿠니)
일본 난카이도에 있던 옛 구니이다. 현재의 에히메현(愛媛県)에 해당한다. 요슈(予州)라고도 한다.
이요 국의 요(予)는 원래 '요(豫)'의 대음표기인데, '요'를 '여(與)'로 적은 목간도 발견된다 (발음은 똑같이 '요'이다). '이요'의 어원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다.(온천설과 예(預)설은 생략)
샘설: 고대 일본인들은 온천 말고도 땅에서 물이 솟아나는 지점인 샘을 가리켜 '이유(いゆ)'라 불렀는데 이것이 변해서 '이요(いよ)'라는 발음이 되었다는 설이다. 고대로부터 현재까지, 생명이 생존하기 위해서 꼭 필요한 물이 솟아나는 샘은 고마운 존재로서 특별지역으로 중시되었고, 이것이 샘 주변을 가리키는 소지역으로서의 지명에서 보다 넓은 지역, 나아가 《고사기》에도 언급된 「이요의 이명지도(二名之島)」즉 지금의 일본 시코쿠 지역을 가리키는 지명으로 자리잡아갔다는 것이다.
이 설에 힘을 실어주는 것이 지금 일본 에히메 현 이요 군 마쓰마에(松前) 정에 있는 이요 신사로, 일본 조정으로부터 정4위상의 관위를 수여받기도 한 이 신사에서 모시는 신은 달의 신 쓰쿠요미노 미코토(月夜見命)와 에히메노 미코토(愛比賣命)이다. 에히메란 《고사기》에 "이요를 에히메라 하다(伊予を愛比売といひ)"라고 나오는 것에서 보이듯, 에히메 현의 옛 지명이다. 또한 동명의 이요시 우에노 지구에 있는 신사의 옛 경내 터에는 이코이(彌光井) 신사의 샘터가 있는데, 고대에 이 땅은 완만한 경사지대로 물이 부족했던 여건상 샘이 특별히 귀하게 여겨졌을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이상 이요시 홍보 2006년 1월호 참조)
이야(彌)설: 《일본서기》에 나오는 각종 단어들의 출전을 중국 고전에서 찾아 정리하기도 했던 학자 다니가와 고토스가(谷川士淸)는 《야마토훈간(倭訓栞)》에서, "伊豫ノ二名ノ洲"로도 불렸던 시코쿠는 일본의 국토창생신화에서는 아와지섬 다음으로 태어났다고 나오는 것에서, '이요'는 사물의 겹침을 뜻하는 '이야(彌, いや)'를 가리킨다고 주장했다. (이상 위키백과)
이세국(伊勢国いせのくに)
지명의 어원에 관해선 여러 설이 있다. 일설에는 많은 여울을 뜻하는 이소세(五十瀬)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다른 설로는 바다에 가깝다는 데서 이소(磯)가 변화한 것이라 한다.
일본서기에서 야마토히메가 우마시쿠니(美し國)라 칭했다는 기록이 있다. 7세기 고토쿠 천황 시대에 이세국이 세워졌다. 덴무 천황 치세에는 이가국이 분리되었다. 8세기 초에는 시마국이 떨어져 나왔다. (이상 나무위키)
국신(國神)인 伊勢津彦(いせつひこのかみ)의 이름에서 유래하였다.
奈郞시대부터 明治시대 초기까지 일본의 지리 구분의 기본단위였던 國으로, 東海道에 있었던 15개국 중 하나이다. 일본 황실의 조상신인 아마테라스 오미카미天照大神을 모신 神社인 皇大神宮을 세운 곳으로 646년 일본에서 조정 안의 혁신파가 벌인 대규모 정치 개혁인 大化改新을 계기로 하나의 국이 되었다. 이후 平氏·北畠氏·織田氏의 지배를 거쳐 江戶시대에는 6개의 藩으로 분할되었다.
이세국은 1871년 明治 신정부에서 廢藩置縣을 시행하면서 安濃津縣과 度會縣이 되었다. 이후 1876년에 통합되어 미에현(三重県みえけん)이 되었다.
동쪽은 伊勢灣에 접하고 있고, 서쪽은 鈴鹿山脈·布引山脈·大台山系를 사이에 두고 伊賀國·山城國·大和國과 접하고, 남쪽은 志摩國에 접하고 있다. 북쪽은 木曾川·揖斐川·長良川을 경계로 尾張國(현 愛知縣)·美濃國(현 岐阜縣)과 서로 접하고 있다. 서쪽의 산지를 제외하고 대부분 평지이다. (이상 위키실록사전)
『이세국풍토기伊勢国風土記』 에 의하면, 이세츠히코신은 야마토의 진무神武천황에 의해 파견된 天日別命에 국토를 건네줄 것을 요구되었지만, 오랫동안 선주하고 있었던 것을 이유로 거절하고 있었다. 그러나 최종적으로 천일별명이 공세 준비를 갖추자 이를 두려워한 이세츠히코신은 동방으로 피퇴하는 취지를 천일별명에 전했다. 그러자 천일별명이 ‘이세를 떠나는 것을 어떻게 증명할 것인가’라고 물었기 때문에 이세즈히코신은 ‘강풍을 일으키면서 파도를 타고 동방으로 떠나간다’는 것을 맹세하고 밤에 동방으로 떠났다. 나중에 천황의 조칙에 의해 国津神쿠니츠신의 神名을 취해 이세국으로 했다고 기술된다. 또한 후세의 가필로, 쫓겨난 후, 다른 땅의 신사에서 모셔진 것이나 시나노국神濃國에 鎮座한 것이 기술된다. (이상 일본위키피디아)
이가국(伊賀国いがのくに)
도카이도에 위치한 일본의 옛 구니이다. 미에현 서부 우에노 분지 일대로, 현재의 미에 현 이가시와 나바리시에 해당한다. 이슈(伊州いしゅう)라고도 한다. 닌자로 유명하다. (이상 위키백과)
「이가」지명 유래로는 ① 험난한 산의 뜻의 「イカ」에서 유래, ② 猿田彦神の女アガツヒメノミコト吾娥津媛命의 アガ의 転音, ③ 지형을 イガ(栗刺밤나무)에 내세운 이름 등의 여러 설이 있다. (아사히신문, 2024.11.11.)
이즈국(伊豆国いずのくに)
일본 도카이도에 있던 옛 구니이다. 시즈오카현의 이즈반도와 도쿄도의 이즈 제도를 영역으로 하고 있었다. 즈슈(豆州ずしゅう)라고도 부른다.
덴무 천황 9년(680년) 7월, 스루가국에서 다카타 군(田方郡)과 가모군(賀茂郡)을 분리하여 설치하였다. (이상 위키백과)
"이즈"라는 이름이 섬(島, 시마) 또는 바다(海, 우미)를 의미하는 고대어에서 유래했다는 설(이상 구글AI)
지역 내 온천이 다수 용출하므로 湯出ゆずづ의 뜻이라는 설이 있으며(出づ湯いづゆ), 伊豆諸島에 있는 다수의 중요 신사와 제관들의 활동으로 인해 「斎いつく」라는 말에서 유래했을 가능성도 있음. (이상 kotobank.jp/word/伊豆国-30828)
"온천이 솟아나는 신(湯出づる神)"에서 유래하여 이즈의 지명이 명명되었다고 전해진다. 이는 '湯出づる'는 '이즈유(出づ湯)'로 표현되고 따라서 지명이 되었다고 볼 수 있음. (이상 travel.rakuten.co.jp/.../spot-izu)
이부키산(伊吹山)
일본 시가현 마이바라시에 있는 산으로 일본백명산에 등재되어 있는 산이다. 높이는 1,377m로 시가현에서 가장 높은 산이다. (이상 위키백과)
"이부키"의 음과 뜻: "이부키"라는 이름은 일본어로 "吹く" (부쿠)와 관련이 있는데, 이는 "불다" 또는 "바람을 일으키다"라는 의미를 가진다. 그래서 이 산은 예전부터 강한 바람이 불고, 고대 일본에서 "이부키가미"(伊吹神)라는 바람의 신이 거주하는 신성한 장소로 여겨졌다. 이 신은 바람을 다스리고, 이 산을 통해 기후와 계절을 조정하는 역할을 한다고 믿어졌다. (이상 챗GPT 40mini)
뱀 비늘 설: 이부키산 정상 부근에 자주 나타나는 구름이나 안개가 뱀의 비늘처럼 보인다고 해서 "이부키(伊吹)"라는 이름이 붙었다는 설이다. 이 설은 일본어로 "이부키(いぶき, 息)"가 숨쉬다, 바람이라는 뜻과 관련이 있다는 해석도 있다.
약초 산 설: 이부키산은 다양한 약초가 자생하는 곳으로 유명합니다. 따라서 "약초의 산"이라는 의미에서 "이부키산"이라는 이름이 붙었다는 설도 있다. (이상 구글A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