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 A. 호스톤
서문
11/ ... 그러한 혁명이 1848년 유럽의 소요unrest로부터 실현되지 못했을 때, 그 창설자들은 사회주의가 원시공동사회의 유물인 미르(농민코뮌)를 존속시키고 있는 러시아와 같은 저개발사회로부터도 발생할 수 있다는 생각을 간단히 받아들였다... 그러나 상대적으로 저개발된 러시아의 상황에 대해 마르크스 모델이 적절한가라는 문제가 러시아의 나로드니키주의자들과 마르크스주의자들간의 열띤 논쟁의 주제가 되었을 때... 레닌 역시 새로운 소비에트 사회가 서양의 더욱 고도로 발전된 자본주의 사회의 프롤레타리아혁명에 의해 재빨리 지지되지 못하면 새로운 소비에트 사회는 생존할 수 없다는 것에 관심를 가졌다. 그러한 지지에 대한 레닌의 기대는 단명으로 끝났다. 즉 레닌의 기대는 스파르타쿠스단the Spartacus의 폭동이 독일에서 분쇄되었던 1919년에 사라졌다...
12/ 그리고 나서 1919년 초에 코민테른정책의 주요 목적은 동양에서 혁명을 조장하는 것으로 되었다... 레닌은 서구자본주의로 하여금 제국주의적 팽창에 의해 번영하도록 한 결정적인 고리를 단절시키기 위하여, 중국·인도 그리고 동양의 다른 곳에서 민족주의적 반反식민지 혁명을 이용하려고 하였다. 아시아의 민족혁명은 유럽 자본을 위한 원료와 시장의 필수적 공급을 붕괴시킬 것이고, 유럽의 경제적 혼란을 선동할 것이고, 마지막으로 서양에서 대망의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촉발시킬 것이다... 소비에트 지도자들은 바로 자본주의가 그렇게 성숙하지 않은 곳에서는 사회주의 혁명이 생존할 수 없다고 믿었기 때문에, 중국에서 그들은 생긴 지 얼마되지 않은 미약한 중국공산당보다는 오히려 장개석의 국민당을 지원하였다. 1920년대와 1930년대에 일본공산당에게 조언할 때조차도, 부하린Nikolai Bukharin 등의 코민테른 지도자들은 메이지 유신 이래의 괄목할 만한 일본자본주의의 성장에도 불구하고 부르조아 민주주의 혁명만이 즉시 가능하다는 그들의 기대를 확고하게 유지하였다.
이러한 견해에 반대하여 노농파는 1927년에 일본자본주의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노농파는 높은 수준의 금융자본, 제1차 세계대전 이래 트러스트화의 급속한 증대, 그리고 강력한 제국주의적 추진, 이 모든 것이 선진자본주의로서의 일본의 지위를 가리킨다고 주장하였다. 강좌파 혹은 이른바 봉건파는 일본의 정치적 상부구조에서 반半봉건 유제의 잔존-예를 들면, 천황제·추밀원 그리고 지배적인 국체國體 이데올로기-이 일본의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이 아직 완성되어 있지 못하고, 따라서 일본공산당이 사회주의혁명을 착수하기 전에 완수해야 할 사명이라는 증거를 구성한다고 주장하였다. 노농파는 일본의 도시뿐만 아니라 농촌에서 자본주의로의 중요한 이행에 대한 증거를 제시하도록 요구를 받았고, 반면에 강좌파의 봉건 테제는 강좌파로 하여금 그와 같이 강력한 후진성의 흔적을 유지하면서도 일본자본주의를 매우 급속하게 발전하도록 허용했던 과정에 대해서도 광범한 역사적 연구를 수행하도록 하였다.
13/ ... 전전戰前 시기에 이러한 논쟁으로 말미암아 일본의 마르크스주의자들은 마르크스주의적 일본사의 단계구분, '아시아적 생산양식' 개념, 일본에서 산업자본주의 발달의 기원, 그리고 일본의 정치경제에서 천황제의 성격이나 역할과 같은 문제들에 착수하였다...
14/ ... 다카하시 가메키치高橋龜吉에 의해... '대동아공영권'이라는 개념과 매우 유사한 주장으로... 그는 아시아에서 일본제국주의 팽창이 필요하고 합법적이며 지지받아야 한다고 결론지었다... 다카하시의 분석에 의해 격분되었고 도전을 받은 강좌파와 노농파의 열렬한 지지자들은...
15/ ... 1920년대까지 일본은 "국가를 부유하게 하고 군대를 강하게 하려는(富國强兵)" 메이지과두제의 목적을 달성하였다... 그러나 가와카미 하지메河上肇와 같은 지도적인 지식인들이 빈곤, 혼잡한 도시, 장시간노동과 저임금에 억압받는 도시 노동자계급의 증대와 같은 일본자본주의의 발달에 따른 국내의 결과들에 대해서 불만을 가졌기 때문에, 마르크스 주의는 일본에서 매력적인 것으로 보였다. 새로운 도시자본주의적인 일본과 전통적 농업부문 사이의 혼란스러운 분열이 출현하였다. 이러한 간극은 자본주의의 등장과 관련된 인간이기주의·개인주의 그리고 이윤추구와 같은 정반대의 가치관들에 대해, 본래 매력적으로 남아있던 일본의 어떤 전통적 가치관들의 희생이라는 가와카미의 최대 관심사를 두드러지게 하는 데 기여하였다. 일본의 마르크스주의자들에게는 구미형 자본주의의 타당성은 새로운 질서가 지금까지 조화로운 사회 내에 새로운 사회적 긴장과 분열을 야기시킨 것으로 인식되었기 때문에 의문이 발생하게 되었다.
16/ 따라서 어떤 의미에서는 일본 안에서 일어난 마르크스주의의 급진적 혁명주의는 자본주의를 통한 '구미' 경로를 따라서 더욱 진보함을로써 집산주의collectivism와 같은 매우 전통적인 가치관들을 회복하고 마르크스에 의해 묘사되었던 것과 같은 사회주의로 나아가려는 노력을 의미하였다... 아이러니컬하게도 강좌파 혹은 일본공산당파는 천황제와 같은 '봉건적 잔재들'이 사회주의를 달성하기 위한 2단계 혁명을 요구했다는 것을 걱정하였다... 일본의 경로에 관한 이들 마르크스주의자들의 반대감정의 병존은 그들 모국의 상황에 마르크스주의를 적용하면서 "그들 사회에 고유한 전통적 가치관들을 다시 주장할 절박한 필요를 느꼈던" 아프리카의 카브랄Amilcar Cabral, 니에레레Julius Nyerere와 같은 사회주의자들 사이에 되풀이되었다...
본문
66/ 마르크스주의가 처음 일본에 수입되었을 때, 그것은 사회진화론Social Darwinism처럼 구미사상의 최전선에 있는 독트린으로서 인식되었기 때문에 주로 진보적 지식인들에게 호소력을 가졌다...
67/ 그러므로 (다카바타케 모토유키(高畠素之, 1886~1928)에 의해서) <자본론>의 첫 일본어 번역이 1920년에 발간될 때까지는, 엥겔스에 의해서 체계화된 '과학적 사회주의'가 일본에 수입된 마르크스주의의 핵심을 이루었다... 오히려 플레하노프의 <마르크스주의의 근본문제>가 (야마카와 히토시(山川均, 1880~1958)와 그의 부인 야마카와 기쿠에(山川菊栄, 1890~1980)에 의해 번역되었던) 레닌의 <소비에트정부의 당면과제>가 분권으로 출판된 1921년 이전에 번역된 첫번째 러시아사회주의 저작이었다...
70/ ... 어쨌든 1920년대초에 일본경제학 서클의 마르크스경제학 연구는 사실상 폭발하였다...
144/ ... 레닌은 러시아의 자본주의 전개에서 세 개의 단계들, 즉 ① '소상품 생산'(작은, 주로 농민공업들), ② '자본주의적 매뉴팩처'(핫토리 분석의 중심), 그리고 ③ '공장제 (대규모) 기계공업'으로 구별하였다... 핫토리 시소服部之總는 현재까지 일본마르크스주의 경제사가들이 도쿠가와에 관한 레닌의 관찰들을 고려하지 않았다고 주장하였다. 그들이 막부 말기에서 가내공업과 도이야제問屋制(先代制)-마르크스주의 경제학에서 자본주의 생산의 초기단계들과 상호관계된 현상들-의 존재를 인정하였을 때조차도, 일본자본주의의 내재적 발전에 대한 그것들의 이론적 중요성은 무시되었다...
돕Maurice Dobb에 따르면, 선대제에서 "생산은 '상인매뉴팩처'에 종속되어 있었다." 이 제도에서, 상인자본가는 원료를 구입해서 그것을 수공업적 작업방식의 기초 위에서 그 원료를 가공하는 개별 수공업자들craftsman에게 보수(임금) 대신에 제공하였다. 그리고 나서 상인은 최종생산물을 받아 그것을 시장에 판매하였다.(M. Dobb, Studies in the Development of Capitalism; Rodney Hilton, ed., The Transition from Feudalism to Capitalism, p.17, 17n) 이 선재제에서, 상인들의 "매점자본은 생산자와 시장간의 중개물로 나타났고, 점차 [생산자들을] 지배했으며, 마침내 그들을 가공임금을 지불받는 사실상의 임노동자로 만들었다."(荒憲治郞·內田忠夫·福岡正夫 공저, <經濟辭典>, s.v. 問屋制家內工業) 問屋制산업의 존재와 자본주의적 가내노동의 형태는 자본주의적 생산의 기원을 매뉴팩처에서 찾는 데서 중요하다. 돕의 지적처럼, "공장제수공업이 가내생산과 유일하게 다른 점은 생산의 기술적 기초는 수공업이고" "그 작업이 고도로 산업화되어 있었기" 때문에, 수많은 직기들이 노동자들의 가정에 분산되어 있지 않고 동일한 건물에 나란히 설치되어 있다는 것이다. 돕은 이것을 원매뉴팩처 시대인 16세기 영국에서 "임금이란 기초 위에서 노동자들을 직접 고용한 자본가들에 의해 점유된 공장들"보다 훨씬 일반적이라 규정하였다.(M. Dobb, op. cit., p.138)
幕末농업에 대한 土屋과 服部간의 대립논쟁에서 두 사람의 입장은 정반대였다. 服部는 농촌에서는 봉건적 특성들이 본질적으로 항존했다는 강좌파 입장을 고수한 반면에 土屋은 '근대화의 맹아'가 '신지주들'과 임노동에 존재했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土屋은 공업과 농업, 양자에서 근대자본주의적 특성들을 지적한 반면, 강좌파의 입장은 근대자본주의적 공업과 함께 농촌의 봉건제적 요소들의 부조화 내지 불균등 발전을 강조했다.(小島恒久, <일본자본주의논쟁사>, p.100n., 101n.)
145/ 1933년에 핫토리는 <러시아의 자본주의 발전>에 대한 레닌의 분석에 의해 제공된 모델의 기초 위에서... 도쿠가와 말기를 본래적 매뉴팩처기로 단정하면서, 핫토리는 "일본자본주의가 이미 매뉴팩처 단계에 들어갔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공식화는 프티 봉건적 생산양식의 존재를 부정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매뉴팩처가 서 있던 기초 위에서 과도기적 통일체내의 봉건적 요소들과 자본부의적 요소들을 보았다." 거기에 구미침략시에 매뉴팩처 단계를 경험하지 못하고 있었던 중국이나 한국과의 결정적인 차이가 있었다. 일본에 대한 구미의 영향은 이미 발생하고 있던 변화들을 단순히 가속화시키는 것이었고, 핫토리가 1870년대 후반과 1880년대로 추정한 자발적 산업혁명을 이끄는 것이었다. "개항과 함께 밀려들어온 미국과 유럽의 대규모 공업생산에 의해 강요되고, 그뒤 메이지정부(에 의해 보증된) 대규모 공업에 의해서뿐만 아니라 일본으로 이식된 대규모 공업에 의해 자극된 도쿠가와 이래로 (존재해 왔던) 고쿠산(谷山 : 藩制와 將軍制) 매뉴팩처는 형태를 바꾸었고" '산업혁명'을 경험하였다...
167/ ... 마르크스는 아시아사회를 에드워드 사이드Edward Said의 용어를 빌린다면, '동양주의자orientalist'의 관점에서 다루었는데, 동양주의적 관점은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이래의 서구 정치사상가들의 공통된 관점이었다. 이 견해는 동양을 전제주의의 온상으로 묘사하고 이 전제주의적 성격이 정치뿐만 아니라 사회에도 만연되어 있다고 본 18세기 샤를 몽테스키외의 저작에 극명하게 나타나 있다.* 마르크스 자신은 그가 프랑스와 영국에서 발견하여 <자본론>에 체계적으로 밝혔던 사회·경제적 발전도식에서 아시아를 명백하게 제외시킴으로써 이러한 전통을 이어받았다. 인도에서의 영국제국주의에 관하여 뉴욕 <데일리 트리뷴>지에 기고하면서, 마르크스는 동양을 현재 역사가 우회한 문명으로 본 헤겔적 관점을 견지하였으며, 또한 발전의 내적 동력을 결여한 아시아에서의 변화에 대한 유일한 희망은 서구제국주의로부터 와야만 한다고 성급히 주장하였다.
사이드Edward W. Said는 '동양주의' 즉 "'동양'과 (그 시대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서양' 사이에 이루어진 인식론적 존재론적 차이에 기초한 사고유형"은 "동양에 관해 설명하고, 전문화된 견해를 수립하고 묘사하고 가르치고 지배함으로써" "동양을 지배하고 재편하고 그에 대한 권위를 가지기 위한 서양적 유형"이라고 주장한다.(p. 2, 3) 사이드의 논의는 중동을 중심으로 동양주의를 보는 서구의 문헌전통에 초점을 맞추었지만, 또한 동양을 정체적이고 수동적이며 미분화된 대중으로 간주하는 마르크스 문헌의 동양주의를 올바로 파악하고 있다. Edward W. Said, Orientalism, pp. 153-156.
*Franco Venturi, "Oriental Depotism," pp. 133-135.
169/ ... 마르크스는 동양사회를 재산공유와 협업을 중심으로 한 생산관계에 기초하여 소규모 농업이 이루어지는 특수한 생산양식의 산물로 규정했다... 결국 지리적으로 특수한 이른바 정태적 동양사회라는 관점과 반드시 지리적으로 국한되지 않으면서 동태적인 사회·경제적 변화의 일반적이고도 보편적인 범주가 될 수 있는 '아시아적 생산양식' 개념 사이의 명백한 모순은 아시아사회에 관련해서 마르크스주의자들 사이에 끊임없는 논쟁을 제기하여 왔다. 특히 1930년경 코민테른 내부의 마르크스주의자들이 동양에서의 혁명에 적합한 전략을 만들어내려 하면서 이러한 갈등은 극에 달했다. 제2차 세계대전 후 중국공산당이 1949년 승리하면서, 그리고 민족해방운동이 아시아와 아프리카 여러 곳의 쇠퇴해가는 유럽제국의 식민지로 확산되면서 이 논쟁은 부활하였다.
171/ ... 일본의 경제발전을 마르크스적 용어로 분석하는 데 쓰인 모델은 레닌의 <러시아의 자본주의 발전>(1899)이었다. 이 책에서 레닌은 한편으로는 러시아에서는 자본주의가 상당한 정도까지 나타나지 못했다는 민중주의자의 견해에 반대하면서도, 그럼에도 러시아의 半아시아적 특징이 러시아의 산업자본주의의 발전을 저해했음을 시인했다. 물론 레닌은 인도·페르시아 및 중국과 같은 완전한 아시아사회와 러시아를 구별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묘사한 정체성이 사유재산·봉건주의 및 자본주의 발전을 완전히 봉쇄해버린 이들 아시아사회와는 달리 러시아는 사실 봉건주의뿐만 아니라, 설령 혼종이라 하더라도, 성장하는 자본주의도 경험했다.
172/ ... 아시아적 특징들에 의하여 생겨난 혼종 자본주의에 관한 레닌의 묘사는 또한 일본에서 국가의 끊임없는 압제와 천황제 같은 일본사회의 다른 모습을 설명하는 데 도움을 준다. 즉 이러한 일본사회의 모습은 자본주의적 특징이라기보다는 아시아적 특징과 깊게 관련이 있는 봉건체제의 특징들이라 생각된다. 이것은 일본봉건주의가 계속 번성하였기 때문에 부르주아민주주의 혁명이 필요했다는 강좌파의 입장이나 봉건적 유산에도 불구하고 일본사회는 실제로 조속한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맞이하기에 충분한 자본주의적 발전을 경험했다는 노농파의 입장을 옹호하는 데 모두 유용하게 적용될 수 있다.
... 실질적으로 아시아적 생산양식에 관한 모든 논쟁은 강좌파 내부에서 일어났다. 노농파는 이 개념에 호소하지 않기로 했다... 이러한 개념은 그들에게는 큰 의미가 없었기 때문이다...
173/ ... 마르크스의 동양사회의 개념이 1853년 엥겔스와의 서신이나 <중국과 유럽에서의 혁명>(1853. 6. 14) 그리고 <인도에서의 영국의 통치>(1853. 6. 25)에 관한 뉴욕 <데일리 트리뷴>지 기사에서 구체화되면서 제기되었다. 이 개념은 세 권의 <자본론>과 엥겔스의 <반듀링론>(1878)에서 더욱 다듬어졌다. 그러나 이 문제에 관한 마르크스의 언급은 산발적이고 다소 단편적이어서 어떤 학자들은 동양사회의 개념을 2, 3개로 구분하였다. 예를 들면, 도널드 로우Donald Lowe는... 세 개의 형태로 나타나며 또한 각기 다른 요소를 강조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즉 1853년 저작에는 아담 스미스·리처드 존스(Richard Jones, 1790~1855)·밀(James Mill, 1773~1836), 그리고 베르니에(François Bernier, 1620~1688)등의 <정치경제학>의 영향을 반영하여 '내포적 촌락공동체와 수리水利 사업의 정부적 통제라는 현상이 강조되어' 있다.** 한편 자기완결적 촌락공동체와 국가의 잉여가치 수탈을 강조한 <자본론>(제1권 제1장 제4절)에서는 아시아적 생산양식을 고대적 생산양식의 한 변형으로 보면서 사유재산과 수리사업의 부재를 별로 강조하지 않고 있다. 또한 <반듀링론>에서는 수리사업을 무시하고 내포적 촌락공동체를 강조하고 있다.
비트포겔은 적어도 두 서술을 구별했는데... 후기저작에서 마르크스는 '대규모 수로 노동의 기술적 측면'을 강조한 반면, 초기 저작에서는 고립된 농촌마을에 의존하는 전제군주의 정치적 역할을 강조하였다고 비트포겔은 주장했다(Karl A. Wittfogel, <Oriental Despotism>, pp. 369-386)...
**Donald M. Lowe, The function of 'China' in Marx, Lenin, and Mao, pp. 11~14. Engels의 책, Origin of the Family, Private Property and the State(1884)에는 그 개념이 완전히 빠져 있었다.
174/ ... 그 인과관계는 기후조건→관개·대규모 수리사업의 필요성→분산된 내포적 농경 촌락공동체에 기초한 전제정치의 성장→토지사유제 발전의 부재 및 그에 따른 봉건적·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의 발전 불능으로 이어진다.
이러한 인과관계에서 앞으로의 발전을 가로막는 주된 요소는 '토지에 대한 사적 소유의 부재'였는데,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이러한 현상을 동양적 전제군주의 존재로 인하여 영구적인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175/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아시아에서 발견한 '정체적 사회조건'의 기초를 형성한 것이 바로 이러한 토지소유 집중과 노동조세=지대의 체계였다... 사실 경제적 계급이 없는 곳에서는 계급투쟁도 있을 수 없다-이것이 바로 마르크스의 체계에서 사회·경제적 변동을 초래하는 핵심이었다.
... 마르크스의 분석방법은 대상에 충실한 것이었는데, 물질적 생산력은 마르크스의 견해를 동양적 '정체'에 관한 헤겔의 신비적 설명과 구별하게 해준다. 아시아적 사회구성체에서 미래의 변화 가능성을 비관적으로 보았다는 데에는 마르크스와 헤겔의 결론은 동일하다. 사회·경제적 변동의 주된 원천-사적 소유관계에서 비롯되는 계급갈등-이 동양적 전제군주의 존재에 의하여 말살되어버린 그러한 사회는 변화의 내적 힘을 결하고 있다. 대개의 경우 변동의 강력한 수단인 고리대조차도 동양사회에서는 강력한 저항을 받았을 뿐 그 구조를 해체시키지는 못했다고 마르크스는 선언했다...
터너Bryan S. Turner와 알튀세Louis Althusser와 발리바르Etienne Balibar, Reading Capital)의 최근 주장을 비교해보라. 터너는 "마르크스의 저작에서 인식론적 단절이 존재하고, 마르크스의 저널리즘은 아시아 사회구성체에 대한 과학적 분석의 기초를 제공해주지 못한"는 데 동의한다. 여기서의 주장은 청년마르크스와 노년마르크스 사이의 공식적이고 궁극적으로는 유지될 수 없는 차이에 의존하지 않는다. 나아가 터너는 힌더스Barry Hindess와 허스트Paul Q. Hirst를 인용하면서 극동에 관한 마르크스의 무지를 생각할 때 "아시아적 생산양식은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임의적 조화를 나타낸다는 것을 밝힘으로써 아시아적 생산양식의 형성에서 이론적인 일관성에 의문을 제기하는 것은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Turner, Marx and the End of Orientalism, p. 82)
177/ ... 리히트하임Georgi Lichtheim이 주장하였듯이... "마르크스는 '진보'에 관하여 팽배해있던 낙관주의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세계자본주의의 침입에 아시아사회가 저항한 것을 볼 때, 그러한 '진보'가 언제나 이루어진다고 낙관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 이러한 분열은 <그룬트리세>에서 더욱 명백하게 설명되었다. 이 책에서 소유와 공동체의 여러 다른 형태를 논의하면서 마르크스는 슬라브 공동체-동양적 공동소유의 변형-를 포함시켰다. 슬라브 공동체가 19세기 후반에도 러시아에 남아 있었다는 것은 러시아의 발전에 특별한 '역사적 환경'을 제공하였다...
180/ ... 일부 마르크스주의자들은 마르크스가 도쿠가와 일본은 봉건사회였음을 솔직히 인정했고, "'아시아적 사회'의 개념은 지리적 개념이라기보다는 사회적·역사적 개념이라고" 주장함으로써 아시아적 생산양식 개념의 지리적 의미를 인정하지 않았다. 그러나 플레하노프George V. Plekhanov에 따르면, 지리적 환경은 역사적 발전을 결정하는 전제조건이며 특정 생산양식을 결정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플레하노프와 레닌 둘 다 러시아의 아시아적 과거와 지속적인 半아시아적 성격이 자본주의 발전의 지체요인이었다고 주장했다... "자본주의적 요소는 서양에서와 같이 농노제도가 사라진 뒤가 아니라 봉건적 농노관계가 여전히 활발히 발전하면서 나타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184/ ... 바르가Eugen Varga(1879-1964)처럼 마디아르Lajos Mad'iar(1891-1940)는 아시아적 생산양식은 봉건재산과 봉건지주가 없다는 점에서 봉건주의와는 다른 별개의 생산양식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마디아르는 홍수와 치수의 필요성 및 인공적 관개사업이 이러한 특별한 생산양식을 형성하도록 한 중요한 요소였을 강조했다...
190/ ... 마디아르에 의하면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초기 저작에는 동양사회의 특징이 "① 토지사유의 부재, ② 인공관개의 필요성 및 이와 관련한 대규모 공공사업의 필요성, ③ 농촌공동체, ④ 정부형태로서의 전제정치"라는 네 가지로 나타나 있다고 본다...
191/ 아이카와相川春喜는 마르크스가 1859년 <정치경제학비판서설>에서 인간의 사회적 역사 시기를 '발전적으로' 아시아적·고대적·봉건적 그리고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으로 설명한 방식을 그대로 해석하여 수용하였다. 그는 아시아적 생산양식을 고전적 노예소유구성체였던 고대 그리스·로마에 선행하는 대립적 사회 혹은 계급사회의 첫번째 형태로 보았다. 또한 그는 마르크스가 '동양적' 혹은 '아시아적' 사회로 보았던 것은, 이집트·터키·페르시아·인도 및 타타르에 관한 마르크스의 조사에서 발견되듯이, 고대 동양의 사회형태를 언급한 것으로 해석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마르크스는 고대 아시아의 가부장적인 사회구조를 설명하기 위하여 고대 무갈제국에 관하여 쓴 베르니에의 서술에 의존하였다. 또한 아이카와는 마르크스는 이들 아시아 사람들에게서 고대 그리스·로마와 고대 독일의 역사적 기초를 발견하였으며, 이것이 마르크스가 그것을(역사적 기초를-역주) 아시아적 생산양식이라고 명명한 이유라고 주장했다...
192/ 따라서 아이카와는 '동양일반의 독자적인 봉건주의'라는 고데스(Lev Abramovich Ventsianovich Godees, 1894–1937)의 언급은 마르크스 자신이 순수한 봉건주의로 평가한 일본과 같은 나라와, 소규모 농업과 수공업이 공동토지소유에 기초하여 계속 존재하고 있는 인도와 같은 나라 사이의 현저한 차이를 지워버렸다고 주장했다...
194/ ... 이러한 그의 해석에서 모리타니森谷克已는... 서양뿐만 아니라 동양에서도 노예제도는 첫번째 계급구성체였으며, 아시아적 생산양식은 고대 아시아 노예제도의 변형 및 중세 동양의 수정된 봉건주의라는 이중의 의미를 갖는다고 보았다...
199/ ... 문제는 만일 일본의 과거에서 아시아적 생산양식을 발견했다면, 그러한 마르크스의 분석에 따라 사유재산의 출현은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일본은 사유재산의 존재가 요구되는 봉건주의를 발전시켰다...
200/ 하야카와早川二郞의 견해로는, 국가공납제도는 동양사의 이른바 특수성의 많은 부분을 설명해준다. 그의 견해로는 이것은 동양에서 토지국유의 기초였으며, 또한 인공관개는 이러한 '형태의 토지국유'의 이차적 결과였다...
201/ 하야카와는 공납제도의 출현-그의 '아시아적 생산양식'-은 <반듀링론>에서 엥겔스가 묘사한 원시공동사회의 붕괴로부터 추적될 수 있다고 계속하여 주장했다. 첫번째 단계에서 생산력 발전은 잉여노동의 가치를 일깨우게 되며 따라서 그전에는 쓸모가 없어 죽여버린 전쟁포로들이 노예가 되어 고대 그리스·로마로 대표되는 고전적 형태의 노예제도가 나타난다. 그러나 <가족의 기원>에서 엥겔스는 원시사회 붕괴의 두번째 길을 제시했다. 원시공동체 내부에서 새롭게 나타난 부자와 가난한 자 사이의 분열 및 노예와 자유민 사이의 분열은 상품교환의 시작과 사유재산을 수반했다. 그러한 내적 분열은 점차 구공동체와 공동토지경작을 파괴했으며, 그리고 토지는-처음에는 잠정적으로, 그리고 나서는 영구적으로-개별 가족이 사용하게 되었으며 또한 사고 팔 수 있는 양도성 상품alienable commodity이 되었다고 엥겔스는 설명했다. 그러나 하야카와의 해석으로는, 두번째 역사단계에서 공동체내의 새로운 분열이 나타난 것은 단지 공동체의 잠정적 해체를 초래하였으며, 공납제도로 좁게 해석되는 아시아적 생산양식 발흥의 출발점이 되었다는 것이다.
자신의 <일본왕조시대사>에서... 하야카와는 "'고전적 노예제도' 이외의 다른 어떤 것에 기초한 노예소유구성체란 있을 수 없다..."고 서술했다. 그리고나서... 성숙한 노예소유구성체가 결여될 수 있는 가능성에는 최소한 세 가지 경우가 있다고 언급했다. 첫째... 원시사회는 선진적인 프롤레타리아사회주의국가의 도움으로, 사회주의를 달성하여 중간의 생산양식을 우회한다. 두번째 경우는 게르만족의 로마 정복에서 역사적으로 명백해진 것인데, 게르만의 로마정복 결과 게르만 사회의 발전은 선진적인 로마사회의 발전에 '접목'되었다. 이러한 경우 기술적으로 게르만족은 직접적으로 노예소유구성체를 경험하지는 않는다. 마지막으로 동양의 역사는 세번째 경우가 된다. 중국과 일본에서는 노예제도가 앞의 두 경우와 같이 완전히 없는 것은 아니었다. 경제체제로서의 노예제도는 있었지만, 그것은 완전하고도 지배적인 사회구성체의 씨앗을 간직하면서 저발전의 상태로 남아 있었다. 결코 고대 그리스·로마 노예제도만큼 성숙되지는 못했다. 반대로 어떤 형태의 계급사회가 그리스·로마의 고전적 노예제도에 선행했지만, 그러나 이러한 공납제도는 결코 독립적 사회구성체의 단계에 이르지 못했으며 원시씨족제도의 말기에 나타난 것은 단지 그러한 형태뿐이었다고 그는 주장했다.
202/ 하야카와의 견해로는 공납제도 혹은 아시아적 생산양식은 개별공동체 사이의 전쟁으로 원시공동사회가 붕괴되면서 나타났다고 한다... 지배적 공동체가 몰락하면 거기에서 이루어졌던 관계가 변경에서 재창조되었다. 결과적으로 새로운 '노예소유구성체'로의 이행은 생산력의 성장이 공동체 관계의 매우 직접적인 붕괴를 초래했을 때 있을 수 있는 것보다 더 어렵게 되었다. 하야카와가 주장했듯이, "'공납제도'는 공동체 자체의 정체성과 '역사의 후퇴' 가능성 때문에 아주 오랜 기간 동안 지속되었다."
이 해석에서 이른바 아시아적 생산양식의 중심요인은 마디아르 또는 코발레프(Maxim Kovalevsky, 1851~1916)가 말한 지리적 환경이나 관개의 필요성은 아니다. 오히려 상업적 관계의 저발전이 공동체 관계의 고착성의 원인이 되었으며, 이 공동체 관계의 고착성이 동양에서의 노예소유구성체의 외관상 결여를 초래했다. 원시공동사회의 붕괴 이후 지리적 위치와 저발전 사이의 명백한 관계는 단지 우연에 불과했다. 서양사회처럼 동양사회도 노예사회구성체로 발전해가는 도정에 있었지만, 상업의 저발전은 동양에서의 이러한 발전을 저해했다.
203/ ... 하야카와의 아시아적 생산양식 개념을 일본에 적용할 때 문제가 되는 것은 베민部民-즉 씨족사회와 다이카大化개혁(645-649) 이후에 존재했던 황실과 귀족계급의 노예-의 지위였다...
204/ 이 문제를 다루는 하야카와 논의의 출발점은 베민은-그리고 스파르타의 헬롯helot은- 노예였다는 다른 사람들의 주장이었다. 이러한 주장은 고대적 노예제도 시대가 다이카개혁에 선행했음을 의미하는 것이며, 따라서 하야카와로서는 이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시급했다. 하야카와는 일본의 베部 제도, 스파르타의 헬롯, 그리고 아테네와 로마의 고전적 노예제도 사이의 차이점을 분석하기 위하여 노예제도를 세 가지 형태-가내 노예제도, 고전적 노예제도 및 국가소유 노예제도-로 구분했다. 가내노예제도는 그러한 노예는 '생산의 기반'이 될 수 없으므로, 사회구성체의 기반이 될 수 없다고 그는 지적했다. 오히려 가내노예제도는 다양한 로마와 아테네의 고전적 노예제도의 선구일 뿐이며, 그 사회의 성격에 따라 성숙한 고전적 노예제도로 진화할 수도 할 수 없을 수도 있다. 국가노예제도는 상대적으로 여전히 원시적인 사회에서 가내노예제도를 보충했다...
하야카와는 (스파르타의) 헬롯도 일본의 베도 고전적 의미의 노예는 결코 아니었다고 주장함으로써, 이러한 특성들을 일본에 적용했다. 그는 헬롯을 원시노예, 즉 후에 노예로 발전한 피지배 농업노동자집단으로 보았다... 베는 가내노예제도가 존재하고 난 후에 형성되었으며, 또한 씨족 공동체 관계로부터 완전히 자유롭지 못한 한 사회가 더 낮은 발전단계의 다른 사회를 정복하여 구성원을 노예로 만들었을 때 형성되었다. 헬롯과는 달리 베는 정복자계층의 소유가 아니라 개인의 재산이었다. 또한 고전적 고대의 노예와는 달리 <古事記>와 <日本書紀> 등 일본사의 고전들은 베는 매매되기보다는 몸값을 받고 교환되거나 혹은 주어버리는 경우를 보여준다. 게다가 나라시대 전에도 입식지入植地 경작에 강요되어 일하고 황실관리토지에서 농업노동자로 일했던 이른바 다베田部는 특정한 마을에 살며 그들 자신의 생존을 영위했어야만 했다는 점에서 베는 농노를 닮았다. 따라서 하야카와는 고전적 노예제도는 일본에서는 일종의 씨족노예제, 즉 한 공동체가 다른 공동체를 정복해서 나타나는 어떤 '국가노예제도'로 대체되었다고 주장했다... 어쨌든 다이카개혁이 이루어지면서... 베의 잔재는 봉건적 가신이 되거나 별도의 부락에서 형편없이 대접받는 부라쿠민部落民으로 살았다고 하야카와는 언급했다.
비록, 早川자신은 상업만으로는 새로운 생산양식의 출현을 야기시킬 수 없다는 마르크스 관찰(Capital, Vol.3)의 정확성을 인정했다 할지라도, 早川의 비평가인 秋澤와의 일치점이 여기 있다. (早川二郞, <いわゆる 노예소유자적 구성의 결여>, pp. 303~307) 平野는 아시아적 및 고전적 노예제와 동양의 저개발국에서 차지하는 상업의 역할에 대해 早川와 견해를 같이했다. 그는 아시아적인, 혹은 전제군주에 의해 토지와 함께 소유되는 노예를 근저로 하는 전체 노예제에서, 노예들은 상품 유통을 촉진시키기 위해서보다는 국가의 계획들을 위해서 존재한다고 주장했다. 이와 반대로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노예제에서 노예들은 개별 가구에 의해 소유되었으며 교환이나 판매를 목적으로 한 상품생산에 이용되었다. 그리스나 로마제국은 상업활동을 확대시키는 데 노력을 기울인 반면, 아시아 전제국가는 그것을 억압하거나, 혹은 존재하지 않는 사적 부문으로부터 그 기능을 박탈하여 대외무역관계에서 직접 상인으로서 역할했다. (1979년 7월 27일, 동경, 平野義太郞와의 대담)
210/ ... 고고학적인 증거를 인용하면서 아키자와秋澤修二는... 노예의 존재는 그 당시에(대략 108년경) 노예가 중국으로 수출되었으며 또한 일본에서는 "대부분의 귀족들은 노예를 소유했다"고 서술하고 있는 《後漢書》<東夷列傳>의 구절에서도 입증되었다. 2·3세기 일본사의 기록들은, 《三國志》<魏志東夷傳>에서, 철기시대의 처음에 계급과 노예의 성장이 가속화되었음을 보여주었다...
211/ ... 아키자와가 노예제도의 일본적 변형이라고 규정한, 준노예 베部와 순수한 노예를 포함하는 베민제도가 번성했다... 마지막으로 <萬葉集>(2권과 7권)은 노예가 농업노동력의 주된 원천이었으며 또한 개인농지에서 노예 이용이 일반적 현상이었다는 증거를 제시해준다...
212/ 아키자와에 의하여 확인된 이러한 특수한 형태의 일본노예제도에 공헌한 특별한 역사적 요인은 고대 일본의 여러 지역들의 '불균등 발전'이었다. 더 천천히 발전하고 있던 아이누족은 다이카개혁 무렵에 노예의 주된 원천이었지만, 그러나 그들의 낮은 기술수준 때문에 포로가 된 아이누족은 곧바로 노예로 이용될 수 없었다...
215/ ... 마지막으로, 물론 <자본론>에서 마르크스가 도쿠가와 일본이 중세유럽의 봉건주의보다 더 순수한 봉건주의의 변형이라고 선언한 사실은 있다.
... 왕조시대 동안 일본은 이미 겐지源氏와 헤이시平氏 같은 세가들이 사병을 키우는 장원제도의 시동을 보이기 시작하였다. 그럼에도 토지국유는 개인영주와 함께 가마쿠라시대(1185-1382)에도 계속하여 공존하였다. 지방관청 관리의 행정권과 장원영주의 소유권 사이의 한계가 매우 불분명하여 실제로는 동일한 토지에 이중 삼중의 소유권이 존재한 경우도 많았다.
225/ 하니羽仁五郞는 수리사업(비록 그가 이 이론을 비트포겔이 아니라 심콕스·베버 및 마디아르와 동일시했지만), '유목민족과의 갈등' 그리고 '잉여인구'에 기초한 아시아적 생산양식의 해석을 단호히 거부했다. 그 대신 하니는 아시아적 양식이 강제와 노예사회 또는 농노사회의 변형에 불과하다는 견해를 수용했다...
하니에 따르면 일본에서 아시아적 사회의 특성들은 공동노예소유제도인 고대의 베部체제에 잘 나타나 있다고 본다. 공동체의 토지소유 또한 이 시기의 특징이었으므로, 봉건주의와 자본주의의 요구조건인 사유재산의 발전은 매우 어려웠다...
282/ 1927년 7월의 코민테른 테제는... 일본에서 2단계 혁명의 필요성을 결정하는 중요한 요소로서 공업부문과 농업부문의 불균형을 묘사하였다. 부르주아민주주의 혁명으로서 메이지유신의 부적절성을 증명하였던 것은 농촌의 견고한 '半봉건' 토지 소유와 지주제의 온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