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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영필 Zho YP Feb 11. 2016

가야와 신라의 삼국통일

조영필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힘은 어디에서 왔을까?


첫째, 변방에서 성장했다.


중국의 춘추전국시대를 보더라도 중원으로 분봉된 나라들은 뒤에 그 나라의 영역을 확장하기가 쉽지 않았다. 서로가 밀집되어 있어, 주변의 강력한 국가들이 서로의 성장에 방해가 되었다. 결국 변방의 나라들이 강성해진다. 변방은 처음에는 인구도 적고 오랑캐와 싸워야 했지만, 그들을 점차 개척하면서 나라를 넓힐 수 있었다.


독일을 통일한 나라도 브란덴부르크 변경백이었다. 그는 폴란드 지역을 개척하여 프로이센 왕이 되었고, 독일 내에서 영토 확장에 한계가 있던 다른 제후국들을 제치고 독일의 소통일을 이루었다.


중국을 통일한 진나라도 변방의 나라이었다. 진나라와 마지막까지 강력하게 대결한 초나라와 제나라 역시 변방의 나라였다. 같은 변방국이지만, 진이 중국을 통일한 것은 무엇 때문일까? 그것은 서쪽의 초원길을 통한 문물의 흡수를 통해 가능했다. 특히 진은 전차부대 기술을 서쪽으로부터 받아들여서, 진의 강군을 만들었을 것이다. 인류 역사에서 가장 선구적인 전차의 유적은 카스피해 북동쪽의 스텝 지대에서 발견되었고, 기원전 20 세기경으로 추정된다. 그것을 진나라는 중국의 다른 어느 나라보다도 빨리 받아들였을 것이다. 사실 진나라 자체가 서역 국가였고 또한 초원과 교통한 나라였는지 모른다.


신라는 어디서 문물을 받아들였나? 신라 역시 초원길을 통해 문물을 받아들였고, 독자적인 문화를 형성했다. 중국의 영향을 받고 있던, 고구려와 백제에 비해 중국문명의 영향을 비교적 덜 받았던 것이 오히려 그 초기 성장에 도움이 되었다. 이때, 중국의 영향이란 중앙집권적 제도를 말한다. 그것은 처음에는 국가체계에 질서를 부여하여 나라를 부강하게 하지만, 국가의 지속적인 발전에는 장애가 된다.


어느 정도 권력이 분산되어 견제가 가능한 민주주의가 결국 전체주의와의 역사적 대결(그리스와 페르시아, 영국과 독일, 미국과 소련)에서 승리하였듯이, 신라의 초기 왕권은 박, 석, 김 3 성이 공유하였고, 귀족의 위상도 매우 강하였다.(화백제도) 그러한 느슨하면서도 균형 잡힌 힘이 결집하여 신라를 강국으로 만들었다.


둘째, 가야를 병합하였다.


가야는 백제와 신라의 영역 중간에 속한 것이 그 운명이 되었다. 가야는 또한 구심점이 없었다. 가야가 성장하기 위해서는 빠르게 가야의 왕권이 성장하여, 전 가야를 통일하고 그 힘으로 신라 또는 백제를 제압했어야 했다. 가야가 백제를  제압하기보다는 가야가 신라를 먼저 제압하는 것이 빨랐을 수 있다. 가야와 신라는 둘 다 소백산맥 동쪽에 존재하였으므로, 두 나라 중 한 나라는 다른 나라를 장악할 운명이었다. 만약 가야가 신라를 병합했다면, 삼국통일은 가야가 했을 수도 있을 것이다.


초기 신라사에는 '왜'의 침공이 엄청나게 많이 기술되어 있다. 그 '왜'가 지금의 일본이라면, 과연 바다 건너 그렇게 신라를 자주 침범할 이유가 있었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 나는 그 사서의 '왜'가 바로 가야가 아니었을까? 하고 생각해본다. 혹은 가야의 주체가 한반도와 큐슈에 동시에 실재하였을지도 모른다. 아무튼 초기 역사에서 가야는 신라에 비해 결코 약한 나라가 아니었다.


낙동강 서쪽의 변한에서부터 출발하는 가야는 건국 초기에 낙동강 동쪽에도 그 영향력(김해, 창녕)이 있었고, 후기에는 소백산맥을 넘어서도 그 세력을 확장하였지만(대가야), 가야 보다 먼저 고대국가로 성장한 백제와 신라라는 두 강국의 틈바구니 속에서 독자 생존의 길을 찾지 못한다. 가야는 결국 신라에 병합되었다. 그것이 훗날, 신라가 백제를 제압하게 되는 결정적인 초기 한 포인트의 승점이었다.


신라가 가야를 통합한 것은 마치 시골청년이 귀족 처녀와 결혼한 것에 비유할 수 있지 않을까? 신라에 비해 해상교류를 통해 형성된 다국적인 가야의 문화(가야금, 야철 등)는 신라의 초원길 문화와 만나면서, 신라 문화를 더욱 살찌우는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 귀족 처녀는 또 신라에서 살아남기 위해, 언 손으로 걸레질을 쳤다. 즉, 전장에서 선봉에 선다.


셋째는 신라의 골품제도 한 몫했다.


골품제도는 폐쇄적이면서도 개방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다. 가야의 왕족들은 골품제도를 통하여, 신라의 상류층에 합류할 수 있었다. 그러나 고유한 신라의 왕족이 아니었으므로 기존 왕족들로부터 상당한 텃세도 겪어야 했다. 김유신의 어머니는 가야계 진골과 결혼하기 위해 진흥왕의 이복형제였던 그녀의 아버지의 집을 도망쳐 나와야 했다.


가야의 세력이 신라에 통합되는 과정에서 그 결속을 가능하게 했던 제도는 신라의 화랑제도였다. 가야의 세력은 화랑제도에 편입되어, 하나의 파벌을 형성하기도 한다. 화랑제도가 만들어진 것은 신라의 행운이라고 볼 수 있다. 당시 신라에서 기존 골품제도 외에 신분상승을 할 수 있는 방법은 대가야, 백제 또는 고구려와의 전투에서 공적을 쌓는 것 외에는 없었다.


핵심계층에 합류하기 위해 점령국(신라)에서 사력을 다해 싸우는 가야계의 모습을 나는 본다. 항상 전투의 선봉에는 가야계 사람들이 있었다. 특히 중요하였던 중원 전투에서, 그리고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는 과정에서 가야 왕손인 김유신의 조부로부터 김유신에 이르기까지 그들의 불굴의 전진이 아니었다면, 신라는 어디서 그런 추동력을 얻을 수 있었을까?


여기서 이를 또 공정하게 평가해주고 있는 신라의 골품 시스템을 본다. 공적이 있으면, 그 공훈에 따라 골품의 상승이 있었다. 일면 폐쇄적인 골품제도에 일부 적용된 이러한 공정한 평가시스템이 또한 신라의 힘이 아니었을까?


이것을 보면서, 이민족을 통합하여 세계 국가를 형성하고, 또한 피지배계층이나 피지배 국가 출신이 최고 지도자로 성장할 수 있었던 과거의 로마나 현재의 미국(오바마)이 연상된다.


다만 통합도 도를 넘으면 해가 된다. 그 예로는 로마 후기에 로마 시민권을 식민지에도 무상으로 수여한 정책을 들 수 있다. 당시 로마제국에서 식민지 백성은 로마 군인으로 봉직 후 은퇴 시, 비로소 로마 시민이 될 수 있었다. 그리고 시민권은 후손들에게 상속되었다. 그러나 시민권의 무상 수여 정책은 이러한 로마 군인을 통하여, 명예로운 로마 시민이 되는 비물질적 인센티브를 없애버렸다. 결국 그것이 로마를 쇠망에 이르게 하는 한 원인이 되었다. 지도층 또는 핵심집단(Inner Class)을 유지하고 동시에 공정한 경쟁을 통해 선발하는 시스템은 조직을 질적, 양적으로 성장시킬 수 있다고 본다.


그러나 신라의 융성은 더는 목표를 상실한 골품제의 한계에서 또한 쇠락으로 이어지는 것이니, 목표(시장)의 상실과 이로 인해 신분상승을 꾀할 수 있는 사닥다리(전쟁)가 치워진 상황에서 신라 하대의 사람들은 좌절하고 또 아부하고, 출국하고 또 반역한다.


(2009년)



Note:

전국시대의 전투는 춘추시대의 전투에 비해, 전차의 규모가 증강되고 있다. 춘추시대 진(晉)의 800대가 전국시대 초(楚)에서는 4,000대로 바뀐다. 전차 1대에 보병이 30명 붙는다고 하므로, 군대의 규모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2~3만의 군대에서 30~100만의 군대로 규모가 바뀐다.

그런데,

전국시대의 새로운 양상은 전차에 쓰였던 말들이 개별화되고 기동력이 강력한 기병의 수단으로 탈바꿈하게 된다는 것이다. 알렉산더대왕의 동정(BC 326년)과 비슷한 시기에 이미 중원에는 기병부대가 등장한다. 조(趙)나라의 무령왕(BC 325년 등극)이 먼저 선진문물을 과감히 받아들여 "호복기사"(오랑캐와 같은 기마복장을 하고 말을 타고 활을 쏜다)를 추진하였다.

진(秦)이 강성해질 수 있었던 것도 북방의 융(戎)과의 끊임없는 접촉을 통해 융의 서방문물을 수용했기 때문이었다. 융은 인도·이란계의 민족으로서 고도의 문명을 지닌 나라였다. 진나라도 조나라에 뒤이어 기병제도를 도입하였다.

(김용옥,[맹자 사람의 길(상)], 84-86쪽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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