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영필
마틴 루터의 종교개혁에는 결혼, 봉지, 제국이 삼중으로 얽혀 있다.
이것은 멀리 클리니 수도원의 청빈 서원과 서임권 투쟁 그리고 카놋사의 굴욕에서 배태되는 것이다. 이러한 로마 가톨릭의 새로운 혁신과 억압에 대해, 세속 제후는 혼인 성직자와 함께 기존의 자유를 갈구하였던 것이다.
만약 마틴 루터가 독일이 아닌 다른 나라에서 이를 시도하였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그것은 보헤미아의 후스를 통해서 잘 알 수 있듯이 로마에 끌려가서 화형 당하는 운명이었다. 그만큼 종교개혁은 당시 기독교적 봉건 질서를 송두리째 와해시키는 폭발성을 지니고 있었으며, 로마 교황청의 교부들 또한 그 엄청난 반동성을 인식하고 있었다. 그러나 후스와는 달리 마틴 루터에게는 보호자가 있었다. 그가 바로 작센의 선제후 프리드리히 3세이다.
그런데 일개 영방 제후인 작센 선제후 프리드리히는 어떻게 해서 황제와 교황의 지시를 묵살할 수 있었을까?
그것은 독일의 신성로마제국이 가지고 있던 체제 내 세력균형 때문에 가능하였다. 선거를 통해 제위를 계승하는 제국의 속성상, 거듭되는 선거와 선거공약을 통해 독일의 권력은 황제로부터 영방군주, 특히 선제후들에게로 조금씩 이전되어 왔었다. 이윽고 16 세기에 이르면, 영방 군주들은 정치적으로나 군사적으로 황제에 대항할 수 있는 세력을 갖추게 되었다. 그것은 마틴 루터의 행운이었고, 또한 세계사의 행운이었다. 그렇다 하더라도 마틴 루터의 용기와 프리드리히의 결단에 대한 찬사가 깎여서는 안될 것이다.
먼저, 결혼의 의미는 무엇인가?
마틴 루터의 종교개혁 이전에는 사제들의 혼인이 광범위하게 묵인되고 있었다. 교황도 예외가 아니었는데, 피렌체의 역사를 읽어보면 잘 알 수가 있다. 그런데 그레고리우스 7세는 청빈 서원을 통하여 이러한 부조리와 폐단을 일거에 혁신하려 하였다. 따라서 교황은 단호한 모범과 강력한 교시로 사제들에게 기존의 혼인생활을 청산하든지 아니면 사제로서의 기득권을 버리든지 양자택일을 하도록 강요하였다.
이러한 혼인 수도자들의 고민에 불을 지른 것이 바로 마틴 루터의 종교개혁이었다. 마틴 루터는 훗날 수도원을 탈출한 어떤 수녀와 결혼하였다. 또 영국 왕 헨리도 자신이 원하는 결혼을 하기 위해 로마 가톨릭에서 독립적인 성공회를 만든다. 동기와 배경은 각기 다르지만, 교회가 인간의 본능(Sex)에 부여한 속박이 해소될 출구는 필요하였던 것이다.
다음으로, 봉지의 의미는 무엇인가?
세력을 확장해가는 영방제후들에게 있어 성직 제후(주교)들의 영지는 점차 눈에 가시처럼 여겨졌다. 원래 주교의 직할지는 기독교 사회에서는 불가침의 영역이었으며, 조세 및 세속권력으로부터 자유로왔다. 그리고 엄청난 헌금이 면죄부 등을 통하여 로마로 흘러가서 교황청을 살찌우고 있었다.
새롭게 권력과 세속에 눈을 뜬 영방제후들은 단순히 주교들의 영지가 문제가 아니라, 자신의 영방국가 안에 존재하던 교회 체제와 그 재산이 탐났다. 세속 제후들은 자신의 군대를 양성하고 국가를 강성하게 만들기 위해서는 영지의 안과 밖에 그물망처럼 쳐져 있는 교황과 교회권력을 차단할 필요가 있었다. 이것이 기존의 세력관계를 재편하고자 하는 영방제후들의 종교개혁에 대한 신념이 되었다.
마지막으로 제국의 의미란 무엇인가?
마틴 루터의 교회 개혁에 대한 선언으로 독일은 혼란의 도가니로 빠져들게 되지만, 결국 황제는 오스만튀르크 등과의 전쟁에서 제후들의 협조를 얻기 위해 신교를 인정하고야 만다. 황제에게는 로마 가톨릭에 대한 종교적 신념도 중요하였지만, 그 이상으로 우선하는 것이 그의 제국이었다. 그를 황제이게 하는 그의 신성한 로마제국을 사라지게 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합스부르크와 신성로마제국 그리고 교회는 독일의 민족국가 성립에 천년 간 실질적인 장애물이었지만, 그러한 지속적인 봉건성으로 인하여, 독일은 또한 '종교개혁'이라는 역사적 소임을 완수할 수 있었다.
1453년 동로마의 멸망, 1492년 콜럼버스의 아메리카 발견, 1498년 바스코 다 가마의 인도항로 개척으로 유럽인에게는 신세계의 지평이 열리고 있었다. 1517년 마틴 루터의 종교개혁은 그 새로운 시대를 광기가 아닌, 합리적 사고 그리고 인문적 정신이 열어갈 수 있도록 길을 열어준 대사건이었다.
(2012. 11. 16)
Note:
클라우디아 메르틀, [누구나 알아야 할 서양중세 101가지 이야기], 92-3쪽 참조
1095년 교황 우르바누스 2세가 제1차 십자군 원정 참가자들을 위해서 면죄부를 발행했다. 면죄부는 원칙적으로는 죄를 고백한 후, 참회의 증명으로서 행해지는 모든 종류의 형벌(속죄행위)을 면제하는 증표이었다. 그러나 넓게는 죄와 벌의 의미에서 포괄적인 용서(완전한 면죄)를 의미하였고, 이러한 완전 면죄부는 처음에는 십자군 원정 참가자들에게만 교부되었지만, 나중에는 보다 폭넓은 계층의 사람들도 면죄부를 손에 넣을 수 있게 되었다.
1300년부터 도입된 가톨릭 성년(聖年)에 로마 교회를 방문한 사람들이나 성지순례에 참가한 사람들도 완전 면죄부를 받을 수 있었다. 13세기부터 특정 성지의 교회에서는 조건부 면죄부를 얻을 수 있었는데, 14-5세기에 이르면 면죄부로 이미 고인이 된 사람들의 영혼에까지 소급적용할 수 있게 된다. (천주교의 교리에 따를 때, 죽은 영혼은 연옥이라는 곳에서 자신의 죄를 속죄하는 고통을 받게 되는 데, 후손이 그를 위해 확보한 면죄부가 이를 감면해줄 수 있다는 믿음이다.)
2020. 3. 21. 이 글을 쓴지 8년쯤 지났네요. 최근에 개신교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되다보니, 종교개혁에 대해 더 많은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것에 대해서는 다른 글로 상론할 기회가 있겠지만, 일단 종교개혁이 르네상스의 문을 열어젖힌 게 아니라, 종교개혁은 르네상스의 결과라는 생각입니다. 그리고 루터 이전의 종교개혁가들 특히 얀 후스(~1415)와 루터 간의 결정적 차이점은 그들의 생애 사이에 인쇄술의 발명(1440~60년경)과 신대륙의 발견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물론 신성로마제국의 정치체제 또한 개혁가에게 상당한 혜택이었다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로마가톨릭에 대한 비판의식이 어느 정도 유럽인들에게 축적되어 왔었고 그 토대 위에서 루터가 그 개혁의 신호탄을 쏘아올렸다는 것입니다.
지금에서야 보니, 성적 속박과 영지의 야심은 오히려 부차적인 것이었다는 판단입니다. 그것은 종교 개혁의 전리품 정도가 아니었을까 합니다.
종교개혁의 역사적 의미는 인류사의 변곡점이 된 이정표로서 아무리 씹고씹어도 부족함이 없는 주제이며, 마르지 않는 강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