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영필
만주는 후금의 누르하치가 일어난 곳이다. 이놈들이 중원을 정벌하고 몇 안 되는 종족이 중국을 다스리려다 보니 부족 전체가 화북 땅으로 이주하였다. 그 넓은 땅에 사람이 살지 않게 된 것이다. 그런데, 자기는 이제 살지 않아도 남이 들어와서 사는 것은 싫다. 또한 어떤 세력이 그곳에서 터를 잡고, 자신들이 한 것처럼 중국을 공격할까 봐 걱정이 되었다. 그래서, 청은 그들의 고향인 만주를 용흥발상지지라고 해서 목책(버드나무를 심어 울타리를 만들었기에 이를 유조변이라고 함)을 하고는 아무도 들어가 살 수 없도록 하는 봉금 정책을 펼쳤다.
일종의 비무장지대, 즉 무주공산이 200년 이상이나 방치된 셈이다. 그런데 이 공간이 정말 어마어마하게 넓다. [조선사람의 세계여행] 400-401쪽의 서북피아양계만리일람지도에서 그 규모를 알 수가 있다. 현재의 동북 3성 중 2성이 해당되는 구역이다. 이 공간이 우리에게는 간도로 명명되는 공간이며, 1712년에 세워진 백두산정계비의 서위압록동위토문이라는 구절의 해석을 둘러싸고, 정혜 감계(1887) 담판에서 조선 대표 이중하가 "내 목은 자를 수 있을지언정, 나라의 땅은 좁힐 수 없다"라고 한 바로 그곳이다. 결국 조선과 청의 영토 경계 협상은 결렬되고, 1909년 청과 일본의 간도협약에 의해 간도의 영유권은 청나라에 유리한 방향으로 결정되었다.
나는 이 역사를 어려서부터 배울 때, 조선의 땅(간도)을 청에게 양도한 일제(을사보호조약으로 조선의 외교권 박탈 시기)가 무슨 면목으로 또다시 독도를 가지고, 이웃 나라를 희롱하는가? 하는 비분강개의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또 이러한 역사적 직무 유기에 대해 일본에게 책임을 묻지 않는 우리 정부의 입장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물론 이것은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더 알게 된 것은 있다. 그것은
1. 만주는 역시 원래 만주족(청)의 땅이었다는 것이다. 다만, 그것이 빈 땅이었기에 우리가 가서 살기도 한 땅이었을 뿐이다.
2. 만약 명나라가 끝까지 존속하였고, 만주족이 별개의 실체로 있었다면, 그 영토가 어떻게 되었을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 아마 만주국이나, 후금이 그대로 존재하지 않았을까? 그러면서 우리와는 발해의 승계를 놓고, 역사적으로 많이 다투었을 것이다.
3. 조선은 만주가 우리 땅이라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고, 그럴 욕심도 없었다. 지극히 한반도 강역에 만족하고 있었다.
4. 물론 우리가 근대화를 먼저 일으키고, 영토 제일주의와 그를 담보할 만한 현대적 군사력이 있었다면, 우리가 그 땅을 차지하고 있었을 수도 있겠다. 러시아가 우리와 국경을 점유하고 있는 것은 표트르의 팽창주의에 의한 것이니까.
5. 일제에게 있어서, 간도 협약은 고민할 게 없었다. 경계의 일부가 조선의 것이 되건, 청의 것이건 간에, 일제는 만주를 식민지화할 생각이었기 때문이다. 일본 제국주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자국의 세력 내 지역(조선)과 지역(만주) 간의 경계를 명확하게 구획하는 방향을 추구한 것이었다. 훗날 일본은 부의를 왕으로 하는 만주국을 성립시킨다.
6. 예전에는 선이 국경이 아니고, 지대가 그 국가의 영역이었는데, 근대에 접어들어 명확한 금 긋기를 하는 과정에서 간도 문제가 발생하게 된 것이다. 조선인이 자꾸 넘어 들어가니까, 청이 그 지대의 권리를 뺏길까 봐 우려하여, 국경회담을 요청한 것이었다. 그런 와중에 지명의 해석에 대한 인식의 문제가 개입된 것이 간도 국경 분쟁이었다.
간도는 우리가 자신의 주권을 가누기도 힘든 상태에서 현재의 모습으로 받아들여진 것인데, 독도 문제는 어떻게 이 뿌리가 형성된 것일까? 일본은 1905년 2월에 시네마현 고시로 무주지 선점을 등록하였다. 조선은 1905년 11월에 을사늑약으로 외교권을 박탈당한다. 그리하여, 일본의 이상한 시도에 이의 제기를 할 주체는 없게 되었다.
독도는 해양영토의 관점에서 일본이 시비를 거는 지역이다. 만약 독도에 대해서 일본이 시비를 계속 걸지 않는다면, 그들이 일본해라고 주장하는 지역의 2/3는 한국의 해양주권의 지배 하에 놓이게 된다. 바로 이 사실을 분명히 인식하고 문제를 풀어가야 한다.
이승만의 반일 정책(그리고 이승만의 영해권 주장, 이승만 라인)은 그래서 우리 역사에 엄청난 이득(Benefit)을 주는 것이었다. 국교정상화라는 과실을 박정희가 활용할 수 있게 되었고, 그 대일청구자금이 역사의 본원적 축적 과정 없이, 한국이 짧은 시일 내에 경제발전을 달성할 수 있게 하는 요긴한 종잣돈이 되어 주었다. 그리고 김종필/오오히라 협상에서 일부 나왔다고 하는 독도 폭파론은 그렇기에 그 평화 협상의 논리적 결론이었다. 왜냐하면 양국의 긴장 요소를 최종적으로 제거하려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민족과 영토 정서상 결코 수용될 수 없는 제안이었다. 그 결과 오늘날 독도는 언제나 한일간의 불편한 과거를 되새김질하는 깃발이 되었다.
그렇지만, 이후 일본에 대해 동해의 해양 영역을 명확히 해주지 않은 점은 역대 정부의 전략적 역량이었다. 그것을 어로수역 협정에서 문서화하여 인증해준 것은 김대중 정권이었다. 그들은 독도 앞까지 일본의 경제수역을 인정해주면서, 무엇을 반대급부로 받아내었는가? 나는 그것이 못내 궁금하다. 최소한 독도에 대한 시비가 더 이상 계속되지 못하게는 하여야 하지 않았을까?
어쨌든 일본이 국제법상 100년 안에 시시비비를 남기고자 하는 독도 문제에 대해 우리는 크게 흥분하지 않는 것이 오히려 필요할지도 모른다. 그것이 한국에 대한 위협이 아니고, 세계에 대한 시위일 수가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침착하게 그 사료와 배경 그리고 그 역사적 함의를 누군가는 정리하고 있어야 할 것이다.
중국은 동북공정, 황해를 자신의 내해로 간주하고 있고, 일본은 임나일본부, 독도를 자기네 땅이라고 우기며, 우리를 압박할 뿐만 아니라, 동지나해, 남지나해에서는 주변 국가 간의 각종의 국경분쟁은 끊일 사이가 없다. 우리도 국가 천년대계의 관점에서 역사의 방향과 우리 자존의 강역, 그리고 그에 걸맞은 국력을 함양하기 위해 노력을 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런 준비가 있다면, 러시아가 우랄지역 이동의 시베리아를 다 먹었듯이, 미국이 텍사스와 캘리포니아, 알래스카를 먹었듯이, 우리에게도 그럴 기회가 언젠가 오게 되지 않을까?
(2011년)
Note: 결론이 황당했다. 우리나라도 다른 나라들처럼 기회를 보아 땅을 넓히자고 한 것이니까. 제국주의적 영토주의적 봉건주의적 사고체계의 산물이라고 비판받아 마땅하다.
이제는 좀 다른 생각이 필요하다고 본다. 사상의 혁신, 정신의 확장이 필요하다. 영토의 확장이 아니라, 합리성과 초월성의 조화로운 현대인으로서 한국민족이 깨어나야 한다. (2020. 4.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