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영필
자비희사는 사무량심이라고 합니다.
자(慈)는 남에게 즐거움을 주려는 마음,
비(悲)는 남의 괴로움을 덜어 주려는 마음,
희(喜)는 남이 괴로움을 떠나 즐거움을 얻으면 기뻐하려는 마음,
사(捨)는 남을 평등하게 대하려는 마음.
이 네 가지는 수행 방법으로서 한량없는 중생에 대하여 일으키는 마음(사무량심)이라고 합니다(네이버 지식백과, 시공 불교사전).
불교신문의 "왜 ‘자비희사’를 닦으라하나"라는 글에 보면 자비희사 사무량심에는 다음과 같은 과보가 온다고 합니다(<대지도론> 제20권)
첫째, 불에 들어가도 타지 않는다.
둘째, 독을 마셔도 죽지 않는다.
셋째, 칼과 같은 흉기에도 다치지 않는다.
넷째, 뜻하지 않은 불행한 최후를 맞지 않는다.
다섯째, 하늘의 신 범천의 경지 즉 색계(色界)에 태어난다.
정말 대단한 과보입니다.
그러므로 자비희사를 본격적으로 발심해봅니다.
자(慈)심이 남에게 즐거움을 주려는 마음이라는 것은 언뜻 이해가 잘 안됩니다. 남에게 즐거움을 준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오락거리를 베풀어주는 것일까요? 그러나 보통은 일반인들이 통상 생각하고 기독교에서도 얘기하는 '사랑'이라고 바꾸어서 이해해봅니다.
다음은 비(悲)심입니다. 남이 슬픈 일을 당했을 때, 함께 슬퍼하고 도와주려는 마음인데, 싸이코패스를 제외하고는 모두 공감하는 마음이 아닐까 합니다. 상대적으로 발심을 하기가 쉬운 마음일 듯합니다.
희(喜)는 남이 기쁜 일이 생겼을 때, 함께 기뻐해주는 마음이라고 합니다. 다들 이게 가장 잘 안된다고 합니다(도일스님의 붓다카페). 왜 그럴까요?
남에게 좋은 일이 생겼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그것은 남이 잘 되었다는 것입니다. 즉 남이 출세해서 떵떵거린다는 것입니다. 어디까지가 남이고 어디까지가 나일지는 상황에 따라서 다릅니다. 박세리가 우승했을 때, 박찬호가 승리했을 때, 남이 우승했는데도 기뻐하지 않았었나요? 그러나 대부분은 사촌이 땅 사면 배아픈 게 사실입니다. 남이 잘되면, 나는 상대적으로 안좋아지게 됩니다. 경쟁자가 잘 되면, 경쟁자가 승진하면, 나에게도 영향이 있습니다. 그런데 마냥 기뻐할 수 있을까요?
이러한 상황에서도 희(喜)심을 발한다면, 그는 바로 아상(我相)이 없는 깨달은 자일 것입니다. 우리는 사회적 동물이므로, 내가 속한 사회의 승리는 기뻐할지언정, 그 속에서 누가 나보다 영향력이 커지는 것은 기뻐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내것이 아닌 남의 것을 기뻐하는 행위는 정말 인간이라는 생물임을 여읜 경지가 아닐까 합니다.
마지막으로 사(捨)는 남을 평등하게 대하는 마음이라고 하는데, 사람에 대한 호오, 미추에 대한 집착없이 똑같이 대하는 마음일 것입니다. 보통 일을 할 때 우리는 선공후사를 생각합니다. 그러나 보다 넓게는 공평무사의 사회적 도덕심과도 통합니다. 집단의 생존 측면에서는 노블리스 오블리제(Noblesse Oblige)로 나타나기도 합니다. 이러한 도덕심도 개인의 입장에서 쉽게 실행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정말 이 정도에 불과한 것일까요? 사심이라는 것이?
사심의 사(捨)는 범어로는 upekkhā. 이른바 고락(苦樂)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상태를 말한다고 합니다. 자비희 3심을 여읜 상태입니다. 정말 대단한 발심이 아닐 수 없습니다.
Note:
자비희사에 고려할 포인트가 있다. 그것은 열린 계와 닫힌 계의 문제다. 열린 계에서는 희심을 발심하기가 쉬워진다.
[법보신문]
4무량심(四無量心, catvāri apramāṇya)이란 수행자가 타인을 대할 때 지녀야할 4가지 덕목이나 바른 마음가짐을 말한다.
①모든 존재가 행복하기를 바라는 자애심(慈, maitrī)
②모든 존재가 고통에서 벗어나기를 바라는 연민심(悲, karuṇā)
③남의 즐거움을 함께 기뻐하는 마음(喜, muditā)
④모든 사람을 친소관계를 떠나 평등하게 대하는 평정한 마음(捨, upekṣā) 등이 한량없이 베풀어지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4범주(梵住, brahmavihārāḥ) 혹은 4범행(梵行, brahmacārya)으로도 불린다.
[중아함경]
라훌라여, 자애(慈)에 대해 명상하라. 이것으로 성냄이 사라진다. 라훌라여, 연민(悲)에 대해 명상하라. 이것으로 남을 해치려는 마음이 사라진다. 라훌라여, 기쁨(喜)에 대해 명상하라. 이것으로 미워하는 마음이 사라진다. 라훌라여, 평정(捨)에 대해 명상하라. 이것으로 마음의 흔들림이 사라진다.
[대지도론 제20권]
<32. 초품 중 세 가지 삼매[三三昧]의 뜻을 풀이함>
4무량심이란,
자(慈)는 중생 모두가 즐겁다고 관찰하는 것이요,
비(悲)는 중생 모두가 괴롭다고 관찰하는 것이요,
희(喜)는 중생 모두가 기쁘다고 관찰하는 것이요,
사(捨)는 이러한 세 가지 마음을 버리고 단지 중생들에 대하여 미움도 사랑도 없다고 관찰하는 것이다.
<33. 초품 중 사무량(四無量)의 뜻을 풀이함>
4무량심(無量心)이란 자(慈)ㆍ비(悲)ㆍ희(喜)ㆍ사(捨)를 말한다. 자는 중생들을 사랑하고 염려해서 항상 안온하고 즐거운 일을 구하여 요익하게 해 주는 것이요, 비는 중생들이 5도에서 갖가지 몸을 받아서 몸과 마음으로 괴로워함을 가엾이 여기는 것이요, 희는 중생들로 하여금 즐거움에서 환희를 얻게 하고자 하는 것이요, 사는 세 가지 마음을 버리고 오직 중생들을 생각하되 미워하지도 않고 사랑하지도 않는 것이다.
자심을 닦는 것은 중생들에 대하여 미워하는 생각을 제하기 위함이요, 비심을 닦는 것은 중생들에 대하여 번거롭다는 생각을 제하기 위함이요, 희심을 닦는 것은 함께 기뻐하지 못함을 제하기 위함이요, 사심을 닦는 것은 중생들에 대하여 사랑도 미움도 제하기 위함이다
【문】이러한 4무량심을 행하면 어떤 과보를 받는가?
【답】부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 자삼매에 들면 현재에 다섯 가지 공덕을 받느니라. 불에 들어가도 타지 않고, 독약을 먹어도 죽지 않고, 칼날에도 상하지 않고, 결코 횡사하지 않고, 착한 신이 옹호하나니, 한량없는 중생을 이롭게 했기 때문에 이런 한량없는 복덕을 받느니라. 이러한 유루의 한량없는 마음으로 중생을 반연하기 때문에 청정한 곳에 태어나니, 이른바 색계이니라.”
【문】부처님께서 4무량의 공덕을 말씀하시기를 “인자한 마음을 잘 닦고 능숙히 닦으면 복이 변정천(遍淨天)에 이르고[極], 가엾이 여기는 마음을 잘 닦고 능숙히 닦으면 복이 공처(空處)에 이르고, 기뻐하는 마음을 잘 닦고 능숙하게 닦으면 복이 식처(識處)에 이르고, 버리는 마음을 잘 닦고 능숙하게 닦으면 복이 무소유처(無所有處)에 이른다” 하셨거늘 어찌하여 앞에서는 “자의 과보로 범천에 태어난다”고 하셨는가?
【답】부처님들의 가르침은 헤아리기 어려우니, 제도해야 할 중생들에 따라 그처럼 말씀하신다.
자정(慈定)에서 일어나서 제3선으로 회향하기는 쉽다. 또한 비정(悲定)에서 일어나서 허공처(虛空處)로 향하거나, 희정(喜定)에서 일어나서 식처에 들어가거나, 사정(捨定)에서 일어나서 무소유처에 들어가기가 쉽다.
또한 자심으로써 중생들로 하여금 즐거움을 얻기를 원한다면 이 과보로 스스로도 응당 즐거움을 받아야 하는데, 삼계 안에서는 변정천이 가장 즐거우므로 말하기를 “복이 변정천에 이른다” 했다.
비심으로써 중생들의 늙고 병들음과 잔인하고 해로운 고행을 하는 자를 보아 이렇게 연민의 마음을 일으킨다.
‘어찌하여야 괴로움을 여의게 할까. 만일 안의 괴로움을 제해 주면 밖의 괴로움이 다시 오고, 만일 밖의 괴로움을 제해 주면 안의 괴로움이 다시 오는구나.’
수행자는 다시 생각하기를 ‘몸이 있으면 반드시 괴로움이 있으니, 오직 몸이 없어야 괴로움이 없으리라. 허공이 능히 물질[色]을 깨뜨리리라’ 한다. 그러므로 복이 공처에 이른다 하는 것이다.
희심으로써 중생들에게 마음(心)과 의식[識]의 즐거움을 주고자 한다. 마음과 의식이 즐거움이란, 마음이 몸에서 떠나기를 마치 새가 조롱에서 벗어나는 것 같다.
허공처의 마음은 비록 몸은 벗어났으나 아직도 마음이 허공에 매여 있거니와 식처(識處)는 한량이 없으니, 일체법 가운데에 모두 마음과 의식이 있어 의식이 자재하고 끝이 없음을 얻게 된다.
이런 까닭에 기뻐함의 복은 식처에 이른다 했다.
사심이란 중생에 대한 괴로움과 즐거움을 버리는 것이니, 괴로움과 즐거움을 버리는 까닭에 참된 버림의 상태[捨法]를 얻는다. 이른바 무소유처(無所有處)이다.
이런 까닭에 버리는 마음의 복은 무소유처에 이른다 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