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혁명과 세계관의 전환

야마모토 요시타카 山本義隆

by 조영필 Zho YP

1권 [천문학의 부흥과 천지학의 제창]


44/ 아리스토텔레스의 우주론은 <천체론>과 <형이상학>에서 주로 전개되고 <자연학>, <기상학>, <생성소멸론>에서 보완되는데, 기본적으로는 그의 자연철학에 기반을 두고 세계(우주)를 설명한다.


47/ 이러한 까닭에 12세기에 서유럽이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을 재발견한 후 14세기에 아리스토텔레스가 기독교 내에서 공인될 때까지, 천지창조나 종말을 인정하지 않는 아리스토텔레스 이론에 대한 여러 논의는 있었지만 이원적 세계상을 별 저항없이 받아들였다.


48/ 한편 이와 같은 자연관과 물질관을 지닌 아리스토텔레스는 <형이상학>에서 각 천체의 운동을 표현하기 위한 "수학자들의 설"로서의 우주상을 기술했다. 이것은 플라톤의 학원인 아카데미아의 문하생이었으며 피타고라스학파의 아르키타스에게서도 가르침을 받았다고 하는 선구자 크니도스의 에우독소스의 이론 및 그것을 키지코스의 칼리포스가 수정해 만든 모델에 기반을 둔 것이다. 지구가 중심에 정지해 있으며 달, 태양 및 그 밖의 천체는 각각 지구를 통과하는 축 주위를 회전하는 여러 구(구각: 여기서 속이 빈 공 모양의 껍질을 뜻한다. 지구를 감싸고 있는 구면 껍질에 천체들이 박혀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에 고착되어 있는 것으로 동심천구설이라고 불린다. 그리고 "별들은 스스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다", "별들은 정지해 있으나 천구에 부착되어 움직인다"라고 <천체론>에 기록되어 있는 것처럼, 천체 자신은 회전하는 구에 부착되어 움직인다. 층상層狀으로 되어 있는 구의 가장 바깥쪽에는 항성천의 구면이 하루에 한 번 회전한다. 이로써 모든 항성이 동에서 서로 움직이는 일주회전日周回轉이 셜명된다.


태양과 달과 다섯 행성은 이 항성천이 서쪽 방향으로 회전하는 것보다는 조금씩 느리게 움직인다. 태양은 항성천에 대해 상대적으로 (항성천을 고정하고 보면) 23.5도 기울어진 경로(황도)상에서 동쪽 방향으로 1년에 걸쳐 주회한다. 행성의 운동은 더 복잡하다. 지구 기준에서 볼 때 화성, 목성, 토성은 순행 상태에서 항성 사이를 뚫고 서에서 동으로 천천히 이동한다. 그런데 그 속도가 일정하지 않을 뿐 아니라 배경이 되는 항성에 대해 정지(留)한 후에 동에서 서로 돌아간다(역행). 그리고 멈췄다가(留), 새로이 순행 상태로 돌아와 동쪽으로 움직인다. 수성과 금성은 태양을 전후해서 움직이며, 평균적으로는 태양과 함께 동쪽으로 움직이면서 1년에 걸쳐 지구 주위를 일주한다. 이처럼 복잡한 운동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각 행성이 복잡하게 얽힌 구조, 즉 다르게 회전하는 여러 구각의 조합을 고려해야 한다. 하지만 기본적인 구조는 여러 층으로 포개어진 동심구로 모두 설명할 수 있다.


에우독소스와 칼리포스는 각각의 천체에 할당된 구를 설명을 위한 가상의 구조로 여겼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는 <천체론>에서 "그 많은 천구는 사실 각각이 그 자체로 물체이다"라고 쓴 것처럼 물리적·물질적 실재라고 생각했다.


50/... 요컨대 이 이론에서는 달과 태양 및 각각의 행성이 중심에 있는 지구로부터 같은 거리만큼 떨어진 위치에 있어야 했다. 그러나 이것으로는 지구에서 보이는 행성의 밝기 변화 혹은 달과 태양의 겉보기 크기 변화를 설명할 수 없다. 이미 6세기의 그리스 철학자 심플리키오스가 다음과 같이 썼다.


에우독소스 학파의 이론은 여러 현상을 설명하지 못한다... 각 행성이 어떤 때는가깝게, 어떤 때는멀리 있는 것처럼 보인다는 점이다.


51/ 다시 아리스토텔레스로 돌아와보자. 그는 일식을 태양과 지구 사이에 끼어든 달이 태양의 빛을 차단하는 현상으로 바르게 인식했다. 그러나 어떤 때는 개기일식이 일어나고 어떤 때는 금환일식이 일어난다는 것은 지구로부터 태양이나 달까지의 거리가 변동함을 나타낸다. 동심구 이론은 이처럼 단순한 사실조차 설명할 수 없었다. 이 점에 관해서는 이미 2세기에 철학자 소시게네스가 지적했다. 지구에서 본 태양의 움직임이 일정하지 않으며, 춘분에서 추분까지와 추분에서 춘분까지의 날짜 수가 다르다는 사실도 있었다.


54/ ... 플라톤에게 천문학은 "로고스로 모든 것을 완수할 수 있는" 학문이었다.


이것은 <국가>와 <고르기아스>에서도 논의되는데, <법률>에 나오는 다음 대화가 이해를 심화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나 자신도 ... 샛별이나 개밥바라기 그리고 다른 약간의 별들이 결코 동일한 궤도를 취하지 않고 여러 방향으로 떠도는 것을 보았으며, 태양이나 달이 항상 그와 같이 움직인다는 것을 우리 모두 알고 있습니다"라는 크레타인의 말에 아테테인은 다음과 같이 답한다.


달, 태양, 그 밖의 별들이 떠돈다는 생각은 잘못된 것입니다. 사실은 그 정반대입니다. 이들 천체는 각각 같은 궤도상에서 회전하고 있습니다. 많은 궤도를 통과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다수가 아니라 항상 하나의 원주상을 주회하는 것입니다.


55/ 그렇다면 플라톤의 천문학에서는 관측에 의한 검증은 중시되지 않은, 아니 요청되지 않은 셈이다. 현실에서 나타나는 천체의 운동은 원리적으로 '이데아'의 운동을 부정확하게 투영하는 그림자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적어도 '이데아'에 대한 학문, 천공세계의 학문, 그리고 지상의 사물에 관한 학문 사이에는 진실성의 정도에 차등이 주어졌다.


... 히파르코스와 프톨레마이오스 이래 관측천문학은 순수 플라톤주의에 저항하며 발전해온 것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플라톤, 그리고 플라톤에게 영향을 준 피타고라스가 수학적 천문학의 발전에 기여한 것도 사실이다... 간단히 말해 천상의 물체가 아무리 복잡하게 움직이는 것처럼 보여도 그것이 겉보기에 지나지 않는다는 입장은, 행성의 역행현상이 관측자가 있는 지구의 운동에 의한 착각임을 간파한 코페르니쿠스에게 계승되었다...


57/ 천체의 운동이 원운동이라는 주장은 이처럼 플라톤과 피타고라스학파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플라톤의 <티마이오스>에는 "우리들 중 가장 천문학에 통달한" 인물로 티마이오스가 등장한다. 그는 "신은 각각의 별의 신체를 만들어내서는, ... 그들을 그 회전운동에 두었습니다. 즉, 일곱 가지 원궤도에 일곱의 신체[태양과 달과 수성·금성·화성·목성·토성]를 둔 것입니다"라고 말한다. 플라톤에게 배운 아리스토텔레스도 <형이상학>에서 "운동은 연속적이기 위해서 ... 특히 원운동이어야만 한다"라고 논했으며, <천체론>에서도...


58/ 어쨌든 이렇게 해서 천체의 운동을 기하학적으로 표상하고 수학적으로 예측하는 수학적 천문학이 탄생하게 되었다. 더 정확하게는 그 이전까지 점성술이나 별점에서 필요로 했던 천체운동의 예측 기능에 대해, 원을 기본으로 하는 기하학이 유효한 수단을 제공했다고 해야 할지도 모른다.


... <알마게스트>에는 기원후 124년부터 141년까지 나일강 하구의 알렉산드리아와 그곳에서 북동쪽으로 24킬로미터 떨어진 카노푸스에서 관측한 기록이 들어가 있으므로, 집필 시기는 그 직후인 기원후 2세기 중기로 추정한다.


59/ 프톨레마이오스 천문학도 구형인 우주의 중심에 구형인 지구가 정지해 있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틀을 받아들였다. 동시에 천체의 운동이 원운동이라는 플라톤의 전제 또한 계승했다. 실제로 <알마게스트>에는 "지구의 위치에는 어떠한 변화도 없다"라고 쓰여 있으며, "에테르는 원주상을 일정하게 운동한다"라고 거의 자명한 것처럼 기술되어 있다.


프톨레마이오스는 <알마게스트>의 서두에서 자신의 천문학을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학과 분명히 구별한다...


61/ 아리스토텔레스는 <형이상학>에서 "이론적 과학은 세 종류, 즉 자연학과 수학과 신학이 있다..." ... 인식 대상의 존엄성을 근거로 신학을 최상위에 두었다. 이에 대해 프톨레마이오스는 인식의 확실성에 근거하여 수학(천문학)을 맨 처음에 두었다.


62/ 애당초 프톨레마이오스의 천문학은 학문의 목적과 성격 자체가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학이나 우주론과 크게 달랐다...


65/ ... 이처럼 <알마게스트>에서는 달, 태양 및 행성의 운동은 자연학적(물리학적)으로가 아니라 수학적(기하학적)으로 다뤄진다. 이 경우 프톨레마이오스 천문학의 구체적인 방법은 원의 조합으로 행성의 궤도를 설명하는 것이었다.


67/ 천문학에서 수학적인 모델로서 이심원과 주전원 가설은 프톨레마이오스 이전부터 있었다. 이 제안은 기원전 3세기부터 2세기까지 살았던 페르게의 아폴로니오스가 생각해낸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 이후 바빌로니아 천문학 이론과 관측에 정통했던 기원전 2세기 니카이아 출생의 히파르코스에 의해 발전되었고, 프톨레마이오스에 의해 이심유도원·주전원 모델이 될 때까지 장장 400년에 걸쳐 완성되었다. 과학사가 조지 사튼George Sarton은 "프톨레마이오스가 한 (천문학은 물론 수학적) 작업의 본질적인 부분은 이미 히파르코스가 수행했다. 프톨레마이오스는 그것을 완성시킨 후 세부를 다듬고 새로운 표를 작성하는 등의 일을 해냈다"라고 썼다... <알마게스트>는 바빌로니아에서 유래한 정량적인 관측천문학과 고대 그리스의 기하학을 바탕으로 한 천체 운동의 이론을 융합함을로써 당시로서는 매우 높은 수준의 천문학을 만들어냈다....


69/ ... 그는 <알마게스트> 외에 천문학서로서 <행성에 관한 가설>과 실제적인 천체의 위치를 계산하기 위한 <간이표>, 그리고 구체인 지구를 평면에 투영하는 방법이나 구면좌표에 대한 수학적 기술을 포함한 <지리학>, 점성술서 <테트라비블로스> 및 광학과 음악에 대한 책을 남겼다. 즉, 프톨레마이오스는 고대에 알려졌던 다방면의 수리과학(응용수학)에 통달해 있었으며, "자신의 이론이나 학설을 순수하고 추상적인 과학으로 여겼던 [고대] 그리스의 수학자 대부분과는 달리, 그리스 최초이자 최대의 응용수학자였다".


117/ 프톨레마이오스는 <행성에 관한 가설>에서 자신의 수학적 천문학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학적 우주론의 중재를 시도했다. 이런 의미에서 프톨레마이오스의 수학적 모델은 어떤 실재적인 것이고, 그가 <알마게스트>를 집필한 의도는 자연학적인 아리스토텔레스 우주상을 수학적으로 정밀하게 만들려는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적어도 프톨레마이오스의 많은 후계자들에게 주전원이나 이심원은 이른바 '현상을 구제'하기 위한 것이었다. 즉, 천구상에서 행성을 나타내는 휘점이 수대 위를 어떻게 움직이는가를 이끌어내기 위한 수학적 장치였고, 행성이 실제로 그에 따라 움직이는지, 또한 왜 그렇게 움직이는지는 고민하지 않았다. 행성의 궤도라는 개념을 소유했는지조차도 의심스럽다...


120/ 결국 아리스토텔레스주의자의 입장에서 보면 "이심원과 주전원이 [행성운동의] 예측에 효과적이라고 해서 자연학적인 비현실성과 우주론적으로 조화롭지 못한 감각을 해소하지는 못했던 것"이며, "[아리스토텔레스 이후에] 동심구 천문학을 주장하는 대부분에게는 <알마게스트>의 성공이 자연학적 원리를 부정하거나 무시하는 변명이 될 수 없었다".


122/ ... 실제로 철학자 쪽에서 제기된 수학적·기술적 천문학에 대한 '원리적' 비판에도 불구하고, 현실의 천체운동을 예측하는 데에는 자연학적·철학적 우주론은 무력했다.


126/ ... 이렇게 근대 이전까지 서구 천문학은 자연철학으로서의 아리스토텔레스 우주론과 수리과학으로서의 프톨레마이오스 천문학 사이의 분열과 상극이라는 문제를 내포하고 있었다. 따라서 중세까지 천문학을 개혁한다는 것은 그저 행성의 위치를 계산함에 있어 우주의 중심을 지구로부터 태양으로 바꾸는 것만이 아니라, 자연학인 동시에 수학적이며, 원리적인 기초가 있으면서 관측에 의한 정량적 근거로 뒷받침되는 천문학을 새로 만들어내야 했던 것이다.


이 작업은 15세기 중반 포이어바흐와 레기오몬타누스로부터 17세기 초두 요하네스 케플러까지 약 한 세기 반의 과정을 거쳐 완수된다. 이를 설명하는 것이 이 책의 목적이다.


128/ 지리학에서 수학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은 프톨레마이오스가 처음은 아니다. 한 세기도 전에 스트라본이 먼저 이야기했다. 그뿐만 아니라 수리학의 선구자인 기원전 3세기의 에라토스테네스, 그리고 지도투영법의 선구자로 그보다 조금 더 일찍 활약한 티로스의 마리노스도 있다. 프톨레마이오스는 개별적으로 수행된 선인들의 수학적 방법을 명확하게 체계화하여 기록으로 남겼다.


130/ 손으로 베낄 때마다 도상의 정보가 손상되고 부정확해진다. 이것은 거의 한 세기 전에 플리니우스Plinius가 <박물지>에서 식물학·본초학에 관해 언급하면서 지적한 사항이다. 식물학과 본초학에서 이러한 문제가 해결된 것은 15세기 말 목판화 혹은 동판화 삽화를 통한 책들이 등장하면서부터이다. 즉, 하드웨어의 개혁에 의한 것이었다. 그러나 지도의 경우는 달랐다. 프톨레마이오스는 "표시해야 할 지점 하나하나를 적절한 장소에 기입하려 한다면, 경도상의 위치와 위도상의 위치를 확보해야만 한다"(I-18.4)라고 말하면서, 이 문제는 수학적인 좌표를 사용함으로써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을 꿰뚫어보고 있었다. 이것은 소프트웨어의 개혁에 의한 것이다. 고대 프톨레마이오스 지리학이 15세기 이후가 되어서야 정확히 복원된 것도 이러한 이유에 의해서이다.


137/ 그러나 특별히 주목할 점이 있다. <지리학>에는 "시간과 함께 지구 표면도 변화하기 때문에, 더 새로운 조사 기록에 마음을 둘 것"이라는 기술이 있으며(I-5), 프톨레마이오스는 지리학이 새로운 조사와 보고를 통해 끊임없이 갱신되어야 한다고 말했다는 점이다...


140/ 서유럽에서 처음 그리스어에서 라틴어로 직접 번역된 프톨레마이오스의 책은 15세기 초기 <지리학>으로, 야코부스 알겔루스(이탈리아 이름은 야코포 안젤로 데 스칼페리아)가 번역했다. 1394년 비잔틴제국(동로마제국)의 마누엘 크리솔로라스가 황제 마누엘 2세의 사자로서 대투르크 방어전의 원조를 호소하러 서유럽까지 왔다. 3년 후 크리솔로라스는 콜루초 살루타티를 중심으로 한 피렌체 인문주의자들의 초대를 받아 그리스어 교사로서 다시 피렌체를 방문했다. 이때 가져온 그리스어 문헌 중에 이 <지리학>이 포함되어 있었던 것이다... 번역자인 야코부스는 살루타티에게 감화된 피렌체의 인문주의자로, 그리스어를 배우기 위해 1395년 콘스탄티노플(현 이스탄불)로 건너가서 크리솔로라스와 함께 피렌체에 돌아온 특이한 경력의 소유자이다.


... 실제로 이 책이 라틴 세계에 어느 정도 널리 알려지게 된 것은 야코부스의 번역이 사본 형태로 나돌게 되면서부터이다. 단, 이 단계에서 지도는 딸려 있지 않았다.


155/ 독일이 프톨레마이오스 <지리학>을 수용할 때 이탈리아와 달랐던 점은 지리학의 수학적 측면에도 관심을 가졌다는 것이다.


15세기 중기에 빈대학과 그 근교에 있던 클로스터노이부르크 수도원에서 지도학에 관한 학파가 탄생했다고 주장하는 다나 듀랜드Dana Durand의 논문 '독일과 중유럽 최초의 근대 지도서'에 따르면, 당시에는 프톨레마이오스의 <지리학>에서 특히 토지의 좌표를 위도와 경도로 정하는 것에 큰 관심을 기울였다고 한다.


162/ 이와 같은 지적 풍토와 학습 환경에서 프톨레마이오스 천문학의 부활과 변혁의 씨앗이 발아하게 되었다. 이것은 게오르크 포이어바흐로부터 시작된다. 포이어바흐는 1423년 현재의 오스트리아 북부 도시 린츠 근교에서 태어났다...


165/ 제자였던 레기오몬타누스에 따르면 포이어바흐는 라틴어 번역에 의거했을지언정 <알마게스트>를 거의 외우다시피 할 정도로 깊게 읽었다고 한다. 이런 의미에서 "프톨레마이오스가 만든 [천문학의] 지식 대부분을 흡수한 최초의 유럽인"이라는 빅터 토렌Victor Thoren의 평은 지나치지 않았다. 그 포이어바흐가 쓴 책이 <행성의 신이론>이다...


178/ 행성의 운동이 태양의 운동과 공유하는 "무언가"가, 지구에서 바라본 태양의 연주운동임을 알아내기 일보 직전까지 왔다. 아무튼 이 지적은 태양의 운동(지동설에서는 지구의 운동)이 행성 운동의 제2의 부등성에 관여하고 있다는 강한 인상을 주었다.


179/ 이와 더불어 <신이론>에는 수성의 궤도 운동에 관한 흥미로운 기술이 있다. "수성의 주전원 중심은 다른 행성처럼 원형의 유도원 궤도를 그리는 것이 아니라, 평면상에서 계란과 비슷한 형태의 궤도를 그린다"라는 기술이다(그림2.4). 포이어바흐가 어떻게 이 곡선에 도달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2,000년에 걸친 원궤도의 주박이 처음으로 풀린 것이다.


183/ 이렇게 포이어바흐가 천문학 부흥의 단초를 제공함으로써, 관측에 의거한 자연학으로서의 천문학에 이르는 첫걸음을 내딛게 되었다.


190/ 이처럼 천문학은 중세에서 "유일하게 정밀한 관측과 예측을 필요로 하는 과학"이었다. 그 가장 큰 이유는 고대부터 천문학이 주로 역산과 점성술에 쓰이는 실학이었기 때문이다.


196/ 이렇게 헬레니즘 그리스에서 형성된 점성술을 집대성하여, 거기에 당시의 자연학과 천문학적 지식을 원용하여 적합한 근거를 마련하고, 그 시대의 과학적 정신에 준하여 학문 체계에 제시하려 했던 시도가 프톨레마이오스의 <테트라비블로스(네 권의 책)>였다... 16세기 독일의 천문학자 요하네스 스타비우스와 이탈리아의 의사 지롤라모 카르다노도 <테트라비블로스>를 높게 평가했는데, 그중에서도 특히 기상 예측에 관한 내용을 높이 샀다...


198/ 여기서 프톨레마이오스가 천문학의 예측에 비해 점성술의 예언을 덜 확실한 것으로 공언했다는 점이 흥미롭다. <테트라비블로스>에서 "일반적인 사건과 개별적인 사건 모두의 원인은 행성과 태양과 달의 운동이다"라고 단정한 것처럼, 영향이 있다는 점에 대해서는 추호의 의심도 보이지 않는다. 단지 회의적인 관점은 그 영향을 인간이 완전하게 알 수 없다는 것, 따라서 정확한 예측을 할 수 없다는 것에서 유래한다.


199/ 하늘의 운행이 땅에 미치는 영향은 "기본적이면서 중요한 두 가지 부분"으로 분류된다. 하나는 모든 민족이나 국가나 도시에 해당하는 일반적인 사항으로, 기후의 변동, 지진, 홍수, 역병, 기근, 곡물의 수확 등의 예측이다. 또 다른 하나는 개인의 운세에 관한 것이다. 이때 전자가 더 강한 원인에 지배받기 때문에 더 중요하다. 이러한 구별은 후에 '자연점성술'과 '판단점성술'로 나누는 분류 방식의 원형이 되었다.


205/ 그러나 서유럽이 이슬람 사회를 통해 고대 그리스의 학예를 발견하려는 이른바 12세기 르네상스를 거치는 과정에서 유럽의 지식인들은 고대 그리스·로마의 점성술을 알게 되었다. 또한 "12세기부터 13세기에 걸쳐 일어났던 고전 번역 붐에서 가장 인기 있었던 분야가 점성술이었다"라고도 한다...


212/ ... 이미 12세기의 유대인 철학자 모세스 마이모니데스는 이 세계가 "인과율에 의해 필연적으로 실현된 것이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론과 창조주의 의욕과 의지로 실현되었다는 창세기의 교의를 조정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라고 단언했다... 1210년에 파리 관구의 교회회의는 "자연철학에 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서와 [아베로에스의] 주석은 파리에서 공개적으로도 은밀하게도 읽어서는 안 된다. 이러한 금지를 위반한다면 파문에 처한다"라고 결의했다...


213/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의 장대한 체계와 치밀한 논증은 차차 유럽의 지식인들을 사로잡게 되었다. 교회는 아리스토텔레스의 학문을 탄압하는 데 성공하지 못했던 것이다... 이러한 위기에 직면한 기독교 신학을 구한 것이 알베르투스 마그누스의 제자였던 도미니코회의 수도사 토마스 아퀴나스였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론을 기독교 교의에 집어넣은 토마스의 철학사상은 사후 일시적으로 이단 취급되었으나 1322년에는 복권되어 기독교 세계에서 공식적으로 인정받아 14세기 중기에는 확고한 정통 신학의 지위를 얻었다...


214/ ... 그가 설명한 바에 따르면 물체인 천체는 역시 물체인 인간의 신체에 작용하지만, 물체가 아닌 인간의 정신과 의지에는 직접 작용하지 않는다... 이러한 논리는 스승 알베르투스의 <광물론>에 나오는 "인간 안에는 두 가지 작용하는 원리가 있다. 즉 자연과 의지이다. 자연은 별에 지배받지만, 의지는 자유롭다..."라는 논의를 발전시켰을 것이다...


240/ 프톨레마이오스 이론과 관측천문학의 부활을 통해 한층 더 의욕적으로 작업에 몰두한 학자는 레기오몬타누스였다.


레기오몬타누스는 1436년에 쾨니히스베르크(독일 남부, 프랑코니아에 있는 시장을 중심으로 성장한 도시)에서 태어나 빈대학에서 포이어바흐의 강연에 참석한 천문학자이다. 본명은 요하네스 뮐러이며, 라틴명인 레기오몬타누스는 탄생지인 Koenigsberg(왕의 산)를 라틴어화한 것이다.


242/ 비잔틴제국 출신 추기경 베사리온이 교황의 특사로서 1460년 5월 빈을 방문하여 <알마게스트>에 명쾌한 주석을 붙여 쉬운 라틴어로 번역해볼 것을 포이어바흐에게 제안했다...


243/ 포이어바흐는 이 작업에 몰두했는데, 절반 정도 진행된 1461년 병으로 사망했다... 레기오몬타누스는 이를 위해 베사리온과 1461년 이탈리아까지 동행하여 그로부터 그리스어를 배웠으며 1462년 말, 늦어도 1463년 중반 이전에는 <적요>를 완성시켰다. <적요> 첫머리의 서문에는 포이어바흐가 임종 시 남긴 "안녕, 나의 요하네스여, 안녕. 그대를 신뢰하는 스승에 대한 추억에 마음이 움직였다면, 내가 완성하지 못했던 프톨레마이오스의 책을 마무리해줬으면 하네. 그대에게 이것을 유언으로 남기겠네"라는 말이 기록되어 있다...


252/ <삼각형총설>은 1464년에 쓰였으나 크게 미뤄져 1533년에 출판되었다. 그러나 이 책이 16세기 천문학의 발전에 기여한 역할은 매우 크다...


263/ 여기에 대해 천문학사 연구자 스워들로Swerdlow가 언급한 내용을 보자


나는 코페르니쿠스가 <적요> 제12권의 두 명제를 주의 깊게 탐구한 후 태양중심이론에 도달했다고 믿는다... 이처럼 레기오몬타누스는 코페르니쿠스가 이룬 대발견의 토대를 제공했다.


267/ 달의 겉보기 크기에 대한 지적은 <적요> 제5권 명제22에서도 반복되었다... <과학전기열전>의 '코페르니쿠스' 항에는 "베네치아에서 인쇄된 <적요>의 이 한 구절이 당시 볼로냐 대학에서 공부 중이던 코페르니쿠스의 주의를 끌었다"라고 나온다. <적요>가 인쇄·출판된 것은 1496년이다. 이때 이탈리아를 방문한 코페르니쿠스는 다음해인 1497년 1월 처음으로 볼로냐 대학에 학생으로 등록했으며, 천문학자인 도메니코 마리아 노바라의 집에 하숙하면서 4년을 보냈다...


274/ 레기오몬타누스는 행성구가 실재함을 믿었을 뿐만 아니라, 진공의 존재를 부정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학도 믿었던 것이다...


281/ ... 레기오몬타누스의 발언은 두 가지 점에서 선구적이었음을 알 수 있다. 첫째, 관측과의 일치를 통해 이론의 올바름을 검증한다는 것. 둘째, 학문이 선인들이 도달한 지점을 넘어 전진할 수 있다는 것...



2권 [지동설의 제창과 상극적인 우주론들]


14/ 지동설을 최초로 표명한 코페르니쿠스의 <소논고Commentariolus>는 무서명의 수고 상태로 친구들 사이에서 회람되었다. 집필은 1514년 이전이라 생각된다. 필생의 대작 <회전론>은 1543년에 출판되었고 이 직후 코페르니쿠스는 눈을 감았다. 향년 70세였다.


15/ ... 우선 키케로의 것에서 히케타스가 지구가 움직이고 있다고 생각했었음을 발견했습니다. 그 뒤 플루타르코스의 책 속에서 다른 몇몇 사람들이 같은 생각을 갖고 있었음을 발견했습니다...


17/ ... 코페르니쿠스가 태어난 1473년은 크라쿠프에서 처음으로 인쇄 공방이 개설된 해로, 포이어바흐의 <신이론>이 처음으로 인쇄된 해이기도 했다. 레기오몬타누스가 뉘른베르크에서 천문학서를 인쇄하기 시작한 것은 그 직전이었다...


18/ 포이어바흐의 <신이론>으로 천문학에 이끌린 코페르니쿠스는 1515년에 <알마게스트>의 라틴어역이 처음으로 인쇄되기 이전에는 오로지 <적요>로 프톨레마이오스 이론을 배웠고 거기에서 큰 영향을 받았다... 코페르니쿠스 자신은 자신의 저서에서 "나의 직접적인 선행자 게오르크 포이어바흐와 요하네스 레기오몬타누스"라 기술하고 있다.


21/ 코페르니쿠스의 이 주장은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 번째는 그때까지의 이론이 태양과 달의 운동에 관해 정확하지 않아 역법을 개혁하기에는 불충분하며 경험과도 어긋난다는 것이며, 두 번째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동심구 이론과 프톨레마이오스의 이심원·주전원 이론의 분열, 특히 전자는 수치적으로 부정확하고 후자는 일정운동의 원칙에서 일탈, 즉 등화점(이퀀트)을 사용하고 있다는 것, 즉 자연학적 우주론과 수학적 천문학이 괴리되어 있고 각자에게 고유한 결함이 있다는 것, 그리고 세 번째는 그때까지의 이론이 '우주의 형태와 그 부분의 확고한 균형'을 제시할 수 없다는 것, 즉 태양계 전체에 대한 체계로서의 구조적 파악이 결여되어 있다는 것이다.


24/... <소논고>에는 '요청 7'에서 명기되어 있다.


행성들에서 보이는 역행이나 순행은 그것들 측에서가 아니라 지구측에서 유래한다. 따라서 하늘에서 일어나는 상당한 수의 불규칙한 겉보기 운동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지구의 단일 운동으로 충분하다.


마찬가지로 <회전론> 제1권 4장의 끝부분에는 불균등한 행성 겉보기 운동의 원인 중 하나로 "그것들이 회전하고 있는 원들의 중심에 지구가 없다는 것"을 들고, "지구[의 운동]에 속하는 것을 천상[의 운동]에 속한다는 오류"에 빠지지 않도록 주의를 환기하고 있다.


지구가 운동하고 있을 가능성은 코페르니쿠스 이전에도 지적되었지만 행성 운동의 두 번째 부등성을 지구의 운동에 의한 외견상의 것이라고 설명한 사람은 코페르니쿠스가 효시이다. 코페르니쿠스는 이 착상을 <적요>에서 얻었으리라 생각된다...


25/ ... 그 '열쇠'란 외행성의 두 번째 부등성을 주전원으로도 회전중심을 갖는 이심원으로도 설명할 수 있다는 프톨레마이오스 <알마게스트>의 주장을 레기오몬타누스가 <적요>에서 내행성에도 적용 가능하다고 지적한 것이다...


27/ 이리하여 코페르니쿠스는 "고대 천문학자가 각각의 행성을 주전원으로 설명하려고 한 모든 현상이 지구의 단 하나의 운동으로 설명된다"라고 결론짓는다.


지구를 정지시킬지 태양을 정지시킬지만을 묻는다면 단순한 상대성의 문제가 된다...


그러나 지구와 태양과 행성의 삼자 관계를 고려하면 지구중심이론과 태양중심이론은 그 설명능력에 현격한 차이가 있음이 드러나다.


30/ ... 프톨레마이오스는 <알마게스트>에서 행성의 배열에 관한 통설을 기술한 뒤, "어떤 별도 검지할 수있을 정도의 시차를 갖지 않으므로 이 문제에 관해서는 우리의 지식을 전진시킬 방법은 없다"라고 기술하며 자기 이론의 한계를 확실히 인정했다.


32/ 행성 궤도의 배열은 플라톤 이래의 현안이었다...


34/ ... 몇 가지 대표적인 견해를 표시해두자


플라톤 달 - 태양 - 수성 - 금성 (그림 5.3)

포르피리오스 달 - 태양 - 금성 - 수성 (그림 5.3)

키케로 달 - 수성 - 금성 - 태양 <스키피오의 꿈>

플리니우스 달 - 수성 - 금성 - 태양 <박물지>(Bk. 2~6)

프톨레마이오스 달 - 수성 - 금성 - 태양 <행성가설>(그림 5.3)

베다 달 - 금성 - 수성 - 태양 <사물의 본질에 관하여>

비트루지 달 - 수성 - 태양 - 금성 <회전론>(Bk. 1, Ch 10)에서


41/ 그런데 개개의 행성 궤도 크기를 자유롭게 축소, 확대할 수 있는 한에서는 그 원들은 수대獸帶[황도대]상의 휘점輝點으로서의 행성 위치를 결정하기 위한 단순한 수학적 가설에 지나지 않지만 그 크기가 확정된다는 것은 그것이 행성들의 실재적인 물리적 궤도를 나타내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렇다면 코페르니쿠스의 전환은 또한 수학적 천문학과 자연학적 우주론의 학문적 서열의 변화도 의미한다...


52/ ... 코페르니쿠스는 실제로 등화점의 메커니즘을 [소]주전원 모델로 치환했다...


53/ 코페르니쿠스와 그 동시대인은 등속 원운동의 도그마에 속박되어 있었다. 이점에서는 프톨레마이오스 쪽이 훨씬 실용주의적이고 실제적이었다.


77/ 무릇 노이게바우어와 스워들로의 말처럼 "티코와 케플러 이전에는 프톨레마이오스의 정밀도를 평가할 위치에 있던 자는 아무도 없었다"...


81/ 결국 코페르니쿠스의 체계가 프톨레마이오스 이론을 뛰어넘는 핵심은 관측 데이터와 양호하게 일치한다는 것도 아니었고 계산의 단순성도 아니었으며 그 태양계 전체의 체계적 구조가 명백해졌음에 있다. 코페르니쿠스는 물리학자(자연학자)라기보다는 수학자였지만 정밀도의 향상을 추구하는 관측자도 아니었고 행성예보에 철저한 계산가도 아니었으며, 그의 문제의식은 실용적이라기보다는 원리적이었고 그의 개혁은 어디까지나 이론적인 설명능력과 원리적인 일관성의 관점에서 진행된 것이다.


84/ 원래 태양과 달 그리고 행성들의 집단과 지구는 같이 다뤄지지 않았다. 코페르니쿠스 이전까지 지구만은 천문학의 대상이 아니어서 '하늘'에는 포함되지 않았다...


87/ 물론 코페르니쿠스 개혁의 큰 의의는 태양을 포함한 천체의 신성성을 파괴했다는 것에 있다...


104/ 실은 1533년 여름에 독일 법률가이자 동양학자인 요한 알브레이트 비트만슈테터가 교황청의 정원에서 교황 클레멘스 VII세와 그 측근에게 '지구의 운동에 관한 코페르니쿠스의 견해'를 전달했다. 이때 교황 등이 눈살을 찌푸렸다는 기록은 남아있지 않다. 비트만슈테터는 그 뒤 추기경 니콜라우스 쇤베르크의 비서를 역임했다. 그 쇤베르크가 1536년에 코페르니쿠스에게 보낸 서간이 <회전론>의 첫머리에 게재되어 있는데 거기에는 코페르니쿠스의 이론으로서 "지구가 움직인다는 것, 태양은 우주의 가장 낮은 곳, 따라서 중앙 위치를 점하고 있다는 것, 제8천구[항성천]는 영원히 움직이지 않으며 고정된 채라는 것"이라고 올바르게 기술한 뒤에 "만약 당신에게 폐가 되지 않는다면, 당신의 발견을 글을 좋아하는 학자들에게 알려주시도록, 그저 당신에게 강하게 청하고자 한다"라고 그 공표를 적극적으로 촉구했다...


105/ 프톨레마이오스도 천공이 정지해 있고 지구가 지축 주변으로 서쪽에서 동쪽으로 회전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에 대해 하늘의 현상에 대한 설명으로서는 가능함을 인정한 뒤에 말했다.


그렇지만 이 지상 및 대기 중에서 생길 것을 고려한다면 그러한 생각이 극히 우스운 것임을 알아챌 수 있음을 그 사람들은 이해하고 있지 않다.


자신의 이론을 공표하기를 오랜 세월에 걸쳐 주저한 코페르니쿠스가 무엇보다도 걱정하고 두려워한 것은, 성서를 방패로 삼은 고상한 교의에 기반을 둔 교회의 사문이나 견책이 아니라 오히려 자기 이론의 '신기함과 부조리'가 일반 상식이나 통설에 정면으로 반하기 때문에 웃음거리가 되는 것이었다.


118/ 결국 코페르니쿠스가 행한 것은 태양을 중심으로 하는 우주의 수학적 기술이 가능하고 또한 현상을 잘 설명함을 보여준 것으로, 거의 그걸로 끝이다. 그의 <회전론>의 최대 특징은 단지 태양 중심의 우주상을 말한 것만이 아니라 그것을 엄밀한 수학적 논의로서 전면적으로 전개했고 자신의 것도 포함해 프톨레마이오스 이래 동시대에 이르기까지 축적된 관측 데이터로 정량적으로 검증했다는 것이다. 그것은 코페르니쿠스 이외에 누구도 할 수 없었던 것으로 실로 <회전론>은 '위대한 책'이라 불린 프톨레마이오스의 <알마게스트> 이래 1300년이 지나 비로소 출현했고 <알마게스트>에 맞설 수 있었던, 빠짐없이 갖추어진 포괄적인 천문학서였다.


121/ 그러나 궤도천문학의 수준에서 보는 한 코페르니쿠스는 원궤도와 등속회전이라는 고래의 도그마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는 그 틀 내에서 이론으로서의 정합성을 높혀 전체의 조화를 이루도록 프톨레마이오스 이론을 고쳐 쓴 것이다. 그런 한에서 철학자 노우드 러셀 핸슨Norwood Russell Hanson이 말하듯이 "코페르니쿠스는 위대한 정통적 행성 이론의 최후에 위치한다고 간주할 수 있다".



3권 [과학혁명과 세계관의 전환]


10/ 코페르니쿠스의 이론이 만들어 낸 자연학상의 문제들을 16세기 단계에서 -코페르니쿠스 자신을 뛰어넘어- 가장 첨예하고 빠짐없이 지적한 사람은 조르다노 브루노Giordano Bruno였다. 그는 신플라톤주의 및 쿠자누스와 루크레티우스에게서 받았던 영향, 그리고 독자적인 사색에 기반하여 1583년부터 1585년에 걸쳐 쓴 <무한·우주와 세계들에 관하여>의 끝부분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무한한 우주를 인정하는 것에 확신을 갖게 해주오. 원소와 천계를 안팎으로 한정하는 볼로구면과 오목구면을 쳐부숴 주시오. 수송천구라든가 천개에 고착된 별이라든가 하는 것들을 웃음거리로 만들어 주시오...... 이 지구가 참된 유일한 중심이라는 생각을 무너뜨려 주시오. 제5원소라는 무지한 신앙을 버리게 해주시오. 이 우리의 별과 세계도, 우리의 눈에 들어오는 저 많은 별과 세계도, 같은 것으로 만들어져 있다는 것을 알려주시오.


11/ 몇몇 천문학자가 관측에 기반하여 이 사실들 중 몇 가지를 확인하기 시작한 것은 이보다 조금 뒤인 1580년대 말이었다. 이 방향 즉 천상세계와 지상세계가 정말로 다른 세계인가 하는 질문으로 어쩔 수 없이 눈을 돌리게 만든 것은 16세기 후반 신성과 혜성-특히 혜성-의 관측이었다...


프톨레마이오스의 <알마게스트>에서도, 아리스토텔레스의 <천체론>에서도 혜성에 관한 언급은 없다. 아리스토텔레스가 혜성을 논한 것은 <기상론>에서인데, 여기서 혜성은 한때 출현했다가 소멸하는 무지개나 번갯불과 같은 수준의, 대가 상층에서 일어나는 기상현상으로 간주된다...


12/ 그런데 아리스토텔레스의 <기상론>에는 혜성을 행성의 일종으로 보는 사람들이 있었음이 기록되어 있다... 예컨대 피타고라스는 혜성을 여섯 번째 행성으로 간주했다. 이 점에 관해서는 기원후 1세기 로마의 세네카가 쓴 <자연연구>가 상세하다. 세네카 자신도 "혜성은 돌발적인 불이 아니라 자연이 만든 영원한 작품의 일부", "혜성은 영원한 것이며 다른 별[행성]과 같은 종류에 속한다고 보아도 전혀 무방하다"라고 말하며 그것이 상층대기의 일과성 현상이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생각을 부정했다...


27/ 정량적이며 지속적인 혜성 관측을 처음으로 실행하고 그 기록을 남긴 것은 15세기 피렌체의 파올로 토스카넬리Paolo dal Pozzo Toscanelli였다. 토스카넬리가 서방 항로를 통해 인도에 도달할 가능성을 지적했다고 하는 1474년의 편지와 지도가 콜럼버스에게 항해의 확신을 주었다고 종종 이야기되지만 이 콜럼버스에게 보낸 서간을 빼고 남아있는 서간이나 논고는 없으며 이 서간도 전사한 것이라 그 신빙성에 물음표가 붙는다.


29/ 이리하여 토스카넬리는 1433년, 1449-1450년, 1456년, 1457년(두 개), 1472년, 도합 여섯 개의 혜성 관측 기록을 남겼다. 게다가 각 혜성이 보이는 동안 며칠에 걸쳐 행한 지속적인 관측이었다. 이 기록들은 15장의 종이에 기록되었지만, 수고로서 회람되지도 않고 파묻혔다가 결국 19세기가 되어 발견되었다...


31/ 토스카넬리의 이 일련의 관측은 서유럽에서 알려진 한 상당한 기간에 걸쳐 지속적·정량적인 혜성 관측의 첫 사례이며, 그림을 보면 알 수 있듯이 혜성의 궤도라는 관념을 선명하게 환기하는 것이었다...


32/ 토스카넬리가 관측한 1456년의 혜성(핼리 혜성)은 유럽 각지에서 주목을 끌었다...


33/ 빈Wien의 포이어바흐도 이것을 관측했다...


34/ 관측은 토스카넬리의 것보다 거칠다. 그러나 특기할 만한 것은 포이어바흐가 혜성에 '고유한 운동', 즉 수학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규칙적인 운동을 부여했다는 것이다.


37/ 포이어바흐가 간단하게 기록한 혜성 시차의 정확한 정의와 관측에 의한 그 정밀한 결정법, 그리고 그것에 기반하는 지구-혜성 간 거리 산출법, 나아가서는 혜성의 머리와 꼬리 크기의 추정에 관하여 보다 체계적이면서 엄밀하게 논한 것이 레기오몬타누스의 논고 <혜성 크기와 경도 및 그 참된 위치에 관하여, 16문제>였다(그림9.3). 1472년경에 쓰인 것이지만 레기오몬타누스 사후인 1531년-1456년의 핼리 혜성이 돌아와 다시금 혜성에 대한 관심이 높아진 해-에 요하네스 쇠너Johannes Schoener가 22페이지의 소책자로 인쇄하였고 1544년에 재판되었다.


71/ 세네카가 혜성의 '회귀'를 이야기하는 것은 흥미롭기도 하고 놀랄 만한 것이기도 하다...


86/ ... 지동설과 천동설의 차이는 계산 편의의 차이일 뿐임은 명백했다. 즉 코페르니쿠스 설의 우주론적 주장은 다루지 않고 지나칠 수 있었던 것이다...


... 천상세계가 불변이라는 그 우주상에 대한 의문은... 새로운 현상의 출현, 즉 1572년과 1604년의 두 신성 출현, 그리고 1577년의 혜성에 의해 공공연한 논의의 장에서 생겨났다. 나중에 '튀코 브라헤 신성'이라 불리게 되는 1572년에 출현한 신성은...


89/ ... 20세기가 되어서도 아스 쾨슬러Arthur Koestler는 "기원전 125년, 히파르코스는 하늘에서 신성이 나타난 것을 발견했는데 그때 이래 이러한 사건은 전 세계의 누구 한 사람 보거나 듣거나 한 적이 없었다"라고 썼다. 그러나 그렇지는 않았다...


90/... 어쨌든 1572년의 신성 출현은 당시 유럽인에게는 전대미문의 사건이었다.


154/ 1577년의 혜성이 1572년의 신성과 결정적으로 다른 또 하나는 이 혜성이 어떤 궤도로 움직이는가라는 문제를 제기했다는 것이다...


207/ 요약하자면 튀코의 관측오차는 1분 이내로, 그의 관측값은 각도의 분 단위까지 신용할 수 있었다.


208/ ... 루퍼트 홀에 따르면 과거의 관측정밀도는 고대의 히파르코스는 20분, 발터 이전의 관측에서 가장 정밀도가 좋은 것이 15세기 전반의 울루그베그로 10분, 즉 천체관측의 오차는 고대부터 코페르니쿠스에 이르기까지 거의 변함없이 각도로 10분 이상을 예상할 수 있었다... 그러나 튀코의 등장으로 관측정밀도는 일거에 한 자리수 향상되었다.


... 이런 의미에서 튀코의 관측은 확실히 마지막 육안 관측에 해당한다...


209/ 그러나 무엇보다도 튀코의 관측이 당대까지 사용되던 것과 크게 다르고 결정적으로 중요한 전환이 된 것은 천체 운동을 정확하게 결정하기 위해서는 당대까지 사용된 방법같이 특별한 시점에서 산발적으로 관측하는 것으로는 불충분하다고 하여 그것을 지속적인 관측으로 치환한 것이었다.


214/ 튀코의 체계는 혜성이 천상의 사건이라는 그의 발견의 필연적 귀결이었다. 왜냐하면 그가 말했듯이 프톨레마이오스의 체계에서는 태양의 위와 아래 공간은 행성의 구각으로 완전히 메워져, 혜성의 운동을 위한 열린 공간이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튀코는 당초부터 혜성은 지구 주변이 아니라 태양 주변을 주회한다고 보았던 듯하다. 그리고 어느쪽 가설로도 그 운동공간이 필요했다...


215/ 그러나 지구의 정지를 확신한 튀코는 동시에 실재론자였으며, 코페르니쿠스의 이론에 따르면 행성운동을 성공적으로 계산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해서 그대로 수용할 수는 없었다.


216/ 내행성인 수성과 금성은 지구에서 보면 태양 방향에서 거의 일정한 각도의 범위 내에서 운동하고 프톨레마이오스 이론에서도 이것들의 주전원의 중심방향은 항상 태양방향과 일치했으므로, 이것들이 태양 주변을 주회한다는 시각은 이전부터 존재했다. 옛날에는 아리스토텔레스와 동시대 사람인 폰토스의 헤라클레이데스가 말했다고 전하는데, 여기에는 이론도 많다.


5세기 전반 북아프리카의 마르티아누스 카펠라Martianus Capella도 마찬가지 모델을 제창했다...


218/ 그러나 이 카펠라의 체계를 세 외행성도 수성이나 금성과 마찬가지로 태양 주변을 주회하는 모델로 확장하는 데는 그 나름의 비약이 필요했다... 튀코는 카펠라의 체계를 외행성으로까지 확대하는 아이디어를 튀코와 거의 같은 세대의 천문학자 비티히에게서 얻었으리라고 생각된다.


228/ ... 그 장애는 물리학(자연학) 영역에서 나타났다... 튀코의 체계에서는 화성 천구가 태양 천구와 교차하게 된다... 행성이 강체적 천구에 고착되어 운동한다면 이것은 물리적으로 불가능했다...


238/ 로스만의 <1585년의 혜성>... 1586년에는 수고로 튀코에게 보냈다... 튀코가 강체적 천구를 버린 것은 이때였다고 한다.


243/ 로스만 자신은 ... 곧 코페르니쿠스의 설에 크게 감화되었다...


... 그중 하나가 행성에 대한 강체적 천구와 같은 것이 존재하지 않고 어떻게 태양이 자신의 주변에 다섯 행성을 주회하게 하면서 동시에 스스로는 지구 주변을 회전하는 곡예가 가능한가 하는 의문을, 튀코의 체계에 던졌다...


266/ 코페르니쿠스는 일찍이 지구가 점하고 있던 우주의 중심이라는 지위를 태양에게 내주었으나 루크레티우스, 쿠자누스, 브루노는 무릇 우주 중심의 존재 그 자체를 부정한 것이다.


314/ ... 이미 기원전 4세기 그리스의 에우독소스의 동심구 모델에서 화성은 난제였다. 고대 로마 플리니우스의 <박물지>에서도 "화성의 진로를 관찰하는 것은 대단히 어렵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런 의미에서는 신입인 케플러가 화성을 떠맡게 된 것은 불리한 제비를 뽑게 된 셈이었다.


315/ 이심률이 큰 화성은 원궤도에 매달리는 한에서는 궤도를 결정하기 곤란했으나, 역으로 바로 그 때문에 타원궤도의 발견으로 이어졌다고 말할 수 있다. 나중에 케플러 자신이 "화성의 운동은 천문학의 숨겨진 비밀[타원궤도]에 도달할 수 있는 유일하게 가능한 길이며, 그것이 아니었다면 우리는 그 비밀을 영원히 알 수 없었을 것이다"라고 썼으며, 화성의 문제와 씨름할 처지가 된 연유를 '천우신조divina dispositio'라고 회고했다...


360/ 이리하여 케플러는 "행성들의 장축선이 태양 본체에서 교차한다는 것을 발견했다".


400/ 고대 이래 '천문학의 두원리', 즉 '지구의 중심정지원리'와 '천체 원운동의 원리' 중 전자는 이미 고대에 의심받은 적이 있으며 코페르니쿠스가 거부했다. 그러나 후자, 즉 '원운동의 원리'는 아리스토텔레스가 <형이상학>에서 "운동은 연속적이기 위해서는...... 특히 원운동이어야 한다"라고 논한 이래[Ch. 1.2], 천체 주회의 영속성의 근거로 간주됨으로써 중세는 물론 코페르니쿠스나 튀코 브라헤를 포함해 마지막까지 견지되어 왔다.


402/ 케플러는 태양계의 모든 천체의 궤도로서 타원을 발견한 것이다.


416/... 바로 이로써 케플러는 천체역학이라는 사유 형식을 창출했고, 17세기의 새로운 역학발전에 크나큰 족적을 남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