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문자 공부

이집트 상형문자 배우기

강주현

by 조영필 Zho YP

15/ 살아있는 문자로서 이집트 통일왕조의 역사시대를 세련되게 장식한 최초의 승전 기념비 나메르 왕의 <나메르 화장판>은 이집트 문자가 가진 표음 및 표의문자로서의 그 화려한 워드 플레이를 느낄 수 있게 해준다.


16/ ... 고왕국 4왕조 쿠푸왕의 피라미드는 높이가 146.6미터(481피트)로 기원후 1311년 159.7미터의 영국의 링컨 대성당Lincoln Cathedral이 세워지기 전까지 3800년 동안 인류의 건축물 중 가장 크고 높은 건축물이었다.


... 피라미드의 시조인 고왕국 3왕조의 두번째 왕인 조세르Djoser 왕의 계단식 피라미드(기원전 2650년경 완공)이다. 높이 121미터에 달한다.


조세르 왕의 계단식 피라미드의 건축설계자는 임호테프로 사실 허리우드 영화에서 종종 근육질의 악당 이미지로 자주 등장한다...


실험적 도전으로 다작의 피라미드를 건축한 고왕국 4왕조의 첫번째 왕인 스네페루Sneferu의 메이둠 피라미드(무너진 피라미드), 굴절 피라미드, 적색 피라미드(기원전 2575년경 완공)가 있다.


17/ 메디움 피라미드 높이는 65미터(미완공: 완공되었다면 91.65미터로 추측), 굴절 피라미드 높이는 104.71미터, 적색 피라미드는 105미터(붉은 석회암으로 건축)에 달한다.


메디움 계단식 피라미드와는 달리 적색 피라미드는 매끈한 빗변의 피라미드를 의도해 건축했다. 하지만 43.22도의 경사각은 스퀏 피라미드Squat Pyramid의 별칭처럼 밑면 220미터의 옆으로 퍼진 난장이 피라미드가 되었다.


... 고왕국 4왕조 두번째 왕 쿠푸의 기자 대피라미드(기원전 2580~2560년경 완공)가 있다. 높이 146.6미터/밑변 230.33미터에 달하며 약 600만 개의 화강암과 석회임으로 건축되었다.


쿠푸왕의 피라미드는 원래 외벽을 싸고 있었던 흰 석회암을 상실해 현재 138.5미터로 약 8.1미터가 낮아졌다. 빗변 경사도 51도 51분 40초이라는 완벽한 경사각을 가지고 진북방향으로 건축되었다.


케프레왕의 피라미드(최종적인 피라미드의 완성형, 기원전2570년경 완공)는 높이 136.4미터/경사도 51도 51분 40초이다. 쿠푸왕 다음으로 두번째로 큰 피라미드이다.


18/ 쿠푸왕 다음으로 두번째로 큰 피라미드이지만 현재 쿠푸왕의 피라미드보다 더 높은 이유는 케프레왕의 피라미드가 10미터 위의 기반암 위에 건축되었기 때문이다.


멘케우레왕의 피라미드(기원전 2150년경 완공)는 높이 65미터/경사도 51도 20분 25초이다.


하워드 비세Howard Vyse라는 영국의 이집트 고고학자는 1837년 멘케우레 왕의 피라미드 안에서 현무암으로 만든 아름다운 석관을 발굴했다. 이 안엔 놀랍게도 젊은 여성의 뼈가 들어있었다고 한다. 고왕국 시대의 석관은 희귀한 것이기도 했지만 흑현무암에 새겨진 정교한 세부장식이 매우 뛰어난 것이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1838년 10월 13일 베아트릭스 호에 실려 영국으로 오던 이 석관은 배의 침몰과 함께 영원히 지중해에 가라앉아 버리고 말았다.


24/ ... 일찍부터 가나안 및 레반트에서 내려온 서아시아인들이 자신들의 커뮤니티를 형성하며 정착했던 델타지역에서 세력을 모아 반란을 일으키며 이집트 정통왕조인 13왕조와 대립하게 된다. 힉소스인들이라 알려진 이 이민자 세력들은 아바리스를 거점으로 새롭게 14왕조를 세웠다. 이 시기를 힉소스 점령기 혹은 제2혼란기라 부르며 중왕국 시대의 화려했던 350여 년간의 번영에 안녕을 고하게 된다.


이집트 정통왕조는 상이집트의 테베(현 룩소르)에서 왕조의 마지노선을 지키며 하이집트의 아바리스와 이집트 중부지역 그리고 남쪽의 키스 혹은 쿠세Cusae 지역까지 접수한 힉소스인들과 수대에 걸친 혈전을 벌였다. 극명한 예로 힉소스인들과의 치열한 전투에서 전사한 17왕조의 타오 세켄레 왕(재위 BC1560-1555)의 미이라 얼굴엔 약 5개의 깊이 패인 도끼자국이 남아 있었다. 타오의 아들인 장자 카모세 역시 아버지의 복수를 위해 힉소스인과 싸우다 장렬히 전사한다. 그러나 타오왕의 부인이자 카모세의 어머니인 아흐호테프 왕비는 남편과 아들을 앗아간 힉소스인들과 싸우며 어린 왕손인 아흐모세를 키웠던 불굴의 정신을 가진 여전사였다. 놀라운 사실은 전쟁에서 참혹하게 전사한 타오 세켄레 왕의 시신을 힉소스인에게서 돌려받고 이집트식 장례를 치렀다는 점인데 이는 유례없는 일이자 당시의 팽팽한 긴장국면으로선 도저히 불가능해 보이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힉소스 왕조와 아흐호테프 왕비 사이에 어떤 밀서 혹은 거래가 있었는지 알 수는 없겠지만 아흐호테프 왕비의 외교적 능력과 노력을 엿볼 수 있는 역사적 사건이 아닐 수 없다.


25/ 후일 왕손인 아흐모세가 자라나 힉소스인들을 이집트 땅에서 몰아내고 이집트를 다시 되찾으며 통일왕조를 이룩하게 된다. 이렇게 드라마틱하게 문을 연 신왕국(BC1550-1070)은 18, 19, 20왕조에 걸쳐 그 시작만큼이나 진취적인 열혈 파라오들을 배출했다...


26/ 이런 이집트 황금왕조도 신왕국 후기의 내부 혼란과 지중해 소국가들(일명 the sea people, 바닷사람들)의 지속적인 침입으로 왕권이 흔들리고 경제적인 타격이 심화되었다. 결국 BC 664년의 아시리아의 침략과 BC 525년의 페르시아 제국의 침입, BC 332년의 알렉산더 대왕의 이집트 점령 그리고 BC 30년에 로마 제국에 속국화 되고 결국 기원후 640년에 이슬람의 점령으로 3200년 동안의 <황금문명왕조>의 파라오 시대가 막을 내리게 된다.


28/ AD 392년 로마황제 테오도시우스 1세는 모든 이교도의 신전을 폐쇄하고 수천년 동안 사용되었던 이집트 고유의 언어와 문자의 사용을 금지시켰다...


이집트 남부 필레섬의 아이시스 신전 입구에 새겨진 아스멧 아콤의 그라피토The Graffito of Asmet Akhom 혹은 Philae 436)는 AD 394년 아이시스 신전의 아스메트 아콤이란 이름의 사제가 누비아신 만두리스를 찬미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상형문자와 민중문자로 새겨놓은 이 벽화는 결국 최후의 상형문자 기록이 되었다. *필레섬에 있던 아이시스 신전은 1960년대에서 1970년에 완공된 아스완 댐 건설로 인해 이집트 남부 나세르 호수 근처의 섬에 옮겨졌다.


33/ 1799년 나폴레옹의 이집트 원정대는 이집트 북쪽 지중해 연안 도시인 로제타Rosetta(또다른 이름은 Rashid) 지역을 점령하고 있었다. 당시 피에르 프랑소와 부샤Pierre Francois Bouchard(1771-1822: 수학교사이자 엔지니어)는 나폴레옹의 과학탐사대 일원으로 해안 경계를 위해 세워진 줄리앙 요새Fort Jullian 방벽을 순찰 중이었다. 부샤는 과학탐사대의 일원답게 예사롭게 보이지 않는 돌을 요새벽에서 발견하고 곧 상사에게 보고하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프톨레마이오스 5세의 칙령이 쓰인 석비였던 것이다.


34/ 기원전 196년 멤피스의 사제들이 프톨레마이오스 5세의 파라오 즉위를 축하하고 그의 치적을 기념하기 위해 세웠다. 이 석비의 주된 내용은 재위 당시 겨우 5살이었던 프톨레마이오스 5세가 멤피스 사제들에게 베푼 세금면제 특례에 대한 찬미가 그 중심 내용이다... 어찌되었건 만들어졌을 당시 2미터가 넘었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현재 남아있는 부분은 세로 약 1미터 가로 72cm 그리고 두께 28cm로 상단의 반이 훼손되었다. 하지만 육중한 화강섬록암으로 만들어져 원래의 위풍당당한 석비의 모습을 아직까지 찾아볼 수 있다.


35/... 나폴레옹의 병사 부샤가 이 석비를 눈여겨 보았던 이유도 이 마지막 하단에 적혀있던 그리스 문자 때문이었다. 그 당시 학자들은 그리스 문자를 읽을 순 있었지만 로제타 스톤 발견 당시 그 누구도 이 석비가 세 가지 다른 언어로 같은 내용을 전달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무엇보다 상형문자를 적어놓은 윗부분이 심각하게 훼손되어 단지 14줄의 상형문자만이 남아있었고 데모틱은 32줄 그리스어는 54줄로 내용상의 일관성을 찾아보기 힘든 상태였다. 물론 읽는 방향도 상형문자와 데모틱은 그리스문자와 달랐다.


36/ ... (존 데이비드) 아케블라드는 프톨레마이오스 시대까지 사용되었던 데모틱의 몇몇 고유명사-그리스, 신전, 이집트-를 콥틱 명사의 14개 음가를 사용해 해독해내기까지 했다. 그의 제자였던 (바론 실베스테) 사시 역시 <알렉산드로스>의 이름을 로제타 스톤에서 찾아내는 공을 세우기도 했다...


데모틱은 기원전 664년경 후기 이집트(하이집트 사이스 지역 중심)시대부터 신관문자와 함께 병행하여 사용되었다. 데모틱은 상형문자 정자체를 직계로 둔 신관문자보다 서체가 훨씬 단순했기 때문에 행정적, 상업적 문서에 많이 사용되었고 5세기까지도 그 명맥을 유지했었다. 무엇보다 프톨레마이오스 시대의 행정관들은 이집트를 효과적으로 통치하기 위해 데모틱을 배우지 않을 수 없었다.


데모틱은 그리스의 알파벳으로 만들어진(8개의 순수 이집트어와 함께) 콥틱 문자의 기본 음소값의 뼈대가 되었다. 따라서 여러 학자들은 그리스문자를 기본으로 데모틱에서 상당수의 이집트 단어를 유추할 수 있었다. 하지만 18세기말의 대부분의 학자들이 결정적으로 놓치고 있었던 것은 데모틱이 상형문자의 직계 혈통이란 점이었다. 무엇보다 그들은 로제타 스톤에 기록된 14줄의 상형문자가 각 기호 안에 음가값을 가진 알파벳형 문자이며 고유의 문법체계를 가진 문자라는 것을 알지 못했다. 상당히 근접한 해독값을 낸 영국의 토마스 영도 카르투슈 안에 들어있던 왕들의 이름들만이 이 알파벳 형태로(음가만을 빌려서) 표기되었다고 믿었고 고유한 문자와 문법체계를 가진 언어로서의 기능을 망각하였기 때문이다.


38/ 윌리엄 뱅크스가 그 대표적인 예인데, 영국의 탐험가이자 아마추어 이집트 학자였던 그는 필레신전의 오벨리스크 베이스에 새겨져 있는 클레오파트라의 이름을 필사해 두었다. 샹폴리옹은 뱅크스의 이 필사본으로 프톨레마이오스와 클레오파트라의 이름을 대조할 수 있었다. 또한 뱅크스의 아부심벨 신전의 라메세스 2세의 카르투슈 필사본은 샹폴리옹이 상형문자를 해독하는 데 결정적인 열쇠가 되는 음가기호를 실고 있었다...


43/ 고대 이집트 인들은 자신들의 문자를 메두 네체르라 불렀다... 즉 신의 언어란 뜻이다.


44/ 이집트인들은 그들의 문자가 지혜와 문자의 신인 토트신의 선물이라 믿었다... 신왕국 시대에 가서 토트신은 머리에 달의 상징을 쓰며 달의 신으로 업데이트하게 되는 데 여기에는 재미있는 신화적 배경이 깔려있다.


45/ <하늘 여신의 서>에 나와 있는 신화에 의하면 하늘의 여신 누트는 땅의 신 게브와 사랑에 빠져 5명의 신을 잉태하게 된다. 이 사실을 안 태양신 라는 질투에 불타 누트 여신에게 자신의 태양의 날들 중 어느 날에도 해산을 할 수 없다는 저주를 내린다. 이에 다급해진 누트 여신은 지혜의 신인 토트신에게 도움을 청했고 신들의 해결사로 이미 명성이 자자한 토트신은 별로 어렵지 않게 묘책을 랄려주었다. 바로 달의 신인 콘수 신의 능력을 빼앗아오기로 한 것이다-물론 일부이지만 말이다... 세네트 게임 마니아였던 토트신은 순진한 콘수신을 꼬드겨 게임을 하자고 청한다. 그리고 승자는 상대의 파워를 가져오는 것이었다.


물론 토트신은 다섯 판을 연승하고 콘수신은 게임 룰에 따라 자신의 달의 힘을 토트신에게 나누어 주었다. 토트신은 달의 힘으로 다섯 날의 달의 날을 만들어 누트여신이 순산할 수 있게 도와준다. 이때 태어난 다섯 명의 신들이 바로 오시리스, 세트, 대호루스, 아이시스, 네프티스이다. 이후 토트신은 자신의 명성에 달의 힘을 추가하게 된다...


46/ ... 신왕국 시대때 왕들의 무덤을 건축하고 그림과 글을 장식하는 임무를 맡았던 전문인력들은 왕들의 계곡에서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위치한 작은 계획도시에서 거주했다. 데이르 엘 메디나(Deir el-Medina; 아랍어로 수도원의 도시)로 알려진 이곳의 고대 이집트명은 '세트 마아트'로 '진리의 도시'란 뜻을 가지고 있다...


48/ 고대 이집트 서기들을 글을 쓸 때 팔레트와 붓을 사용했다.

팔레트는 대부분 나무로 만들었다. 펜은 간단한 갈대줄기를 잘라 끝을 갈아 잉크를 묻혀 사용했다. 이 갈대붓의 길이는 23cm나 되는 정도다. 대부분 팔레트엔 검정과 빨강의 두 가지 색 잉크를 담았지만 경제적으로 여유있는 서기들은 노랑, 파랑, 초록의 잉크도 담아 사용했다. 붉은 색의 잉크는 제목을 달거나 신성한 단어를 표기할 때 사용했는데 붉은 색은 산화철 성분의 대자석(red ochre) 가루를 기름과 섞어 만들었다.


49/ 하지만 평균지능을 가진 일반인이 700여개의 문자기호체계를 가진 상형문자를 읽고 쓴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워 보인다. 실제로 사용되었던 기호가 200개에서 250개 정도였다고는 하나 이것 역시 우리의 평균 문자갯수를 상당히 초과했던 점에선 별반 다를 바가 없이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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