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영필
한반도에서의 불교의 수용은 교과서에 따르면, 고구려 소수림왕 2 년(372)의 순도(順道), 백제 침류왕 원 년(384)의 마라난타(摩羅難陁) 그리고 신라 법흥왕 14 년(527)의 이차돈(異次頓)이 그 주인공들이다.
삼국유사에 보면, 아도(阿道)의 기록에서 <아도본비>를 인용하여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아도는 고구려 사람으로 어머니는 고도녕(高道寧)이다. 정시(正始) 연간(240~248)에 조위(曹魏) 사람 아굴마(我崛摩)가 고구려에 사신으로 왔다가 고도녕과 사통하고 돌아갔는데, 이 때문에 아도를 임신하게 되었다. 아도가 태어난 지 다섯 살이 되었을 때 어머니가 출가시켰다. 나이 16 살 때, 위(魏)나라로 가서 아굴마를 만나고 승려 현창(玄彰)의 문하에서 불법을 배웠다...
미추왕 3 년(264)에 성국공주(成國公主)가 병이 들었는데... 아도가 스스럼없이 대궐로 들어가자 공주의 병이 나았으므로... 흥륜사라 하였다... 얼마 후 미추왕이 승하하자 나라 사람들이 법사를 해치려 하였다. 법사가 모록(毛綠)의 집으로 돌아와 스스로 무덤을 만들어놓고 문을 닫고 목숨을 끊어 끝내 다시는 나타나지 않았다...
이상에서 일차적으로 알 수 있는 사항은 이미 3 세기에 고구려에서 불교가 왕족에게 받아들여져 있다는 사실이다. 정사로 보아도 고구려와 백제에서 4 세기에는 왕실과 귀족이 아무런 저항 없이 신속하게 불교의 가르침을 국교로서 받아들이고 있다. 이는 그 이전부터 불교에 대해 충분한 이해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일 것이므로, 한반도에 불교가 들어온 것이 서기 4 세기보다는 훨씬 이전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차적으로 알 수 있는 사항은 신라의 경우에는 이웃나라들과 달리 불교에 대한 저항이 매우 심했다는 사실이다. 우선 국왕이 법사로 임명한 아도를 사람들은 해치려 하였다. 따라서 먼저 아도의 순교가 발생하게 되었다. 그리고서도 이후에도 불교가 국교가 되기 위해서는 왕족인 이차돈의 순교가 재차 필요하였다는 사실이다.
이차돈은 성은 박(朴)씨로 이차돈(異次頓)은 이름이다.거차돈(居次頓) 또는 염촉(猒髑)으로도 기록되어 있는데, 고슴도치(가시 돼지)를 뜻하는 것이라고 한다. 그의 이름의 의미에 대해서 언어학적으로 여러 주장이 경쟁하여 아직 정설이 정해지지 않은 마당에 비전문가가 굳이 자세히 상론할 필요는 특별히 없다고 할 것이다. 다만 감각적으로 느껴지는 것은 이 이차돈의 이름이 저 멀리 인도의 신화와 관련성이 높아 보인다는 점이다.
인도의 신화에서 멧돼지(바라하 Varaha)는 비슈누의 화신(아바타)이다. 따라서 이차돈도 아마 비슈누의 화신일지도 모를 일이다. 다음으로 그의 순교 시 뿜어져 나온 젖빛 피의 경우에 젖빛은 비슈누의 우유 바다 휘젓기 신화와 관련이 있다. 고통을 벗어나 자유를 얻고자 불로장생의 영약 암리타(Amrita, 감로수)를 찾아가는 이야기인데, 이 말고도 우유는 젖빛 코끼리 신화 등 인도 신화에서 매우 성스러운 상징인 것이다.
그런데 더 중요한 것은 이제부터이다. 그것은 불교를 들여오고자 한 왕들이 모두 김씨들이라는 것이다. 법흥왕은 말할 것도 없고, 미추왕은 김씨 왕조의 첫 번째 왕이다. 미추가 이사금으로 재위한 이후에도 석씨 왕이 3 대를 이은 연후에야 내물이 마립간으로 비로소 김씨 왕가의 터를 잡게 되는 과정을 보면, 미추의 왕권은 매우 허약하였을 것으로 짐작이 된다. 그렇다면, 왜 이처럼 불교를 들여오는데, 김씨들이 적극적이었던 것일까?
문무왕비에 보면, 신라 김씨들은 투후(秺侯) 제천지윤(祭天之胤)을 그들의 선조로 여기고 있다. 여기서 투후란 한대의 김일제라는 인물을 말하는 것으로 그의 아버지는 흉노의 휴도왕(休屠王)으로서 제천금인(祭天金人)을 모셨다고 되어있다. 혹시, 이때의 금인(金人)이 불교의 전래와 관련하여 어떤 의미를 가지는 것은 아닐까? 만약 그렇다면, 신라 김씨들은 이미 한반도에 이주하여올 때부터 불교에 동질적인 유대감을 가지고 있었을 수 있다.
그러나 그들 앞에 있던 세력은 풍류도를 중심으로 하는 박씨 왕가이었다. 따라서 이주 세력이었던 김씨 일족은 처음에는 그들의 신념을 숨겨야만 했었고, 가끔씩 지배층의 반응을 보기 위해, 아도니, 묵호자니 하는 승려들을 초청하여, 끈기 있게 리트머스 시험지를 대보아야 했던 것이다. 그 은인자중의 세월이 몇백 년이었던가? 드디어 왕위 계승과 권력 구축에 어느 정도 자신감이 붙을 무렵, 풍류도의 본산인 박씨 왕가에서도 불법에 뜻을 같이하는 동지(이차돈)를 얻을 수 있었다. 그리하여 법흥왕은 일사불란하고도 전격적으로 종교개혁을 시도하였고, 그 사건의 이름이 바로 이차돈의 순교이라 하겠다.
(2015. 04. 20)
Note:
이차돈의 순교에서 젖빛 피가 뿜어져나온 설화에 대해서 본문에서는 비슈누의 화신과 연결하여보았지만, 다음의 이야기를 읽으니, 이것이 더 직접적으로 관련있어 보인다.
[도올 김용옥의 금강경 강해] 277쪽에서부터 보면,
부처의 전생 이야기를 본생담이라고 하고 이를 담은 경전은 본생경이라고 한다. 부처의 전생 중에 찬디바리(인욕선인, 끄샨띠바딘 리쉬)라고 있었는데, 악한 왕인 가리왕(Kali-raja, Kalinga, 가릉가)의 시기를 당하여, 그에 의해 능지처참을 당하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찬디바리는 아무런 분노를 띠지 않았다. 마침내, 찬디바리는 말한다. "내 진실로 인욕하는 마음이 지성하여 거짓됨이 없다면, 내 흘린 피 모두 젖이 되리라, 그리고 모든 잘린 몸이 제자리로 돌아오리라!" 이 말이 끝나자 마자 피가 드디어 우유빛같은 젖이 되고, 예전과 같이 몸이 온전하게 되돌아 왔다. (현우경, 권 제2의 가리왕과 인욕선인의 이야기)
또한 피=젖이라는 것 자체가 농경문화라기 보다는 기마/유목문화의 아리안적 관념이라고 하였다.
삼국유사에 휴도왕 관련 내용이 하나 있다. 그것은 탑상편의 요동성육왕탑(遼東城育王塔)이다. http://db.history.go.kr/item/compareViewer.do?levelId=sy_003r_0020_0020_0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