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영필
다음으로 고고학적 증거를 살펴보기로 하자
바둑의 고고학적 유물로서 漢나라 시대까지의 것은 다음 2 가지이다.
河北望都一號東漢墓出土石圍棋盤
그 하나는 상단 그림의 하북성 망도에서 출토된 바둑판이다. 시기는 후한(AD 25~220)말기로 추정되며 17줄 바둑판이다. 특징은 화점이 5개라는 것이다. 이 화점 5개를 특히 부기하는 이유는 또 다른 유명한 17줄 바둑판인 티벳왕 송찬감포(AD 617?~649)의 출생지 출토 바둑판과 비교하기 위해서이다.
주지하다시피 티벳의 바둑판은 17줄이다. 송찬감포왕의 출생지 돌바둑판에서는 화점을 확인할 수 없지만, 티벳의 전통을 계승하는 시킴왕국의 바둑판(월간바둑 2005년 8월호 참고)을 보면 제 3선의 12점과 중앙의 1점이 화점으로 표시되어 있다. 그런데 중앙의 화점은 외곽의 12 화점에 비해 그 문양이 훨씬 크다. 그에 반해 하북성 망도의 바둑판은 사진에서 보듯이 제 4선의 4점과 중앙의 1점이 화점인데, 그 크기와 문양은 모두 동일하다.
인상학적으로 17줄의 바둑판의 경우, 제 3선에 화점이 있거나, 제 4선에 화점이 있거나에 상관없이, 중앙의 화점과 연계하여 보면, 무언가 기하학적으로 어정쩡한 느낌을 받는다. 아마 이것이 19줄 바둑판으로 발전하여 정착하게 된 결정적인 이유일지도 모른다.
陽陵帝陵南闕門遺址出土漢代陶質圍棋盤殘塊
다른 하나의 유물은 한나라 경제(한무제의 선왕)의 양릉 유적지 발굴 도기 바둑판 파편이다. 파편에서 확인되는 선은 13×10의 금인데 귀로 생각되는 제 4선에 화점의 표시가 있는 것이 특징이다. 우선 시기 비정은 불확실하다. 그 이유는 이 도기가 주 매장지에서 출토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도 양릉 인근에서 나온 것이므로 최소한 서한 시대(BC 226-AD 25)에는 속하는 것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이 파편에 다음으로 주의깊게 살펴볼 것은는 화점의 표시이다. 화점은 제 4선의 점에 X로 크게 표시되어 있다. 그런데 17줄 바둑판의 파편이라면, 제 9선에 표시되어야 할 것이고, 그것이 아니라 19줄 바둑판의 파편이라면 제 10선에 표시되어야 할 중앙의 화점표시가 보이지 않는다. 따라서 과연 이것이 바둑판의 파편이 맞을 것인지에 대해서조차 심히 의심스럽다.
이상과 같이 최소한 한대(漢代) 까지 바둑의 고고학적 증거는 무척 초라하기 그지 없다. (앞에서도 일차 언급하였지만 티벳 출토 바둑판 또한 송찬감포왕의 출생지 유적이므로 AD 7세기 이후의 유물로 추정하는 것이 합리적이다. 혹자는 이것이 기원전 수천년 전의 유물이라고 하는데 아무런 근거가 없는 주장이다.) 이것은 선진시대와 한대에 유행하였으며, 동시대의 문헌기록에도 많이 보이는 육박의 유물과는 매우 대조적이다.
육박은 전국시대와 한대에 걸쳐 하기표와 같은 정도의 고고학적 유물이 발견되었다.
(babelstone.blogspot.co.uk 사이트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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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분류 소분류 건수 바벨스톤의 분류기호
입체 전체(소상과 기반)가 다 있는 경우 14 1
소상만 있는 경우 6 2
그림 일반 4 3
화상석(사람이 하는 것) 45 4a
화상석(신령이 하는 것) 12 4b
부분품 나무와 돌 등으로 된 기구 39 5
무늬 거울 위에 새겨진 것 2 6
해시계 위에 새겨진 것 2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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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벨스톤(babelstone)이라는 개인 블로그가 모은 것을 기준으로 하였는데도 전체 124건이라는 어마어마한 수의 유물이다. 육박은 이처럼 많은 유물이 지하에서 부장품으로 마구 쏟아져 나오는데, 왜? 바둑은 춘추전국시대의 유물이 1점도 없으며, 한대의 유물도 어찌해서 겨우 2점에 불과한 것인가? (그나마 1점은 시대 설정이나, 바둑 연관성에서 상당히 의심스럽다)
이러한 지극히 객관적인 사실을 직시할 때, 게다가 비교할 수 있는 대상이 명확히 있을 때, 정상의 사고수준을 가진 사람이라면 어떻게 대답할 수 있을까? 필자의 대답은 다음과 같다.
'주와 춘추전국시대에는 바둑이라는 게임은 존재하지 않았다.'
이상 문헌적으로나 고고학적인 사실에 비추어 볼 때, 바둑의 누천년 기원설은 이제 완전히 폐기되어야 한다고 본다.
그런데 우리는 어려서부터 항상 바둑의 동양철학적 가치관과 상수체계에 대해서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왔다. 특히 바둑은 천문의 이치를 터득하고 앞날을 예지하는 도판으로 기능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철학에서부터 탄생한 바둑은 처음부터 19줄이어야 마땅하였다. 19줄이 되어야만 19×19 = 361 점이 되어, 일년 365일과 삼라만상의 이치를 추상화한 것으로 이치에 맞지 않겠는가?
그러나 상기 망도의 17줄 바둑판의 발견은 이러한 기존의 견강부회의 억설을 무참히 깨트려 버린 것이니, 바둑이라는 게임의 탄생과 주역의 철리(哲理)와는 애시당초 크게 상관이 없었음을 분명히 알려준 증좌라 할 것이다.
더더우기 바둑이 성행한 당송대 이후의 출토 유물을 보더라도 바둑판의 줄 수는 11줄, 13줄, 14줄, 15줄 등 너무도 다양한데, 도대체 적용해보려는 상수체계와는 심히 엇박자의 세계이다. 게다가 가로세로의 줄수가 서로 다른 바둑판의 존재에 이르면 이것은 또한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이는 바둑이라는 게임의 본질에서 바둑판과 그 위에 그어져 있는 줄의 수는 필수적인 요소가 아니기 때문에 바둑판의 줄의 수를 가지고 바둑의 기원을 설명하는 모든 이론은 어쩔 수 없이 쓴 맛을 보게 되는데, 이는 당연한 결과이다.
(다음편에 계속)
(2015.04.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