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과학발달사

맨셀 데이비스

by 조영필 Zho YP

7/ 유리제조에 있어서 이집트인은 기원전 1370년경에 이미 대규모 작업을 시작하였다. 알렉산드리아시 근처 호수에서 발견된, 보통 세탁소다로 알려진, 탄산소다는 도가니 속에서 분말석영 혹은 순백사와 함께 융해되어 있었다. 유리제조에 대한 이 처방은 앗시리아인도 발견하였던 것이다.


10/... '자연의 완전성'이라는 철학적 관념에서 출발한 아리스토텔레스는 물체의 자연운동에 관하여 말하기를 물체는 그 무게에 비례하는 속도로 낙하한다고 주장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약 2000년 후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갈릴레오가 그 부당성을 지적하는 데 필요한 실험을 시행하였다.


12/ 그(탈레스)는 또 몇 가지의 전기와 자기현상을 최초로 관찰하였다. 호박을 마찰시키면 나무껍질이나 새털과 같은 가벼운 물건을 그것이 잡아당길 수 있다는 사실...을 그는 발견하였다. 원래 전기라는 말도 'elektron'이라는 호박에 대한 그리스의 명칭에서 직접 유래한 것이다. 또 그는 자연에서 산출되는 산화물인 자철광석의 조각을 자유롭게 회전할 수 있도록 실에 매달아 놓을 때는 항상 동일한 방향을 가리킨다는 놀랄만한 성질에 대해서도 기술하였다... 탈레스는 전기와 자기현상을 활성물질과 함께 있는 '영혼' 혹은 '신'과 관련시켜서 설명하였다...


14/ 아리스토텔레스는 또한 우주만물은 단일체로 구성되어 있다는 원시관념을 지양하였다. 그는 천체에 대해서는 제5원소로서 '정신'quinta essentia을 상상하였다(이말에서 'quintessence=정수'라는 말이 파생되었다)... 갈릴레오가 발명한 망원경으로 태양의 흑점, 달 표면의 주름살(산과 계곡), 또 어떤 항성으로부터 오는 광선의 빈번한 변화가 밝혀질 때까지는 모든 천체의 이 '완전성'은 거의 보편적인 사실로 적용되었었다.


15/ ... 그릇된 개념의 나열을 끝맺기 위하여 "자연은 진공을 싫어한다"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주장을 여기에 덧붙여 보기로 하자...


20/ 기원전 3세기와 2세기에 걸쳐 생존하였던 아리스탈크스·에라토스테네스·히파르쿠스의 3거두들은 우주상에 대한 인간의 시야를 놀랄 만한 정도로 확장시켜 놓았다. 즉 그들은 기하학적 방법과 정확한 관찰을 결합시킴으로써 우주상을 확장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아리스탈크스는 지구가 태양 주위를 공전한다는 사실을 정확하게 추리하였으나 후세대의 천문학자들은 그의 결론을 용납하지 않았다. 그는 태양이 적어도 달보다도 25배나 더 먼 곳에 떨어져 있다고 추측하였다. 이것은 너무나 적은 비율이었지만 태양이 800만km나 떨어져 있다는 그의 제안은 당시의 사람들에게는 놀랄 만한 사실이었다. 실제로 태양은 150,000,000km나 되는 원거리에 있다.


에라토스테네스가 이루어 놓은 가장 뛰어난 성과는 불과 80km 밖에 오차를 내지 않고 지구의 둘레를 정확히 측정한 것이다. 그는 현재 아스완이라고 부르는 곳에서 수직천정방향에 나타나는 태양이 같은 시각에 그곳으로부터 북방 800km나 멀리 떨어져 있는 알렉산드리아시에서는 수직천정방향으로부터 7(1/2)도 기울어진 방향에 나타난다는 사실을 이용하여 지구 주위의 길이를 측정할 수 있었다... 완전히 과학적 방법으로 위도 및 경도의 양선을 도입함으로써그는 종전 것보다 월등히 정확한 지도를 제작할 수 있었다.


21/ 마지막으로 히파르쿠스에 대해서 말하여 보자. 그는 1,000여개 이상의 항성의 목록을 편찬하였으며 에라스토테네스와 똑같은 '위도 및 경도'의 개념을 이용해서 여러 항성들을 천체도에 표시해 놓았다...


22/ (톨레미는) 정밀한 지도제작을 하였고, 노르웨이로부터 영국을 포함하여 중국에까지 이르는 먼 나라들을 기술한 것 이외에 톨레미는 광선의 굴절에 대해서도 최초로 상세한 연구를 하였다...


화학은 로마제국이 알렉산드리아시를 점령하였던 기간에 비로소 한 개의 과학으로서 시작되었다고 전해져 있다. 서기 1세기경의 알렉산드리아학파에 속하는 화학적 저술은 종전의 것보다 현저한 진보상을 보여주고 있다... 축적된 관찰결과를 설명해보려는 원시적인 시도까지도 기술되어 있었다. 여러 금속은 각각 어느 한 행성에 속하는 것이며 그 행성의 영향을 받고 있다고 생각하였다.


23/ 유황과 비소 사이의 관계에는 특히 활동적인 '영혼'이 있는 것으로 생각되었는데 이 사실은 이와 같은 '영혼'들이 유황이나 비소의 수증기였으리라는 것을 암시해주고 있다.


알렉산드리아학파를 성공케 한 그 중요한 요소였던 실제적인 연구방법은 후일에 이르러서도 여전히 다대한 성과를 거두었다. 이 사실은 이러한 방법을 이용해서 많은 유용한 기계적 장치를 제작해 낸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다. 그 실례로서 급수관·양수펌프·물시계·원호측정기를 들 수 있으며 그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것은 반작용 터빈의 간단한 구조인 것이다. 반작용 터빈은 히어로의 기관으로 알려져 있는 것인데 그것은 두 개의 분출구로부터 방출되는 수증기로서 회전운동을 하게 된 속이 빈 회전축을 가진 구로 구성되어 있다. 제트추진식비행기는 이 알렉산드리아인의 완구에서 실현된 원리를 최근에 응용한 기계에 불과한 것이다.


28/ ... 회교국의 레오날드 다 빈치라고 일컬을 수 있는 오마르 카이암Omar Khayyam은 수학의 이항정리 및 3차방정식의 해법을 발견한 것으로 인정되고 있다...


29/ ... 아라비아의 유명한 연금술사로는 8세기 말엽, 하룬 알 라시드왕의 치하, 바그다드에서 살던 하이안Jabir ibn Hayyan이 있었다... 어떤 저서에서 그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두 '영혼'을 유황과 수은의 두 원소와 동일한 것으로 인정하였다.


31/ 12·13세기에 이르자 유럽에는 수많은 대학의 설립을 보게 되었는데 그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대학은 1101년 창립된 파리대학이다. 1250년 이전에 창립된 거의 모든 대학은 로마교황의 훈령으로 정식승인을 받았던 것이다. 이와 같이 교황의 허가를 받게 된 이유는 당시에는 로마교황만이 공인돈 유일한 국제적 권위였으며 또 대학은 창립 당초부터 학생들을 국적에 관계없이 세계 각처에서 모집하였기 때문이다... '대학교University'라는 명칭 자체가 '전세계의Universal'이라는 라틴어의 어근에서 파생된 말이다. 적어도 학문에는 국경이 없다는 것이 인정되었다. 따라서 교황만이 학문의 중심지를 지방주의 지위 이상으로 승격시킬 수 있었다.


32/ ... 대학들은 창립 초기에 하나의 중요한 공헌을 하였다. 그들이 추구하는 학문과 방법을 정밀히 연구하기 위해서는 고대서적과 항상 대조해볼 필요가 생겼는데 여기서 그들은 참고될 만한 번역서는 거의 모두 만족할 만한 것이 못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그리스의 원저를 연구하는 것이 한층 더 유리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43/ ... 코페르니크스는 지구의 자전현상이 밤과 낮의 연속을 간단히 설명할 수 있다는 점을 밝혔다. 톨레미의 학설은 모든 천체가 24시간 내에 지구 주위를 돌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그는 지구의 자전현상에 대한 반대의견을 논박하였으며 지구는 그 표면에 존재하는 모든 물체에 비하여 너무나 거대하므로 그 물체전체와 대기를 함께 대단히 원활하게 회전시킬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이와 같은 서두로 시작해서 그는 다음과 같이 계속하였다.


"만약 지구가 자전운동 외에 다른 운동을 하고 있다면 그 운동은 여러가지 타당한 방법으로 그 특징이 뚜렷하게 나타나야 할 것이다. 그러한 운동 때문에 생길 수 있는 결과 가운데서 공전현상을 들 수 있다. 만약 태양의 고정성을 인정하고 태양대신 지구가 공전한다는 사실도 인정한다면 우리가 실지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여러 성좌와 항성들이 뜨고 진다는 사실과 그로 인하여 아침에 나타나는 별, 저녁에 나타나는 별로 구별된다는 사실도 자연히 설명될 수 있는 것이다. 또 행성의 정지나 전후운동도 그 자체의 운동이 아니라 지구의 운동 때문에 생기는 현상이며 이 지구의 운동으로 말미암아 실지로 행성이 움직이는 듯이 보인다는 사실도 명백하게 설명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결국 태양이 우주의 중심을 차지하고 있다는 사실도 확실히 알 수 있는 것이다."


코페르니크스는 다음의 한 항목, 즉 히파르크스Hipparchus가 발견한 춘분·추분의 세차운동에 대해서도 설명하였다. 춘분·추분의 세차운동은 지구의 자전축(남북 양극을 맺은 직선)이 서서히 섭동perturbation하고 있다는 코페르니크스의 설명에 의해서 매우 간단히 기술될 수 있다. 팽이를 돌릴 때는 비틀거리면서 도는 것과 같이 지구의 축도 서서히 섭동을 하면서 회전하여 26,000년을 한 주기로 하나의 원추형을 그리게 될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현재의 북극성이 지리학상으로 항상 북쪽을 가리키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의미하고 있다. 그 예로 과거에 북쪽을 가리키는 별로 선택되었던 수많은 항성들이 지구의 섭동작용으로 말미암아 지금에 와서는 그 위치가 변하고 만 것이다.


코페르니크스적 체계의 주요한 지지자로서 도미니크회의 수사 죠르다노 브루노Giordano Bruno가 있었다. 브루노는 대담한 생각의 하나로서 오늘날에는 이미 진실로서 판명된 바이지만 별들은 태양과 같은 종류의 항성이나 단지 거리가 태양보다 너무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에 단순한 점으로 보인다는 생각을 하였다...


58/ 망원경의 발명은 갈릴레오와 관련되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이러한 종류의 간단한 기계가 16세기 중엽쯤 영국의 딕이즈Digges와 이탈리아의 포르타Porta에 의해서 기술되었다는 사실도 지적할 필요가 있다...


... 달 표면에 검은 흔적은 산이라는 것도 처음으로 알아냈고 그 산의 그림자를 보고서 그 높이를 측정하기도 하였다. 그보다 후에 그는 태양표면에 밝은 부분과 어두운 부분을 발견하였다. 목성의 위성 중 네 개를 관찰하였는데 이 네 개의 위성은 모든 사람이 볼 수 있는 태양계의 간단한 축소모형 노릇을 하고 있다는 사실도 관찰하였다. 그는 금성의 여러가지 위상(초생, 4분의 1, 2분의 1, 만)을 보았고 이렇게 모양이 변하는 것은 금성이 지구보다 태양에 보다 더 가까이 위치하였기 때문이란 것도 알아냈다. 토성의 독특한 구조를 탐지해서 그것은 바로 토성 주위를 싸고도는 거대한 고리에 의한 것이라는 것도 알았다...


61/ ... 코페르니크스의 저서가 출판되던 같은 해에(1543) 베살리우스의 방대한 저서 <인체의 해부에 대하여>가 출판되었다.


67/ 여기서 계수 G는 중력의 상수라고 알려져 있는 보편상수이다.

이 법칙으로 태양 주위를 공전하는 행성의 운동을 설명할 수 있으리라는 가능성은 뉴톤이 이 문제를 연구하기 전에 여러 번 논의되었었다. 그는 그 법칙이 케플러의 제1법칙인 타원궤도와 밀접한 관련성을 맺고 있으리라는 사실과 또 케플러의 그밖의 법칙 역시 적용되리라는 사실을 재빨리 증명하였다(1666). 그러나 그는 한 가지 사소한 문제에서 난관에 봉착하게 되었다... 20년 후에 가서야 비로소 미분적분학의 방법을 도입함으로써 이렇게 문제를 간략화한 가설이 옳았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었다...


68/ ... 태양에서 가장 가까운 수성의 경우에 있어서 뉴톤의 법칙은 수성의 공전궤도 자체가 지극히 서서히 태양 주위로 회전한다는 사실을 설명할 수 없었다.


그 궤도는 1세기에 40초에 해당되는 각도를 만들며 회전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정도로 수성의 궤도가 태양을 중심으로 90도만큼 돌려면 810,000년이 걸릴 것이다. 이 지극히 미소한 운동은 뉴톤의 법칙이 설명할 수 없었던 유명한 예외인데 나중에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에 의하여서만 정확하게 설명될 수 있었다.


... 1781넌 하쉘Herschel이 발견한 천황성의 운동이 약간의 불규칙성을 보이고 있는 원인이 그때까지 설명되지 못하고 있었다. 거의 동시에 두 사람의 수학자, 즉 캠브리지의 아담스Adams와 프랑스의 레베리에르Leverrier는 천왕성의 이러한 동요는 어떤 다른 행성 때문에 일어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교묘한 계산을 해본 결과 그 새로운 행성이 하늘 어디쯤 위치하고 있는지도 추산해냈다. 베를린의 천문학자 갈레Galle는 레베리에르로부터 이에 대한 상세한 설명을 받고 그날 저녁 해왕성이란 새 행성을 발견하였다...


72/... 광산의 작업결과로 흡인펌프는 물을 약 10m밖에 더 못끌어 올린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이 사실에서 10m 되는 물기둥은 대기와 같은 정도의 압력(단위면적에 미치는 힘)을 가지고 있으리라고 추측하고 토리첼리는 다음과 같은 실험을 해서 이 압력을 측정하는 데 더 편리한 방법을 발견하였다. 즉, 한쪽 끝이 막힌 긴 유리관을 수은으로 채우고 끝이 열린 다른 쪽으로 수은이 담긴 그릇 속에 세워서 기압계를 만들었다.


토리첼리는 수은이 담긴 유리관의 길이가 얼마이든 관계없이 수은주가 76cm 이상으로는 올라가지 않으며 수은이 차지 않은 관의 나머지 부분은 완전히 비어 있어서 소위 토리첼리의 진공을 형성한다는 사실을 발견하였다. 당시에는 실험용으로 유리관을 생산할 만한 유리 공업은 이탈리아에서만 발달되었으므로 이러한 간단한 실험도 단지 이탈리아에서만 가능했었던 것 같다...


파리에 있는 파스칼Pascal은 재빨리 이 이론을 조사해 보기로 하였다. 즉, 수은주의 높이를 일정하게 유지시키고 있는 것이 바로 공기의 압력이라면 공기가 희박한 산 위에 올라간다면 그 수은주의 높이는 감소해야 할 것이다. 그는 그의 매부를 시켜서 오베르뉴에 있는 피드돔므산에서 이러한 시험적 실험을 해보게 하였다. 토리첼리의 기압계를 산 위로 가지고 올라가서 수은주는 7.6cm나 감소하게 되었다...


73/ 앞서 말한 것과 비슷한 결과를 독일의 오토 폰 게릭게Otto von Guericke는 굉장한 규모를 가진 장치를 준비함으로써 얻게 되었다. 그는 구스타프스 아돌프스의 군대의 군수감이라는 지위를 이용해서 대기의 압력으로부터 생기는 결과를 증명하였다. 가장 유명한 실험은 두 개의 철제반구를 만들어서 한데 맞춘 후 공기펌프로 공기를 배기하고서는 그 구를 다시 분리시키려 했더니 그 구 양편에 말 8필씩 모두 16필의 힘이 든 것을 보여 준 실험이었다. 그는 이 실험을 레겐스부르그에서 페르디난드황제가 참석한 축연에서 실행하였다.


폰 게릭게의 실험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옥스포드에 살고 있던 보일Boyle은 유능한 그의 조수 로버트 훅크Robert Hooke를 시켜서 좀더 개량된 공기펌프를 만들게 하였다. 이 공기펌프를 이용한 일련의 실험에서 그는 공기에 가해지는 압력이 변함에 따라 그 체적도 변한다는 사실을 발견하였다...


75/ ... 덴마크의 관측자인 뢰머Roemer가 이룩한 발견이었다. 그는 작은 망원경으로도 쉽사리 관측할 수 있는 목성의 위성을 면밀하게 관찰한 결과 광선의 속도를 측정하는데 성공하였다. 즉, 목성의 위성 중 첫째 위성이 일정한 간격을 두고 같은 시간에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목성이 지구로부터 멀어져감에 따라 먼저번보다 점점 느린 시간에 사라진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목성이 지구를 향해서 올 때는 그 반대현상이 일어나는 것이다. 그 위성의 운동이 불규칙적이라고 인정할 아무런 이유도 없었기 때문에 이것은 목성이 관측자로부터 멀이 떨어져가면 광선이 달려야 하는 거리도 그만큼 멀어지므로 따라서 지구에 도달하는 시간이 늦어지고 반대로 목성이 지구로 향해서 접근해오면 그 시간이 빨라지기 때문이라고 생각하였다.


이 면밀한 관찰로부터 뢰머는 빛의 속도를 계산할 수 있었다. 지금은 빛의 속도를 매초 300,000km로 계산하고 있고 이것은 1/7초 동안 지구 주위을 한 번 돌 수 있는 속도다...


뢰머의 발견과 계산은 영국 왕립천문대장 에드먼드 핼리에 의해서 지지되었고 그의 후계자 존 브래들리John Bradley에 의해서 확인되었다. 브래들리는 두 개의 주요한 발견을 하였다. 첫째는 지구의 미동으로 알려져 있는 지축의 적은 불규칙한 운동(장동)의 발생과, 둘째는 광행차현상이다...


83/ 수리물리학 이외의 다른 과학 방면에서 보면 18세기는 유물론적 경향을 전혀 찾아볼 수 없던 시대였다. 열·광·자기·전기·화학적 및 생화학적 변화는 모두 미묘한 정령이나 '유동체'의 작용으로 인한 현상으로 해석되었다. 열이란 열소라고 하는 근본적 원소 때문에 생기며 광은 우주 속에 충만해 있는 에텔이라는 매질 속에서 진행한다. 자기나 전기는 유형의 물질을 연상시키는 '유동체' 또는 '정수'라는 용어로 설명되었다. 물질의 연소는 그 물질 속에 내재해 있는 플로지스톤(열소) 혹은 연소의 정령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이며, 또 모든 생물학적 생장은 '생명력' 혹은 '활력'이 있기 때문에 가능하다고 생각하였다. 이 신통치 않은 조작된 이론으로 말미암아 그들은 '유동체'나 '정령'들이 도대체 무엇인지 한번도 명확하게 정의를 내려보지도 못하였다. 그래서 그 '유동체'나 정령들이 분리될 수 있는 유형의 물질을 말하고 있는지 혹은 단순히 물질의 특유한 상태를 의미하는지조차 확실한 분별을 짓지도 못하였다.


... 최초의 성공적인 증기기관은 다트머스에서 대장장이 노릇을 하던 뉴코멘Newcomen이 1971년 윌버햄프톤에서 만들어낸 것이었다... 이 피스톤의 운동은 광산에서 물을 끌어올리는 데 사용될 수 있었으며 후에는 방직공장과 그밖의 다른 공장에서 기계를 움직이는 데 사용되었다...


84/... 미국의 학자 벤자민 톰슨Benjamin Thompson의 실험결과로 열학은 화학의 분야에서 이탈될 수 있었다... 그는... 바바리아의 선제후로부터 룸포드Rumford 백작의 칭호를 받았다.


... 만약 열에 의하여 생기는 가장 간단한 변화 중의 하나로서 얼음이 물로 변하는 것을 생각하면 이 변화는 상당한 량의 '열소'를 필요로 한다는 결론이 성립된다. 그러나 룸포드는 물이 그 무게에 있어서 얼음보다 100만분의 1 정도만 증가한다면 그의 저울이 탐지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물과 얼음의 무게가 똑같다는사실을 증명하였다. 이 실험은 열소가 아무런 유형의 물질이 아니라는것을 증명해주었다.


85/ 룸포드의 가장 유명한 실험은 대포의 포신에다가 끝이 무딘 송곳을 마찰시킴으로써 많은 량의 열을 발생케 한 것이다. 이러한 작업을 계속함으로써 그는 많은 량의 물을 끓이는 데 성공하였으며 가장 중요한 것은 송곳을 계속해서 마찰시키기만 하면 거기에서 발생되는 열의 량은 얼마든지 커진다는 사실을 발견하였다. 이렇게 많은 열을 발생케하였으나 금속의 무게에는 아무런 변동도 없었다. 이러한 실험과 그밖에 이와 비슷한 실험에서 룸포드는 마찰에 의해서 사라진 송곳의 운동에너지로부터 생기는 것이 곧 열이라고 주장하였다...


89/ ... 카벤디시가 계산해낸 값은 그의 실험 이후 150년 동안에 산출된 값 중에서 가장 정확한 값과 단 100분의 1밖에 차이가 없다. 카벤디시는 단지 1퍼센트 이내의 적은 오차를 냄으로써 우리가 자신의 체중을 아는 것보다 더 정확하게 지구의 무게를 측정하였다...


90/ 연소과정은 화학자들이 오랫동안 관심을 집중시켜 왔던 물체의 변화 중의 하나였다... 레오날드Leonardo가 어떠한 근거에서 그런 결론에 도달했는지는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어쨌든 그는 연소과정에 공기가 참여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신하고 이겻을 명확히 표시한 적이 있었다.


목재와 같은 물질의 연소는 재 이외에도 물·타르·숯과 같은 것이 생성되느니 만큼 좀 더 복잡한 과정이라고 생각되었다. 그러나 금속의 연소와 같은 간단한 경우를 연구하게 되자 약간의 진전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錫이나 鉛을 연소시켜 보면 연소 전의 금속보다 무거운 물질이 생성된다는 것이 발견되자 연소과정에 관한 기본적인 사실이 수립될 수 있었다. 이 사실은 많은 실험가에 의해서 수립된 것이며, 1553년경에 이미 카르다누스Cardanus가 발견하였던 것이다. 1630년 프랑스의 쟝 레이Jean Rey는 이러한 무게의 증가는 연소에 참여한 공기 때문에 생긴 결과라고 강조하였다. 한편 보일은 이 무게의 증가가 금속에 붙어 있는 '불의 입자' 때문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는 또 공기가 화학적인 혼합물이며 연소나 호흡에 작용하는 것은 공기의 일부 뿐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연소와 호흡의 화학적 유사성에 대해서는 옥스포드의 화학자 메이오우Mayow가 강력히 주장한 바 있었다. 그는 현대의 화학교실에서 처음으로 실시되는 실험의 하나로서 병입을 물 속에 넣고 그 병 속에서 물질을 연소시킴으로써 공기의 체적이 감소하는 것을 보여주었다. 그는 또 동물(쥐)이 죽을 때까지 일정량의 공기를 호흡하도록 내버려두면 위와 똑같이 공기량의 감소현상이 일어난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메이오우는 내과의사였으며, 그의 업적은 당시(1674)에 있어서 화학과 의학의 밀접한 관계를 보여 주고 있다. 화학이 대학교에서 강의된 것은 어디까지나 의학의 부속적인 학문으로서였다.


블랙Black이나 쉘레Scheele·카벤디쉬Cavendish·프리스틀리Priestley와 같은 쟁쟁한 화학자들도 이 열소설을 완전히 인정하였다...


카벤디쉬의 가장 유명한 화학실험은 아마 물은 산소가스에 수소가스를 화합시켜서 얻은 유일한 생성물이라는 것을 증명한 실험일 것이다....


93/... 로모노소프Lomonosov는 현재의 레닌그라드에서 1745년부터 1765년까지 화학교수로 교편을 잡고 있었다... 금세기에 와서야 비로소 그의 원고가 완전한 망각 속에서부터 소생하게 되었다.


146/ ... 현재 사용되고 있는 바와 같이 사진은 일종의 염화은을 흑화시키는 광의 작용을 이용한 것이다. 이에 대한 기초적 사실은 사진의 상을 실제로 만들 수 있는 기술이 발달되기 오래 전부터 이미 알려져 있었다. 1822년 죠셉 닙세Jeseph Niepce는 최초로 이에 성공을 하였다. 그는 상을 금속판에 고착시켰던 것이다. 1839년 다게르Daguerre는 닙세와 공동연구를 한 결과 수정된 과정을 고안해냄으로써 사진술을 한층 더 진보시켰다... 현재 쓰이고 있는 사진술의 비결은 영국인 폭스 탈보트Fox Talbot가 고안한 것이다.


그는 종이에 염화은을 칠하여 필름으로 썼으며 沒食子酸으로 陰化를 현상하고 그후 '하이포'를 써서 像을 정착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