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영필
음절 문자에서 음소 문자로 가는 도정은 멀고도 험하다.
페니키아 문자는 자음 문자였다. 자음만 써놓으면 모음은 알아서 읽으면 된다. 히브리어를 보면 알 수가 있다. 랍비를 룹바라고 읽어도 같은 뜻이다. 여기에 영어와 한국어의 차이에 대한 힌트가 존재한다. 영어는 자음 중심으로 모음은 얼마든지 변화하고 약화(약모음 schwa)가 가능하지만, 한국어에서는 모음이 바뀌면 뜻도 바뀐다.
문자의 역사를 보면,
문자는 탄생 이후 그림 문자 -> 단어 문자 -> 음절 문자 -> 음소 문자 -> 자질 문자 로의 발전단계를 거쳐왔다. 단어 문자는 기원전 40~30세기에 수메르인이 최초로 사용하였고, 이후 기원전 10세기에서 5세기에 걸쳐 그리스의 알파벳 탄생으로 음소문자가 완성된다. 그런데 그리스에서 알파벳이 탄생한 배경을 보면 재미있는 점이 많이 있다.
페니키아 문자는 히브리 문자와 같이 자음 문자 체계였다. 즉 음절 문자와 완전한 음소 문자의 사이에 위치한 문자로서 음소 문자의 특징과 음절 문자의 특징을 동시에 가지고 있었다. 왜냐하면 음절 문자가 아닌, 음소 문자(자음)로 문서를 기록한 뒤, 발화는 음절로 하였기 때문이다. 이때 음절이라고 하는 것은 그 언어(페니키아어) 내에서 자동적으로 모음요소를 추가하여 발음하는 규칙을 가지고 있다는 의미에서의 음절이다.
지중해의 교역상대인 그리스인이 페니키아 문자를 차용하고자 할 때, 페니키아 문자 중에는 그리스인이 아예 소리를 낼 수 없는 문자(또는 기호)들이 있었다. 그 문자의 대표적인 것이 ’aleph이다. aleph 앞에 있는 기호[ ’ ]는 성문폐쇄음을 뜻하는 것이었는데, 이 소리를 가지고 있지 않은 그리스인은 이를 그냥 aleph라고 발음하였다. 그리고 이집트에서 유래한 두음 원리(Acrophonie Principle, 문자의 명칭의 첫음을 그 문자의 음으로 삼는 규칙)에 따라 'aleph는 [ ' ]음을 나타내는 문자에서 [a]음을 나타내는 문자로 바꿔지게 되었다.
이러한 모음 문자 탄생의 방식은 다시 반복되어 그리스어에 없는 약한 유기음 [h]를 가진 he를 그리스인들이 그냥 e로 발음하면서 또 하나의 모음 문자인 [e]가 추가로 만들어진다. 그리고 페니키아어의 반자음/반모음인 yodh [ j ]와 waw [ w ]는 반자음/반모음을 발음하지 못하는 그리스인들에게 [ i ]와 [ u ] 음으로 자연스레 대체되었다. 이렇게 모음 문자 a e i o u는 그리스에서 수백 년에 걸쳐 차례차례 만들어진다.
결론적으로 모음의 탄생 배경은 다음과 같다. 먼저, 페니키아어와 그리스어의 발음이 서로 상이하였다. 이것은 자기 문자를 만드는 모든 민족이 당면한 과제이다. 다음으로, 자음으로만 표기하여도 의사소통에 문제가 없는 페니키아 인과 달리, CV(자음+모음) 형태로 발음을 하는 그리스인에게는 모음의 특정이 필요하였다. 그러나 이것이 당시에 처음부터 명확히 인지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마지막으로는, 모음을 탄생시킨 콤마이다. 그것은 ’aleph나 `ayin [O]의 [ ’ ]와 [`]의 표식이 마침 그리스어에는 없는 발음이었을 뿐만 아니라, 문자라기보다는 무언가 생략 가능하게 보이는 그 부호성이 모음 탄생에 중요한 행운으로 작용하지 않았을까? 하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그리하여, 자음과 모음이 모두 갖춰진 오늘날 음소문자 알파벳의 원형이 만들어진다.
즉, 인간이 자신의 말소리를 음절이 아니고, 음소화(그리고 자음과 모음으로 분리)하는 데는 문자 탄생 이후 무려 3000년 이상의 엄청난 세월이 필요하였던 것이다. 이로써 지중해와 근동에서 최초로 음소문자가 만들어지고, 이것은 그 편리함으로 인하여 전 세계로 파급 확산된다. 그것은 서쪽으로는 유럽으로, 북쪽으로는 러시아로, 동쪽으로는 페르시아를 거쳐, 인도, 몽골 등에 이른다.
인류 문명에 인도가 중요한 기여를 많이 하였지만(아라비아 숫자와 Zero 등), 최소한 문자는 지중해의 것이었으니, 그것은 활발한 교역의 필요성이 글자를 낳은 증표이다.
음소문자 아이디어를 도입한 이후 인도에서는 산스크리트어 등 각종의 다양한 문자가 만들어지고, 그들은 누천년 동안 구술 암기되어 내려오던 자신들의 힌두교 전승을 문자화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인도의 문자는 동남아에 파급되어 동남아 각국의 문자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또한 장건의 서역 개척으로 실크로드가 열리자, 음소문자는 중국 방면으로도 전해져 위구르 문자, 몽골 문자, 만주 문자 등을 성립시킨다. 뒤이은 불교의 전파 과정에서 인도문자는 중국의 음운학에 영향을 미쳐, 반절의 표기(성모/운모) 체계를 성립시킨다.
이렇게 볼 때, 15세기 세종대왕의 한글 창제는 오랜 기간의 인류의 문자 발명과 그 전파 그리고 음운 연구의 최종 단계의 아름다운 금자탑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소위 자질 문자라고 하여 한글은 문자에 이미 그 음운 자체의 지표(자질)를 보유하고 있다. 이는 곧 한글이 세계 문자 역사의 최고이자 최종적 결실임을 나타내는 것이다.
이러한 문자 역사의 도정에 대한 수많은 엄연한 사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가림토 문자의 존재를 막연히 긍정하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연민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은 음소문자라는 것이 단군시대에 갑자기 하늘에서 턱 굴러내려 올 정도로 그리 쉽게 형성될 수 없다는 사실에 대한 무지에서 기인하기 때문이다. 가림토문자가 어떻게 형성되었는지에 대한 역사와 그 형태와 쓰임에 대한 최소한의 사례는 존재해야 비로소 우리는 가림토 문자를 합리적 고려의 대상으로 삼을 수 있을 것이다.
현재 한글이 가지고 있는 자질 문자로서 갖추고 있는 정연한 음운 및 음성학적 논리체계 속에서 조선은 자국의 말소리를 그대로 표현해냄과 동시에 당대를 대표하던 선진 중국문명을 받아들이기 위한 한자음 재현의 니즈를 완벽히 충족하였다.
한자와 함께 글을 병서할 수 있는 모아쓰기의 방식과 그를 뒷받침하는 받침 체계의 완성은 오늘날 우리가 서양의 알파벳에 쉽게 대응하면서 동시에 한자의 장점(뜻소리) 또한 함께 보유할 수 있게 해준다. 따라서 문자 자체가 음과 동시에 뜻을 함장하고 있어(예, '밥'은 그 형태 속에서 '밥상에 차려진 밥공기'의 훈훈함을 느끼게 해준다), 엄청나게 빠른 지식전파의 속도를 자랑하게 되었다. (동일한 의미체계를 독서하는데, 영어가 11분이 걸리면, 한글은 7분이 걸린다고 한다.)
20세기 들어 시작된 한민족의 융성은 세종대왕의 한글 창제 없이는 불가능하였을 것이다. 더불어 독특한 형태(모아쓰기)의 우리글은 그 많은 20세기의 시련 속에서도 우리 민족을 독자적인 문화강국으로 성장케 하는 안전판이 되어주었다.(자국의 문자가 없어 영어 알파벳을 빌려 쓰거나, 아예 영어를 쓰는 많은 나라들(특히 필리핀)을 보자)
가림토 문자설과 일본의 신대문자설은 지향은 양극단(한민족 선민사상과 일본인의 한글 시샘)이지만, 역사와 사실을 보지 못하는 점에서는 같은 정도의 인식 수준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2010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