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영필
한글은 세종대왕이 만들었지만, 그 한글을 오늘날 우리가 쓰는 한글로 다듬는 데 초석을 놓은 사람들은 기독교 선교사들이다. 그들은 기독교를 선교하기 위해 한글을 배우고 개선하였으며, 또 인쇄 출판하였다. 이를 통해 양반의 사사로운 편지(정조의 서신 포함)나 고을 아전의 문서 그리고 대가집 규방에서나마 읽혀지던 언문이 모든 백성에게 퍼질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이는 구텐베르크와 마르틴 루터의 후예들이 이루어낸 금자탑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구텐베르크는 누구나 쉽게 읽을 수 있는 금속활자 활판인쇄 기술을 만들었고, 또 마르틴 루터는 성경이 모든 민중의 것이라고 생각했다. 구텐베르크의 인쇄기로 가장 많이 인쇄된 것이 마르틴 루터의 독일어 번역 성경이라고 말하고 있듯이, 기술과 사상은 밀접히 결합하여 역사의 여명을 밝혔다. 마르틴 루터는 로마 가톨릭 교회의 경직성은 사도로부터 계승되어오는 전통과 일반인이 알아 들을 수 없는 라틴어로 이루어지는 미사의식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따라서 그는 종교개혁의 신호탄을 쏘아올린 후 바로 이어 기독교의 교의를 누구나 쉽게 읽고 스스로 깨달을 수 있도록 라틴어 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하였다. 이는 사제집단만의 전유물이었던 기독교의 교의를 모든 사람에게 개방하고자 하는 민주적 정신의 산물이었다. 그리고 그는 그 이전 교회개혁가들이 고문과 화형으로 순교를 강요당했던 것과 달리 구텐베르크 이후 세대였기 때문에 인쇄출판기술의 덕택을 받아 그의 종교개혁을 지속할 수 있었다.
그러한 기독교 프로테스탄트(항의)의 DNA는 조선땅에서도 빛났다. 100년 먼저 들어온 천주교에서는 완전한 성경을 번역하지 않고, 교리나 일부 복음만을 번역하는 정도에 불과했던 성경의 한글화 작업이, 기독교 개신교 선교사들은 입국 또는 입국하기도 전에 이미 완전한 한글판 성경을 들고 들어왔던 것으로 그것은 증명되었다. 물론 그들의 작업에는 그 이전 프랑스 외방선교회 신부들의 한불사전 편찬 작업 등 선구적 업적에 도움을 받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오늘날 한글의 자형과 가로쓰기와 띄어쓰기 맞춤법 등 새로운 한글로의 탄생에는 기독교 개신교 선교사들의 힘이 무엇보다도 지대했음을 우리는 알아야 할 것이다.
기원전 8~5세기 그리스 알파벳의 탄생 및 정착 이후 머나먼 음소문자의 전파를 거쳐 이천 년 후 동아시아에서 탄생한 두 번째 알파벳이자 문자의 이상인 자질문자를 성취한 '한글'은 세종대왕의 위대한 업적으로서 누구도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초기 용비어천가나 월인석보의 인쇄 편찬 이후 한글 관련 인쇄본은 1527년의 훈몽자회, 1598년의 무예제보 등에 불과할 정도로 그 수량이 과소하다. 유명한 김천택의 청구영언(1728)도 원본은 필사본인 것이다. 그리고 사실 인쇄본이라고 하더라도 조선시대 인쇄본의 출판량은 몇 부에서 몇십 부에 지나지 않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여러 한글 성경을 몇천 부씩 찍어 백성들의 손에 무상으로 쥐어주었으며, 또한 그 활자와 인쇄기를 통해 그간 필사본을 돌려가며 읽는 것으로 유통되던 여러 민담 소설류를 마음껏 찍어 보급한 한글 출판 인쇄의 개혁은 조선 민중을 문자 세계로 인도한 그야말로 복음이 아니고 무엇이었으랴. 주시경과 한글학회도 이러한 기독교 선각자와 서재필의 독립신문의 향도를 통해 인도되었음은 역사를 조금만 들추어봐도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의 한글의 공로자로 나는 세 사람을 말하고 싶다. 그 첫째는 세종대왕이고 둘째는 마르틴 루터이며 셋째는 구텐베르크이다. 세종대왕을 제외한 나머지 두 사람은 이미 세계사에 있어서도 절대적으로 중요한 인물들이지만, 이처럼 우리 역사에서도 심대한 영향을 미쳤다. 그리고 세종대왕은 헐리우드와 볼리우드에 비견할 수 있는 충무로의 콘텐츠 제작 역량과 한류의 밑바탕 저력으로서 한글의 우수성이 더욱 발휘됨에 따라 점차 세계사에 미치는 영향력을 목하 증대시켜 나가고 있다.
1784년 이 땅에 가톨릭 신앙이 전래된 후 3년 만인 1787년부터 한글로 된 교회 서적들이 발간되기 시작했다. 정약종(아우구스티노)은 1786년께 이승훈(베드로)에게 세례를 받아 오랜 교리 연구 끝에 한글 교리서 해설서인 「주교요지」를 집필했고, 최초의 한글 성경 「성경직해광익」은 1790년대 초 최창현(요한)이 우리말로 썼다...
한글과 가톨릭의 만남
1801년 신유박해에 관한 정부 기록을 정리한 「사학징의」에 따르면, 당시 조선에 전해진 가톨릭 한문 서적 120종 177권 가운데 3분의 2가량인 83종 111권이 한글로 번역됐다고 보고 있다... 교회 기록에 따르면, 흥선대원군은 교회를 박해하면서 “언문, 즉 한글을 잘 알면 천주교인”이라고 이야기했을 정도라고 전해진다.
... 제4대 조선대목구장 베르뇌 시메온(1814~1866, 장경일) 주교는... 1857년 반포된 사목교서인 장주교윤시제우서(張主敎輪示諸友書)에는 ‘교리를 제대로 배우기 위해서는 언문(한글)을 배우든 한문으로 배우든 글자를 배우기를 적극적으로 권장한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프랑스 선교사들은 한글의 체계적인 연구와 전파를 위해 ‘한글-한문-프랑스어 사전’과 ‘한글-한문-라틴어 사전’을 제작했다. 한글에 관한 최초의 사전은 1866년 완성됐다고 전해지지만, 그해부터 일어난 대박해인 병인박해 때 불태워져 남아있지는 않다. (가톨릭평화신문, 조선 선교의 일등 공신 ‘한글’… 풍요로운 우리 교회 말 제대로 알자, 2020.10.7.)
「성경직해광익」과 「성경직해」
우리나라 최초 한글 성경은 1790년대 초 역관 출신 최창현(요한)이 펴낸 「성경직해광익」(聖經直解廣益)이다. 「성경직해광익」은 디아즈(예수회) 신부가 1636년 북경에서 펴낸 「성경직해」(聖經直解)와 마이야(예수회) 신부가 1740년 북경에서 펴낸 「성경광익」(聖經廣益)을 취합해서 한글로 옮긴 책이다. 중국에서 한문으로 쓰인 두 책은 주일ㆍ축일의 성경 본문, 본문 주해, 묵상, 실천 덕목 등을 종합적으로 담았다. 한글 신약성경의 효시가 되는 「성경직해광익」은 박해 속에서도 필사를 거쳐 신자들에게 널리 퍼졌다. 수록된 성경 본문은 신약성경 4복음서의 30% 분량이었다.
1890년대 제8대 조선교구장 뮈텔 주교는 「성경직해광익」을 「성경직해」로 이름을 바꿔 서울 성서활판소(가톨릭출판사 전신)에서 9권으로 간행했다. 「성경직해」는 1930년대까지 판을 거듭하면서 신자 애독서로 자리 잡았다. (cpbc News, 1790년, 하느님이 우리말을 시작하시다, 2012.11.20.)
「성경직해광익」은 포르투갈 출신 예수회 선교사 디아즈 신부(1574~1659)가 베이징에서 간행한 주일복음 해설서인 「성경직해」(1636년)와 프랑스 출신 예수회 선교사 마이야 신부(1669~1748)가 펴낸 주일복음 묵상서 「성경광익」(1740년)을 우리말로 옮겨 하나로 합한 책이다. 일반적으로 역관 출신 최창현(요한·1759~1801)에 의해 쓰인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편찬자에 대한 다른 견해도 제시되고 있다.
총 86장으로 구성된 이 책은 복음구절 해설에 해당되는 잠(箴)과 묵상할 주제를 전해주는 의행지덕(宜行之德), 기도지향인 당무지구(當務之求) 등이 포함돼 있다. 2012년 발표된 논문 「성경직해광익 연구」(조한건 신부)는 “한문본에는 보이지 않는 ‘예수셩심첨례셩경’이 포함되었다는 점” 등을 새롭게 밝혀내기도 했다.
「성경직해광익」은 성경 전체를 번역한 것은 아니지만 교회 전례력에 따라 매주 미사에 봉독되는 성경 일부가 수록돼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현대적으로 해석하면 ‘매일미사’와 같은 역할을 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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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약종(아우구스티노·1760~1801)이 오랫동안 교리 연구를 통해 누구나 이해하기 쉽게 편찬한「주교요지」는 주문모 신부의 인가를 얻어 교우들에게 널리 보급됐다. 논문 「초기 한국 천주교회 교리서에 나타난 토착화」(2005년, 이동욱 신부)에 따르면「주교요지」(절두산 순교성지에 소장된 활판본-b 기준)는 총 43조목 80장으로 구성돼 있다. 구체적으로는 상편 32조목 36장, 하편 11조목 41장이다.
상편은 자연신학의 호교론적 이론을 통해 천주에 대한 인간의 바른 인식에 중점을 두고 있으며, 하편은 성경에 바탕을 둔 계시를 중심으로 구속론을 이야기한다. 특히 조선 상황에서 조선인의 실정에 맞게 서술하고 있다는 점, 한글로 쓰여 계층을 불문하고 누구나 읽고 교리를 배울 수 있게 됐다는 점에서 주교요지는 한국교회 교리서의 토착화 역사를 대변하기도 한다. (가톨릭신문, 최초 한글 성경 「성경직해광익」·교리서 「주교요지」, 2013.10.1.)
성서국역은 1790년대초 역관인 최창현 등 일부 신자들에 의해 성경직해(聖經直解) 성경광익(聖經廣益) 등 성서의 일부가 수록된 한문본이 번역되었고 1839년 앵베르범 주교 때 역시 성서의 일부가 수록된「천주성교공과」가 있었음이 기록으로 남아있다. 그러나 이 책자들은 모두 일상의 기도생활에 필요한 성서의 일부 내용만을 발췌번역한 것으로서 본격적인 성서국역의 작품은 아니었다. 본격적인 성서국역은 오히려 천주교보다 1백년 늦게 우리 나라에 들어온 개신교에 의해 시작됐다.
개신교의 성서국역은 만주에서 선교하던 로스목사, 평신도 이응찬ㆍ백흥준 등에 의해 1882년「누가복음」을 1887년「예수성교전서」를 각각 만주에서 간행했으며, 일본에서 개신교인이 된 이수정은 1883년 현토한한신신약성(懸土漢韓新約聖書)를 간행했다. 이같이 개신교는 우리나라 진출 전에 이미 만주와 일본에서 본격적으로 한글 성서를 간행, 1882년 한미조약 이후 미국 선교사들은 국역성서를 갖고 입국했다.
우리나라에 입국한 개신교 선교자들은 1887년 성서번역위원회와 성서위원회를 조직, 1900년에「신약전서」1911년에「구약전서」를 번역, 신구약을 합본한「성경전서」를 간행했다. 이「성경전서」는 1956년「성경전서개역 한글판」으로 개정 간행 현재까지 사용되고 있다.
... 천주교는... 1910년에야 본격적인 성서국역인 사사성경(四史聖經)을 간행했다. 4복음서인「사사성경」은 라틴어 성서(불가타역)를 번역한 것으로 4복음서 중 마태오 복음서는 손성재 신부가 나머지 세 복음의 번역과 전체역주는 한기근 신부가 담당했다. 10여년후인 1922년 다시 한기근 신부의 번역으로 사도행전 번역서인 종도행전(宗徒行傳)이간행됐다. (가톨릭신문, 한글성서역사, 교회창설부터 시작, 2020.6.5.)
존 로스, 한글성경을 만들기 위해 고려문을 찾다
존 로스 선교사의 한국 이름은 ‘라요한’이다. 그는 1842년 스코틀랜드 동북지역에 위치한 이스터 마치 지역에서 태어나 연합장로교회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1872년부터 본격적인 선교 활동을 시작했다. 그는 평양 대동강에서 순교한 토마스 선교사의 뜻을 이루기기 위해 선교에 나섰지만, 첫 선교지는 중국 만주였다. 그가 몸담고 있던 스코틀랜드성서공회(NBSS)에서 파송된 곳이 중국 만주 영구였기 때문이다. 로스는 영구에서 첫 겨울을 보내며 중국어와 사서삼경 공부에 매진했고, 이듬해인 5월에는 중국어 설교에 성공했다.
하지만 결혼 후 1년 만에 아내와 사별하게 된 로스는 1874년 ‘고려문’으로 향한다. 고려문은 당시 만주에서 국제무역이 가장 성행했던 곳인데 음력 3~6월, 8월, 9~10월, 12월에만 통행이 허락돼 개방 시기에는 수많은 상인들이 몰리던 곳이었다. 당시 존 로스는 성경을 조선말로 번역해줄 사람을 찾고 있었는데, 고려문에 모인 조선 상인들은 한문이나 만주어에 능통한 경우가 많아 종교 전파에 좋은 기회라고 여겼던 것이다. 이때 그와 연이 닿은 사람은 평안도 의주 출신의 이응찬이었다. 이응찬은 당시 압록강을 건너다니며 한약재를 팔던 장사꾼인데, 단동으로 가던 배가 풍랑을 만나 고려문까지 떠밀려온 상황이었다.
자모만 배우면 누구나 배울 수 있는 우수한 한글
이응찬은 로스 선교사와의 인연으로 한글 교사 겸 번역가로 활동하게 됐다. 로스는 그의 도움을 받아 최초의 한글 띄어쓰기가 도입된 한국어교재 ‘조선어 첫걸음(Corean Primer, 1877)’을 만들었다. 이는 로스가 자신과 같은 선교사나 외국인들이 한글을 배울 수 있도록 만든 책으로, 한글 아래 발음기호를 표기하는 방식으로 기록됐다. 여기에 최초의 한글 띄어쓰기가 도입된 것은 로스가 사용하던 영어의 띄어쓰기가 자연스레 반영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책에는 “한글은 소리글자로 이루어져 자모만 배우면 누구나 읽고 배울 수 있는 글자”라며 한글의 우수성을 언급하기도 했다. 이후 간행물로는 <독립신문>이 1896년 최초의 한글판 신문 발행과 함께 띄어쓰기를 도입했으며, 1906년 대한국민교육회가 발간한 <초등소학>에는 단어와 조사들을 모두 띄어 쓰는 일도 있었다. 그러다 1933년 조선어학회가 한글 맞춤법 통일안을 제정하면서 띄어쓰기의 어문규정이 하나씩 정립되기 시작했다.
초창기 성경 번역에는 로스 선교사를 중심으로 이응찬, 이성하, 백홍준, 김진기 등이 참여했다. 한국인 번역자들이 한문 성경을 읽고 그것을 한글로 옮기면, 로스가 다시 한글과 헬라어를 대조해가며 원문에 가깝게 다듬는 방식이었다. 이에 1878년 이들이 공역한 ‘누가복음’ 초역이 완성됐으며, 이 초역본은 다시 로스의 선배였던 맥킨타이어 선교사가 다른 한인 번역자들과 함께 수정 과정을 거쳐 최종본으로 완성했다. 이렇게 만들어진 번역본들은 1878년 ‘요한복음’과 ‘마가복음’, 1877년 《한문문리성경》, 1879년 ‘마태복음’, ‘사도행전’, ‘로마서’ 등이다.
최초의 한글성경《예수셩교누가복음젼셔》
신약 성경의 한글 번역이 어느 정도 마무리되어 갈 즈음 로스는 한글 성경의 인쇄비를 마련하기 위해 스코틀랜드성서공회에 130파운드를 요청했다. 그리고 1881년 중국 심양(랴오닝성에 있는 도시로 한국 교민이 많은 곳)에 인쇄소를 설치해 우리나라 첫 한글 성경인 《예수셩교문답》과 《예수셩교요령》을 인쇄했다. 당시 수천 권이 인쇄된 두 책은 부산과 국내 일부 지역, 만주 한인촌, 일본 등으로 발송됐다. 《예수셩교문답》은 현재 런던 캠브리지 대학 도서관에 보관되고 있다. 이듬해인 1882년에는 한국 개신교사상 최초의 성경으로 알려진 51페이지짜리 《예수셩교누가복음젼셔》가 3,000부 간행됐으며, 이후에는 영국 옥스퍼드 대학에서 발행한《개역 그리스어 성서》를 기준으로 《예수셩교젼셔》를 다시 검토, 교정하며 더욱 정확한 성경을 완성해갔다. (국립한글박물관 소식지, 기획기사2, 2017.2.)
1. 「예수셩교젼셔」 (1887)
존 로스 목사를 중심으로 매킨타이어(John Macintyre), 이응찬(李應贊), 백홍준(白鴻俊), 서상륜(徐相崙), 이성하(李成夏) 등이 함께 번역한 최초의 한글 신약전서이다. 최초의 한글 성서인 누가복음(「예수셩교누가복음젼셔」)을 출판한 것은 1882년이다. 이 책은 서북 방언으로 번역된 것이다. 곧 이어서 요한복음을 출판하였다.
요한복음은 매킨타이어의 뜻에 따라 서북말 판과 서울말 판 이렇게 두 가지로 출판하였다. 마가복음부터는 서울말 수정을 거쳐 출판하였다. 그러나 ‘아밤, 오맘, 아반이(아바니)’ 등 적지 않은 서북 지역의 말이 계속해서 그대로 사용되었다. 1887년에는 신약 전체의 번역을 완료하여 「예수셩교젼셔」로 출판하였다.
먼저 한국인 번역자들이 중국어 신약(1852, 대표역본)을 보면서 한국어로 번역하였고, 로스와 매킨타이어가 그 한국어 번역문을 그리스어 개역과 영어 개역을 철저하게 대조하면서 검토하고 수정하는 방식으로 번역하였다. 로스는 번역 대본으로 그리스어 개정판을 사용한다고 강조하였다.
로스역의 번역 원칙은 “본문의 의미와 한국어의 관용어에 적합한 절대적 직역”이었다. 그러나 로스 스스로가 고백하였듯이, 직역이 통하지 않는 몇몇 경우가 있었다. 그리스어의 “바늘눈”을 중국어 성경은 “바늘 구멍”으로 번역하였는데, 한국어로는 “바늘귀”로 번역한 것이 그러한 예이다.
이 번역에서 신명 번역으로는 ‘하늘’과 ‘님’에서 찾은 말로 ‘하느님’ 또는 ‘하나님’을 처음으로 사용하였다. 중국어 번역은 주로 상제(上帝) 또는 신(神)으로 번역하고 있었다. 로스는 이렇게 기록했다. “한국인에게 ‘heaven’은 ‘하나ᆞ갈’[hanal]이고, Lord 혹은 prince는 ‘님’[nim]이다. ‘hananim’은 어느 곳에서든 위에서 다스리시는 분이고, 지상에서 가장 높은 분이라고 조선인들이 알고 있는 낱말이다.”
이 번역을 위하여 스코틀랜드성서공회와 영국성서공회가 경비를 지원하였고, 스코틀랜드 교회들도 지원을 해 주었다. 「예수셩교젼셔」를 통해서 한국 사람에게 복음이 전해졌고, 한국에 교회가 시작되었다.
2. 이수정 번역 「신약마가젼복음셔언하ᆡ」 (1885)
이수정은 1882년 9월 수신사의 수행원으로 일본에 도착하여 도쿄 농학사 츠다센을 방문했다가 한문 신약성서를 받아 이를 읽고 복음을 받아들여, 1883년 4월 29일에 세례를 받고, 미국성서공회 일본지부 루미스 총무의 권유로 성서를 번역하였다.
이수정은 1884년에 브리지만(E. C. Bridgeman)과 컬버트슨(N. S. Culbertson)이 고전 한문으로 번역한 중국어 성경(新約全書, 1859) 본문에 이두식 토를 붙이는 방식의 번역인 「新約聖書 馬太傳」, 「新約聖書 馬可傳」, 「新約聖書 路加傳」, 「新約聖書 約翰傳」,「新約聖書 使徒行傳」을 출간하였다. 한문 본문을 그대로 두고 한글 토를 붙인 것이어서, 지식인들이 읽을 수 있는 번역이었다.
이후 국한문병용체로 「신약마가젼복음셔언하ᆡ」(1885)를 번역하였다. 번역 대본이었던 중국어 성서에서는 “야소기독(耶穌基督)”으로 번역되어 있었던 것을 그리스어를 따라 “예슈쓰크리슈도스”라고 음역하였다. 이외에도 “크리슈도스”(마 1:1), “밥테슈마”(막 1:4), “사밧”(막 6:2) 등과 같이 인명 지명 기타 주요 음역들은 그리스어에서 음역한 것으로 보인다. 야스카와(Yasukawa) 목사와 녹스(G. N. Knox) 목사로부터 번역에 도움을 받았다.
국한문 병용 형식의 번역은 한자를 모르는 사람도 읽을 수 있었고, 식자층들은 한자어 표기를 통해서 마가복음의 내용을 잘 이해할 수 있었다. 이수정이 번역한 마가복음에는 한국 문화 속에서 오래 전승되면서 형성된 언해문의 정갈한 문체가 반영되어 있었다. 1885년 미국인 선교사 언더우드(H. G. Underwood) 목사와 아펜젤러(H. G. Appenzeller) 목사가 한국에 입국할 때 이수정이 번역한 마가복음을 가지고 들어왔고, 이후 국내에서 성서번역자회를 조직하고 시작한 최초의 작업이 이수정역의 개정이었다. (대한성서공회)
류현국 교수, 12년간 40개국서 연구해 「한글 활자의 탄생」 출간
“한국 활자 인쇄의 근대화는 많은 부분 기독교 선교사들에 의해 이뤄진 것이 사실이다. 기독교 선교사들은 신식 한글 활자를 개발해 서양의 인쇄기술로 한글 성경을 출판·보급하고, 대중에게 광범위하게 읽히게 한 구심점 역할을 담당했다. 한국 출판 인쇄 활동의 새로운 영역을 개척하고 선구자적 역할을 담당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49쪽).”
<한글 활자의 탄생 1820-1945(홍시)>은 납활자 이전 금속활자나 목활자, 도활자 등이 한국 서지학계에서 깊이 있게 연구돼 온 것과 달리, 이렇다 할 연구 업적이 없던 조선 말기와 일제강점기 등 근대 시기 한글 납활자의 생성과 발달 과정을 복원한 대작이다. 저자인 류현국 교수(쓰쿠바기술대 종합디자인과)는 이를 위해 최근 12년간(2002-2014) 한글 활자의 원형과 계보를 찾아 40여 개국을 직접 방문해 발굴한 자료들로 ‘역사의 공백’을 메웠다.
‘한글’이 아닌 ‘한글 활자’의 역사라는 점이 이채로운데, 이에 대해 “서체는 그 나라의 문화와 기술, 정신을 내포한다. 서체 디자인은 활자 문화에 영향을 끼치고, 정신적 기둥을 구축한다”는 말로 답한다. 그리고 12년간 한글 활자사 연구의 결론은 이것이다. “한글 활자의 발달사는 기독교의 성서 번역 출판의 역사와 거의 일치한다.”
이 책은 최근 한국 역사학자들이 근대사에 공헌한 기독교의 역할을 ‘서양의 영향’이라는 이유로 왜곡·축소시키고 있는 가운데 나온 결과물이라 특히 주목받고 있다. <한글 활자의 탄생>에는 기독교 선교사들이 복음을 전하기 위해 한글 활자를 개발하여 성경을 인쇄하고 다국어 사전이나 한글 교재를 만드는 과정 등이 상세히 기록돼 있다. 다음은 저자인 류현국 교수와의 일문일답.
......
-선교사들은 왜 복음을 전하면서 ‘한글’에 주목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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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사 전체로 봐도 선교사들이 처음부터 그 나라 언어로 된 성경을 갖고 복음을 전하러 들어간 것은 우리 뿐일 것입니다. 성경도 순 한글활자로 인쇄되었습니다. 번역에는 천주교 선교사들이 출판한 <한불자전(1880)>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1882년 영국인 존 로스(John Ross·1837-1905)를 통해 만주에서 한글 낱권성경 11권이 들어왔습니다. 당시 조선인 '권서인(colporteur)'들은 만주에서 성경 인쇄를 위해 활자를 직접 만들었고, 조선은 쇄국정책을 내세웠기에 그들은 복음에 생명을 걸어야 했습니다.
1885년 미국인 언더우드 선교사도 영문 타자기와 이수정의 한글성경 번역본을 들고 입국했습니다. 일본에서는 주로 미국장로교의 도움을 받아 한글 성경이 간행됩니다. 이후 만주 계통과 미국 계통이 연합, 1887년 <마가의 전한 복음서 언해> 2천 부를 요코하마에서 출판했습니다. ‘언해’란 한자의 문장를 한글로 대역했다는 말로, ‘순수 한글’ 성경이라는 뜻이 됩니다. 그것이 최초의 국내 번역판 순한글 복음서였습니다. 이런 부분들이 교회사 연구에서 조금씩 밝혀졌지만, 활자 관련 연구는 아무래도 소상하게 이뤄지진 못했던 것 같습니다.”
-존 로스 선교사가 만든 활자는 어땠는지요.
“존 로스 선교사는 처음에는 한글 학습서 <조선어 초보(1877)> 의 간행을 위해, 신식 4호 분합활자와 3종류의 분합 목활자(자음자활자와 모음자활자의 조합방식)를 급하게 제작해서, 활자의 질이 그다지 좋지 못했습니다. 이후 로스 선교사는 스코틀랜드 성서공회(NBSS)의 지원으로 1880년 일본의 도쿄 츠키치활판제조소에서 이응찬이 그린 원도(原圖·활자 설계도)와 서상륜의 종자(種字) 조각에 의해 양질의 ‘신식 한글 3호 활자’가 제작되었습니다. 그래서 1882년 중국 심양에 최초 개신교 활판소인 ‘문광서원’을 세워 한글 성경 인쇄에 본격적으로 나서게 됩니다.”
이런 과정을 거쳐 신앙고백서 혹은 교리서 <예수성교문답(耶蘇聖敎問答)>과 <예수성교요령(耶蘇聖敎要領)> 4쪽이 한글 소책자 시험본(Tentative edition)으로 1881년 10월 인쇄된다. 시험본 인쇄에 성공한 로스 선교사는 1882년 3월 <예수성교 누가복음전서>, 5월 <예수성교 요한복음전서> 1883년 1-2월 <예수성교성서 요한복음>을 3천 부씩 인쇄했고, 10월 <예수성교성서 누가복음 제자행적> 인쇄 때는 ‘예수’, ‘하나님’ 등의 앞에 한 글자 띄어쓰기(대두법)를 실시한다.
책에서 류 교수는 “<예수성교문답>과 <예수성교요령> 두 소책자에 사용된 단어와 문장, 문법과 번역 등은 한국어학 역사에 있어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며 “뿐만 아니라 이는 지금까지 발견된 최초의 한글 개신교 문서라는 점에서도 가치가 돋보인다”고 설명했다.
한국과 일본 사이에 제작 주체와 관련해 주장이 엇갈리는 ‘한글 해서체 4호 활자(1884)’에 대해서도, 류 교수는 개신교와 관련된 새로운 입장을 제시한다. 한국에서는 이 서체를 ‘한성체’로 부르면서 신문 <한성주보(1886)> 창간을 위해 제작됐다고 주장하고, 일본에서는 이 조선 최초의 근대 신문이 후쿠자와 유키치라는 일본인이 조선에 한글을 보급하기 위해서 만들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류 교수는 수신사를 따라 일본을 방문한 후, 조선어 교사로 있다 일본에서 조선인 최초로 세례를 받은 개신교 신자 이수정과 관련, 일본에 있던 미국 선교사 루미스(Henry Loomis, 1839-1920) 목사의 주도로 제작된 활자라고 설명한다. 이수정은 루미스의 제의로 성경을 한글로 번역하기 시작했고, 1883년 <마가복음> 번역을 끝낸 후 미국성서공회(ABS)에서 간행했다. 루미스 선교사는 1883년 11월 ABS 뉴욕본부에 활자 개발과 관련된 지원금 요청 등의 편지를 보냈다는 것.
루미스 선교사는 이수정에게 신약 4복음서 간행을 위한 한글 번역을 부탁했고, 일본에서 발행된 최초의 국한문 번역본 낱권 성경인 <신약 마가전 복음서 언해>를 1884년 12월 완성시켜 1885년 초 요코하마에서 이를 간행했다. 루미 선교사는 이후 신약성경 전체를 언제든지 조판·인쇄할 수 있도록 활자 세트를 보관하고 있었다고 한다.
이 4호 활자는 언더우드 선교사에 의해 1885년 전달됐고, <한성주보> 발행을 비롯해 최초의 순 한글 민간지 <독립신문(1897)>과 최초의 아동잡지 <소년(1897)> 등에 사용됐을 뿐 아니라 국내 각 인쇄소와 출판사에도 많이 보급됐다. 또 아펜젤러가 만든 최초의 기독교 신문 <조선그리스도인회보(1897-1905)>, 언더우드가 만든 최초의 장로교 주간신문 <그리스도신문(1897-1907)> 발행에도 사용됐다. 류 교수는 “지금 시각으로 보면, 4호 활자는 당시 완성도가 가장 높은 본문(명조)체였다”고 했다.
-로스 선교사가 만든 활자와 일본에서 만들어진 활자는 어떻게 다른가요.
“로스 선교사는 보급을 위해 직역체 대신 대화체와 평안도 사투리를 사용했는데, 그러다 보니 성서 내용 자체에 충실하지 못한 부분이 있었습니다. 일본에 있던 루미스의 제의를 받은 이수정은 한자와 한글을 병행했지요. 하지만 한국 선교에 나선 언더우드 선교사는 표준어를 쓰면서 두 가지의 장점을 합치고 싶었습니다. 이 점에서 ABS와 연결된 루미스 선교사와 방향이 달랐고, 언더우드는 대량 인쇄가 가능한 일본에 직접 찾아가 친구와 선배들의 도움으로 1887년 <마가의 전한 복음서 언해>를 발간할 수 있었습니다.”
...... (크리스천투데이, “한국 초기 선교사들, 출판·인쇄 분야의 개척자”, 2015.10.21.)
근대 한글 활자 개발자는 서양 선교사들
류현국 일본 쓰쿠바기술대 종합디자인학과 교수는 최근 이런 근대기 한글 활자사 연구에 획을 긋는 연구서 ‘한글 활자의 탄생’(홍시)를 내놨다. 그간 목활자나, 직지를 포함한 조선왕조 동활자 연구 등에만 집중됐던 시선을 근대로 돌려, 근대 한글활자의 개발과 전파, 보급 과정을 조명했다. 12년간 세계 40여개국을 답사해 곳곳에 흩어져 있는 근대 한글 활자의 기록과 인쇄사를 분석해 기록했다.
류 교수에 따르면, 근대식 활자와 인쇄술로 한글간행물을 펴내기 시작한 것은 서양 선교사들이었다. 18세기 초 서양에서 중국 등 동양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며 선교사들을 중심으로 한자 납활자가 개발되기 시작했는데, 이 과정에서 중국을 통해 서양인들의 눈에 한글이라는 문자가 들어오기 시작한 것.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의 재무담당 헨드릭 하멜의 ‘표류기’(1668) 등을 통해 서구에 한글의 존재가 알려지긴 했지만, 19세기 초까지만 해도 유럽의 문자학계는 문자 역사에서 한글처럼 독창적으로 개발된 문자체계를 인정하지 않는 경향이 강했다.
1869년 천주교 조선교구장에 임명된 리델 주교 등 성직자들이 최우선 과제로 삼은 일은 교회 서적의 인쇄와 보급이었다. 조선 왕실의 탄압으로 중국, 일본 등에 머물렀던 천주교 사제들은 1870년대부터 만주, 일본 등에서 한글 교리서 저술을 진행했고, 1881년에는 나가사키에 조선교구 인쇄소를 설립해 보다 본격적인 한글 문서 인쇄를 시작했다.
개신교 선교사들의 활동도 활발했는데, 1874년 스코틀랜드성서공회 중국 동북부지부에 부임한 존 로스 목사 등은 중국 책에서 추출한 한글 서체를 토대로 1877년 중국 상해에서 ‘조선어 초보(Corean primer)’를 만드는 등 적극 활동했다.
책의 본문에 사용 가능한 양질의 소형활자가 적용된 첫 출판물은 1879년 나온 ‘한불자전’인데 코스트 신부가 한 조선인 천주교 신자가 그린 한글을 토대로 활자를 제작해 이름없는 장인들과 함께 500권을 간행했다. 서양식 가로쓰기, 띄어쓰기 등을 적용한 점이 특징이다.
1910년 전후로는 조선에 진출한 기독교 선교사들에 의해 출판사와 인쇄소가 설립되고 민간인 인쇄업자도 나왔다. 한글판 ‘독립신문’(1896년)을 비롯해 황성신문, 제국신문, 대한매일신문, 만세보, 대한민보, 국민신보 등이 잇달아 한글로 간행되며 한글문화로의 혁명이 서서히 진행됐다.
...... (한국일보, 2015.10.8.)
“한글은 정말로 이 세계에서 제일 간단하다. AD 1445년에 발명되어 조용히 먼지 투성이의 시대로 자기의 세월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으니 누가 그것을 알아주었겠는가? 하나님의 신비로운 섭리에 의해 그것은 신약성서와 다른 기독교 서적을 위해 준비된 채 자기의 날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1909년 캐나다 출신 선교사 게일(1863~1937)은 저서 ‘전환기의 조선’에 동료 선교사 존슨(1867~1919)의 이 글을 인용했다. 그리피스(1843~1928) 선교사는 “금과 보석을 발견한 알리바바도 언문(한글)의 철자를 찾아낸 언더우드와 아펜젤러보다 더 즐거움을 느끼지는 못했을 것”이라고 할 정도였다. 당시 선교사들이 한글이 얼마나 ‘좋은 무기’인지 자각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조선일보, 한글은 기독교 선교 최고의 무기, 2023.11.30.)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1859-1916)는 한국의 첫 미국인 장로교 선교사로 1885년 26세의 나이에 조선에 첫발을 내디뎠다. 1882년 5월 조미수호통상조약이 체결된 지 3년이 지난 시점이었다.
성경 통해 재발견된 한글의 가치
언더우드를 비롯해 많은 초기 선교사들은 선교 활동을 위해서는 현지어로 된 성경이 꼭 필요하다 생각에 성경을 번역하고자 했지만, 한영 사전도 하나 없는 상황에서 성서 번역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이에 언더우드는 1887년 동료들과 '영구성경위원회(Permanent Executive Bible Committee)'를 창설해 위원장을 맡으며, 조선인들의 구어체에 가까운 언어로 성경을 번역하는 것을 목표로 성서 번역 사업에 매진했다.
그로부터 3년 뒤인 1890년, 언더우드는 우리나라 최초의 영한사전인 '영한자전(A Concise Dictionary of the Korean Language)'을 일본 요코하마의 한 인쇄소에서 출판했다. 560페이지에 달하는 이 사전은 한영과 영한의 두 부문으로 구성됐고 총 5,293개의 영어 단어가 수록된 것으로 알려졌다. 같은해 언더우드는 영한자전과 함께 한국어 기초 문법서인 '한영문법(An Introduction to the Korean Spoken Language)'도 펴냈다. 총 425 페이지의 이 영문 문법서는 한국어의 음운론, 형태론 등을 소개하며 이후 한글 연구와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한영 사전과 한국어 문법서의 출판으로 성경 번역을 위한 토대를 마련한 후 1893년 드디어 본격적인 한글 성경을 위한 번역 작업이 시작됐다. 언더우드와 미국 선교사인 헨리 지 아펜젤러(1858-1902), 메리 플레처 스크랜튼(1832-1909) 등 영구성경위원회 구성원들은 조선인 기독교도들과 협력하여 신약 성경 번역에 착수했다.
마침내 1900년, 국내 최초의 한국어 신약 성경인 “신약젼셔”가 출판됐고 이는 이후 미국 선교사 윌리엄 데이비스 레이놀즈(1867-1951)가 주도한 구약 성경 번역 작업으로 이어졌다. 1911년 한국어 구약인 “구약젼셔”가 발간되면서 성경 전체를 한글로 읽을 수 있게 되었다. 한국어로 된 구약과 신약 전체 성경은 여러 번의 개정을 통해 1937년에 완성됐다.
선교사들의 한글 교육을 통한 복음 전파는 이후 한국어의 언어학적 연구의 중요한 동력이 됐다. 예컨대 우리말을 뜻하는 단어로 “한글”을 처음 쓰기 시작한 국어학자 선구자 주시경 선생은 1894년 배재고등학교(현 배재대학교)에 입학해 한국어 연구에 몰두했다. 배제재고등학교는 1885년 미국 선교사 애펜젤러가 설립한 한국 최초의 근대식 중등사립학교다. 주시경 선생은 1908년에 창립된 한글학회의 창립자이자 일제강점기에 한글 보존을 위해 헌신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 그는 1910년 “국어문법”을 출판했는데 이는 국어의 문법 및 특징을 기술한 최초의 현대어 문법서였다. (코리아헤럴드, 조선의 초기 선교사들, 한글 보급의 문빗장을 열다, 2023.2.26.)
......
한글전파의 1등 공신 ‘딱지본 소설’, 최초의 한류 《춘향전》
1910년 경 돈 6전으로 살 수 있는 것은 우동 한 그릇, 그리고 딱지본 소설책(6전 소설) 1권이었다. ‘딱지본 소설’이란 1890년대 신식 활판 인쇄기가 도입되면서 한글 소설책들이 대거 쏟아졌는데, 특히 표지가 알록달록 예쁘고 크기가 작아 아이들이 갖고 노는 딱지 같은 느낌을 주는 책을 말한다. 한글박물관에는 《콩쥐팥쥐전》, 《박씨전》, 《깔깔 웃음주머니》, 《춘향전》 등 형형색색의 표지를 가진 딱지본 소설을 전시해두고 있으며, 벤치에 앉아 관람객들이 내용을 읽어볼 수 있도록 복제본도 비치해 놓고 있다. 직접 보면 알겠지만 이 딱지본 소설들의 표지는 화려한데 본문 안에는 그림이 하나도 없다. 당시에는 표지 그림이 판매 부수에 큰 영향을 줬기 때문에 화가들은 책 표지를 눈에 띄게 만들려고 많은 노력을 했다고 한다.
딱지본 소설 가운데는 우리가 역사책에서 흔히 봐 왔던 한 권의 책이 얼른 눈에 들어온다. 바로 1908년 안국선이 쓴 《금수회의록》이다. 꿈속에서 동물들이 회의를 한다는 설정으로 저자는 까마귀와 여우, 벌, 개구리 등의 입을 빌어 인간의 간사함과 함께 나라를 망치고 백성들을 도탄에 빠트리는 자, 그리고 일제 침략을 우회적으로 비판한다. 당시는 일제강점기로 일본군의 탄압과 수탈이 매우 극심하던 때였다. 그래서 딱지본 역시 총독부로부터 엄격한 출판검열을 받았는데 안국선의 《금수회의록》은 일본이 최초로 출판금지를 한 책들 중 하나이기도 하다.
딱지본 소설은 당시 많은 서민들에게 인기몰이를 하며 한글 전파의 1등 공신 역할을 했다. 이중에서도 가장 큰 사랑을 받았던 책은 《춘향전》이었다고 한다. 한글박물관에는 제목과 표지, 크기 등 다양한 형태로 출판된 《춘향전》 딱지본 소설들이 전시돼 있다. 이 춘향전은 근대 뿐 아니라 1950년대 중국에 수출돼 CCTV가 이를 방영하는 등 중국인들로부터 관심을 받아왔다. 어찌 보면 우리나라 첫 번째 한류스타는 사극 ‘대장금’의 여배우 이영애가 아닌 춘향이가 아닐까 싶다.
최초의 한글 교과서 《사민필지》, 그리고 대한민국 첫 국어교과서 《바둑이와 철수》
국립한글박물관에는 최초의 한글 교과서도 소장돼 있다. 바로 미국인 선교사 헐버트가 지은 세계지리서 《사민필지》다. 이 책은 한글이 우리나라 공식글자가 되기 5년 전인 1889년에 공식 출판됐으며, 지구, 유럽주, 아시아주, 아메리카주, 아프리카주에 대한 소개를 비롯해 태양계와 기후 · 인력 · 일월식, 대륙과 해양, 인종 등에 관한 내용이 담겨져 있다. 이 책을 지은 헐버트는 ‘동양의 조그만 나라에 한글이라는 글자가 있는데 국민이 이를 천시하고 오히려 한자를 존대한다’며 의아해 했으며, 3년 만에 한글을 배운 뒤 최초로 한글 교과서를 썼다고 알려져 있다. 《사민필지》는 세계 정세에 대해 어두웠던 당시의 조선인들이 세계에 눈을 돌리게 함으로써 근대화의 장을 여는 계기가 됐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국립한글박물관 소식지, 기획기사1, 2017.2.)
선교사로 온 호모 헐버트 박사
한국인보다 한글을 더 사랑했던 외국인이 있다. 미국에서 온 선교사 호모 헐버트 박사이다. 그는 한국인들보다 먼저 한글의 가치에 눈을 떴다. 그는 한글과 세종대왕에 대해서 연구했고, 띄어쓰기와 문장 부호를 도입하여 더 읽고 쓰기 쉽게 한글 체계를 정리했다...
한국 근대문명의 선구자가 될 운명
“문자의 단순성과 소리를 표현하는 방식의 일관성에서 한국의 소리글자와 견줄 문자는 세상 어디에도 없다.” -《한국사》 중 세종 편에서
헐버트 선교사는 미국 명문가의 자제였다. 그의 아버지는 버몬트 주 미틀베리 칼리지의 총장이었고, 어머니는 다트머스 대학 설립자의 증손녀였다. 그는 1886년 유니온 신학대학교 2학년 재학 중에 고종이 설립한 조선 최초의 공립학교인 육영공원의 영어교사를 자원하여 한반도 땅을 밟았다.
당시 조선은 고종 23년으로, 갑신정변이 일어난 지 2년 후였다. 나라의 운명이 바람 앞에 촛불처럼 위태롭게 흔들리고 있었다. 대외적으로는 열강들이 제국주의의 야망을 품고 간섭을 시작했다. 그가 오기 바로 이전 해는 영국이 전라남도 거문도를 불법 점거한 ‘거문도 점령사건’이 있었고, 이듬해에는 천주교 박해로 마찰을 빚던 프랑스가 조선과 수교를 맺고 통상을 하기 위해 ‘조불수호통상조약’이 이뤄졌다.
헐버트는 한국에 오자마자 자신이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열악한 환경에 힘들어하며 귀국을 생각했다. 하지만 곧 한글과 운명 같은 사랑에 빠진다. 금발의 서양인이 ‘똑똑한 자는 아침나절이면 익히고, 어리석은 자는 10일이면 익힐 수 있는’ 한글의 우수성에 반한 것이다. 그리고 한글을 배운 지 4일 만에 그는 글을 읽고 쓸 수 있게 되었다.
“이런 훌륭한 문자를 만들어낸 민족이라면 앞으로 충분히 발전할 수 있어!”
그는 한글에서 조선의 가능성을 엿보고 밝은 소망을 품었다.
한글을 현대화시키다
“조선 언문이 중국 글자에 비하여 크게 요긴하건마는 사람들이 요긴한 줄도 알지 아니하고, 오히려 업신여기니 어찌 안타깝지 아니하리오. 이러므로 한 외국인이 조선말과 언문법에 익숙지 못한 것에 대한 부끄러움을 잊어버리고 특별히 언문으로서 천하각국 지도와 목견한 풍기를 대강 기록한다.” -《사민필지》 서문 중에서
세종대왕이 한글을 창제하고 반포했다면, 헐버트 박사는 한글을 현대화시키고 보급에 앞장선 사람이었다. 그는 한국인보다 한글의 가치를 더 잘 알았다. 그래서 세종대왕과 한글의 우수성을 학술적으로 파헤쳤다. 동대문교회의 담임목사로 시무하며 배재학당과 관립중학교(현 경기고) 등에서 학생들에게 세계 역사와 지리 등을 가르치면서도 늘 한글에 대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특히 한글이 과학적으로 만들어진 글자라는 점과, 누구나 쉽게 배울 수 있다는 점, 최대한 단순하면서도 광범위한 표음 능력을 지닌 점을 높이 평가했다. 그의 저서 《조선의 혼을 깨우다》에는 세종대왕을 존경했던 마음을 아래와 같이 곳곳에 드러내고 있다.
“자신의 의견만을 고집하지 않고 요동의 중국인 학자에게 열세 번이나 사람을 보내 비판과 조언을 구한 세종은 모든 위인들의 특징인 겸손함을 지녔음에 주목하라. 또한 백성들의 관습을 배려하고, 백성에게 익숙한 한자 필법에서 최대한 적게 벗어나게 하기 위해 음소를 삼각 구조로 배열하여 음절을 이루게 할 만큼, 탁월한 실용성을 지녔음에 주목하라. 이러한 점에서 세종은 참 독창적인 인물이었다.”
한편 헐버트 박사는 우리나라에 띄어쓰기와 문장 부호를 최초로 도입한 인물이다. 본인이 한국어를 배우던 중 표기된 부호와 소리 나는 부호가 서로 다름을 알고, 띄어쓰기와 쉼표, 마침표 등을 사용해서 의사전달에 용이하도록 기록했던 것이 그 시초였다. 한편 독립신문을 창간했던 배재학당의 제자 서재필에게 다른 제자였던 주시경을 추천해서 신문을 같이 만들도록 이끌며 이러한 문장 법칙이 독립신문에도 반영되도록 했다. 그리고 인쇄시설을 제공하고 독립신문의 영문판을 창간하는 등 그는 물심양면으로 함께했다.
한글 보급과 홍보에 본보기가 되다
“세계 200여 개의 문자와 비교해 봐도 조선의 글씨와 견줄 문자는 없다. 한글은 배운 지 나흘이면 어떤 책도 읽을 수 있다.” - 헐버트 박사의 회고록 《헐버트의 꿈, 조선은 피어나리!》 중에서
그는 한국어를 터득한 지 3년 만에 《사민필지》(1891년 1판본, 1896년 2판본)라는 한글판 교과서를 출판했다. 이는 ‘서민부터 일반 백성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알아야 한다.’라는 뜻으로 천연색 세계지도가 아홉 장이나 들어간 최초의 순우리말 세계 지리서이다. 조선 어린이들의 수준에 맞춰서 우리나라의 전래동화집 《마법사 엄지》도 출간했다. 여기에는 마법사인 엄지가 친구들에게 이야기를 들려주는 형식으로 ‘흥부놀부’, ‘콩쥐팥쥐’ 등 10편의 전래동화가 실렸다.
대외적으로는 미국 《타임스》와 AP 통신의 객원 특파원, 삼문 출판사의 책임자 등을 역임하며 한국의 소식을 매번 세계에 알렸다. 특히 미국 연례 보고서에는 《조선 글자》라는 학술 논문으로 한글의 기원과 우수성을 발표했다. 그의 이런 저서는 한문 역사책 《대동기년》(5권, 1903)과 영문으로 된 《한국사》(2권, 대한 제국사), 《대한 제국 멸망사(소멸되는 한국)》(1906), 《한국어와 드라비다어(인도남부, 파키스탄, 스리랑카)의 비교 연구》 등이 있다. 또 개인적으로 조선을 배경으로 《The Face in the Mist : 안갯속의 얼굴》이라는 모험소설도 창작했다.
재미있는 점은 헐버트 박사가 그때까지 구전으로만 전해지던 아리랑을 지역별로 모아서 서양식 음계로 표기한 후 세계에 소개한 것이다. 영문 월간지 《한국 소식》을 발행하고, 1896년 2월호에 문경 아리랑을 서양 음계로 채보하여 다른 시조, 민요들과 함께 논문으로 써서 발표했다. 이후에도 한국 민요의 악보집을 만들어서 국내에 배포했다. 지금도 문경시에는 그의 초상화와 그가 채굴한 문경아리랑 악보가 기념비로 새겨져 있다.
이런 활동들로 인해 헐버트 박사는 일본에 아주 눈엣가시였다. 그래서 고종황제가 일제에 의해서 강제 퇴위될 때 그 역시 강제 추방이 되어 미국으로 돌아가야 했다. 하지만 그는 미국에서도 곳곳을 다니며 강연과 기고, 저서 출간 등 여러 방면으로 한글을 홍보했고, 조선의 독립운동을 도왔다. 그리고 마침내 우리나라가 해방을 맞은 후 일제치하에서 독립된 대한민국 땅을 다시 밟을 수 있었다.
“나는 웨스트민스터 사원보다 한국 땅에 묻히기를 원한다.”
86세의 노구를 이끌고 한국으로 가는 배를 타는 날, 그는 미국 기자들에게 유언처럼 위와 같은 소회를 남겼다. 하지만 태평양을 건너는 한 달여간 여행의 여독으로 광복절 행사를 열흘 앞둔 8월 5일 청량리 위생병원에서 유명을 달리했다. 장례는 국내 최초로 외국인 사회장으로 거행되었고, 그의 배재학당 재직 시절 제자이기도 했던 이승만 전 대통령이 대한민국 최고의 건국훈장인 태극장을 사사했다. 이후 김대중 대통령도 1999년에 묘비명을 친필 휘호로 다시 새겼다. 그 외에 이달의 독립운동가에 선정(2013년), 금관문화훈장 추서(2014년), 서울 아리랑 페스티벌의 제1회 ‘서울 아리랑 상’(2015년)에 추서되었다.
헐버트 박사의 한국 이름은 ‘홀법 할보’이다. 그는 오늘날 결코 잊어서는 안되는 대한민국의 은인 중 한 사람이다. (데일리투머로우, 한글 교과서를 처음 만들다 '선교사 호모 헐버트 박사', 2023.10.18.)
3. 「셩경젼셔」 (1911)
국내에서 성경번역자회(聖經飜譯者會, The Board of Official Translators)를 조직하고, 성경 번역을 시작하였다. 처음에는 이수정역 마가복음과 로스-매킨타이어역 누가복음과 로마서를 개정하는 일을 시작했다. 이러한 개정 작업을 통해서 통일성 있는 한국어 표기를 위한 기초를 마련하였다.
1892년 마태복음과 사도행전을 출판하면서부터 이전 번역의 개정을 하지 않고, 순수 국내역본으로 새롭게 번역을 하였다. 이후 계속해서 신약 각 책을 번역하면서 출판하였고, 1900년에는 신약전서의 번역이 완료되어 출판되었다.
지금은 교회 용어로 자연스럽게 사용하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 “셰례”, “션지쟈”, “회가ᆡ” 등과 같은 용어가 바로 이 당시의 번역자들의 끊임없는 토론과 고심의 산물이다. 위원회 번역은 지식층 문체와 일반 대중 문체 사이에서 고심을 거듭하였고, 정식 교육을 받지 못한 사람이라도 이해할 수 있는 쉬운 문체이면서도 동시에 식자층의 마음에 들도록 정숙하고도 깔끔한 문체를 사용하기 위하여 노력하였다.
1) 「신약젼셔」(1900, 1902, 1904, 1906, 1911)
「마태복음」(1892) 이후로 「요한믁시」(1900)까지 신약 낱권들이 계속해서 번역되고 개정되면서 출판되었다. 초기에는 띄어쓰기가 없었는데, 1897년 갈라디아서 아고보서 베드로전후서 등에서부터 띄어쓰기를 한 것을 볼 수 있다. 1900년에는 「신약젼셔」가 출판되었다. 1900년에 출판된 「신약젼셔」는 그 후 계속 수정 보완되면서 여러 차례 출판되다가, 1911년에 완결판이 출판되었다.
1900년 「신약젼셔」는 한국인 6명(최병헌, 조한규, 이창직, 정동명, 김명준, 홍준)과 선교사 6명(스크랜튼, 아펜젤러, 게일, 레널즈, 언더우드, 트롤로프)이 짝을 이루어 번역을 하였다(후에 송덕조가 언더우드의 동역자로 합류). 「신약젼셔」가 서울의 중상류 말을 채택함으로써 그 후 한글성경이 한글을 통일시키고 표준말을 보급시키는 데 크게 기여할 수 있었다.
2) 「구약젼셔」(1911)
「창셰긔」(1906, 1908), 「시편」(1906, 1908) 등의 번역이 먼저 완료되어 출판되면서 구약의 번역이 이루어지기 시작하였다. 1908년 이후에는 레널즈와 한국인으로 번역위원으로 임명된 이승두, 김정삼이 함께 번역하였다. 1910년에 번역이 완료되어 1911년에 「구약젼셔」가 출판되면서 「셩경젼셔」가 출판되었다.
3) 「新約全書 국한문」(1906, 1908, 1909, 1910, 1911, 1921)
「신약젼셔」 본문을, 체언 부분과 용언 어간 부분 등에서 한자어로 교체할 수 있는 모든 말을 한자어로 바꾸었다. 유성준이 본문 변환 번역 작업을 하였다. “계신”을 “在하ᆞ신”으로 “우리”를 “我等”으로 “아버지여”를 “父여”로 “이름을”을 “名을”로, “거륵하게”를 “聖하게”로 바꾼 것과 같은 변환은 한글을 한자로 번역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당시의 지식인들에게 크게 환영을 받았다. 1923년에는 「聖經全書 션한문」이라는 이름으로 출판되었다. ‘국한문’이라 하면 ‘한국의 한문’이라는 뜻이 담기는데, ‘션한문’이라 하면 ‘조선의 한문’이라는 뜻이 담긴다. 나라를 잃은 시기에 이루어진 책 이름의 변화라는 점을 생각할 수 있다.
4) 「鮮漢文 貫珠 聖經全書」(선한문관주성경전서, 1926)
유성준의 「新約全書 국한문」에, 1912년 이익채가 옥스포드캠브리지 대학교에서 출판한 영어 개역의 관주를 한글 성서의 본문에 맞게 번역하여 출판한 「신약젼셔 관쥬」의 관주를 이 책에 함께 편집하였다. 그리고 정태용 조용규가 번역한 「鮮漢文 舊約全書」에 구약 관주를 번역하여 함께 편집하여, 「鮮漢文 貫珠 聖經全書」로 출판하였다. 이 관주가 「관주 개역한글판」의 관주로 이어진다.
관주는 성경 본문 안에서 서로 관련이 있는 구절들을 밝혀 준 곳이다. 관주에는 ‘보, 비, 인’ 세 가지 약자가 사용되고 있다. 흔히 우리는 이들을 ‘보라 관주’ ‘비교 관주’ ‘인증 관주’라고 부른다.
5) 「簡易 鮮漢文 新約聖書」(1931)
‘선한문’ 성경이 한자어로 바꿀 수 있는 모든 말을 한자어로 번역한 데 비해서, ‘간이선한문’(簡易 鮮漢文) 성경은 본문을 그대로 두고 한자어만 한자로 표기하였다.
하나ᆞ갈에 계신 우리 아바지여 일홈을 거륵하ᆞ게 하ᆞ옵시며 … 大槪 나라와 權勢와 靈光이 아바지ᄭ게 永遠히 잇사ᆞ옵나ᆞ이다 (신약젼셔 마 6:9)
이로써 세 가지 성경이 보급되어, 저마다 자기가 잘 읽을 수 있는 본문으로 성경을 읽었다. 한자 문화에 익숙했던 사람들은 ‘선한문’ 성경을 즐겨 읽었고, 한자어를 읽을 수 있는 세대는 ‘간이 선한문’ 성경을 읽었다. 한자어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은 한글성경을 읽었다. (대한성서공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