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조영필 Zho YP Mar 18. 2021

결혼식

조영필

결혼식


1
현장에는
엎질러진 향수 내음이 비릿하고
사건은 알기 쉽게 관례대로 처리된다
먼저 지문이 묻지 않도록 흰장갑을 끼고
상흔을 가린 남녀가 마네킹처럼 웃는다 영원히
싫증나지 않는 사진첩이 증거물로 수집되고
판례의 표정으로 하객들은 박수를 친다
범인은 현장에 있다
까만 넥타이 흰 드레스로 태연한 척해도
공범인지 모른다
혐의의 도열을 지나
진상은 꽃다발 부케 언덕에 부장하고
선서를 마친 한 오라의 남녀
순순히 호송차에 오른다


2
유리벽 너머의 판토마임
누가 자백을 한 것일까
누구의 손가락에 반지가 채워진 것일까
문은 낮아서 고개를 숙이고
무릎걸음을 해야 통과를 허락하지만
석유처럼 검은 아라비아 상인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린다
희고 가느다란 손가락이 두레박처럼 빠져들면
지층 깊숙이 숨죽여온 수맥이 범람한다
술을 따르어
물새 둥지에 술을 따르어
그해 여름 또는 그해 겨울 싹이 튼 모의가 닻을 내린다
한 꺼풀씩 때를 벗기는 파도
둥근 선창에서는 바다와 하늘이 또 한 번 교대하고
갈매기는 누설되지 않은 수심의 과거
수평선의 끝에서
무지개의 알리바이를 선회한다



(1991년)



매거진의 이전글 목련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