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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영필 Zho YP Feb 09. 2020

싯달타의 스승

조영필

싯달타에게는 세 사람의 스승이 있었다.


그런데 그의 스승들은 많이 알려지지 않았고, 또 쉽게 무시되고 있다.


두 번째와 세 번째 스승이었던 알라라 칼라마(Alara Kalama)와 웃다카 라마풋다(Uddaka Ramaputta)에 대해서는 그나마 어느 정도의 존중이 주어지는 편이다. 그러나 첫 스승이었던 박가바(Bhagava)에 대해서는 그 기술 태도가 너무도 인색하기 그지없다.


과연 그것은 그들에 대한 합당한 대우인가?


내가 알라라 칼라마와 웃다카 라마풋다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삼계육도에 대해서 알고부터이다. 여기서 삼계는 욕계, 색계, 무색계로 이루어져 있는데, 그 중 무색계가 가장 높은 경지이다. 그리고 무색계는 4개의 단계가 있다. 그것은 비상비비상처천, 무소유처천, 식무변처천, 공무변처천이다. 이것을 보고 나는 싯달타의 스승들이 얼마나 중요한 분들인지를 알게 되었다.


싯달타는 알라라 칼라마에게서 무소유처정을 배웠고, 웃다카 라마풋다에게서 비상비비상처정을 배웠다. 그러한 경지가 삼도육계의 가장 높은 경지, 이제 한 걸음만 더 내디디면 해탈인 바로 그 무색계의 최고 경지에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 아마도 그것은 선정의 가장 높은 경지일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러나 그 한 걸음을 더 내디디기가 그리 쉬운 것은 아니었다. 그래서 싯달타는 웃다카 라마풋타를 떠나서 무얼 하게 되는가? 그는 고행을 택하였다.


제일 처음에 만난 박가바의 수련방법을 참고한 것일지도 모른다. 물론 싯달타의 고행은 박가바의 고행과는 그 차원이 다른 것이었다. 그것은 고행의 목적과 구도의 지향점이 달랐다. 박가바의 고행은 더 나은 곳에 태어나기 위한 고행에 불과한 것이었지만, 싯달타의 고행은 깨달음을 위한 고행이었다. 박가바의 고행은 고행의 과보로서의 천상의 생을 희구하는 것이었지만, 싯달타의 고행은 육신의 욕망마저 청정한 경지에 이르도록 하기 위한 방법을 찾는 도정이었다.


결국 싯달타는 중도를 증득하여 마왕의 항복을 받는다. 만약 고행이 없었다면, 싯달타가 알라라 칼라마나 웃다카 라마풋다를 넘어설 수 있었을까? 싯달타는 맨 처음에 박가바를 만났을 때, 고행의 목적과 고행의 원리에 의문을 가진 것일 뿐 그 고행 자체는 높게 평가했던 것이다.


왜? 박가바는 중요하게 다루어지지 않는 것일까? 분명히 중도의 한 극점이 고행이라면, 싯달타의 고행과 싯달타가 박가바를 만난 사실은 대단히 중요하다. 왜냐하면, 초기 불교에서 부처님이 강조하신 계정혜 3학의 계*에 이미 고행의 일부가 들어있다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여기서 구도를 위한 하나의 팁을 생각해본다. 먼저 선정의 경지에 도달하기 위한 명상을 배운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자기자신의 몸의 욕망을 이길 수 있는 불굴의 의지의 훈련이 또한 필요하다. 스포츠나 무술도 그러한 훈련에 도움이 될 것이다.


알라라 칼라마는 수론파(삼키아 학파)의 성자이며, 수론파의 주장은 유가의 이기이원론과 유사한 측면이 있다고 한다. 이(理)에 해당하는 푸루샤(神我)와 기(氣)에 해당하는 프라크리티(自性)가 있는데, 푸루샤와 프라크리티의 결합에 의해서 고(苦)가 생긴다. 따라서 푸루샤가 프라크리티를 동일시하지 않는 상태에 이르면 해탈이며, 이러한 경지에 도달하기 위해 선정을 한다. 알라라 칼라마는 무지와 업과 윤회와 욕망의 해탈에 대해서 이미 가르치고 있었다.(위키백과 참고)


웃다카 라마풋타 또한 싯달타에게 대지혜(반야)와 해탈의 경지를 가르치고 있다.


싯달타의 스승들(그리고 그들의 뿌리인 힌두철학)에 대해 갑자기 관심이 생긴다. 싯달타의 깨달음은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이 아닐 것이다.



Note:

*계가 고통을 유발한다고만 생각할 것이 아니라 인간을 건강하게 하는 것이라고 달리 보라고 한다. (도올 EBS 불교 강의)


그렇다면 부처는 고행을 계로 재정의한 것이다. 고를 넘으려고 하는 불교가 일부러 고행을 하며 고통스러워할 이유도 필요도 없는 것이다.


싯달타는 욕망을 에너지로 활용하여 (불쏘시개 삼아) 로켓을 발사한 것이다. 3년 전에 이 글을 쓸 때, 이미 이러한 생각이 있었는데 막상 그 내용을 구체적으로 기입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2023. 3.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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