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영필
일본의 역사를 볼 때, 나는 항상 쇼군(정이대장군)에 감탄하곤 한다.
왜냐하면 무사의 세력이 정권을 완전히 장악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기존 천황의 질서를 보존해두었기 때문이다.
과거 인류의 역사에서, 황제나 왕은 어느 시대, 어느 나라를 막론하고 권력을 잃는 순간 죽음에 이르게 된다. 천수를 누리는 경우는 아들에게 왕위를 물려주었을 때 정도이다. 그러나 자식에게 목숨을 잃는 경우도 적지 않다.
실권은 곧 죽음이므로, 왕은 살아 있을 때까지만이 왕인 것이다. 영국의 여왕 엘리자베스 2세가 그 아들 찰스가 환갑이 넘었는데도 왕위를 계속 유지하고 있는 것을 보면, 그 왕이란 자들의 뼈 속 깊이 새겨진 공포가 어느 정도일지 짐작이 간다. 지금은 왕위 승계 후의 사람들의 무관심이 더 공포스러운 것일지 모르겠다.
권력을 양도하고도 죽지 않게 된 것은 보통 우리가 근대 대의제 민주정에 의한 것이라고 생각하겠지만, 또 있다. 그것은 이원 권위 체제이다. 영국 왕들이 더 이상 죽지 않게 되고 일본 천황들이 더 이상 죽지 않게 되었다.
우선 일본사에서 정이대장군이 가능하였던 이유는 일본의 주력인 야마토 계통의 주민과는 다른 이민족이 일본 열도 내에 이미 거주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을 가리켜, 에조(하이蝦夷 또는 에미시, 일본섬에서 이민족으로 취급되었던 민족, 근세에는 주로 아이누)라고 하는데, 헤이안 시대에는 일본의 혼슈 중부와 그 이북에 거주하고 있었고, 전국시대 초기까지도 혼슈 북부는 아직 미개척된 이민족의 땅이었다.
따라서 일본의 야마토 천황 정권은 이들을 정복 복속하기 위하여 정이대장군을 파견한다. 그러나 이러한 장군의 거병은 애당초 에조에 의한 어떤 특정한 위난을 평정하기 위해 출정하는 것이므로, 분명히 정해진 목적이 있었고, 그에 합당한 일정한 기한이 있었다. 따라서 목적이 완결되거나, 기한이 다하면, 다시 중앙에서 파견된 일반 행정관에게 그 지역의 행정 및 명령계통을 인계하고, 교토에 복귀하여야 했다.
이러한 정연한 국가의 질서에 역행하게 되었던 것은 여러 가지 복잡한 사정이 있는 것이지만, 11-12세기에 동북지방에서는 오슈의 후지와라 씨 가문이 4대, 백 년 간에 걸쳐 교토의 중앙정권에 독립적으로 이 지역을 실질적으로 지배하게 되었다.
이것은 11세기 초 미나모토노 요리요시(가와치 겐지의 2대 당주)와 그의 아들 요시이에가 동북의 난(전 9년, 후 3년의 역)을 해결하기 위해 임시적으로 가졌던 계엄사령관과도 같은 특수한 권력이 점차 발전하여, 그들이 떠나고 난 후, 동북의 지배자가 된 오슈의 후지와라 씨 가문에 의해 평시에도 사법 및 행정권을 가지게 되는 조직체계로 발전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 가문을 멸문시키면서 12세기 말엽 일본사의 첫 막부 정권인 가마쿠라 막부를 성립시킨 미나모토노 요리토모(요시이에의 증손)는 다름 아니라 바로 중앙의 천황 정권의 행정체계와 양립하여 존속 가능하였던 오슈의 후지와라 씨의 실질적 지배 구조에 착안하여 막부를 개창한 것인 셈이다.
물론, 이러한 막부의 지배구조의 실체는 가마쿠라 막부에서도 조금씩 진화 발전하였고, 이어진 무로마치 막부를 거쳐, 도쿠가와 막부에 이르러서야 오늘날 우리가 막부 정권이라고 하는 그 완전한 전국적 전면적 통치구조의 실체를 형성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천황과 쇼군이라는 이원적 정부체계는 일본의 경우, 특히 근대화 시기에 엄청난 도움이 되었다. 이질적인 서양문명의 압도적 위협 속에서 일본의 개혁 세력들은 구태를 벗지 못하고 근대화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기존 권력(도쿠가와 막부)을 포기하고, 별도의 권위(천황)에 정통성을 부여하여 새로운 권력과 정치체제를 창출할 수 있었다(대정봉환). 따라서 나는 이러한 이원적 권위의 체계가 모든 경쟁하는 조직에 있어서는 일종의 보험 장치가 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이러한 이원적 권위의 체계를 보여주는 또 다른 사례로는 크게는 유럽에서의 세속권력(왕 또는 황제)과 종교권력(교황) 간의 긴장도 떠오르지만, 가장 유사한 구성은 영국의 의회 정치 발전과정에서 오버랩되는 측면이 있다. 왜냐하면, 영국 왕은 영국의 국교인 영국 성공회의 형식적 수장이기 때문이다. 영국은 마그나 카르타와 권리청원 그리고 권리장전을 거쳐, 그 왕은 군림하나 통치하지 않는 전통을 가지게 되었다. 그렇다고 왕이 완전히 허수아비가 되는 것은 또 아닌 것이다.
유사한 경우는 태국에서도 볼 수 있다. 태국의 정치는 수상과 의회가 하지만, 태국의 국왕은 태국의 국민들로부터 많은 존경을 받고 있고, 필요한 경우에는 중요한 정치적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국민의 95%가 불교를 신봉하는 불교국가인 태국에서 태국 국왕은 또한 불교의 수호자이기도 하므로, 입헌군주제 하에서도 국왕의 위상은 매우 높다.
그런데 일본의 쇼군 체계는 그 쇼군 체계를 낳은 긴장을 도쿠가와 시대에서도 계속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홋카이도오의 아이누의 존재이다. 정벌해야 하는 이민족과 확장할 수 있는 미개척지가 있는 한 무사계급은 그 존재의 이유를 잃지 않는다.
베트남의 역사를 보면, 하노이를 중심으로 하는 정치 세력이 끊임없이 남진하고 있다. 그 북쪽 변경은 중국 세력에 의해 막혔고 서쪽은 산악지방으로 진출의 가치가 낮았지만, 남쪽으로는 그 팽창을 근대까지 지속할 수 있었다. 따라서 오늘날 베트남은 매우 길쭉한 나라가 되었는데, 이러한 베트남의 개척사로 베트남 민족은 군사적으로 강인한 DNA를 형성할 수 있었다. 그들의 대외 항쟁의 역사(몽골, 중국, 프랑스, 미국)에서 우리는 그들의 자긍심을 충분히 확인할 수 있다.
한반도의 정치 세력에게 한반도를 벗어나, 개척 가능한 영역은 세종 대의 사군육진 개척 이후로는 존재하지 않았다. 북쪽의 만주는 청(淸)의 발원지(만주)이어서, 봉금 지대이었으므로, 심리적으로 더 이상 영토를 확장하기 힘들었다. 따라서 북쪽의 공지와 삼면의 바다 속에서 진공상태와도 같은 평화를 누린 조선은 문치와 문약에 기울어지게 되어, 무관 계급과 실무 세력(상인 계급)이 성장하지 못하게 되었다.
또한 변혁기에 개혁세력들은 기존의 무능한 왕가를 개조하는 것 외에는 그것을 대체하는 대안을 달리 찾을 수가 없었다. 기존에 가지고 있지 않는 새로운 정통성을 창조하는 것은 너무도 혁명적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뜻있는 개혁세력들조차도 서로 힘을 하나로 모으지 못하고 우왕좌왕하다가 결국 국권을 잃게 되었다.
내가 생각하기에 한국사에서 막부를 세우기에 가장 근접한 세력은 이성계의 세력이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정도전이라는 대사상가가 있었기에, 막부보다는 역성혁명의 정당화로 모든 권력을 장악할 수 있었다. 그것은 또한 불교를 뒤엎는 유교적 국가 이념으로의 전환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기도 하였다.
다시 되돌아보면, 우리 민족이 처한 지형적 환경의 한계 속에서 우리는 우리의 근대사에서 많은 안타까움과 슬픔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사는 역사에 유례없는 군신 공치(君臣共治)의 붕당 정치사를 탄생시켰고, 그 역사의식으로 인하여, 조선왕조실록을 남기게 되었다. 또한 애민사상의 결정체인 한글은 또 어떤가?
우리에게 쇼군(귀납적)은 없었다. 다만 우리는 아직도 우리 몫의 역사적 미결과제를 짊어지고, 시지프스와도 같이 저 연역의 산정(山頂) 위로 또다시 바위를 굴러 올려 간다. 시간이 멈추지 않는 것처럼.
주:
일본의 이민족은 혼슈 중부 이북뿐 아니라, 규슈 남부에도 있었다. 규슈 남부를 정벌하는 장군은 정서대장군이라고 한다. 동북지방을 정벌할 때도, 서부 해안(동해 방면) 쪽은 정적대장군이라고 하였으며, 동부 해안(태평양 방면) 쪽이 정이대장군이다.
또 평시에 이적의 통제를 목적으로 하는 진수부장군이 있었고 오슈의 후지와라 씨는 이 직함을 활용하였다. 그러나 가마쿠라 막부 이후로 일본 전역의 무사를 지도하는 쇼군(정이대장군) 막부의 상설 체제가 형성된 이후 더 이상 다른 명목의 장군(진수부장군 등)은 필요치 않게 되었다. 다시 말하여, 임시직인 정이대장군의 상설화란 평시 진수부의 기능을 전국화 시킨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