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영필
역사상 두 개의 황제 족보가 있다. 하나는 중국의 황제이고, 다른 하나는 로마 황제이다.
중국의 황제는 진시황이 BC 221년에 그 계보를 처음 열었다. 춘추전국시대를 마감하고 전 중국을 통일한 그 해에 그는 왕이란 칭호로는 더 이상 만족할 수 없어 황제(신과 동격)가 된다. 그 후 중국의 왕들은 모두 황제를 칭한다. 다만, 신과 동격은 부담이 되었는지 천자(天子)로 만족한다. 즉, 하늘로부터 그 권위를 받아, 시간의 질서(연호 제정)와 공간의 질서(제후국들의 왕권 승인)를 주관한다. 따라서 황제란 왕국들을 거느린 제국의 군주이며, 위계서열의 최상위인 셈이다.
이에 맞서 유라시아 초원을 터전으로 동서무역을 장악한 유목민의 세력 또한 결집하여, 통일된 중국과 대등한 힘을 과시하였다. 한때, 한나라로부터 조공을 받을 정도로 강성하던 선우의 흉노는 서방으로 이동하였으나, 뒤이어 초원을 제패한 패자들은 칸으로 만족하지 않고, 오히려 중국의 황제(오호, 원, 금, 청)를 계승하였다. 섬나라 일본은 제국주의 시대에 기회를 잡아, 아시아 태평양 지역을 유린하고, 청의 마지막 황제 부의를 만주국에 부용하면서, 중국 황제의 최후와 몰락을 함께 하였다. 따라서 제국의 군주의 정통성은 동양에서는 중국의 황제로 정리할 수 있다.
서양의 황제는 BC 27년에 옥타비아누스가 ‘아우구스투스(존엄한 자)’의 칭호를 받으면서 그 서막을 열었다. 로마의 황제는 4가지 구성요소의 결합으로 구성된다. 그것은 제1인자(Princeps/ 제1시민, 두 명의 집정관(Consul)이 포함된 '제일인자 보좌위원회'(콘실리움 프린케피움, 내각)을 이끈다), 군통수권(Imperator), 호민관특권(Tribunicia Potestas/ 평민집회 소집권, 입법권, 거부권), 그리고 최고제사장(Pontifex Maximus)이다. 이것은 로마 공화정의 제도적 틀 속에서 황제의 권력과 그 권력의 세습을 구축한 것이다. 옥타비아누스는 카이사르의 양자이었기에, 옥타비아누스 이후 로마 황제들의 지위는 프린켑스이고 그들의 공식 명칭은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 트리부니키아 포테스타스 + 개인 이름 이었다.
재미있는 것은 중국의 황제는 즉위시 바로 연호가 새로 제정 공포되지만, 로마의 황제는 즉위시 자신의 초상이 담긴 화폐를 주조하였다는 사실이다. 한쪽에서의 천문이 다른 한쪽에서는 통화가 된다. 중국의 황제는 하늘로부터 자신의 권위를 정당화하였고, 로마의 황제는 공화정의 이념 속에서 자신의 황제권을 확립하였다는 것이 다른 점이다. 이런 점에서 나는 중국의 최고 공산당 지도자는 왠지 로마 황제 같은 느낌을 받는다. 무산계급사회의 이상 속에서 최고 권력이 집중된 그들이 황제가 아니면, 무엇일까? 마오쩌뚱의 멘토는 마르크스가 아닌 진시황으로 비유되지만, 나로서는 오늘날의 중국 주석은 중국 황제보다는 오히려 로마 황제를 벤치마킹한 느낌이다.
로마가 기독교를 받아들이고 국교로 승인하면서 이제 로마 황제도 중국 황제와도 같이 신으로부터 지상의 권력을 받게 된다. 이후 로마의 분열은 동서에 각각 독립된 황제를 배태하지만, 서로마의 황제좌는 AD 476년 야만족에 의해 단절된다. 그러나 로마 주교가 프랑크의 카알 대제에게 AD 800년 서로마 황제관을 씌어줌으로써, 그 영예는 부활된다.
프랑크 제국은 카알 사후 분열하게 되고, 세 개의 프랑크로 분열되어, 오늘날의 프랑스, 독일, 이태리의 국가 기원을 이룬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런데 서프랑크에서는 이 황제권에 관심이 없었던 반면, 유독 동프랑크에서는 황제라는 명예직에 관심이 많았다. 동프랑크에서는 압도적인 실력의 패자가 없었던 까닭에, 이질적인 부족의 독립적 소군주라 할 수 있는 주요 공작들 간의 회합을 거쳐, 왕을 선출하였다. 따라서, 선출된 왕이 그와 대등한 세력의 다른 공작들을 지도하기 위해서는 단순한 왕 이상의 권위가 필요하였다.
동프랑크의 오토는 기어코 로마에 가서 로마 주교(교황)의 도유(축성)를 받고, AD 962년 황제의 감투를 쓴다. 오토의 제국을 가리켜 신성로마제국이라고 지칭하는데, 그것은 그 신성한 로마의 세속 영역이 독일과 이탈리아반도에 국한되어 과거 로마제국의 일부에 불과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이념적으로는 서유럽 전체를 아우르는 제1인자의 명예를 얻을 수 있었다. 서유럽의 기축 신앙인 기독교의 교황이 보증하는 로마 황제의 관을 계승하였기 때문이다.
한편 동로마가 1453년 멸망하자, 모스크바 공국은 동방정교의 보호자가 되어 비잔틴 제국(동로마)의 상속자임을 주장하였다. 1547년, 모스크바 대공은 공식적으로 자신이 러시아의 짜르(카이사르의 러시아말)임을 공표하여, 모스크바는 제3의 로마(제2의 로마는 콘스탄티노플)가 된다. 그러나 비잔틴의 멸망 시점에서 동로마의 황제좌는 실질적인 권력과 권위의 측면에서 오스만튀르크의 술탄에게 이전된 것으로 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영원한 황제의 도시인 이스탄불(콘스탄티노플)을 술탄이 장악하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동로마 황제를 이어서는 2개의 황제좌가 탄생한다. 오스만튀르크의 술탄과 훗날 몽골 세력을 몰아내고 성장하는 러시아의 짜르이다.
중국의 황제가 봉건제 하이어라키의 최상위이었듯이, 신성로마 황제 또한 지위는 불안하였으나, 형식적으로는 그러했다. 어떻게 보면, 서유럽에서 황제를 칭할 수 있었던 유일한 황제(Kaiser/Emperor)이었다. 프랑스 왕은 그와 권위를 같이할 수 없었으며, 영국 왕은 프랑스 왕의 봉지를 받았으므로, 또 위계상으로 더 낮은 제후라는 계급질서이었다. 그러나 형식적인 서열과 실제 힘의 우열은 달랐고, 당시 영국 왕이나, 프랑스 왕의 현실적인 관심은 그런 형식적인 서열보다는 자국 내에서의 왕권의 확립이 더 중요한 문제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로마 주교(교황)의 도유(축성) 의식을 통해 황제에 오르는 의례가 전통이 되면서, 자연스레 교황은 황제와 버금가거나, 그 이상의 지위를 요구하게 된다. 교황이 황제에게 관을 씌워 주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신의 계시를 받은 교황이 황제에게 그 지위를 넘겨준 것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원래 로마의 황제는 기독교를 국교로 승인할 때, 최고제사장인 황제의 자격으로서 동시에 교황이기도 하였지만(동로마 황제는 동방정교의 교황), 카알 대제나 오토 대제는 그 제사장의 권위를 로마 주교에게 내어줄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신의 계시를 독점한 교황은 점차 서유럽에서 유일무이한 정신적 권력을 획득해간다.
그런 까닭에 서구의 황제와 왕은 종교로부터의 간섭을 차단할 필요가 있었는데, 두 가지 방법이 사용되었다. 그 한 가지는 독일에서 행해진 방법으로, 제국 내에서 자체적으로 황제를 선출하는 방식인데, 이는 교황의 형식적 승인을 제거하였다. AD 1356년 금인칙서를 통하여 황제를 선출하는 자격을 갖춘 선제후(Kurfuerst, Princeps Elector)들의 선거를 통해서 황제가 되는 것이 명문화된다. 이 선제후(황제를 선거하는 제후)에서 제(帝)에 해당하는 단어인 퓨어스트(Fuerst)가 프린켑스(Princeps)의 뜻이며, 그들이 제1인자(프린켑스)를 선출하였다는 것은 로마시대 이래의 공화제적 선거 전통을 여실히 증명하고 있다. 이것은 신정에서 귀족정으로의 변화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또 다른 방향으로의 종교의 간섭 배제로는 절대왕정의 왕들이 왕권신수설을 주창한 것이다. 그것은 왕권은 신이 왕에게 그 권력을 직접 (교황을 통하지 않고) 부여하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신을 통한 왕권의 근거 또한 기독교를 통한 것이었고, 그것은 성경을 귀족과 사제 계급이 독점하고 있을 때에나 가능한 것이었다. 종교개혁과 인쇄술의 발전으로 신민들도 신과의 직통 채널을 가지게 되면서, 서양 제국들의 몇몇 운이 나쁜 왕들은 그들의 목숨을 권력독점의 대가로 지불하기에 이른다. 1649년의 찰스 1세, 1793년의 루이 16세, 그리고 1918년의 니콜라이 2세가 바로 그들이다. 이러한 절대권력의 절대적 몰락으로 인하여, 역사가 한 걸음씩 나아간 것은 권력이 스스로 권력을 백성에게 내어준 적이 없기 때문이다.
신성로마제국은 이후, 프랑스 혁명을 무산시키려다가, 오히려 나폴레옹에 의해 해체의 운명을 겪게 된다(1806년 레겐스부르크 제국회의). 신성로마제국을 해체하기 직전 나폴레옹은 프랑스 황제위를 열었고(1804년), 로마제국을 잃은 합스부르크가는 오스트리아 황제라 자칭한다. 오스트리아를 배제하고 독일을 소통일한 프로이센 또한 파리에 입성하여 카이저를 칭한다(1871년). 이에 질세라, 해가 지지 않는 나라 대영제국은 인도의 무굴제국을 병합함으로써 인도의 황제가 된다(1877년).
베니스에 가보고 놀랐던 것은 과연 어떻게 이 조그만 도시국가가 이토록 대단한 부를 과시할 수 있는가? 하는 점이었다.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이야기'를 읽어 보니, 베니스 또한 황제의 도시였다. 제4차 십자군 원정 시, 베니스는 약 100년간 동로마제국에 대해 3/8의 권리를 갖는 도시국가이었다. 세습 왕이 없는 통령 제도의 공화정이었지만, 이를 통해, 한때의 베니스의 부귀영화를 이해할 수 있다.
황제란 무엇인가? 그것은 재화(財貨)의 블랙홀이다. 세상의 부란 부는 모조리 족족 빨아 당겨서는 그 자신의 수도에 별을 뿜어낸다. 그의 힘의 크기만큼 엄청난 건축물이 건조된다. 그 도시에 가 보면 이 도시가 과연 황제의 도시였는지, 왕의 도시였는지, 제후의 도시였는지를 알 수가 있다. 도시란 황제의 힘의 크기가 남아있는 그대로의 유물이다.
(2012. 11. 17)
Note:
독일을 중심으로하는 로마제국을 신성로마라고 하는데, 이때의 '신성한(holy)' 이라는 수식어는 오토 때 붙여진 것이 아니라, 12세기 호엔슈타우펜 왕가의 프리드리히 1세 바르바로사 집권기에 처음 사용되기 시작하였다.
이것은 서임권 투쟁 기간 동안 신비스러운 황제의 권위가 손상된 것에 대한 반작용으로서 성스러운 기독교 역사 속에서 제국의 숭고한 위상을 표현하기 위한 조치라고 할 수 있다.
클라우디아 메르틀, [누구나 알아야 할 서양 중세 101가지 이야기], 52-3쪽 참조
Note:
지금에 와서 보니 서양에서 로마 이전의 제국들에 대해서 무지했던 것 같습니다. 수메르, 아카드, 앗시리아, 바빌로니아, 이집트, 페르시아, 마케도니아 등. 로마 이전의 제국의 역사를 어떤 관점을 찾아 정리하면 재미있을 듯합니다.
(2021. 8. 13.)
아랍과 이슬람의 제국에 대해서도 무지하였다. 역시 이러한 제국 및 황제의 계보도 오늘날의 세력이 옛영광으로 반영되는 것일 터이다. 아메리카 인디언의 마야, 잉카, 아즈텍의 황제들이 완전히 무시되는 것과 같은 이치라고 할 것이다.
(2022. 9.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