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영필
대륙은 합리주의이고, 영국은 경험주의이다. 경험주의는 임기응변인 것이고, 합리주의는 원칙주의이다.
원칙주의이며, 고집불통의 원조는 유대교와 유태인이다. 남들은 모두 다신론인데, 혼자 유일 신관을 주장하여, 상호주의적 존중을 배신하였다. 선민사상으로 뭇 이웃 민족과의 불화는 당연한 덤이었는데, 영광스러운 고립을 자초하였다.
유태인이 가지고 있던 유대교가 기독교로 변신하여, 유럽 문명을 관통해나간 이야기는 굳이 부연하지 않는다. 다만, 기독교 또한 원칙주의자들이었고, 그 원칙의 탐구가 합리주의를 잉태시켰다. 데카르트는 나는 믿는다 고로 존재한다에서 믿는다를 생각한다로 바꾸었다.
그러나, 섬나라의 생존환경은 대륙보다 더 유연한 사고가 필요하였기에, 경험주의를 발전시켰다. 경험주의가 동서양의 양안에서 무력에 기반한 이원 정부체계를 발전시켰고, 상인들을 위한 자본주의를 발흥시켰다.
그에 반해, 대륙에서는 원리주의에 몰입하게 되는데, 그 극한의 표상이 조선의 선비정신이다. 그들은 한번 옳다고 생각한 것을 철저히 지키고 실천한다. 목숨을 구걸하지도 않는다. 따라서 조선은 최고의 영예를 사육신에게 바친다.
대륙에선 다수를 움직이는 일통하는 정신의 감화가 중요하였기 때문이다. 바다 건너 숨을 곳도 없다. 오직 정신의 힘만이 사람을 움직이고, 비록 오늘 죽는다고 하더라도 역사에 이름을 남길 수가 있다.
조선은 반도인데, 대륙도 아닌 반도에서 대륙의 원리주의 일색이었던 것은 놀랍다. 그에 반해, 이탈리아 반도에서 기독교를 승인하기 전 로마제국은 다신론과 실용주의로서 해양세력의 특징을 보유한다. 반도라고 하더라도 대륙의 유전자를 발현할지, 해양의 유전자를 발현할지는 시대와 상황에 따라 다르다고 할 것이다.
역사적으로 해양세력의 경험주의가 대륙에 상륙하게 된 것은 바로 신대륙인 아메리카에서 가능하였다. 그곳에서는 모든 합리주의와 경험주의가 교배되었고, 경험주의는 비로소 대륙의 색채를 띠게 되었다. 따라서 미국은 세계를 앞서가는 신세계가 될 수 있었다.
미국의 정치체제 또한 합리와 경험의 교배이다. 대통령제는 원칙주의의 산물이지만, 의회의 양원은 경험주의의 산물이다. 51개 자치주의 연정 형태는 보편적 원칙이 지역적 특수성에 유연하게 적응한 역사이다. 중앙집권과 지방분권이 조화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한때는 영국과도 같이 외교적으로 고립주의를 채택하였지만, 지금은 세계의 경찰을 자임한다. 그러나 미국 이데올로기에 대한 자신감이 조금씩 상실되어가는 지금은 다시, 고립주의로 돌아가려는 흐름이 나타나고 있다.
누구나 세상을 원칙과 필연에 입각하여 설명하고 싶다. 그러나, 그 해결책을 마냥 기다리기에 인생은 짧고, 문제는 심각하다. 그것이 우리가 경험과 개연에 의하여, 한 고비를 넘겨가야 하는 이유인 것이다. 인류가 생존하는 한 이러한 연역과 귀납 그리고 이(理)와 기(氣)의 갈등과 조화는 영원한 숙제일 것이다.
다만, 오늘 내가 확인한 것은 우리 민족의 역사 코드는 실용보다는 이념에 가깝다는 것이다. 그래서 오늘도 우리네 술집에서는 서로 다른 주장을 목청 높이 외치느라, 술판은 사정없이 뒤엎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