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개똥 역사

귀족의 작위에 대하여

조영필

by 조영필 Zho YP

동양에는 공작(公爵), 후작(侯爵), 백작(伯爵), 자작(子爵), 남작(男爵)의 오등작이 있다. 그런데 서양에도 공작(Duke), 후작(Marquis), 백작(Count), 자작(Viscount), 남작(Baron)의 오등작이 있다. 이 무슨 해괴한 일치란 말인가? 모든 것이 거의 상이한 두 문명권에서 이 어찌 작위의 오분이 같을 수가 있을까?


동양의 오등작은 춘추시대 주(周)의 봉건에서 시행되었다. 이후 중국사에서 똑같이 시행된 적은 없으나, 공-후-백-자-남의 위계 순서는 대체로 준수되고 있다. 한국사에서는 고려 공민왕 시기에 시행되었다고 한다. 서양에서도 보면, 지역과 시대에 따라 각기 다른 작제를 시행하여 왔다. 따라서 각 나라별로 작위의 단계가 다양하여, 이를 일관하는 오등작의 원칙이 따로 있지는 않다.


그런데 왜 우리는 으레 작위 하면, 오등작을 생각하게 된 것일까? 그것은 일제의 영향으로 보인다. 일본은 서양의 문물을 해석하는 과정에서 유럽의 작위를 춘추시대 주의 작위에 비추어 한자로 역의하였다. 또한 일본은 일본 제국주의 천황제에서 이러한 오등작제를 실제로 시행하였다.


이와 같이 우연의 일치처럼 보이는 동서양의 오등작제이지만, 일단 번역이 그렇게 되어서 그런지 몰라도 그렇게 번역이 가능한 상당한 특성이 또한 있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우선 공작에 대해서 살펴보자.


공작(Duke, Herzog)이란 무엇인가? 공작은 왕이 내린 작위가 아니다. 공작은 공작 스스로의 자격으로 부여된 작위이다. 즉 왕이 어쩔 수 없이 부여한 작위이다. 왕보다 조금 세력이 작은 (왕이 완전히 제압할 수 없었던) 또 다른 왕(공작)이 어떤 필요에 따라, 자기보다 조금 더 큰 세력인 왕을 중심으로 상호 간에 봉건적 유대(위계) 질서를 맺은 것에 불과하다. 따라서 공작은 왕이 멋대로 부릴 수 있는 부하가 아니다. 공작은 왕의 간섭을 배제한 채로 자신의 영지를 다스릴 수 있었다. 이것이 공작이다.


이는 서양의 봉건제의 시원인 프랑크 제국에서 유독 동프랑크 지역에서 공작이 많았던 역사적 과정을 추적하면 알 수 있다. 동프랑크에서 카롤링거의 왕통이 끊긴 이후, 왕은 주요 귀족의 합의에 의해 선출되었다. 이렇게 선출된 왕은 자신들이 신하로서 떠받들어야 하는 왕이 아닌, 명목상의 왕에 불과하였다. 그 왕을 선출한 귀족이 바로 그 동프랑크 왕국 내 각 지역의 독립 군주였던 공작들이었다.


이처럼 공작의 위세는 지역적 기반이 워낙 뿌리 깊은 것이지만, 동쪽 변방에서의 외적의 침입(마자르족과 오스만튀르크 등) 또한 일부 공국이 홀로 막아내기에는 엄청나게 거대한 파고이어서, 하나의 구심점(왕)을 중심으로 상호 연대하는 체제를 만들어내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러한 외부의 강력한 위협이야말로 동프랑크에서 선제후와 황제의 이중 권력 구조인 신성로마제국이 형성된 배경이다.


주(周)의 경우에는 또 어떠한가? 주나라에서 공의 작위와 함께 영지가 부여된 것은 바로 송(宋)나라이다. 송은 주가 무너뜨린 주의 상국(上國)이었던 은(殷)의 유민들을 규합한 나라이다. 또한 송에 분봉된 제후는 패주(敗主)가 된 은의 주(紂)왕의 형인 미자(微子)로, 송공(송나라의 공작)은 주(周)왕에게 신하의 예를 하지 않을 특권조차 부여되었다. 동과 서에서 공작의 위상이 매우 유사하지 않은가?


다음은 후작이다. 후작(Marquis)은 공작의 다음 위의 서열인데, 이를 설명하기 전에 먼저 백작을 다루어야 한다.


백작(Count, Earl, Landgraf)이 비로소 왕의 신하이다. 왕은 혼자서 통제할 수 없는 자신의 광대한 지역을 함께 다스릴 충성스러운 신하들이 필요하였다. 따라서 공이 있는 신하들에게 봉토를 부여하여, 백작으로 삼는다. 그러므로 백작은 왕에게 무한책임을 지는 제후이었을 것이다. 이 백작이 더 세분화될 때, 그 상층부에는 후작이, 하층부에는 자작이 생긴다. (영국의 백작 대응어인 얼(Earl)은 행정관의 느낌을 주는 대륙계의 카운트(Count)보다, 어원상으로는 차라리 공작의 대응어인 듀크(Duke)에 가깝다. 따라서 영국의 얼(Earl)을 백작이라고 구분하기는 하나, 독립 부족장으로서 규모가 작은 공작 같은 느낌이 든다.)


후작이란 다른 말로 변경백(邊境伯)이다. 독일어 마르크그라프(Markgraf)를 번역한 것인데, 이는 후작의 유래와 기원을 이해하는 힌트이다. 모든 국가에는 완전히 제압하기 힘든 강력한 외적이 항상 존재하기 마련이다. 따라서 이를 막아내기 위해 군사적 요새가 변경에 설치된다. 그리고 충성심과 실력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귀족이 이곳의 책임자로 파견될 것이다.


유럽의 프랑크 왕국에서 그 지역은 주로 동쪽 경계의 지역이었다. 즉 오스마르크(동쪽 변방이란 뜻, 나중에 오스트리아가 된다)나, 브란덴부르크(나중에 프로이센이 된다)가 그곳이다. 이러한 지역은 처음에는 변두리 지역으로 전쟁이 많고 위험하여, 분봉되고 싶지 않은 지역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왕성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오히려 왕으로부터 독립된 권력을 구축할 수 있었다. 그리고 처음에는 변경이라 척박한 지역이었을 테지만, 잘 훈련된 군사력으로 변경의 이민족을 몰아내고 토지 개간을 하게 되면 오히려 영지가 자연스레 확대되는 이점이 있었다.


군사력도 강하고 영지도 확대된 변경백의 지위는 점차 백작의 위상을 넘어, 공작에 버금가는 영예와 권력을 확보하게 된다. 신성로마제국에서 합스부르크가(家)가 오스트리아를 기반으로 삼은 것이나, 브란덴부르크가 프로이센으로 성장하여 독일을 소통일하게 된 것은 변경백의 지리적 이점이 아니면 설명하기 힘들다.


주의 경우에 후작으로 봉작된 대표적인 사례가 제(濟)의 태공망인데, 바로 그 유명한 강태공이다. 강태공은 주 무왕의 천하통일에 절대적인 공헌을 한 가장 믿음직한 신하로서 주의 동쪽 변경(산동성 지역)인 제나라에 후작으로 봉해진다. 주공의 섭정 시 부여된 후작위는 모두 변경지역에 분봉된 신뢰도 높은 인물이었다. 변경을 책임진 신하는 그 무력의 활시위를 절대 왕성으로 돌리면 안 되었기에 무엇보다도 충성도가 우선이었다. 이는 곧 서양의 후작(Marquis, 변경백)과 매우 상통하는 측면이다. 또한 그 후작의 나라들이 모두 그 경계 밖 영토의 확장을 통해 강대한 세력이 되는 것도 공통점이다.


자작(Viscount)은 백작과 같이 왕을 직접 배알하는 자격을 갖추었지만, 보통의 백작에 비해 좀 작은 수준의 영지를 분봉받은 신하이다. 독일어에서는 부르크그라프(Burggraf, 성백, 城伯)라고 하는데, 이를 통해 유추해보면, 자작이란 농산물이 많이 수확되는 넓은 지역의 영주(백작)가 아니라, 교역의 요충지에 성곽을 세워놓고, 통행세를 부과하는 성주인 셈이다 .


주의 자작 중에서는 초(楚)나라가 유명하다. 초의 지역은 주의 봉건시대에는 남만이라 하여, 야만족의 땅으로 천시되었다. 따라서 초나라는 상대적으로 낮은 등급의 작위를 부여받았다. 처음에는 영토와 생산력 또한 작았을지 모르나, 변방의 지역에서 영토와 세력을 일신우일신한 초나라가 주의 천자에게 작위를 올려줄 것을 누차 건의하였다. 그러나 봉건적 위계질서와 화이론에 속박된 주의 왕실은 그 상소를 철저히 무시하였다.


결국 실력과 명예의 불균형에 따른 모멸감을 참지 못한 초나라는 스스로 왕을 칭하기에 이른다. 그리고 그 후 다른 나라들도 초나라를 따라 점차 칭왕을 하게 된다. 결국, 춘추의 도리는 무너지고, 실력 제일주의의 전국시대로 접어들게 되는 것이다. 어찌 보면, 초나라의 자작위는 주의 봉건제의 파열음을 부르는 단초가 아니었을까?


서양에서는 프로이센의 성립 과정에서 이와 유사한 사례를 볼 수 있다. 브란덴부르크 변경백은 처음에는 선제후도 아니고, 왕도 아니었다. 그러다가 브란덴부르크의 독일적 경계를 넘어 폴란드의 튜튼 기사단 지역을 점차 접수하였다. 브란덴부르크는 강력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먼저 독일 내에서 선제후의 지위를 획득한다. 그리고 기사단 지역을 폴란드로부터 독립시키고 프로이센 왕국을 수립하여 왕을 칭한다. 한편으로는 독일 제국 내의 브란덴부르크 선제후인 후작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독일 제국 밖의 프로이센 왕이 되는 것이다. 이러한 이중의 지위와 세력을 잘 활용하여, 이후 프로이센 왕가는 독일 황제의 지위에까지 오른다.


남작(Baron)은 영지가 있는 귀족으로서 공작이나 백작(후작, 자작)이 아닌 자이다. 즉 아마도 공작이나 백작의 가신의 수준이 아니었을까?


그러므로 봉건제는 기본적으로 삼등작이다. 즉 왕과 대등한 귀족인 공작, 왕의 일차적 제후인 백작, 그리고 공작과 백작의 가신 또는 왕의 이차적 제후인 남작이 그것이다. 그리고 처음에는 백작이었으나, 점차 공작으로 신분이 상승되는 후작이 봉건의 질서를 외곽에서부터 무너뜨리는 망치(동인)로써 봉건제의 이상은 계속 세속적으로 환골탈태한다.



참고문헌:

민후기, 춘추 작제의 성격과 변화 - 족에서 국으로 -, 중국고대사연구 제12집.

민후기, 은상의 수평적 족연합과 '민족'의 형성 - 청동기 금문을 중심으로 한 내작의 기원에 대한 탐색 - , 중국고대사연구 제13집.


(2015. 02. 07)



Note:

추가 사항(인터넷 검색, 원전 미확인)

공작의 공(公)은 남성의 성기를 묘사한 것이라고 한다.

후작의 후(侯)는 후(矦)인데, 화살이 과녁을 향해 날아가는 모양이라고 한다.

백작의 백(伯)은 백(白)인데, 흰 머리뼈, 햇빛, 엄지손가락 등의 상형이라고 한다.

자작의 자(子)는 귀족들의 자제나 혈통을 의미하였다고 한다.

남작의 남(男)은 일정한 토지를 관리하는 직책을 가진 인물을 뜻한다고 한다.



상(商)대의 자(子)는 왕실의 보호를 받는 특별한 계층이다. 때문에 갑골문이나 청동기 문자에 보이는 자(子)는 상 왕실과 혈족관계에 있는 귀족의 아들에 대한 존칭이 된다...

아들 자(子)와 쟁기의 상형문인 힘 력(力)이 함께 있는 글자를 상대 갑골문에서 발견할 수 있다. 이는 밭 전(田)과 쟁기의 상형문인 힘 력(力)으로 이루어진 사내 남(男)의 글꼴이 갑골문에서 정확하게 어떤 의미로 사용되고 있는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당시 사회의 문화적 면모를 전달하고 있기에 의미가 있다.

(김경일, [갑골문·청동문·죽간으로 밝혀낸 유교 탄생의 비밀], 139-142쪽 참조)



상나라 시절에 제작된 청동기는 제사에 사용하는 제기나 술잔이 대부분이었다. 이때의 청동기는 외면적인 장식에만 치중하여 주술효과를 강조하였다...

기원전 13세기 상나라 말기가 되면 청동기 명문에 사람의 이름이 등장한다. 그전까지의 족휘族徽 단계에서는 청동기가 하나의 집단을 대표했다면, 이제는 그 용도가 변하기 시작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금문金文이 본격적으로 제작되었던 때는 서주 시기이다. 제기를 빌려 했던 과시행위가 이제는 사적 차원을 넘어 좀 더 체계화되어 조정에서 행해지는 공적 행사가 되었다. 이것을 책명冊命 의식이라고 하는데… 관리는 이 책명의식을 통해 관직과 재산 그리고 그것을 증명할 징표를 받았다...

이런 책명 의식은 <예기>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옛날에 현명한 군주는 덕이 있는 자에게 작爵을 수여하고, 공이 있는 자에게 봉록俸祿을 주었는데, 작과 록은 반드시 대묘大廟에서 수여하여 조상의 허락없이 군주 마음대로 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제사 드리는 날, 먼저 잔을 바친 뒤 군주는 내려가 동쪽에 위치한 계단 남쪽에 서서 남쪽을 바라보고, 명을 받은 사람은 북쪽을 바라본다. 사史가 명령이 적힌 서판을 들고 군주의 오른쪽에 서서 이를 읽으면, 사람들은 머리가 땅에 닿게 재배再拜하고 그 글을 받아 집으로 돌아가 사당에 바친다. 이것이 작과 록이 시행되는 방법이었다.

爵자는 원래 술잔을 나타내는 글자였다. 기본 형태는 술이 잘 흘러나오도록 앞으로 튀어나온 주둥이가 있고 손잡이와 3개의 발이 달린 모양이었다. 그런데 갑골문에는 다양한 종류의 爵자가 사용되었다. 서로 종류가 다른 술잔을 하나의 글자로 표현하다 보니 실제 사물의 다른 형태가 그때그때 드러난 것이다. 왕이 귀족에게 신분을 하사할 때는 각 신분에 맞게 서로 다른 형태의 술잔을 함께 내려주었는데 여기에서 작위爵位라는 표현이 나왔다. <예기>에는 귀족의 신분을 공작, 후작, 백작, 자작, 남작 5개의 작위로 분류하고 있다.

(이승훈, <한자의 풍경>, 281-284.)



<맹자 134 - 만장 하 11-1>

北宮錡問曰 周室班爵祿也 如之何

孟子曰 其詳不可得聞也 諸侯惡其害己也 而皆去其籍 然而軻也 嘗聞其略也

天子一位 公一位 侯一位 伯一位 子男同一位 凡五等也

君一位 卿一位 大夫一位 上士一位 中士一位 下士一位 凡六等

天子之制 地方千里 公侯皆方百里 伯七十里 子男五十里 凡四等

不能五十里 不達於天子 附於諸侯 曰附庸

天子之卿受地視侯 大夫受地視伯 元士受地視子男


천자의 직할지는 땅이 사방 천리이고 공과 후의 직할지는 사방 백리이며 백은 칠십리, 자와 남은 오십리의 땅을 직할지로 해 모두 네 등급으로 나누어집니다.


주례(周禮)에는 이렇게 되어 있지 않다.

<周禮 地官司徒>

之地 封疆方五百里 其食者半 諸之地 封疆方四百里 其食者參之一 諸之地 封疆方三百里 其食者參之一 諸之地 封疆方二百里 其食者四之一 諸之地 封疆方百里 其食者四之一

공은 사방 500리, 후는 400리, 백은 300리, 자는 200리, 남은 100리의 영토를 봉해주는 것으로 되어 있어 서로 다르다.

맹자가 말하는 것은 다스리는 영토가 아니라 세금을 받아 자신이 사용할 수 있는 식읍의 크기만을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네이버블로그, 소호자, 고대사원문자료모음>



다음은 주영한국교육원(http://www.koreaneducentreinuk.org)의 [영국의 귀족 제도]를 참조하여 추가로 정리하여 보았습니다.


영국의 귀족제도가 대륙의 귀족제도가 좀 다르기는 하지만, 참고할 점은 있어 보인다. 우선 영국은 노르망디공(公) 윌리엄이 영국을 정복한 후(1066년), 국가를 많은 장원(manor)으로 분할하고, 각 장원을 왕의 직신(baron)들에게 관할하도록 하였다. 이렇게 보면, 영국의 남작(baron)은 오히려 대륙의 백작(count)과 비슷한 느낌이다. 아무래도, 노르망디 공 자신이 공작이었기 때문에 그의 직신이 남작에 불과한 것이 아니었을지 모르겠다. 따라서 영국의 백작(earl) 또한 대륙의 공작(duke)의 위상으로 느껴지는 것의 힌트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영국의 작위는 baron과 earl이 먼저 생겨났고, duke(1337년 시작)와 marquess는 14세기에 viscount(1440년 시작)는 15세기에 만들어졌다. 이렇게 보면, baron과 earl을 제외한 나머지 작위들은 대륙국가들과 대비한 영국의 왕국으로서의 품위 유지 차원에서 설치된 작위로 여겨진다. 특히 duke는 대부분 prince에게 주어진 명예적 작위이었으므로, 대륙의 왕에 대해 준독립적인 duke들과는 사뭇 다르다. 다음으로 marquess(라틴어 marchiones)는 영국에서는 웨일스 국경의 제후를 지칭하였으며, 처음에는 다른 백작보다 높은 지위를 의미하지는 않고 단지 국경 근처에 영지가 있다는 의미만을 포함했다(대륙에서 카롤링거 왕조의 marquis는 '백작은 하나 이상의 영지를 소유할 수 없다'는 규정에서 제외되는 공작의 위상에 버금가는 국경 수비 임무의 귀족). earl은 덴마크 jarl에서 유래한 용어로 노르망디공의 정복에 앞서 데인의 크누트 왕의 영국 지배시절(1016-35년)에 영국에 이미 도입된 작위였다.


사실 영국 작위 제도의 특징은 아버지의 작위가 장남에게만 승계된다는 것에 있다. 그리고 그 장남도 아버지의 생전에는 아버지의 작위보다 한 단계 아래의 작위로 호칭되었다. 따라서 장남이 아닌 아들들의 후손들이 한편으로는 귀족의 후예이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법적으로 평민인 gentry 계층을 형성하여 영국 산업혁명의 주도 세력으로 등장하게 되는 시대적 사회적 배경을 이룬다.


◦ 귀족 작위의 어원

- "Duke" comes from the Latin dux, leader

- "Marquess" comes from the French marquis, which is a derivative of marche or march

- "Earl" comes from the Old English or Anglo-Saxon eorl, a military leader

- "Viscount" comes from the Latin vicecomes, vice-count

- "Baron" comes from the Old Germanic baro, freeman

(2023. 1. 28.)



댓글에서 동양의 오등작과 서양의 작위의 matching은 서양 선교사가 먼저 한 것이라는 제보가 있어, Gemini를 통해 조사해보았습니다. 다음은 Gemini의 답변을 참조한 것입니다.


최초 번역의 가장 유력한 문헌은 1687년 파리에서 발간된 《중국 철학자 공자》(Confucius Sinarum Philosophus)입니다. 이 책은 벨기에 출신 선교사 필리프 쿠플레(Philippe Couplet) 등이 공자의 사서(四書)를 라틴어로 번역한 것인데, 여기서 주나라의 오등작을 유럽의 봉건제 계급으로 치환하여 소개했습니다.

公 (Gōng): Dux (Duke / 공작)

侯 (Hóu): Marchio (Marquess / 후작)

伯 (Bó): Comes (Count / 백작)

子 (Zǐ): Vicecomes (Viscount / 자작)

男 (Nán): Baro (Baron / 남작)

이 책은 본래 대학(Scientia Sinica), 중용(Ratio Disciplinae), 논어(Logos) 세 경전을 담고 있습니다. '오등작'에 대한 구체적인 매칭과 설명은 주로 다음 부분에서 나타납니다.

서문(Prolegomena) 및 용어 해설: 이 책의 방대한 서문(약 100~106페이지 부근)에서 중국의 관제와 작위 체계를 유럽 독자들에게 설명하며 라틴어 용어와 공식 대응시켰습니다.

논어(Lun Yu) 제5권(공야장 편 등): 제후들의 급을 논하는 주석 부분에서 이 용어들이 실제 번역어로서 사용됩니다.

해당 문헌에서 주나라의 제후 체계를 설명할 때 사용하는 라틴어 용어와 매칭은 다음과 같습니다. (당시 라틴어 원문의 핵심 단어들을 재구성함)

"Sinense regimen quinque dignitatum gradibus distincum est: nimirum Dux, Marchio, Comes, Vicecomes, & Baro." *(중국의 통치 체제는 다섯 등급의 작위로 나뉜다. 즉, **공작(Dux), 후작(Marchio), 백작(Comes), 자작(Vicecomes), 남작(Baro)*이다.

중국 연표 설명 부분에서는 주나라 무왕(Wu Vangus)이 나라를 세우고 제후들에게 땅을 나누어 줄 때의 상황을 설명하며 이 용어들을 사용합니다.

"Regulos ac Principes in quinque classes distribuit: quarum prima Ducum, secunda Marchionum, tertia Comitum, quarta Vicecomitum, quinta Baronum erat." (그(무왕)는 소왕들과 군주들을 다섯 등급으로 나누었는데, 첫 번째는 공작, 두 번째는 후작, 세 번째는 백작, 네 번째는 자작, 다섯 번째는 남작의 등급이었다.)


1711년판 《중국 제국의 6대 고전》(Sinensis Imperii Libri Classici Sex): 예수회 선교사 프랑수아 노엘(François Noël)이 1687년판에서 빠졌던 '맹자'를 포함하여 사서(대학, 중용, 논어, 맹자)에 효경과 삼자경을 완역해 프라하에서 출간했습니다.

맹자 '만장(萬章)' 하편: 이 부분에 천자, 공, 후, 백, 자, 남의 위계와 녹봉에 대한 상세한 설명이 나옵니다. 노엘은 이 대목을 번역하며 앞선 선교사들이 정립한 라틴어 작위 체계를 확고히 굳혔습니다.

따라서 개념의 정립은 1687년 《중국 철학자 공자》의 서문과 용어 해설에서 시작되었고, 이것이 경전 본문 번역에 본격적으로 적용되어 완성된 것은 1711년 프랑수아 노엘의 맹자 번역이라고 보는 것이 학계의 일반적인 견해입니다.

당시 선교사들은 중국의 '제후(Principals)' 시스템이 유럽의 봉건 영주 체계와 놀라울 정도로 유사하다고 판단하여 이 번역어를 선택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중국 통사》(Histoire générale de la Chine, 1735)

저자: 장바티스트 뒤 알드(Jean-Baptiste Du Halde)

내용: 예수회 선교사들이 보낸 방대한 보고서를 집대성한 책으로, 당시 유럽에서 '중국학의 바이블'로 통했습니다.

역할: 1687년 라틴어본의 내용을 프랑스어(Duc, Marquis, Comte 등)로 옮기며 서양 작위와 동양 오등작의 대응 관계를 유럽 지식인 사회에 완전히 고착시켰습니다. 이 책은 이후 영어로도 번역되어 영국 지식인들에게 전달되었습니다.

《중국어 문법》(Notitia Linguae Sinicae, 1728년 저술 / 1831년 출간)

저자: 조제프 드 프레마르(Joseph de Prémare)

내용: 18세기 초에 작성된 이 문헌은 한문 문법과 어휘를 라틴어로 설명한 사전적 성격의 책입니다.

역할: 모리슨이 영중사전을 만들 때 가장 많이 참고한 문헌 중 하나입니다. 한자 '公, 侯, 伯, 子, 男'이 각각 어떤 라틴어 작위와 대응되는지를 문법적으로 정리하여 모리슨에게 교량 역할을 했습니다.

《영중 사전초고》(A Dictionary of the English and Chinese Languages, 1700년대 말)

모리슨 이전에도 광동(Canton) 지역의 상인들과 통역사들을 위해 제작된 필사본 형태의 '어휘집(Glossaries)'들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선교사들의 학술적 번역(라틴어)을 실무적인 영어로 바꾸는 과정에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 영국의 동인도 회사 직원들이 중국 관리들을 접대할 때, 중국의 '공작'을 자신들의 'Duke'로 불러야 한다는 식의 실무 지침이 이 시기에 형성되었습니다.


19세기 초, 로버트 모리슨(Robert Morrison) 같은 개신교 선교사들이 중국에 들어와 최초의 근대적 영중사전(1815~1823년, 총 3부 6권으로 순차적 발행)을 만들 때, 이전에 라틴어로 정리된 예수회의 연구 성과를 대거 참고했습니다.

모리슨은 'Duke'라는 단어를 정의할 때, 과거 라틴어 번역가들이 'Dux'를 '公(공)'으로 옮겼던 전통을 그대로 이어받아 '公爵(공작)'이라 표기했습니다.


서양의 작위를 동양의 '공후백자남'으로 영향을 준 결정적인 문헌은 중국 청나라 시대의 지리서인 《해국도지》(海國圖志, 1842년 초판)로 알려져 있습니다.

위원(魏源)의 역할: 저자 위원은 서양의 관제와 신분 제도를 설명하면서, 독자들이 이해하기 쉽게 유교 경전인 《예기》나 《주례》에 등장하는 주나라의 오등작(公·侯·伯·子·男) 개념을 차용했습니다.

임칙서의 자료: 위원은 친구인 임칙서가 수집한 서양 신문과 책자의 번역본(사주지, 四洲志, 1839~1840년경 원고 완성 및 내부 유포)을 물려받았습니다. 이 자료들은 이미 선교사들의 번역 관습에 따라 서양 귀족을 '공후백자남'으로 부르고 있었습니다.

유교적 세계관으로의 편입: 위원은 이 번역어들을 그대로 채택하면서, "서양의 제도 또한 주나라의 예법과 같은 오등작을 따르고 있으니, 그들도 나름의 문명적 질서를 갖추고 있다"는 논리로 사용했습니다.

그 외에도 1840년대 전후로 활동했던 선교사들의 저술이나, 1860년대에 발간된 영한사전의 효시 격인 문헌들(예: 롭샤이트의 영중사전)을 통해 이 번역어들이 고착화되었습니다.

즉, [라틴어 번역본] → [영중사전] → [중국 지식인]으로 이어지는 지식의 전달 경로가 형성된 것입니다.


이후 메이지 유신 시대의 일본이 서구 제도를 받아들이면서 《해국도지》 등에서 사용된 이 번역어들을 공식적으로 채택했습니다. 1884년 일본이 '화족(華族)령'을 공표하며 자신들의 귀족 제도를 공·후·백·자·남으로 재편했고, 이것이 현대 동아시아에서 서양 귀족 작위를 번역하는 표준으로 완전히 굳어지게 되었습니다.


서양 작위 체계의 핵심인 영국(잉글랜드)의 사례를 보면 5등작이 완성된 것은 생각보다 늦은 시기입니다.

초기 핵심 3단계: 공작(Duke), 백작(Earl), 남작(Baron).

후작(Marquess)의 도입: 1385년, 공작과 백작 사이의 위계를 정립하기 위해 도입되었습니다.

자작(Viscount)의 도입: 1440년이 되어서야 헨리 6세가 존 보몬트(John Beaumont)를 최초의 자작으로 임명하며 독립된 계급으로 인정받았습니다.

자작을 뜻하는 Viscount는 라틴어 'Vice-comes'에서 왔습니다.

원래 자작은 독립된 세습 영주라기보다, 백작(Count)이 다스리는 영지 내에서 사법이나 행정 업무를 대행하던 '부관'이나 '대리인'에 가까웠습니다.


서양인들이 작위를 볼 때 느끼는 실제적인 위계감은 다음과 같은 층위로 나뉩니다.

층위 작위 인식 (Conception)

Top Tier Duke (공작) 왕족에 준하는 최고의 통치자

Middle Tier Marquess (후작), Earl/Count (백작) 실질적인 영토를 가진 대영주

Bottom Tier Viscount (자작), Baron (남작) 행정적 성격이 강하거나 가장 낮은 귀족


국가마다 다른 '등작'의 개수

유럽은 국가마다 '5단계'가 지켜지지 않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독일: 'Fürst(방백/후작)'나 'Graf(백작)' 계열이 매우 세분화되어 있어 5단계로 딱 떨어지지 않습니다.

영국: 현대까지 5단계를 가장 잘 보존하고 있지만, 실제 사교계에서는 'Lord(경)'라는 칭호로 퉁쳐서 부르는 경우가 많아 등급 자체를 엄격히 따지는 것은 공식 문서상일 때가 많습니다.


공후백자남'이라는 5단계 틀에 들어가지 못하고 그 경계에 걸쳐 있는 준남작(Baronet)과 기사(Knight), 그리고 종자(Esquire) 같은 계급들은 서양 작위 체계의 독특한 지점을 보여줍니다.

이들이 오등작 번역에서 제외된 이유는 명확합니다. 바로 '세습 여부'와 '상원 의원(Peer) 자격' 때문입니다.

준남작 (Baronet): 17세기에 영국 제임스 1세가 군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만든 계급입니다. 세습은 되지만 '귀족(Peerage)'은 아닌 애매한 위치입니다. 동양의 오등작은 모두 '귀족'이어야 했기에, 준남작은 번역 과정에서 '작위'의 반열에 끼지 못하고 누락되었습니다.

기사 (Knight): 서양의 상징과도 같지만, 기사는 세습이 되지 않습니다. 당대에 끝나는 명예직에 가깝죠. 동양의 작위는 가문의 위신을 대변하는 세습제가 기본이었으므로, 기사는 작위(爵)보다는 관직이나 명예 칭호로 취급되었습니다.


선교사들이 '오등작'으로 깔끔하게 정리하기 전, 실제 영국의 계급 위계는 아래와 같이 더 복잡했습니다.

구분 작위/칭호 번역어 비고

상위 귀족 (Peerage) Duke ~ Baron 공·후·백·자·남 오등작의 핵심, 상원 의석 보유

하위 귀족 (Gentry) Baronet 준남작 세습 가능, 상원 의석 없음

Knight 기사 세습 불가, 'Sir' 칭호 사용

Esquire / Gentleman 종자 / 신사 지주 계층의 말단


독일의 '퓌르스트(Fürst)'와 '프린츠(Prinz)'

독일권의 작위 번역은 지금도 번역가들을 괴롭히는 난제입니다.

상황: 영어로는 둘 다 Prince로 번역되곤 하지만, 독일에서는 엄격히 다릅니다. Prinz: 왕의 아들(혈연적 왕자). Fürst: 실질적인 영토를 다스리는 통치자(방백/제후).

번역의 고충: 오등작 체계에는 '왕자'를 뜻하는 별도의 작위가 없습니다. 결국 번역가들은 영토를 다스리는 Fürst를 '공작' 혹은 '후작'으로 뭉뚱그려 번역했습니다. 이 때문에 독일의 수많은 작은 나라 군주들이 졸지에 영국식 후작(Marquess)과 동급으로 취급되는 혼선이 빚어졌습니다.

영주의 대명사 '그라프(Graf)'와 백작(Count)

유럽 대륙의 Count(Graf)는 영국의 Earl과 대응되지만, 그 권위의 폭이 너무 넓었습니다.

독일의 다양한 백작들: Landgraf (주백): 공작에 맞먹는 대영주.
Pfalzgraf (궁정백): 황제의 대리인인 막강한 권력자.
Markgraf (변경백): 국경을 지키는 후작급 백작.

번역의 결과: 번역가들은 이 복잡한 위계를 무시하고 이름 뒤에 'Graf'가 붙으면 무조건 '백작'으로 통일해버렸습니다. 그 결과, 실제로는 공작보다 강력했던 '궁정백'이 서열상 자작보다 겨우 한 단계 높은 백작으로 과소평가되는 일이 생겼습니다.

프랑스의 '비담(Vidame)'과 '슈발리에(Chevalier)'

프랑스는 중앙집권화가 강해지면서 고대부터 내려온 독특한 직함이 많았습니다.

Vidame (비담): 원래 교회의 재산을 관리하고 군사적 보호를 하던 귀족입니다. 공후백자남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이 직함은 결국 번역에서 완전히 삭제되거나, 대충 '남작' 정도로 하향 조정되었습니다.

Chevalier (슈발리에): 영국의 Knight에 해당하지만, 프랑스 귀족 가문의 차남들이 신분을 유지하기 위해 쓰던 호칭이기도 했습니다. 이를 '기사'라고 번역하면 단순한 병사처럼 보이고, '작위'라고 하기엔 세습이 안 되어 번역가들을 고민에 빠뜨렸습니다.

오등작으로 해결이 안 되는 직함들이 늘어나자, 근대 지식인들은 새로운 한자 용어를 조합하기 시작했습니다.

Elector (선제후): 황제를 뽑는 권한이 있는 대영주. (오등작에 없으므로 별도 명칭 부여)

Grand Duke (대공): 공작보다 높고 왕보다 낮은 지위.

Archduke (대공):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가문 황태자급 직함.

오등작 각 글자의 기원에 대한 해석은 한자의 가장 오래된 형태인 갑골문(甲骨文)과 금문(金文), 그리고 이를 체계적으로 정리한 최초의 자전인 허신의 《설문해자(說文解字)》 등에 근거를 두고 있습니다.

각 글자의 기원에 대한 문헌적 근거와 학술적 해석을 정리해 드립니다.

1. 공(公): 분배와 남성의 상징

원문 출처: 《설문해자》 — "公, 平分也. 从八从厶. 八, 分也; 厶, 奸衒也." (공은 공평하게 나누는 것이다. '八'과 '厶'로 구성되었는데, '八'은 나눈다는 뜻이고 '厶'는 사사로움이다.)

해석: '남성의 성기' 설은 문자학자 시라카와 시즈카(白川靜)나 현대 고문자학자들의 견해에 자주 등장합니다. 갑골문에서 '公'의 아랫부분인 '厶' 모양이 남성의 생식기를 상징하며, 이것이 가문을 대표하는 어른이나 조상신을 의미하게 되었다는 해석입니다.

2. 후(侯/矦): 과녁을 맞히는 무사

원문 출처: 《설문해자》 — "矦, 春獀, 旣徂, 矦而射也. 从人, 从厂, 象張布, 矢在其下." (후는 사냥을 나가 과녁을 세우고 활을 쏘는 것이다. 사람과 '厂'으로 구성되었으며, 포(천)를 펼친 모양과 그 아래 화살이 있는 모양을 본떴다.)

해석: '후(侯)'의 옛 글자인 '矦'는 화살(矢)이 과녁(厂/천)을 향하는 모습입니다. 고대 중국에서 제후를 선발할 때 활쏘기 시험을 치렀던 풍습에서 유래했으며, 변방을 지키는 무장(Warrior)의 성격을 강하게 띠고 있습니다.

3. 백(伯): 우두머리와 엄지손가락

원문 출처: 《설문해자》 — "伯, 長也. 从人, 白聲." (백은 어른/우두머리다. 사람과 '白'의 소리로 구성되었다.)

해석: '白'의 기원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습니다. 엄지손가락: '白'이 손가락의 모양을 본떠 '첫째(맏이)'를 뜻한다는 설이 유력합니다 (형제 순서인 백-중-숙-계). 머리뼈/햇빛: 갑골문 연구자들은 '白'이 '햇빛'의 밝음이나 혹은 제사에 쓰이던 '흰 머리뼈'의 상형이라고 보기도 하며, 이는 집단의 우두머리가 가진 신성함을 상징합니다.

4. 자(子): 작위 계승자

원문 출처: 《설문해자》 — "子, 十一月陽气動, 萬物滋, 人以爲偁. 象形." (자작의 '子'는 만물이 번식하는 모양이며, 사람의 칭호로 쓰인다. 상형문자다.)

해석: 본래 갓난아이가 팔을 벌리고 있는 모양입니다. 오등작에서는 천자나 제후의 자제(혈통)들이 받는 작위에서 유래했습니다. 주나라 이전에는 왕실의 자손들을 높여 부르는 일반적인 칭호였으나, 점차 독립된 작위로 굳어졌습니다.

5. 남(男): 밭을 일구는 힘

원문 출처: 《설문해자》 — "男, 丈夫也. 从田, 从力. 言用力於田也." (남은 장부다. '田'과 '力'으로 구성되었으며, 밭에서 힘을 쓰는 것을 말한다.)

해석: '일정한 토지를 관리하는 직책'이라는 해석은 매우 정확합니다. 밭(田)과 쟁기(力)의 합자로, 농경 지대를 책임지고 관리하며 생산력을 담당하는 하급 영주의 실무적 성격을 담고 있습니다.

요약 및 결론

公, 伯, 子: 주로 혈연적 위계나 조상신, 가문의 어른이라는 '상징성'에서 출발.

侯, 男: 과녁(무력)과 밭(경제력)이라는 '실무적 기능'에서 출발.


시라카와 시즈카(白川靜, 1910~2006), 《자통(字通)》(1996년) 및 《한자: 그 기원과 구조》(1970년)

가장 구체적인 출처입니다. 시라카와 시즈카는 한자의 기원을 '신화와 주술'의 관점에서 분석하며 다음과 같이 설명했습니다.

公 (공): 시라카와는 '厶'를 사사로움이 아니라 남성의 성기 혹은 조상신을 모시는 함으로 봅니다. '八'은 그 기운이 퍼져나가는 것이며, 가문의 가장 높은 어른이 신적 권위를 가졌음을 뜻한다고 설명합니다.

侯 (후): 화살(矢)이 과녁(矦)에 꽂히는 모양임을 명확히 합니다. 이는 단순한 사격이 아니라, 성벽이나 국경에서 적의 저주를 막기 위해 화살을 쏘아 맞히던 주술적 무사의 기원을 말합니다.

伯 (백): '白'을 '흰 머리뼈'라고 해석하는 대표적인 학자가 바로 시라카와입니다. 전쟁에서 승리한 뒤 적장의 머리뼈를 하얗게 씻어 제단에 올리던 '우두머리'의 권위를 상징한다고 봅니다. (엄지손가락 설은 전통적 해석이며, 머리뼈 설은 고문자학적 해석입니다.)

子 (자): 갓난아이가 포대기에 싸여 팔을 휘젓는 모양이며, 이는 혈통의 보존과 제사를 지낼 후계자를 뜻합니다.

男 (남): 밭(田)과 쟁기(力, 쟁기의 상형)의 결합입니다. 시라카와는 이를 '토지 신에게 제사를 지내고 밭을 일구는 권한을 부여받은 자'로 정의합니다.

결국 17세기 예수회 선교사들이 라틴어로 초석을 놓고, 19세기 동양 지식인들이 한자로 완성한 이 번역 체계는 "서양의 역동적인 봉건 질서를 동양의 정적인 계급 질서로 박제"하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덕분에 우리는 서양 역사를 아주 편하게(5단계로) 읽을 수 있게 되었지만, 동시에 서양 귀족들이 가졌던 복잡한 영지 개념과 위계의 역동성은 놓치게 된 셈입니다.

서양인들은 자신들의 작위 시스템을 "역사적으로 형성된 다양한 계급의 집합"으로 보지, 주나라처럼 "천자가 설계한 5단계의 완벽한 질서"로 보지는 않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서양 작위를 당연히 5등급으로 생각하는 것은, 17~19세기 선교사와 지식인들이 서양의 파편화된 작위들을 동양의 '오등작'이라는 틀에 끼워 맞춘 번역의 승리라고 볼 수 있습니다.

동양에는 '오등작(五等爵)'이라는 명확한 숫자가 포함된 단어가 있지만, 영어권에서는 이를 묶어서 부르는 고유 명사가 딱히 없습니다. 19세기 서양 학자들이 중국의 제도를 연구할 때, 중국에 'Five Degrees of Nobility'가 있다는 사실에 오히려 놀라며 자신들의 체계와 비교 연구를 시작한 것입니다. 즉, 5라는 숫자로 시스템화한 것은 동양의 유교적 관념이 훨씬 강합니다.


예수회 선교사들이 방대한 유교 경전을 굳이 라틴어로 번역하여 유럽에 소개한 데에는 종교적, 정치적, 그리고 학술적인 전략이 치밀하게 깔려 있었습니다. 단순히 지적 호기심 때문이 아니라, "중국 선교를 성공시키기 위한 거대한 프로젝트"의 일환이었습니다.

그 주요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1. 적응주의 선교 전략 (Accommodatio)

당시 중국에 진출한 예수회(Jesuits)는 '현지 문화를 존중하며 복음을 전한다'는 적응주의 원칙을 가졌습니다.

유교와의 접점 찾기: 선교사들은 중국인들이 목숨처럼 아끼는 유교가 기독교와 완전히 배치되는 '우상숭배'가 아님을 증명해야 했습니다.

보편적 진리 증명: 유교 경전을 번역해 보니, "중국인들도 이미 하느님(상제, 上帝)을 알고 있었으며, 다만 복음이 전해지지 않아 그 형태가 달랐을 뿐이다"라는 논리를 펴기 위해서였습니다.

2. 유럽 본토에 '선교의 정당성' 확보

당시 가톨릭 내부에서는 예수회의 선교 방식을 비판하는 목소리(전례 문제)가 컸습니다. "중국인들의 제사는 미신인데 왜 허용하느냐?"라는 공격에 대응하기 위해 선교사들은 증거가 필요했습니다.

라틴어의 권위: 당시 유럽 지식인들의 공용어인 라틴어로 유교 경전을 정밀하게 번역하여 보냄으로써, "중국은 미개한 나라가 아니라 유럽만큼 고차원적인 도덕과 철학(공자)을 가진 나라이니, 우리의 선교 방식이 맞다"라는 것을 입증하려 했습니다.

3. '현자 공자'를 통한 지적 교류

선교사들은 공자를 단순한 이교도가 아니라 '동양의 소크라테스'로 묘사했습니다.

이성적인 도덕 국가: 계몽주의가 싹트던 당시 유럽인들에게, 계시(성경)가 없어도 이성(유교)만으로 거대한 국가를 평화롭게 다스리는 중국의 모습은 충격적이었습니다.

학술적 가교: 오등작을 Duke, Baron 등으로 번역한 것도 유럽인들이 중국의 사회 구조를 자신들의 봉건제와 대조하며 '지적으로 이해 가능한 영역' 안으로 끌어들이기 위한 도구였습니다.

'서양 5등작'은 서양의 역사적 실체와 동양의 유교적 이상향이 만나 탄생한 '정제된 편집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2026.2.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