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영필
삼전도에서 인조는 청태종 홍타이지에게 얼마나 머리를 조아렸을까? 저 누대 위에 홍타이지가 앉아 있고, 인조는 어디 만치 저 밑에서 오체투지를 하였을 때, 그 심정이 어떠했을까? 일국의 왕이 타국의 왕에게 그것도 어제까지 오랑캐라고 생각했던 버러지만도 못한 놈에게 고개를 조아려야 하는 심정은 도대체 그것이 어떻게 가능했을까? 하는 궁금증을 넘어, 엄청난 비애를 느끼게 한다.
아마도 그것은 광해군이었으면 불가능하였을 것이다. 인조이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아마도 인조반정이 행해지고 난 후에 이미 조선은 왕의 것이 아니었고, 신하들의 것이었다. 이미 인조는 왕으로서의 체통과 명예보다는 그저 산 송장이 아니었을까? 인조는 신하들이 시키는 것이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는 그런 왕이었다.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매 한 가지이고, 무엇이든 신하의 눈치를 보아야 하는 그였기에, 신하의 눈치를 보는 것이나, 오랑캐에게 큰 절 한 번 하는 것이나, 그것이 그것이었기 때문이다.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선조는 신하들보다 더 빨리 한양이고 궁성이고간에 내뺄 수 있었다. 그것은 본능적인 위험을 느꼈기 때문이다. 그에게는 사는 길은 도망치는 길밖에 없었고, 그러한 느낌을 원초적으로 가질 수 있었다. 왜냐하면 그의 권력은 그가 구축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하들에 의해 왕이 된 인조에게는 그러한 위기감이 존재하질 않았다. 신하들의 인의예지의 논쟁 속에서 그는 도망칠 기회를 잃고 남한산성에 갇히고야 마는 것이다.
그나마 그의 왕권은 이제는 오히려 청나라가 살려주었다. 그리고 그의 아들 효종은 청나라에서 돌아와서 허수아비 왕권을 이었으나, 북벌을 추진하면서 비로소 정통성과 권력을 되찾는다. 그러나 한번 왕(광해군)의 피맛을 본 신하들에게 왕권은 그리 대단해 보이지 않았다. 평생 동안 영조는 신하들에게 오히려 핏줄에 대한 콤플렉스에 시달려야 했고, 그것이 또 그의 아들을 죽이게까지 하였다.
그런 모든 것을 극복하고자 하였던 철인왕 정조 그러나 그가 조선의 운명을 돌려놓기에 시대는 너무 늦었고, 동아시아의 운명은 모두 경각에 놓였으니, 그러나 아무도 모른 채 시간은 그냥 흘러갔다.
(2015. 04. 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