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영필
대화 개신(大化改新)은 일본사에서 아주 중요한 사건으로 보인다.
[소가씨의 비밀]이라는 유튜브 동영상을 시청하게 되면, 소가 이루카(蘇我入鹿)는 AD 645년 어느 날(6월 12일), 자객들에 의해 천황의 어전에서 살해당한다. 그런데 나는 이 장면에서 이차돈의 순교(AD 527년)가 갑자기 생각났다. 소가 이루카와 이차돈은 권신과 충신으로 그들의 행적이 양극단이고, 그 죽음의 원인 또한 그만큼 다른 데도 말이다.
소가씨가 권력을 전횡하기 이전에는 모노노베(物部)씨가 권력의 중심부에 있었다. 소가씨와 모노노베씨가 권력투쟁을 하게 된 표면적 이유는 불교에 대한 입장 차이이다. 소가씨는 선진 외래 종교인 불교를 도입하고자 한 반면, 모노노베씨는 신관의 가문으로서 반불교적인 입장이었다. 소가씨는 먼저 천황의 윤허 하에 자기 집에 불당을 건립하였다. 그러나 역병이 돌게 되었을 때, 모노노베씨가 재난의 원인으로 소가씨의 불당을 지적하고 파괴한다. 이런 일이 몇 차례 더 있고서 결국 두 가문은 피할 수 없는 결전을 벌이는데, AD 587년 소가씨가 승리하여, 모노노베씨를 멸문하고 정권을 잡는다. 이때 여자인 스이코(推古) 천황이 즉위하고 AD 592년 쇼오토쿠(聖德) 태자가 섭정을 하게 된다.(율령국가 성립)
소가씨의 권력 전횡은 소가 이루카의 대에 들어서 그 도를 넘는다. 드디어 황자 나카노오에(中大兄)는 이루카가 천황위를 찬탈할 의도가 있다고 판단하여, 소가 이루카를 어전에서 참살한다.(AD 645년 대화 개신) 나카노오에는 이후 황태자가 되고, 훗날 덴지(天智) 천황으로 즉위한다.(AD 668년) 덴지 천황을 도와 대화 개신을 성공시킨 주역은 나카도미노 가마타리(中身鎌足)인데, 그는 모노노베씨와 같은 신관의 후손이었다. 덴지 천황은 가마타리의 후손에게 후지와라(藤原)의 성을 수여하였다. 이로써 일본 최고의 귀족 가문인 후지와라가 출현하게 된다.
따라서 소가씨의 출현 및 득세와 멸문 과정에서 그 모티브는 불교이다. 어쩌면 소가씨는 일본으로의 불교 전래와 불교 관련 선진문화의 도입이 자신들의 가문의 사명이었는지도 모른다. 이것이 이차돈의 순교와 오버랩되는 것이다.
대화 개신 직후, 김춘추가 일본을 방문하였다고 한다. 따라서 대화 개신 세력이 신라계라고 하는 주장이 유튜브 동영상에 있다. 그런데 AD 660년 백제가 멸망하자, 일본은 백제부흥 세력을 지원하기 위해 엄청난 군선을 모아 참전하였으나 패전한다.(AD 663년 백강전투) 만약 대화 개신의 세력이 정말 신라계이었다면, 왜, 일본은 백제를 돕기 위해 그토록 전력을 다해야 했을까? 한반도와 일본의 역사적 관계는 일면적 시각으로 결론을 내리기는 쉽지 않다.
여기서 나는 일본의 신불 습합(神佛習合, 일본 신도와 불교의 융합)이란 것에 대해 생각해본다.
만약 소가씨의 숭불 사상이 성공하였다면, 일본의 종교는 한국의 불교와 유사하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우리나라에서는 샤머니즘(무교)이 대웅전(환웅전)을 부처에게 내어주고, 칠성각과 산신각으로 불사(佛寺)의 뒷전으로 밀려났다. 그러나 일본에서는 신사 내에도 사찰이, 사찰 내에도 신사가 있는 등, 신도와 불교가 엉켜있다. 원래는 그것이 거의 구분이 안 갈 정도로 섞여 있었는데, 메이지 유신 때의 배불정책으로 신도와 불교가 어느 정도 서로 정리된 것이 그나마 오늘날의 모습이라고 한다.
즉 소가씨를 통하여 불교는 기존 신도 세력의 저항에도 불구하고 일차적으로 도입되었으나, 다시 나카도미노와 같은 신관 세가의 재등장으로 불교 일방의 종교생활은 억제되었다. 그러나 유입된 불교 사상의 높은 문화 수준은 인정되어져, 부처를 신도내의 신격으로 포섭한 것이 오늘날의 신도의 모습(신불 습합)이며, 대화 개신의 결론이라고 하여야 할 것이다.
일본 신도는 한반도뿐 아니라, 알타이의 무속 신앙과 그 궤를 같이 하며, 자국을 신국(神國)이라고 하는 점에서는 신라의 화랑도나 풍월도와 유사한 느낌이다. 소가씨와 모노노베씨의 정쟁도 불교파와 국신파의 투쟁이었다. 소가씨의 승리는 불교파의 승리이었으나, 훗날 소가씨의 패배로 또 불교가 완전히 배척된 것은 아니었다. 일본 특유의 신불 습합이 이루어진 것이다. 한국에서는 불교를 중심으로 무교가 포섭된 반면, 일본에서는 신도가 주체가 되어 불교를 흡수하였다.
그러나 메이지 유신 때, 다시금 불교가 탄압이 되어서, 신불 습합이 해체되어간다. 즉 일본 신도는 불교를 흡수하고, 자신의 정체를 강화한 후, 불교를 분리시킨 것이다.
일본의 전국시대에 불교 제 종파는 무력의 측면에서는 막부에 철저히 궤멸되고, 권력에 부용된 반면, 신도는 천황의 신화적 권위를 통하여 막부와 쇼군에 대해 독립적으로 존속하였다. 천황과 신도는 결국 일본의 봉건제를 지속시킨 신성한 권위임과 동시에, 향후 근대화를 전개하는 별도의 명분이 되어 주었다. 따라서 일본사에 있어서, 일본을 가장 일본스럽게 만들어 준 사건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대화 개신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백강의 패전에도 불구하고, 한반도와 대륙에서의 침략 가능성은 오히려 야마토 국가의 왕권 확립을 강화시킨다. 또 그렇게 결속된 군사력으로 일본은 동북지방의 에조(아이누)를 정벌하여 영토를 확장하는 등 고대국가의 틀을 서서히 갖추어 나간다.
(2015. 3. 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