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영필
세계사에서 봉건제는 세 번 있었다고 한다. 중국 주나라의 춘추전국시대와 유럽의 중세, 그리고 일본의 전국시대와 뒤이은 도쿠가와의 막번 체제가 그것이다.
이 세 곳의 봉건제는 그런데 조금씩 다르다. 우선 주나라의 봉건제는 통합국가의 성립으로 마감된 반면, 일본의 봉건제는 통합 후에도 오히려 봉건제를 지속한다. 그리고 유럽의 봉건제는 통합을 이루지도 못하고 그대로 산업혁명을 맞이하였다.
왜, 이러한 차이가 발생하였을까? 나는 그 원인은 종교의 역할 차이에 기인하는 것이라고 본다.
주나라에서는 정치권력에 독립적인 종교권력이 존재하지 않았다. 설사 주나라 천자에게 제사장으로서의 종교적 권위가 있었다 하더라도 그것의 유통기한은 춘추시대까지이었다. 뒤이은 전국시대는 패도의 시대이었고, 진시황은 통일 과정에서 터득한 법가의 정책으로 봉건제를 종식시켰다.
이에 반해 일본에서는 천황이라는 별도의 권위가 있었다. 천황은 기본적으로 정치권력이었으나, 군사적 영향력을 상실한 이후에는 천손의 혈통이라는 신화적 권위로서 형식적 조정을 교토에 유지하였다. 유교와 불교 그리고 신도(神道)가 병존하는 16세기 일본의 합리주의에서 쇼군은 굳이 천황의 형식적 권위를 종식시킬 필요를 가지지 못하였다. 따라서 천황의 형식적 신하인 쇼군의 일본 지배는 위임통치이므로 군현제로 나아가지 못하였다.
유럽의 봉건제에는 기독교가 있었다.
교황은 세속 권력에 대비되는 별도의 권위로서 유럽의 중세를 관통한다. 종교가 기능적으로 봉건제와 완전히 유리되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성직자는 성직 제후가 되어, 봉건 질서에 통합되어 있었다. 성직 제후의 영토는 세속 제후의 영토 사이사이에 위치하여, 세속 국가들의 전쟁과 확대를 감시하였다. 독일은 민족국가마저 성립하지 못하였다.
기독교의 정신적 지도 하에서 영토의 합법적 확장은 전투가 아니라, 상속으로서만 가능하였다. 그러므로 정략결혼을 잘 하는 것은 영토확장의 기술이었으며, 이 부문에서는 합스부르크가(家)가 으뜸이다. 동맹의 담보이자 증표로 소비되었던 일본의 여인과 달리, 유럽의 신부는 영지의 상속권을 지참하고 왔다.
그 외의 방법으로는 이교도 지역을 정복하는 것이 있었다. 더 이상 서유럽 내에서 교황의 승인하에 자신의 영토를 확장할 방법이 없게 되었을 때, 중세 유럽인들은 십자군 전쟁을 시도하였고, 그것은 종국에 대항해 시대를 열었다.
이와 같이 유럽의 봉건제는 기독교와 불가분의 관계 속에서 역사를 만들어왔다. 교황과 유럽의 봉건제는 UN을 만들고, 안전보장이사회를 만들어, 오늘날 세계사적으로 확장되어 있다.
(2011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