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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영필 Zho YP Feb 21. 2016

반도 국가의 고민 - 우리 역사의 정체성

조영필

임진왜란에서 일본의 압도적 군사력을 막아낸 것은 불세출의 성웅 이순신과 조선수군의 화력이었다. 그런데 섬나라인 일본이 왜? 오히려 육지 국가인 조선과의 해전에서 지고 만 것일까? 일본 전국시대의 주요 전쟁을 보면, 해전은 없다. 전쟁은 주로 혼슈에서 일어나며, 야전에서 결판난다. 따라서 충무공은 왜의 수군이 배를 건너뛰어서 육박전 하듯이 수전을 육전화하는 것을 봉쇄한다. 쇠갑판에 못을 박고, 견고함과 속도로 적의 배를 두 동강 내고, 화약으로 불을 내뿜는 거북선은 오직 수전은 수전으로 라는 모토의 무기체계인 셈이다.


그러면


이제 강한 해군을 가진 조선은 왜? 황해를 지배하지 못했을까? 그리하여, 황해를 유럽의 지중해로 만들지 못한 것일까? 고려나 조선의 해군이 노르만의 유럽 정벌처럼 동아시아를 호령할 수는 없었을까? 그리하여, 스페인과 포르투갈이 지중해에서 갈고닦은 항해술로 전 세계를 자오선으로 반 나누어 금 그었듯이, 우리도 동해와 황해, 그리고 동지나해와 남지나해에서 갈고 닦은 항해술과 전술로 오대양 육대주를 500년 이상 먼저 누비고 있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러나  


한반도는 북쪽으로 넘어오는 대륙의 백만 대군을 막아낼 만한 지형 지물이 없었다. 그것은 살수 대첩에서 시도되었으나, 남한산성의 고립으로 최종적으로 확인되었다. 또한 고려 최씨 정권에서 보듯이, 한반도의 중심부에 대륙세력을 견뎌낼 만한 제주도에 비견할 큰 섬이 없었다. 겨우 육지에 붙어 있는 작은 섬 강화도가 있었을 뿐이다.  


이러한 지형적 환경에 따른 한반도의 지위는 AD 670~676년 간의 나당 전쟁의 승리로 비로소 확정된다. 그것은 중국과 한반도 간의 신사협정이었다. 그 이전까지 한사군의 설치와 수양제 그리고 당태종이 그렇게 점거하고 싶어 하던 한반도는 이제 중국이 직접 통치로 넘보지 않는 독립 영역으로 남게 되었다.


대신에


한반도는 중국을 사대하면서, 중화의 질서에 안주하여야 했다. 한반도가 이 질서를 준수하는 한, 이후 중국의 어떠한 패자도 한반도를 강점하거나, 직접적으로 지배하려고 하지 않게 되었다. 이것이 중국과 한반도의 질서이고 우리의 역사가 되었다.


그래서


한국은 근대화 과정에서 그렇게 세계사에 무지하고 무력하게 살았어도, 독립국으로 존속할 수 있었다. 또한 한국의 국경은 압록강과 두만강을 넘지 않는다. 왜냐하면, 한반도의 경계를 넘게 되는 순간, 그것은 중국에 대한 위협이 되어, 한반도 중심 국가의 자멸을 초래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통일 신라 이후 한국의 역사는 한반도에 한정되어 있었지만, 임진왜란과 병조호란의 양란 이후에는 한 뼘도 더 넓힐 수 없는 북쪽의 유조변(간도)과 조선통신사를 통해 안정된 삼면의 바다 속에서 조선은 진공과도 같은 300년의 역사를 만들게 되었다. 당연히 무인과 상인이 터를 잡을 공간은 없었다. 몇 백 년 전 남의 나라의 주자학만을 부여잡은 사대부들이 지도하는 사농공상의 배고픈 카스트 제도 하에서 조선 백성은 그 가난의 사슬을 누구라도 끊어주기를 애타게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2011년)


 Note:

서구의 대항해시대의 원동력은 ‘탐욕(돈)과 명분(기독교)’이다. (2023. 3.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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