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부채, 그 첫 5000년

데이비드 그레이버

by 조영필 Zho YP

부채, 그 첫 5000년



<프롤로그>

5쪽: 1970년대 석유위기 때 OPEC(석유수출국기구) 회원국들이 새로 얻은 부를 서구의 은행으로 쏟아부었다... 시티뱅크와 체이스뱅크는 전 세계에 직원들을 보내 제3세계의 독재자들과 정치인들에게 대출을 쓰도록 권했다... 처음에는 터무니없이 낮은 이율로.. 1980년대 초 미국의 긴축 통화정책 때문에 이율이 20%로 치솟았다. 이것이 1980년대와 1990년대 제3세계의 부채위기로 이어졌다. 이때 IMF가 개입했으며... 빈국들은... 기본 식료품에 대한 가격안정정책을 포기하고... 전략식량을 비축하는 정책과 무료건강보험과 무상교육까지 포기해야 했다.


10쪽~: 만약 역사가 뭔가를 보여준다면, 그것은 폭력에 근거한 관계들을 정당화하고 도덕적인 것처럼 보이도록 만드는 최고의 방법은 그 관계들을 부채의 언어로 다시 구성하는 것이라는 사실이다. 부채를 바탕으로 할 경우 폭력의 희생자가 뭔가 잘못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마피아 단원들은 이것을 잘 이해하고 있다. 정복군의 지휘관들도 이것을 잘 이해하고 있다... 희생자들은 "정복군들에게 목숨을 빚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죽음을 당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 국제재판소들은 보통 침략자들에게 배상을 요구한다. 독일은 제1차세계대전후... 이라크는 1990년... 의 쿠웨이트 침공에 대한 배상금을... 그런데도 마다가스카르와 볼리비아, 필리핀 같은 제3세계 국가들의 부채는 그와 정반대로 돌아가는 것 같다... 프랑스의 갈리에니 장군이... 마다가스카르를 '평정'한 뒤 가장 먼저 한 일 중 하나가... 세금을 무겁게 부과... 마다가스카르에 '침공당한' 비용을 물리기 위한 것이었다... "국제공동체"가 도덕적 이슈를 들고 나온다면, 그것은 마다가스카르 정부가 부채상환을 지연시키고 있다고 느낄 때뿐이다.

그러나 부채는 승리자의 정의만은 아니다. 그것은 또한 승리를 해서는 곤란한 승리자를 처벌하는 방법이 될 수도 있다... 그 금액(약 180억 달러)은 고의로 상환이 불가능한 규모로 정해졌으며, 그에 따른 통상중단은 "아이티"라는 이름을 부채와 빈곤, 인간의 불행과 동의어로 만들어 버렸다.

그런 한편으로 부채가 그와 정반대를 의미하는 경우도 간혹 있다. 1980년대를 시작으로... 미국이 제3세계의 부채를 모두 합한 것보다도 더 많은 부채를 쌓았다... 그래도 미국의 외채는 미국의 군사적 보호를 받는 국가들(독일, 일본, 한국, 대만, 태국, 걸프만 국가들)의 기관투자가들이 보유한 미국 재무부 채권의 형식을 취하고 있다... 조금 변했다. 중국이 그 게임에 끼어든 것이다... 그렇다면 미국 재무부로 지속적으로 흘러들어가는 이 모든 돈의 정체는 무엇인가? 대출인가? 아니면 공물인가?


13쪽~: 역사를 돌아보면 특별히 달리 대접받는 부채와 채무국이 늘 있어왔다는 사실이 확인된다. 1720년대 영국에서 채무자 감옥의 실태가... 폭로된 적이 있었다... 미국의 경우는 '캐딜락' 채무자인 반면, 마다가스카르는 그 옆 감방에서 굶주리고 있는 극빈자 채무자이다. 그 사이에 캐딜락 채무자들의 하인들이 가난뱅이 수감자에게 그의 문제가 순전히 그 자신의 무책임 때문인 이유에 대해 강의한다.

갱단원이 당신에게 총을 들이대며 "보호금"으로 1천 달러를 요구하는 행위와, 똑같은 갱단원이 권총을 들이대며 1천달러의 "융자"를 내놓으라고 요구하는 행위의 차이점은 무엇인가?... 미국이 군사적 우위를 상실하게 되면, "융자"는 아주 다르게 취급될 것이다... 그러나 결정적인 요소는 여전히 권총인 것처럼 보일 것이다.


17쪽~: 부채의 역사를 돌아볼 경우 가장 먼저 발견되는 것이 심각한 도덕적 혼동이다... 빌린 돈을 갚는 것은 도덕의 문제라고 생각하면서도 돈을 빌려주는 사람은 누구나 사악한 인간이라고 인식하고 있다는 사실에서 그 혼동이 가장 극명하게 보인다... "정복당한" 사람들에게도 결혼과 장례가 돈이 가장 많이 드는 대사였다... 고리대금업자 자신들이 도덕의 종국적 권위자인 경우다.


25쪽~: ... 도덕성을 객관적인 산수로 바꾸고, 그렇게 함으로써 그렇지 않았더라면 무도한 것으로 보였을 것들을 정당화하는 돈의 능력이다... "부채"와 단순한 도덕적 의무의 차이는 채무자의 소유물을 압류하거나 다리를 부러뜨리겠다고 협박함으로써 그 의무를 강제할 사람의 존재 여부에 있지 않다. 그 차이는 단지 채권자의 경우 채무자가 갚아야 할 금액을 정확히 책정할 수단을 갖고 있다는 사실에 있다... 폭력이 인간관계를 수학으로 바꿔놓는 방법이 거듭 소개될 것이다. 폭력은 부채를 둘러싼 모든 논란에 도덕적 혼란이 일어나는 종국적 원인이다... 국가와 시장 그리고 자유와 도덕성과 사회성의 본질에 대한 기본적인 인식은 전쟁과 정복, 노예제도의 역사에 의해 형성되어 왔다.


29쪽~: 이번에는 금융가들이 상상을 초월하는 규모로 그 짓을 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들이 늘린 부채의 규모는 지구촌 국가들의 GDP(국내총생산)를 전부 합친 것보다도 크다... 자본주의를 규정하던 기관들(리먼 브라더스, 시티뱅크, 제너럴 모터스)이 붕괴하거나 휘청거렸고 탁월한 지혜인 것처럼 보였던 모든 것들이 허위인 것으로 드러나고... 여론조사에 따르면, 미국인들의 절대 다수가 경제에 미치는 영향이 어떠하든 금융기관의 구제에 반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불량 모기지론으로 고통 받는 보통시민들에 대해서는 구제금융을 실시해야 한다는 인식을 보였다.


33쪽: 과거 가상의 신용통화 시대들은 거의 예외 없이 잘못될 수 있는 일을 사전에 예방할 제도들을 창조했다. 대출자들이 관료와 정치인들과 결탁하여 지금처럼 사람들의 고혈을 짜내는 짓을 하지 못하도록 막았던 것이다. 당연히 채무자들을 보호할 제도도 수반되었다... 이 시대는 먼저 채무자가 아닌 채권자를 보호하는 것이 목적인 IMF 같은 글로벌 기관들의 창설로 시작했다.


34쪽: 상식적인 관점에서 보면 국가와 시장은 서로 정반대의 원칙을 추구하는 곳이다. 그러나 역사적 사실들을 들춰보면, 국가와 시장은 함께 태어났으며 언제나 서로 밀접하게 얽혀 있다. 이 모든 잘못된 생각들의 공통점 하나는 모든 인간관계를 교환으로 압축하려는 경향을 보인다... 교환의 원칙이 폭력의 결과로 비롯되었다는 사실이 제시될 것이다. 돈의 기원이 범죄와 배상, 전쟁과 노예제도, 명예와 부채, 상환 등에서 발견된다는 말이다...


<물물교환의 신화>

42쪽~: ... 괴리는 왜 일어난 것일까? 그 괴리의 일부는 증거의 본질 때문이다. 주화들은 고고학적 기록으로 보존된다. 그러나 신용거래는 대체로 그런 식으로 보존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문제의 뿌리는 그보다 훨씬 깊다. 경제학자들에게 있어서 신용과 부채의 존재는 언제나 불명예의 소지를 남기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돈을 빌려주거나 빌리는 사람들이 순전히 "경제적" 동기(예를 들면 이방인에 대한 융자도 사촌에 대한 융자와 똑같다)를 바탕으로 행동하고 있다고 주장하기가 거의 불가능해지기 때문이다.


46쪽: 그 이야기는 처음부터 끝까지 다 애덤 스미스가 꾸며낸 것은 아니었다. 이미 B.C. 330년에 아리스토텔레스가 정치학 논문에서 그와 비슷한 것을 생각하고 있었다.


55쪽~: 캐롤라인 험프리(Caroline Humphrey)가 인류학적 관점에서 물물교환을 연구한 끝에 내린 결론이 압권이다. "순수하고 단순한 물물교환 경제에서 화폐가 탄생했다는 증거는 차치하고 그런 경제의 예조차 보이지 않는다..."... 보통 물물교환은 이방인들 사이, 심지어 적들 사이에서 일어난다.


61쪽~: "경제학"이라는 학과가 존재하기 위해선, 재화의 교환이 전쟁과 성욕, 모험,미스터리, 섹스 또는 죽음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전제가 필요했다... 이런 구분은 변호사와 감옥과 경찰 같은 매우 구체적인 제도를 통해 가능해진다... 이런 조건이 갖춰지면 우리는 삶이 쇼핑을 하는 시장과 음악과 축제와 유혹에 관심을 쏟는 "소비 영역"으로 분명하게 구분된다고 단정할 수 있을 것이다.


62쪽~: 파키스탄 북부의 파쉬툰 사람들은 아낌없이 주는 환대로 유명하다. 그들에게 있어 물물교환은 환대(또는 친족 등의 인연)의 끈으로 묶이지 않는 사람들하고나 하는 것이다... 물물교환에서 가장 훌륭한 파트너는 멀리 떨어져 사는 까닭에 불평할 기회를 갖지 못할 사람이다... 만일 상대방이 신경을 써야 할 사람이라면... 마치 그 일을 선물처럼 꾸밀 가능성이 있다.


72쪽~: ... 전통적인 버전의 경제사에 결정타를 날린 것은 이집트의 상형문자와 그 다음에 메소포타미아의 설형문자의 번역이었다... 신용시스템이 주화의 발명보다 수천 년 앞섰다는 사실이다...

... 화폐의 기본단위는 은화인 셰켈이었다. 은 1셰켈의 가치는 보리 1부셸의 가치와 같았다... 한 달은 30일이라는 원칙에 따라 신전의 근로자들은 매일 일정 양의 보리를 받았다... 사실상 은이 돈이었다... 실제로 부채는 그 사람이 가진 다른 것으로 상환할 수 있었다... 대부분 보리로 부채를 상환했던 것 같다. 은과 보리의 교환비율을 정하는 것이 그렇게 중요했던 이유도 거기에 있었다. 그러나 양이나 가구 아니면 청금석으로 상환하는 것도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상인들은 실제 거래에서 은을 사용하기도 했던 극소수의 사람들에 속했다. 그러나 그런 상인들까지도 대부분의 거래를 신용으로 했다.


75쪽: ... 가상의 화폐가 가장 먼저 온 것이다. 주화는 한참 뒤에 등장했다... 물물교환은 주화 또는 지폐 사용의 부산물인 것으로 보인다.


<원초적 부채>

81쪽~: 경제는 거대한 물물교환 시스템이다. 그러나 문제는 역사가 돈이 없으면 그런 거대한 물물교환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는 사실이다. 유럽이 중세에 겪었던 것처럼, 경제가 "물물교환으로 회귀"할 때조차도 실제로 돈의 사용을 포기하지 않는다. 다만 현금의 사용만을 포기했을 뿐이다. 예를 들어 중세에도 사람들은 도구와 가축의 가치를 옛날 고대 로마의 통화로 계산했다. 그 주화가 이미 통용되고 있지 않았는데로 말이다.

경제학자들은 개인들과 국가들의 주된 활동이 물건들을 교환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우리가 그런 경제학자들의 주장을 사실인 것처럼 상상하도록 만드는 것이 돈이다. 아울러 돈의 존재만으로는 우리가 세상을 그런 식으로 볼 수 없다는 것도 명백하다. 만일 그럴 수 있었다면, 경제학이라는 학과는 고대 수메르 시대 아니면 적어도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이 등장한 1776보다 훨씬 앞서 탄생했을 것이다.

여기서 빠진 요소는 사실 애덤 스미스가 경시하려고 노랙했던 바로 그것, 즉 정부정책의 역할이다. 스미스의 시대 영국에서는 시장을, 말하자면 푸주한과 철물상과 잡화상들의 세계를 인간의 활동과 완전히 동떨어진 영역으로 보는 것이 가능했다. 영국 정부가 시장의 육성에 적극적으로 관여했기 때문이다. 법과 경찰만 아니라, 스미스 같은 자유주의자들이 옹호한 특별한 통화정책도 필요했다. 또한 통화의 가치를 은과 연결시키는 조치도 필요했고 또 동시에 화폐공급을 크게 증가시킬 필요도 있었다. 특히 소액권 통화의 양적 확대가 요구되었다.


83쪽: 미첼-인스는 신용화폐론으로 알려지게 된 이론의 대표자였다.


86쪽: 차탈리스트(Chartalist)의 관점을 자극한 힘은 사실 '독일역사학파'로 알려진 학자들에게서 나왔다. 이 학파의 가장 유명한 지지자는 1905년에 [화폐국가이론]을 발표한 역사학자 게오르그 프리드리히 크나프(Georg Fridrich Knapp)였다.


87쪽: 크나프에 따르면, 유통 중인 실제 화폐가 이 "상상의 화폐"와 일치하는지 여부는 특별히 중요하지 않다. 국가가 세금 납부의 도구로 받아들이기만 하면, 그것이 순은이건 순도가 떨어지는 은이건 아니면 가죽이건 말린 대구이건 전혀 차이가 없다.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국가가 받아들이는 것이면 무엇이든 통화가 될 수 있다.


88쪽: 차용증서가 통화로 유통될 수 있는 것은 헨리가 부채를 상환하지 않는 한에서라는 점이다... 영국은행이... 1694년에... 120만 파운드를 왕에게 융자해주고... 은행권을 발행할 수 있는 독점권을 얻었다... 새로 생긴 왕실의 부채를 화폐로 만든 것이다... (그들은 왕에게 원금에 대해 매년 8%의 이자를 물리고 동시에 그 차용증서를 빌려간 고객들에게도 이자를 물렸다)


89쪽: 스미스의 주장이 옳아서 금과 은이 정부와는 완전히 독립된 시장의 자연스런 작용을 통해 돈이 되었다면, 단순히 금광과 은광에 대한 통제권을 확보하는 것이 확실한 방법이지 않는가?... 그렇다면 금을 채굴해 일정한 모양으로 만든 뒤 그 위에 자신의 얼굴을 찍어 국민들 사이에 유통시켜놓고는 국민들에게 그 돈을 다시 내놓으라고 요구하는 이유는 도대체 무엇인가?


90쪽~: ... 시장들이 고대 군대 주변에 형성된 것은 거의 확실하다. 인도의 사상가 카우틸리아(Kautilya)의 [실리론(Arthasastra)]과 중국의 [염철론(鹽鐵論)]만을 슬쩍 보아도 고대 통치자들 대부분이 광산과 군인, 세금, 식량의 관계를 놓고 오랫동안 부심했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국가가 없는 사회들은 또한 시장을 갖지 않는 경향을 보인다.

... 신기한 것은 주류 경제학자들이 정부를 위해 일할 때는... 시장이 존재하지 않는 곳에 시장을 형성할 세금정책을 권한 것이다.


94쪽~: 돈이 "발명되지" 않은 것은 음악이나 수학 또는 보석이 발명되지 않은 것이나 마찬가지다. 우리가 "돈"이라고 부르는 것은 절대로 어떤 "실물"이 아니다. 그것은 사물들을 수학적으로, 서로 비교하는 한 방법이다... 그런 비교는 아마 인간의 사고만큼이나 역사가 깊을 것이다. 더 구체적인 증거를 얻으려고 노력하는 순간, 우리가 지금 "돈"이라고 부르는 그것에 너무나 다양한 습관과 관행이 녹아 있다는 사실이 발견될 것이다.


96쪽: 1930년대 대공황이 일어났을 땐, 정부가 귀금속과 연결해 화폐를 안정시켜주기만 하면 시장이 스스로를 규제할 수 있다는 인식이 완전히 버려지게 되었다.


97쪽~: 존 메이나드 케인스(John Maynard Keynes)는... [화폐론(Treatise on Money)] 초반부에 제시한 그의 결론은... 화폐의 기원이야 어떻든 지난 4,000년 동안 화폐는 사실상 국가의 창조물이었다... 그렇다고 반드시 국가가 화폐를 창조한다는 뜻은 아니다. 돈은 신용이다. 돈은 개인들의 계약적 합의(예를 들면 융자)를 통해서도 탄생될 수 있다. 국가는 단순히 그 합의를 집행하고 법적 조건들을 정한다.


99쪽~: 초기의 국가들이 세금을 요구한 이유(시장창조)를 설명하는 것과 국가가 "무슨 권리"로 그렇게 했는지를 묻는 것은 별개의 문제이다... 어떤 식으로 정당화했는지 물어보아야 한다.


대안적인 설명이 하나 있다. '국가신용이론(state-credit theory)'에 맞춘 설명이다. '원초적 부채이론(primordial debt theory)'이라 불린다... 이것은 최근 등장한 관점이며, 유로화의 본질을 둘러싸고 논쟁이 벌어지던 가운데 처음 모습을 드러냈다... 이 관점의 핵심적인 주장은 통화정책과 사회정책을 분리시키려는 시도는 어떠한 것이든 종국적으로 잘못된 것으로 드러나게 되어 있다는 것이다... 정부는 세금을 이용하여 화폐를 창조한다. 정부가 그렇게 할 수 있는 이유는 정부가 시민들이 서로에게 진 부채의 감시인이 되기 때문이다. 이 부채 자체가 바로 사회의 핵심이다. 이 부채는 돈과 시장보다 훨씬 앞서 존재했으며, 화폐와 시장은 단지 그 부채를 잘게 잘라 나누는 한 방법에 지나지 않는다.


101쪽~: [브라흐마나]였다. 결론은 인간의 존재 자체가 부채의 한 형태라는 것이다.

인간으로 태어나는 자체가 하나의 빚이다. 인간은 죽을 운명을 안고 태어나며, 제물을 바쳐야만 죽음으로부터 자신을 되찾을 수 있다.

제물은 "죽음에 바치는 공물"로 불린다... 만일 우리의 삶 자체가 빌린 것이라면, 과연 누가 그런 빚을 갚기를 원하겠는가? 빚을 진 가운데 산다는 것은 죄스럽고 완벽하지 못한 일이다. 그러나 완벽은 곧 절멸을 의미한다. 이런 식이라면 제물의 "공물"은 우리가 진 부채, 즉 우리 자신을 일시적으로 대체할 동물의 생명으로 지급하는 일종의 이자일 수 있다. 말하자면 불가피한 죽음을 일시 연기하는 데 대한 대가인 것이다.


106쪽: 수메르인에서부터 고대 그리스인에 이르기까지, 은과 금은 신전에 공물로 바치는 귀금속이었다. 어디에서나 화폐는 신들에게 바치기에 가장 적절한 것에서 비롯된 것 같다... 세금은 우리를 있게 해준 사회에 대한 빚의 측정에 지나지 않는다.


107쪽: 이런 종류의 "원시적인 통화"가 물건을 사고파는 데 사용된 경우가 극히 드물었으며, 물건의 거래에 쓰였다 하더라도 닭이나 계란, 구두, 감자 같은 일상적인 품목이 거래에 사용된 적은 절대로 없기 때문이다. 화폐는 물건들을 구입하는 데 쓰이기보다는 사람들 사이의 관계를 다시 정리하는 데 주로 이용되었다. 무엇보다도 결혼을 성사시키고 분쟁을, 특히 살인이나 상해로 야기된 분쟁을 해결하는 일에 쓰였다.


115쪽: 이자를 물리는 융자가 언제 또 어떤 식으로 시작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정확히 밝힐 수 없다. 그 관행이 글자보다 앞서 나타난 것 같기 때문이다. 가장 그럴 듯한 학설은 신전의 행정관들이 대상무역에 필요한 자금을 대주는 방법으로 그 아이디어를 내놓았다는 것이다... 그런 융자가 자리를 잡자마자, 그 관행이 급속도로 전파되었던 것 같다. 오래지 않아 상업융자만 아니라 소비자융자까지 등장하게 되었다. 이 소비자융자가 바로 고전적 의미의 고리대금이다. B.C. 2400년경엔...


126쪽: 에밀 뒤르켐(Emile Durkeim)은 모든 종교의 신들은 언제나 사회의 투사(投射)라고 주장함으로써 어떻게 보면 콩트를 앞질렀다... 종국적으로 보면 "신"과 "사회"는 똑같다.


<잔인성과 구원>

153쪽: 부채문제가 다른 문제를과 다른 점은 그것이 평등을 전제로 하고 있다는 점이다.


<경제적 관계들의 도덕적 근거에 관한 짧은 논문>

163쪽: 1950년대와 60년대와 70년대에 이런 상호성의 한 변형이 "교환이론"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면서 대단한 위세를 떨쳤다... 인류학 분야에서 지적 신으로까지 추앙받은 레비-스트로스는 인간의 삶은 3개의 영역으로 이뤄진다는 아주 유별난 주장을 했다. 그 영역은 언어(단어들의 교환으로 이뤄져 있다)와 혈족관계(여자의 교환으로 이뤄져 있다), 그리고 경제학(물건의 교환으로 이뤄져 있다)이다. 이 3가지 영역 모두는 상호성이라는 똑같은 근본적 법칙의 지배를 받았다고 그는 주장했다.


169쪽: 경제적 관계의 바탕에 3가지 중요한 도덕적 원칙이 있으며, 그 원칙들 모두는 어느 인간사회에서나 똑같이 일어난다는 점을 보여줄 것이다. 그 3가지 원칙을 나는 공산주의와 계급조직, 교환이라고 부를 것이다.


<섹스와 죽음의 게임>

231쪽: 고전(古錢)학자 필립 그리어슨이 바바리아 법전에 담긴 돈에 관한 내용에 대해 쓴 글을 떠올려 보라.

... 아일랜드의 법전에서는 소 또는 여자 노예로 계산되었다...


233쪽: 10계명의 열번 째 조항은 틀림없이 사람의 가슴에 이는 욕정(간통은 이미 10계명 중 일곱째로 언급되었다)에 대해 말하는 것이 아니라, 여자를 채무노예로 취할 가능성에 대해 언급하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마당을 쓸거나 빨래를 너는 종을 빼앗지 말라는 뜻이다.


235쪽: 역사적으로 볼 때, 상업경제 즉... 시장경제는 비교적 새로운 형태이다. 인간 역사 대부분 동안에 인간경제가 지배했다... 사람들이 인간경제에서 축적한 것은 어떤 종류의 부채인가? 그리고 인간경제들이 상업경제에 양보하거나 지배당하게 될 때 어떤 일이 일어났는가? 이것은 "단순한 의무가 어떻게 부채로 바뀌었는가?라는 질문을 던지는 또 다른 방법이다.


<명예와 추락>

322쪽: 인류학계에서는 신부값이 인구는 상대적으로 적고 땅은 특별히 귀하지 않은 곳에서... 인구가 많고 땅이 귀한 곳에선 그 대신에 결혼지참금이 발견된다...


<신용과 금화, 그리고 역사의 순환>

381쪽~: 돈의 경우 다른 어떠한 것보다 두드러진 사건이 한 가지 있다. 주화의 발명이다. 주화는 중국 북부의 대평원과 인도 북동부의 갠지스 강 계곡, 에게 해를 둘러싼 지역 등 서로 다른 3곳에서 거의 동시에 등장한 것 같다. 그 시기는 B.C. 600년에서 B.C. 500년 사이였다... 그러다 A.D. 600년쯤, 그러니까 노예제도가 사라지고 있던 그 시점에 전반적인 추세가 갑자기 거꾸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주화가 말라갔다. 모든 곳에서 다시 신용으로 돌아가는 현상이 나타났다.

왜 그런 순환이 일어났을까? 가장 중요한 요인 하나는 전쟁인 것 같다. 폭력이 만연했던 시기에는 무엇보다도 금이 두드러졌다... 부채는 정의상 신뢰의 관계만 아니라 기록이기도 하다... 전쟁과 폭력의 위협이 도처에 널린 세상에서는, 거래를 단순하게 하는 것이 여러 모로 이익이었다. 전국시대의 중국과 철기시대의 그리스, 마우리아 왕조의 인도가 폭력의 위협이 팽배했던 시대였던 것 같다.

병사들과 거래할 때는 단순한 것이 더더욱 좋았다... 중무장을 한 채 떠도는 군인은 신용도가 아주 낮다... 금괴와 은괴가 소중한 이유는 아무데나 가서 어떠한 물건과 교환해도 사람들이 그걸 받아주기 때문이다. 어떠한 질문도 묻지 않을 것이다.


386쪽~: 이자의 기원은 아마 영원히 미스터리로 남을 것이다. 문자의 발명보다 앞서기 때문이다...

간단히 이익금 중 일정 몫을 요구하지 않은 이유는 무엇인가?... 이익분배 파트너십은... 서로를 추적할 방법을 가진... 사람들 사이에 맺어졌다. 관료들은... 상인이... 정직할 것으로 기대하기 어렵다고 결론을 내렸던 것 같다. 고정 이자율이라면... 이처럼 차입과 거짓말을 연결시키는 것이 역사에 중요한 연결이었다.


393쪽~: 알렉산드로스 이후 이집트를 통치한 그리스 왕조인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동안엔 '깨끗한 서판'에 제도화되었다. 그리스어와 이집트어로 쓴 로제타스톤이 이집트 상형문자의 번역을 가능하게 만든 열쇠로 확인되었다는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다... 그것은 원래 프톨레마이오스 5세가 B.C. 196년에 채무자와 죄수들에게 내린 사면을 선언하기 위해 세운 것이었다.


397-398/... 이웃간의 부채를 청산하거나 현지 행상과 거래하거나 정부와 관련있는 일을 처리할 때, 사람들은 다양한 신용도구들을 이용했던 것 같다. 후대의 중국 역사학자들은 이 신용도구들 중에서 가장 오래된 것은 잉카문명의 'Khipu' 시스템과 비슷한 매듭 끈들이었으며 훗날엔 길게 홈을 판 나무나 대나무도 쓰였다. 메소포타미아에서와 마찬가지로 중국에서도 신용도구들이 글자보다 앞서 존재했던 것 같다.


... 한나라 초기의 문헌은 이렇게 전하고 있다.

... 우왕은 백성들을 위해 리산의 금으로 돈을 주조했다...

... <관자>는 이렇게 전한다... "먹을 죽조차 없어 자식들을 팔아야 했던 백성들이 있었다. 이런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 돈을 주조했다."

... 융자와 자식 매매를 연결시키는 것이 그럴 듯하게 들린다. <관자>는 뒤에 이렇게 설명한다... 비상사태가 발생할 경우에 대비해 공공창고에 저장할 곡물로 수확의 30%를 거둬들이는 것을 제도화했다... 달리 말하면, 중국인들도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 같은 곳에서 회계의 단위로 화폐를 창조하게 만들었던 그 저장시설물들을 세우기 시작했다는 뜻이다.


<축의 시대(B.C. 800-A.D. 600)>

403쪽: 집중력 있는 독자라면 야스퍼스의 '축의 시대' 중 핵심적인 기간이, 말하자면 피타고라스와 공자와 붓다가 살았던 기간이 주화가 발명된 시기와 거의 일치한다는 사실을 눈치챘을 것이다. 게다가 이 세상에서 주화가 처음 발견된 세 지역은 바로 그 현자들이 살았던 곳이었다.


407쪽: '축의 시대'가 경험한 것은 새로운 종류의 육군의 등장이었다. 귀족적인 전사들과 그들의 종자로 이뤄진 군대가 아니라 훈련을 잘 받은 직업군인들로 이뤄진 군대였다. 예를 들어 그리스인들이 주화를 사용하기 시작한 시기는 또한 그들이 끊임없는 훈련과 연습이 요구되는 그 유명한 팔랑크스 전술을 개발한 시기이기도 하다.


408쪽: 실제로 한 이론은 인류 최초라고 알려진 바로 그 리디아 주화가 용병들에게 월급을 주기 위해 발명된 것이라고 주장한다.


413/ The Nature of Money를 쓴 조프리 잉햄은 그 결과 생긴 시스템을 '군사-주화 복합체'라고 부르지만 나는 '군사-주화-노예 복합체'라고 부르는 것이 더 정확하다고 생각한다...


419쪽~: 그리스의 자료들은 마가다가 20만 명의 보병과 2만 필의 말과 4천 마리의 코끼리를 동원할 수 있었다고 전한다... 시장경제가 전쟁의 와중에 출현해 점진적으로 정부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정부는 곡물창고와 작업장, 거래소, 창고와 감옥을 체계적으로 세워 월급을 받는 관리들로 하여금 감독하게 했다... 그 결과 일상생활의 '화폐화'가 나타났으며...

불교가 귀금속을 멀리하는 태도를 취했음에도 불구하고 신용거래에 대해서는 언제나 관대한 입장을 보였다... 폭력과 군대를 거부했지만 상업에는 결코 반대하지 않은 종교의 입장에서 보면 고리대금도 이치에 벗어나지 않는다...


422-423/... 상인들은 새로운 종교의 가장 열렬한 후원자들이었다(자이나교 신자들의 경우 살아 있는 생명체에 해를 입혀서는 안된다는 교리 때문에 사실상 상인이 되는 외에 달리 길이 없었다... 불교가 귀금속을 멀리하는 태도를 취했음에도 불구하고 신용거래에 대해서는 언제나 관대한 입장을 보였다... 폭력과 군대를 거부했지만 상업에는 결코 반대하지 않은 종교의 입장에서 보면 고리대금도 이치에 벗어나지 않는다...


425/... 중국은 금화나 은화를 만든 적이 없다... 실제로 유통된 주화들은 기본적으로 잔돈들이었다...


436쪽: 이익을 추구하는 계산의 반대로는 공자의 이상인 인(仁)이 묵자의 겸양보다 조금 더 완벽하다... 도교를 신봉하는 사람들은 훗날 더 나아가 직관과 '자발성(spontaneity)'을 끌어안았다. 이 모든 것들은 시장 논리의 경상(鏡像)을 제시하려는 시도였다. 그럼에도 경상(鏡像)은 경상일 뿐이다. 같은 것을 거꾸로 보여주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440쪽~: '축의 시대'의 영성은 물질주의의 바탕 위에 세워진 것이다... 영국 학자 리처드 시포드(Richard Seaford)가 [화폐와 초기 그리스의 정신(Money and the Early Greek Mind)]이라는 책을 발표했다...

최초의 주화가 리디아 왕국에서 B.C. 600년경에 주조된 뒤, 그 관행은 그리스 도시들이 있던 인근의 이오니아 지역으로 신속히 퍼졌다... 그 당시 지중해에서 활동하던 그리스 용병들의 상당수를 제공한 지역도 이오니아였으며, 그 용병들의 본부들이 있던 곳이 밀레토스였다.

... 3명 모두가 주로 이 세상이 비롯된 물질의 본질에 천착한 인물로 기억되고 있다. 탈레스는 물을, 아낙시메네스는 공기를 제시했다. 아낙시만데르는 '아페이론(apeiron 무한한 것)'이라는 새로운 용어를 만들었다...

시포드가 강조하는 것처럼, 돈도 그랬다. 주화로 바뀐 신(神)은 물질적인 실체이며 또한 추상적 개념이기도 하다.

... 거기에는 공동체의 의지와 그 주화의 물질적 본질 사이에 어떤 긴장이 있었던 것 같다...


448쪽: ... 특히 그 제국들이 확장에 한계를 보이며 '군사-주화-노예 복합체'를 위기에 빠뜨리자, 모든 것이 갑자기 변했다. 인도에선 아소카가 불교를 바탕으로 왕국을 재건하려고 노력했다. 로마에선 콘스탄티누스가 기독교인들에게 의지했으며, 중국에선 한나라의 무제(武帝)(B.C. 157~B.C.87)가 비슷한 군사 및 재정위기를 맞아 유교를 국가의 철학으로 채택했다. 그 3명 중에서 무제만이 최종적으로 성공을 거두었다... 콘스탄티누스의 경우엔 서쪽 제국은 몰락했으나 로마교회는 살아남았다. 아소카의 계획이 가장 형편없는 결과를 낳았다... 불교 자체가 그의 영토에서 밀려나고 말았다.


<중세(A.D. 600-A.D. 1450)>

468쪽~: 이는 중국이 친(親)시장, 반(反)자본주의 정책을 취했다는 의미이다... 프랑스 역사가 페르낭 브로델(Fernand Braudel)이 지적했듯이, 자본주의와 시장은 정반대로 인식될 수도 있다. 시장은 돈이라는 매개를 통해 재화를 교환하는 방법들이다... 반면 자본주의는 무엇보다도 더 많은 돈을 얻기 위해 돈을 이용하는 기술이다. 정상적인 상황에서라면 돈으로 돈을 버는 손쉬운 방법은 일종의 공식적 독점이나 사실상의 독점을 구축하는 것이다. 자본가들이 상인이든 금융가든 아니면 산업가든 불문하고 시장의 자유를 제한하기 위해 정치권력과 가까워지려 드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군인들은... 선한 존재가 아니지만 국경수비에는 반드시 필요한 존재들이다. 마찬가지로, 상인들도 탐욕의 지배를 받고 기본적으로 비도덕적이다. 그럼에도 관리감독만 주도면밀하게 한다면, 그들을 공익에 봉사하도록 만들 수 있다.


471쪽~: 소신공양에 끌리는 이유는 이런 감정이 절대적 자선이라는 관념과 함께... 인간경제에서는 어떤 행동이 순수하게 이기적이거나 순수하게 이타적이라는 생각은 누구의 머리에도 떠오르지 않았던 것 같다... 이기심이 전혀 없는 베풂의 행위는 또한 절대적으로 반사회적인 수도, 그렇기 때문에 어떻게 보면 비인간적일 수도 있다. 그것은 단순히 절도행위 또는 살인행위의 경상(鏡像)일 뿐이다... 중세중국불교는 그 자체의 상업적 기원에 충실하게도 시장의 언어까지 쓰는 놀라운 경향을 보였다. 어느 승려는 "상업적 거래에서 하는 것과 똑같이, 사람들이 복을 사고 죄를 판다"고 썼다... 옛날 인도 불교에서 희미하게 보이던 "업보"의 개념이 여기 중국에서 막강한 생명력을 다시 얻었다.


478쪽~: 대중에 뿌리를 내리게 된 상인들의 종교 중국 불교가 이런 방향으로 발전한 것은 당연하다. 부채의 신학, 절대적 자기희생, 그리고 재산만 아니라 자신의 삶까지 포기하는 관행 등 모든 것들이 마지막에 금융자본으로 이어졌다. 이런 결과가 매우 기묘하고 역설처럼 보이는 이유는 그것이 교환의 논리를 불멸이라는 문제에 적용하려 했기 때문이다.

불교의 최종 목적은 "공(空)", 즉 절대적 해탈을 이루는 것, 말하자면 모든 인간적 및 물질적 애착의 끈을 끊는 것이지 않는가. 왜냐하면 그런 애착의 끈들이 모든 고통의 원인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승불교의 신자들에겐 누구도 혼자 독립된 상태에서는 절대로 그런 해탈을 성취하지 못하는 것으로 여겨졌다. 각자의 해탈은 다른 모든 것들에 달려 있다. 그렇기 때문에 시간이 끝날 때까지 그 문제는 어떻게 보면 늘 미해결로 남아 있게 된다.


480쪽: 로스파베가 말한 '원초적 화폐'처럼, 제물을 공물로 바치는 행위는 부채를 갚는 행위가 아니고 상환이 가능하다는 생각 자체가 불가능하다는 점을 인정하는 행위이다.


484쪽~: 중국 불교가 전성기를 누리던 때인 A.D. 806년에 차를 남쪽 끝 지역에서 수도로 수송하던 상인들과 세금으로 거둔 돈을 수도로 옮기던 관리들은 장거리 이동에 따를 위험을 걱정하여 수도의 금융가들에게 돈을 예금하고 어음을 발행하는 시스템을 고안하기 시작했다. 이때 어음은 "비전(飛錢)"이라 불렸다. 이것도 마찬가지로 부절처럼 반으로 나뉘어졌으며, 은행의 지방 지점에 가면 현금으로 바꿀 수 있었다.

... 종이화폐가 사용된 그 몇 세기가 중국 역사에서 경제가 가장 역동적으로 돌아간 시대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487/ 중세 대부분 동안, 세계 경제의 중추신경이자 극적인 금융혁신들을 이룬 곳은 중국도 아니고 인도도 아니고 근서 지역이었다...


489/ 더욱이 중세 대부분 동안 이슬람은 서구문명의 핵심이었다. 인도까지 진출하고, 아프리카와 유럽까지 확장하고, 인도양 너머로까지 선교사를 파견하고 개종자를 얻기도 했다.


490/... 다양한 이슬람법 학파들이 자유로이 자신들만의 교육기관을 세우고 종교재판 시스템을 지켰다... 제국의 인구 상당수를 이슬람으로 개종시키는 일에 적극적으로 나선 이들이 바로 법학자들이었다... 법학자들은 군대와 과시적이나마 권위를 갖춘 정부를 가까이 두려고 노력했다...


492-497/... 노예 군인은 중세 이슬람 국가와 사회 사이에 높이 쳐진 그 벽의 논리적 결과였다.

... 종교 지도자들이 창조한 법적 시스템도 이슬람 교도들이 노예로 전락하는 것을 사실상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납치와 법적 차별, 부채 혹은 아동 매매를 통한 노예는 전면 금지되었다. 본인의 자발적 의사에 의한 노예도 금지대상이었다... 모든 형태의 채무노예도 당연히 금지되었다. 마지막으로 이슬람은 고리대금을 엄격히 금지했다...

어떻게 보면, 이슬람 법정의 확립이야말로... 사막 또는 대초원 정신의 승리로 말이다... 중동의 위대한 도시문명들을 지배한 것은 언제나 행정관과 상인들의 연합이었다... 평범한 농민들과 도시 시민들의 눈에 오랫동안 대원수로 여겨졌던 상인계층이 이슬람으로 개종하면서... 혐오의 대상이 되었던 관행을 포기하고, 대신에 국가에 맞서는 사회지도자가 되기로 했다.

이슬람이 처음부터 상업에 긍정적인 관점을 보였기 때문에 그런 일이 가능할 수 있었다. 무함마드 본인부터 상인으로 성인 생활을 시작했으면, 이슬람 사상가 중에서도 이익의 건전한 추구를 원래부터 부도덕하거나 신앙과 반대되는 것으로 본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고리대금에 대한 금지에도 상업의 성장을, 더 나아가 복잡한 신용도구의 발달을 저해할 요소가 전혀 없다. 그와 반대로 칼리프 영토 안에서 초기 몇 세기 동안 상업과 신용도구가 동시에 발전을 이루었다.

그래도 이익이 가능했던 것은 이슬람 법학자들이 어느 정도의 봉사료를 챙길 수 있도록 해 두었기 때문이다... 신용으로 구매한 물품에 대해서는 현금으로 구입한 것보다 가격을 조금 더 높게 책정할 수 있도록 한 조치가 특별했다... 금융과 다른 돈벌이 활동을 동시에 벌일 것으로 여겨졌다. 그 결과 신용도구들이 무역에 아주 중요한 요소가 되었으며... 자신의 부 대부분을 예금해 두고 일상의 거래 대부분을 주화가 아닌 잉크병과 종이로 처리하게 되었다. 약속어음은 'sakk'(check) 또는 'ruq'a'(note)로 불렸다. 수표는 부도가 날 수 있었다...


1000년경에 이르러선 바스라에선 금융가가 없어서는 안될 존재가 되었다. 모든 상인들이 각자 은행구좌를 갖고 있었으며, 시장에서도 수표만을 끊었다.


수표는 배서를 하여 다른 사람에게 양도할 수 있었으며, '신용장'(suftaja)은 인도양이나 사하라 사막 너머까지 통용되었다. 만약 수표와 신용장들이 사실상의 종이화폐로 바뀌지 않았다면, 그것들이 국가와는 완전히 독립적으로 움직인 탓에 가치가 거의 전적으로 신뢰와 평판을 근거로 정해졌기 때문일 것이다. 어떤 문제를 이슬람 법정으로 끌고 가면 대체로 상인길드나 시민협회들이 중재에 나섰다...


이젠 금융을 보도록 하자. 이 분야에서는 이자를 받는 투자 대신에 파트너십이 더 선호되었다. 대체로 한쪽이 자본을 대고 다른 쪽이 기업을 운영하는 식이었다. 투자자는 미리 자신이 받을 수입을 정하지 않고 나중에 결실의 일정 몫을 받았을 것이다... 실제로 초기 상업법에서 가장 뜨거운 논쟁의 대상이 되었던 것이 바로 평판 자체가 토지나 노동, 돈 또는 다른 자원처럼 자본의 한 형태로 고려될 수 있는 것인가 하는 문제였다. 상인들이 자본은 전혀 대지 않고 오직 평판으로만 파트너십을 이루는 경우도 간혹 있었다. 이것은 "훌륭한 평판의 파트너십"이라 불렸다...


... 국가의 집행 메커니즘 없이 움직이는 신용경제에서는 약속어음의 가치 중 상당 부분이 서명을 한 사람의 이름에 좌우된다는 점을 암묵적으로 인정하고 있다는 점이다. 피에르 부르디외가 뒷날 현대의 알제리의 신뢰경제를 묘사하면서 강조했듯이, 명예를 돈으로 바꾸는 것은 상당히 가능하지만 돈을 명예로 바꾸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중앙아시아의 무역로를 따라, 그리고 사하라 사막으로, 특히 중세 세계무역의 주요 해로였던 인도양 너머로까지 이슬람이 전파될 수 있었던 것은 이 신뢰 네트워크의 공이 컸다. 인도양의 경우 중세에 이슬람의 호수가 되다시피 했다. 왕들과 군대들은 전쟁을 마른 땅에서만 치르고, 바다는 평화로운 통상지역으로 남겨둬야 한다는 원칙을 세우는 데 이슬람교도 무역업자들이 결정적 역할을 했던 것 같다. 동시에 이슬람은 예멘의 아덴에서 인도네시아의 몰루카까지 넓은 무역시장에 거점을 마련했다. 이것 또한 이슬람 법정이 그 항구들을 매우 매력적인 곳으로 만들 기능들을, 이를테면 계약을 체결하고, 부채를 회수하고, 신용장을 양도할 수 있는 금융을 형성할 수단을 완벽하게 제공한 덕이었다. 그런 환경에서 말레이의 화물집산지 말라카의 상인들 사이에 형성된 신뢰의 수준은 가히 전설이었다... 상인들은 형식적인 계약을 피하고 "악수"로 거래를 종결짓기를 더 좋아했다.


498/... 롱바르(Maurice Lombard, 프랑스 역사학자)의 묘사는 유명한 작품 <천일야화>에 나오는 신밧드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 같다.


499-501/ 상인에 대한 존경심은 세계 최초의 민중적 자유시장 이데로로기라 불릴 수 있는 것과 조화를 이룰 수 있었다... 고대의 부채와 노예제도의 재앙에서 벗어나자마자, 지방의 시장은 도덕적으로 위험한 장소가 아니라 그와 정반대의 장소가 되었다...


가격협정의 기미를 보이는 것이면 무엇이든 강한 혐오의 대상이 되었다... 메디나라는 도시에 품귀현상이 일어났을 때 무함마드 본인부터 상인들로 하여금 가격을 내리게 하는 조치를 취하길 거부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신성을 더럽히는 일이라는 근거에서였다. 왜냐하면 자유시장에서 "가격은 신의 의지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법학자들은 무함마드의 결정에 대해 시장 메커니즘을 간섭하는 정부의 모든 조치를 신성을 더럽히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는 식으로 해석했다.... 이 이야기들이 애덤 스미스의 "보이지 않는 손"(신의 섭리의 손이기도 하다)과 너무나 비슷하다는 생각이 든자면, 그건 우연의 일치만은 아닐 수도 있다... 교환은 인간의 합리성과 언어의 자연스런 결과라는 주장은 Ghazali(1058-1111)과 Tusi(1201-1274)의 글에 이미 담겨 있었다... 개 두 마리가 뼈를 교환하는 것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것이다... 가잘리의 <종교학의 소생>(Ihya Ulum-id-din)에... 바늘 공장이 예로 제시되며, 바늘 하나를 생산하기 위해 25가지 작업을 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그 차이점은 비슷한 점만큼이나 큰 의미를 지닌다... 스미스에게 분업은 개인적 이익을 추구하면 "물건들을 교환하길 원하는 인간들의 타고난 성향" 때문이다. 반면 투시에게 분업은 상호부조의 확장이었다.


... 신의 섭리가 우리들로 하여금 다양한 능력과 욕망과 기질을 갖도록 만들었다고 투시는 주장한다. 시장은 단지 상호부조의 일반적인 원칙이, 말하자면 능력(공급)과 필요(수요)의 연결이 현실로 드러난 것일 뿐이다...

... 그는 "만일 사람들이 다 똑같이 평등하다면, 모두가 사라지고 말 것이다"라고 주장한다... 그럼에도 시장은 경쟁보다는 주로 협력을 추구하는 곳이라는 전제에서 시작하는 순간, 도덕적 함의가 매우 달라질 것이다. 이슬람 경제사상가들도 시장경쟁의 필요성을 인정하고 또 받아들인다. 하지만 그들은 경쟁을 시장의 본질로는 절대로 보지 않는다...


502-503/ 가잘리가 분업을 보는 시각도 이와 비슷하다. 화폐의 기원에 관한... 물물교환의 신화와 아주 비슷한 내용으로 시작한다... 그는 상상 속의 원시 부족민으로 시작하지 않고 상상 속의 시장에서 낯선 사람들이 만나는 것으로 이야기를 풀어간다.


... 교환이 이뤄지기 위해선 두 가지 대상의 가치를 측정할 방법이 있어야 한다... 전혀 아무런 특징이 없는 제3의 대상을 이용해서만 비교가 가능하다는 것이다. 바로 이런 이유로 신이... 금과 은으로 된 주화 디나르와 디르함을 창조했다고 그는 설명한다.


504-505/... "돈은 돈을 벌기 위해 창조된 것이 아니다."... 돈도 재화의 가치를 평가하는 수단을 제공하는 측정의 단위이다. 그렇지만 돈이 그런 역할을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그것이 끊임없이 돌고 있을 때뿐이다...


... 중세 근서 지역의 상인계급은 특별한 위업을 이루었다... 고리대금의 관행을 포기함으로써, 그들은 종교지도자들과 함께 공동체의 실질적 지도자가 될 수 있었다. 그들의 공동체는 아직도 상당 부분 모스크와 시장이라는 두 개의 기둥을 중심으로 조직되는 것으로 여겨진다. 이슬람의 전파가 시장을 세계적 현상으로 만들었다...


521/ 근대적 금융의 개척자들이 '템플기사단'으로 흔히 알려진 '솔로몬 성전의 군사기사단'(Military Order of the Knights of the Temple of Solomon)이라는 소리가 자주 들린다... 남부 프랑스의 영주라면 템플기사단을 통해 부동산을 담보로 맡기고 일종의 환어음(이슬람의 '수프타자'(suftaja)를 모델로 한 것이나 기록은 암호로 했다)을 받아 그것을 예루살렘의 성전에서 현금으로 바꿀 수 있었을 것이다. 달리 말하면, 기독교 교인들은 이슬람의 금융기법을 이슬람을 공격할 전쟁 비용의 조달에 사용했다는 뜻이다.

템플기사단은 1118년부터 1307년까지 존재했다...

금융의 역사에서 이탈리아 사람들은 복잡한 공동출자 조직과 이슬람 스타일의 환어음을 선구적으로 사용한 것으로 가장 유명하다. 처음엔 환어음은 아주 간단했다...


522/ 이들 금융 기업들의 자본 대부분은 인도양의 향료와 동양의 사치품을 주로 거래한 지중해의 교역에서 나왔다. 그럼에도 인도양과 달리, 지중해는 끊임없이 전쟁이 벌어지던 해역이었다. 베네치아 갤리선들은 포와 군인을 싣고 항해하며 상선과 전함의 역할을 동시에 수행했다. 교역과 성전과 약탈 사이의 구분도 거의 없었다... 아시아의 제국들은 전사와 상인의 영역을 구분했으나 유럽에서는 그 영역이 자주 겹쳤다.


523-524/ 그들(베네치아)은 11세기에 크레타와 키프로스 같은 섬들을 점령하고 거기에 설탕 플랜테이션을 조성하여 명실상부한 상업제국을 건설했다. 이 플랜테이션의 노동력을 주로 아프리카 노예로 채웠는데 이것이 훗날 신대륙에서 매우 익숙해질 어떤 패턴을 예고했다. 제노바가 곧 그 뒤를 이었다... 흑해의 해안지역을 공격하거나... '예약 전쟁'(war by subscription)이라 불릴 만한 것으로, 원정을 계획하는 사람들이 투자자들에게 주식을 팔고 그 대신에 전리품 배당에 참여할 권리를 주는 방식이었다... 이 배들은 향신료와 고추, 비단, 양모제품 등을 싣고 헤라클레스의 기둥들을 지나 대서양 해안을 따라 플랑드르나 상파뉴까지 항해했다.


... "상인 모험가"라는... 단어는 나라 밖에서 활동하던 상인을 의미했다. 그러다가 "모험"이라는 단어가 오늘날과 같은 의미를 띠기 시작한 것이 바로 이 시기였다. 말하자면 1160년부터 1172년 사이 상파뉴 박람회와 이탈리아 상업제국들이 최고조에 달했던 때였다... 아서왕 소재의 소설로 유명한 프랑스 시인 크레티엥 드 트루아(Chretien de Troyes)였다. 퍼시발 경과 성배의 이야기를 처음으로 쓴 작가로 유명한 인물이다... 떠돌이 기사는 "모험"을 찾아, 말하자면 위험한 도전과 사랑, 보물, 그리고 명성을 좇아 세상을 떠도는 전사였다...


527/ ... 1199년 11월... 앙리의 아들 Theobald 주최로 상파뉴 에그리의 성에서 열린 마상 창시합에 참가한 상당수의 기사들이 갑자기 종교적 열정에 사로잡혀 경기를 포기하고 대신 성지를 탈환하겠다고 맹세했다... 결국엔... 콘스탄티노플을... 약탈했다...


529/ ... 환어음은 동양에서 A.D.700년 또는 A.D.800년에 이미 사용되었으나 서양에는 그보다 몇 세기 뒤에 소개되었다... 인도의 나란다 대학은 A.D.427년에 설립되었으며...


531/... 아리스토텔레스는 금과 은이 그 자체로는 아무런 가치를 지니지 않기 때문에 돈이란 것은 인간 공동체들이 교환을 용이하게 하기 위해 발명한 사회적 관습에 지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화폐는 "합의에 의해 탄생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을 바꾸거나 쓸모없는 것으로 만들어버릴 권한이 우리들에게 있다는 뜻이다... 중세 후반에 이르자 그의 관점이 표준적인 지혜가 되었다. 가잘리도 아리스토텔레스의 관점을 수용한 최초의 인물에 포함되었다... 그러나 가잘리는 돈이 사회적 관습이라는 주장에는 동의하지 않았다. 그에게 있어서 돈은 신이 내린 것이었다.

... 가잘리의 입장은 화폐를 종교적 권위의 보호 아래 둬야 한다고 말함으로써 시장을 정치적 간섭으로부터 보호하려는 이슬람의 의도와 완벽하게 맞아떨어졌다.


533/ 아리스토텔레스... 가 사용한 단어는 'symbolon'이었다... 그리스어 '심볼론'은 원래 '부절'(符節)을 뜻하는 단어였다. 계약이나 동의사항, 또는 부채를 기록한 뒤 반으로 갈라서 쌍방이 한쪽씩 가졌다는 그 부절 말이다... 그러나 정말로 놀라운 것은 "상징"을 뜻하는 현대의 중국어 단어 '符' 또는 '符號'도 그리스어와 거의 똑같은 기원을 갖고 있다는 사실이다.


540-541/... 중국과 이슬람권에서 똑같이 시장이 번창하는 가운데 사회가 융성했지만, 그것이 근대 자본주의의 특징인 거대 상업은행과 산업기업으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이슬람의 경우... 당시 대규모 상인들은 "자본 소유자"라는 뜻으로 '사히브 알말'(sahib al-mal)이라 불렸다. 법이론가들도 자본의 조성과 확장에 대해 자유롭게 거론했다... 그런데도 근대 자본주의 같은 것이 이슬람권에서 생겨나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 두 가지 요소를 강조하고 싶다.


첫째, 이슬람 상인들은 자유시장 이념을 진지하게 받아들였던 것 같다. 시장은 정부의 직접적인 감독을 받지 않았다. 계약도 개인들 사이에 체결되었다... 명예와 신용이 서로 분리할 수 없는 것이 되었다...

둘째, 이슬람은 또한 수익은 위험에 대한 보상이라는 원칙을 진지하게 받아들였다. 교역 활동 자체가 상당히 모험적인 것으로 통했다... 이런 위험을 피하기 위해 고안된 금융 메커니즘들은 사악한 것으로 여겨졌다... 상업 투자자들도 마찬가지로 위험을 부담해야 한다는 인식이 지배적이었다. 이것이 훗날 유럽에서 발달하게 될 금융과 보험 형태의 대부분을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이 점에서 보면 중세 초기 중국의 불교 수도원들은 정반대 쪽의 극단을 보여준다... 불교는 이슬람과 달리 오늘날 우리가 "법인"이라고 부르는 것과 매우 비슷한 조직을 낳았다...


542/... 그것을 중세의 언어로 고쳐 옮기면, 법인들은 천사를 많이 닮았다.

법적 측면을 본다면, 법인이라는 개념을 중세 성기 유럽의 산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법인을 "의인"(擬人, persona ficta)으로 보자는 사상이 처음 확립된 것은 1250년 인노첸시오 4세 교황의 교회법을 통해서였다. 그 개념이 처음 적용된 곳 중 하나가 수도원이었으며, 대학과 교회, 공국, 길드에도 적용되었다...


법인을 천사 같은 존재로 비유한 것은... 위대한 중세 전문가인 독일의 Ernst Kantorowicz로부터 차용한 것이다. 그는 이 모든 것이 토마스 아퀴나스가 천사들을 플라톤의 이데아들을 구체화한 것으로 보던 때를 전후해 일어났다고 주장했다...


543-544/... 법인들의 존재... 역사적 맥락에서 보면 그것들이 이상하고 엉뚱한 창조물이기 때문이다... 중세의 특징 하나로 형이상학적인 실체들이 끝없이 증식된 현상이 꼽힌다. 거기에 유럽인들이 더한 형이상학적 실체 하나가 바로 법인이었다.


... 근대적 의미의 법인에 가장 가까운 예... 시토 수도회의 수도원들은 중국 불교의 수도원들과 비슷했다. 제분소와 대장간 같은 시설로 둘러싸인 수도원들은 "평신도"들과 함께 상업과 농업에 종사했으며, 실을 잣고 양모를 수출하곤 했던 평신도들은 사실상 임금노동자들이었다. 일부 전문가들은 이를 두고 "수도원 자본주의"라고 부르기도 했다... 상인들이 법적 또는 사실상의 독점을 얻고 교역의 일상적 위험을 피하기 위한 방법으로 스스로를 불멸의 '몸'으로 조직하고 나섰을 때였다. 대표적인 예가 바로 1407년 런던에서 헨리 4세의 특허를 받은 '상인 모험가협회'(Society of Merchant Adventurers)였다... 영국의 모직물을 구입해서 플랑드르에 내다 파는 것이었다. 그 법인들은 근대의 주식회사보다는 중세의 상인길드와 비슷했다. 그라나 나이 많고 돈이 많은 상인들이 젊은 상인들에게 융자를 제공할 수 있는 구조를 제시했다... 그런 기업들이 해외에서 무장 모험을 벌이는 쪽으로 눈을 돌릴 때, 인류 역사의 새로운 시대가 시작되었다.


<자본주의 제국의 시대(1450-1971)>

550쪽: 그 금과 은 중에서 유럽에 상당히 오랫동안 유통된 양이 극히 적었다는 사실을 간과한 점이다. 대부분의 금은 인도의 사원으로 모아졌고, 은의 절대 다수는 최종적으로 중국으로 선적되었다...


551-553/ 몽골족들은 1271년 중국을 점령한 뒤 종이화폐 제도를 그대로 유지했으며... 그러나 1368년... 농민 지도자 출신이 다시 중국의 권력을 잡았다...

... 곧 공식적인 종이화폐와 주화 꾸러미 대신에 은 덩어리가 비공식적 경제의 화폐로 쓰이게 되었다...

결국 정부는 비공식적 경제에 대한 단속까지 포기하고 완전히 다른 길을 택했다. 종이화폐의 발행을 중단하고, 광산을 합법화하고, 은 덩어리를 큰 규모의 거래에 통화 쓰도록 하고, 심지어 개인들에게도 주화꾸러미를 제작할 권한을 주었다. 이것이 정부로 하여금 부역 제도를 점차적으로 포기하고 은으로 지급하는 세금제도를 택할 수 있도록 했다.

... 문제는 새로운 정책이 성공하려면 중국 정부가 국내에 계속해서 은을 풍부하게 공급할 수 있어야 한다는 점이었다... 중국의 광산은 금방 고갈되었다. 1530년대 일본에서 새로운 은광이 발견되었다. 그러나 이 은광들도 일이십년 지나자 고갈되고 말았다...


고대 로마 이래로, 유럽은 금과 은을 동양으로 수출해왔다. 문제는 유럽이 아시아인들을 사로잡을 물건들을 많이 생산하지 못했다는 점이었다...


554/ UC 어바인의 Kenneth Pomeranz 교수가 최근 지적했듯이, 아시아에서 귀금속에 대한 무제한적인 수요가 일어나지 않았더라면 이런 일은 절대로 가능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특히 중국 경제가 그렇게 역동적이지 않아서 3세기 동안 신세계에서 나온 막대한 양의 은을 흡수하지 못했다면, 그 광산들은 몇 십 년 안에 채산성을 맞추지 못하고 말았을 것이다. 1500년부터 1640년 사이에 은으로 환산한 물가에 엄청난 인플레이션이 일어났다는 사실은 아시아가 은 공급의 상당 부분을 흡수하는 가운데서도 유럽에서는 은의 가치가 떨어지고 있었음을 말해준다.


1540년 경엔 은의 공급과잉이 유럽 전역에 걸쳐 물가의 붕괴를 초래했다. 중국의 수요가 없었다면, 아마 아메리카 대륙의 광산들은 이때 작업을 중단하고 아메리카의 식민지화 프로젝트도 실패했을지 모른다. 유럽으로 향하던 갤리온(대형범선)이 유럽에 화물을 내리지 않고 아프리카를 돌아 인도양을 건너 중국의 광둥성으로 향했다. 스페인이 마닐라를 건설하면서, 1571년부터 갤리온들은 직접 태평양를 건너기 시작했다. 16세기 말경 중국은 1년에 거의 50t의 은을 수입하고 있었다. 전체 은 소비량의 90%에 달하는 양이었다. 그것이 17세기 초에는 소비량의 97%가 넘는 116t으로 늘어났다. 그에 대한 대금으로 중국은 비단과 도자기 등을 대량으로 수출해야 했다. 이들 중국 제품 중 상당수는 중남미의 새로운 도시들로 향했다. 이 아시아 무역이 새롭게 부상하던 글로벌 경제에서 가장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


556/... 그렇다면 인플레이션을 유발한 요인은 그 귀금속을 최종적으로 통제하게 된 사람들, 말하자면 정부와 금융가와 대규모의 상인들이 그 통제력을 이용하여 규칙을 바꾸기 시작했다는 사실이다. 첫 번째는 금과 은이 '화폐'라고 주장했다. 두 번째는 그들만을 위한 새로운 형태의 신용화폐를 도입했다.


564쪽~: 코르테스... 일련의 원정들이 실패로 돌아가자, 그는 채권자들의 등살을 견디지 못해 카를로스 황제에게 직접 호소하기 위해 스페인으로 돌아가야 했다. -자본주의의 이중성- 혹시 이 이야기들이 제4차 십자군 전쟁을 떠올리게 하지 않는가. 빚을 진 기사들이 외국 도시들을 마구잡이로 약탈하며 부를 챙겨왔지만 채권자들에게 그 부의 거의 전부를 넘겨주게 되었다는 그 십자군 전쟁 말이다.


567쪽: 돈과 비교하면 모든 것이 초라하게 보일 것이다. 채무자에겐 이 세상이 잠재적 위험들과 잠재적 도구들, 잠재적 상품들의 컬렉션으로만 보일 것이다. 인간관계조차도 비용과 편익을 따져야 하는 것으로 바뀔 것이다. 정복에 나설 당시 스페인 정복자들은 세상을 이런 식으로 본 것이 틀림없다.


... 세계 최초의 중요한 주식회사들이 영국과 네덜란드의 동인도 회사들이었다는 것은 결코 우연의 일치가 아니다. 이 회사들이 추구한 것은 스페인 정복자들이 추구한 것과 똑같았다. 탐험과 정복과 부의 축적, 이 3가지의 결합이었다. 그것은 이익 외의 모든 도덕적 명령을 배제하는 구조이다.


569/ ... 새로 부상하는 자본주의 질서에선 돈의 논리에 자율이 허용되었다. 이제 정치력과 군사력이 점점 돈의 논리를 중심으로 재조직되었다. 이것이 곧 금융의 논리였다. 그런데 따지고 보면 이 금융의 논리도 처음에 국가와 군대가 받쳐주지 않았다면 존재할 수 없었을 것이다. 중세 이슬람의 예에서 보듯이, 순수한 자유시장의 조건이었다면 경쟁만을 추구하는 시장들이 발달하지 않았을 것이고, 이자를 무는 융자를 회수하기가 사실상 불가능했을 것이다.


570-572/... 루터는 1520년에 고리대금에 대한 맹렬한 비판으로 개혁가의 활동을 시작했다... 면죄부 판매 자체가 영적 고리대금의 한 형태라는 것이었다...

... 고리대금은 죄이지만 특별한 상황에서는 4~5%의 이자는 합법이며... 채무자들이 법을 어길 권리를 갖는다는 주장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받아들일 수 없다는 식이었다.


스위스의 프로테스탄트 개혁가 츠빙글리는 더욱 분명했다... "사람들에게 빚진 것은 모두 갚도록 하라"고 말한 사도 요한의 예를 따라 살게 할 수는 있다.


곧 칼뱅이 나서서 고리대금에 대한 전면적 금지를 부정하게 된다. 1650년경에 이르러선 프로테스탄트의 거의 모든 교파들이 칼뱅의 관점에 동의하게 되었다.


이 모든 것들이 정당화된 과정을 들여다보면 두 가지가 두드러진다. 첫째, 프로테스탄트 사상가들 모두가 'interesse'에 대한 중세의 주장을 고수했다는 점이다. 즉 "이자"를 대출자가 그 돈을 수익이 많은 추자로 돌렸을 경우 챙겼을 수 있는 돈에 대한 보상의 의미로 보았다는 뜻이다. 원래 이 논리는 상업적 융자에만 적용되었다. 그러던 것이 이젠 모든 융자에 적용되기에 이르렀다... 둘째, 고리대금이 적에게나 할 수 있는 행위라는 가설, 더 확대해서 모든 상업이 전쟁의 성격을 어느 정도 띤다는 사실이 결코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예를 들어 칼뱅은 '신명기'가 아말렉 사람들만을 언급하고 있다는 점을 부인했다...


585-587/ 여기서 나는 "이기심"(self-interest)이라는 개념에 특별히 주목한다... 그 단어가 처음 등장한 것은 정확히 홉스의 시대 때였다. 그것은 이자 지급을 뜻하는 고대 로마의 법률용어 'interesse'에서 직접 차용한 단어이다... 그때까지 영국의 관습과 불편한 관계에 있던 마키아벨리의 사상과 비슷한 것으로 여겼다...

하지만 왜 "interest"였을까? 왜 인간 동기에 관한 일반적 이론을 원래 "융자 상환 지연에 대한 벌금"을 의미한 그 단어로 만들었을까?

그 단어의 호소력은 부분적으로 그것이 부기에서 나왔다는 데 있었다. 그것은 수학적이었다... 이는 곧 인간의 행동을 예측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인상까지 줄 수 있다. 엘베시우스(Helvetius)는 중국의 상앙을 떠올리게 하는 문장에서 "물질세계가 운동의 법칙의 지배를 받는 것과 똑같이, 도덕적 세계도 이익의 법칙의 지배를 받는다"라고 썼다.


문제는 이러한 발상의 기원이 전혀 합리적이지 않다는 점이다. 그 뿌리는 신학이었으며, 그 발상을 뒷받침하던 신학적 가설들은 결코 사라지지 않았다. "이기심"이 증명된 것은 1510년경 이탈리아 역사학자 프란체스코 귀차르디니(실제로 마키아벨리의 친구였다)의 저작물에서였다. 거기서 그는 그 단어를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자애"(self-love)의 완곡한 표현으로 썼다... "사랑"을 "이익"으로 대체한 것은 아주 명백한 이동이었음에 틀림없다. 귀차르디니 같은 저자들이 벗어나고자 했던 것이 바로 사랑이 최고의 감정이라는 그 가설이었기 때문이다.


588/... 자본주의의 기원에 관한 이야기는... 신용 경제가 이자의 경제로 바뀌는 것에 관한 이야기이다...


591/... 부채의 '범죄화'는 곧 인간 사회의 바탕을 '범죄화'하는 것이었다. 작은 공동체 안에서는 보통 모두가 채권자이자 채무자라는 사실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597-600/ 근대금융도구들의 역사와 종이화폐의 기원은 모두 시정부 채권의 발행으로 시작된다. 12세기 베네치아의 정부가 군사적 목적을 위한 자금을 긴급히 필요로 했을 때 세금을 내야 하는 시민들에게 강제로 공채를 팔면서 시작된 관행이었다... 그러나 진짜 역설은 이 부채를 '화폐화'할 때만, 즉 정부로 하여금 부채의 상환에 대한 약속을 하게 한 뒤 그 약속을 현금으로 유통시킬 때만 나타난다.

스페인의 세비야에서조차도 일상의 거래에 쓰인 금과 은이 그리 많지 않았다. 대부분의 금과 은 덩어리들은 곧바로 항구에서 활동하던 제노바 은행가들의 창고로 보내져 동양으로 실려 나갔다. 그 과정에 금과 은은 복잡한 신용거래의 바탕이 되었다. 이를테면 금의 가치만큼 황제에게 융자를 해줘 군사작전에 필요한 비용으로 쓰도록 하고, 그 대신에 문서를 발행하여 그것을 소지한 사람에게 정부로부터 이자가 붙는 '연금'을 받을 자격을 부여했다. 특히 이 문서는 현금처럼 거래가 가능했다. 그런 식으로 은행가들은 자신들이 소유한 금과 은의 가치를 거의 무한정 증식시킬 수 있었다.


1570년대에 이미 세비야에서 멀지 않은 메디나 델 캄포 같은 곳에서 그런 문서를 통해서만 거래가 이뤄지는 박람회가 열렸다. 스페인 정부가 실제로 부채를 상환할 것인지, 또한 어느 정도의 주가로 상환할 것인지는 언제나 조금은 불확실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증서들은 할인가격에 거래되었으며, 특히 유럽의 전 지역에서 유통되기 시작하면서 지속적으로 인플레이션을 유발했다.


순수한 의미에서의 지폐에 대한 이야기는 1694년 영국은행의 창설로 시작된다. 이 은행권은 어떠한 의미에서도 채권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 지폐도 다른 것과 마찬가지로 왕의 전쟁부채에 뿌리를 두고 있다... 돈이 더 이상 왕에게 진 부채가 아니고 왕이 진 부채라는 사실은 돈 자체를 그 전과 판이하게 다른 것으로 만들어버렸다. 이제 돈은 여러 면에서 옛날 형태의 돈의 경상(鏡像)이 되었다.


610쪽~: 자본주의는 끊임없는 성장을 요구하는 체제... 자본주의 초기에 합법적인 이자로 연 5%가 널리 받아들여졌듯이, 어느 국가든 GDP(국내총생산)의 성장률이 연 5%는 되어야 한다... 1700년대부터... 근대 자본주의의 여명에 나타난 것은 신용과 부채의 거대한 금융조직이다... 이 금융조직은 도덕적 충동만으로 그렇게 하지 않는다. 물리적 힘까지 동원한다. 중요한 고비마다 유럽에선 전쟁과 상업이 뒤얽히는 모습이 거듭 나타난다...

... 18세기의 버블 거의 모두는 유럽의 전비를 마련하기 위해 고안된 장밋빛 식민지 사업들 때문이었다. 종이화폐는 부채화폐였으며, 부채화폐는 전쟁화폐였다... 정부의 경찰과 감옥을 이용하여 나머지 인구의 생산성을 최대한 짜냈다.

누구나 다 알듯이, 스페인과 포르투갈 제국들이 처음 시작한 세계시장 시스템은 먼저 향료를 구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었다. 그 시장은 곧 무기무역과 노예무역, 마약무역으로 3갈래로 나뉘어졌다. 마약무역은 대부분 커피와 차, 담배, 설탕 등 약한 마약들을 거래했다. 그때 증류주도 처음 등장한다. 잘 알고 있듯이, 그러다 유럽인들은 금 유출을 막기 위한 한 방법으로 중국에 아편을 공격적으로 판매하면서도 양심의 가책을 전혀 느끼지 않았다. 의류무역은 그 다음에 등장했다. 동인도회사가 무력을 동원하여 인도의 목화수출무역을 막은 뒤의 일이었다.


629쪽: ... 도박과 계시 사이에 깊은 관계가 있을 수도 있다는 점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자본주의는 도박을 작동의 근본적인 한 부분으로 중히 여기는 시스템이다... 동시에 자본주의는 특이하게도 자체의 영속성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못하는 것 같다.


630쪽: 국가부채는... 미래 세대에게 빌린 돈이다... 적자재정은... 더 많은 군사력을 쥐어주는 한 방법이다. 다른 한편으로 보면, 그것은 정부가 정작 다스리고 있는 국민들에게 빚을 지고 있다는 의미이다.


631쪽: 첫째, 국가부채는 전쟁에서 탄생한다. 둘째, 그것이 모든 사람들에게 똑같이 지는 것이 아니고 자본가에게만 지는 것이다. 그 당시 프랑스에선 "자본가"는 구체적으로 "국채를 소유하고 있는 사람"을 의미했다.


<1971년-아직 결정되지 않은 새로운 시대의 시작>

664쪽: 이 부채 중에서 경마나 사치 때문에 생긴 부채의 비중이 매우 낮다는 사실이다... 종국적으로 보면, 학대를 당하거나 범죄 취급당하거나 악마 취급을 당하고 있는 것이 사교성이다... 미국에서 일어나는 파산의 주요 원인은 병이다. 대부분의 차입이 단순히 생존의 문제이다(자동차가 없으면 직장에 다니질 못한다). 또 대학에 다닌다는 것이 직장을 가진 뒤 노동햇수의 거의 반을 부채노예로 지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경우가 갈수록 늘어나고 있다.


666/ ... 부채와 권력, 죄와 속죄가 거의 구분되지 않는 것이 되어버렸다. 자유가 노예의 신세이고, 노예의 신세가 자유이다...


667/ 자본주의는 그런 식으로 돌아가지 않는다. 종국적으로 자본주의는 계급과 배제의 시스템이다. 그 시스템이 한계점에 닿으면, 여러 징후들이 다시 나타난다...


672-673/ 오늘날 이라크라 불리는 나라에선 지난 5,000년 동안 극적인 도덕 및 금융혁신이 두 차례 이상 일어났다. 첫 번째 혁신이 바로 이자를 물리는 부채의 발명이었다. B.C.3000년경에 일어났을 것으로 짐작된다. 두 번째 혁신은 A.D.800년경에 일어났다. 이자를 물리는 부채를 명백히 부정한 첨단 상업시스템을 최초로 개발한 것이다.


674/ 시장의 역사는 지금까지 우리가 배워온 것과는 전혀 다르다. 역사 기록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는 초기의 시장들은 고대 메소포타미아의 정교한 행정체계의 부산물인 것 같다. 그 시장들은 주로 신용을 바탕으로 움직였다. 현금시장이 생긴 것은 전쟁을 통해서였다. 다시 말하지만, 현금시장은 주로 군인들에게 보급품과 월급을 제공하기 위해 만든 세금과 공물정책을 통해서 생겨났다. 공물의 경우에는 다른 측면에서도 매우 유익한 것으로 드러났다...


675/ ... 그 이후로 우리가 목격한 것은 두 가지 포퓰리즘 즉 국가와 시장 포퓰리즘 사이를 끝없이 오간 정치적 속임수였다...

... 전쟁과 정복, 노예제도는 인간경제를 시장경제로 바꾼 데서 그치지 않았다...


676/... 어떤 사람에게 호의를 빚지는 것과 누군가에게 부채를 지는 것의 차이는 부채의 경우 금액이 정확히 계산된다는 점이다. 계산은 등가를 요구한다. 그리고 그런 등가는 오직 사람들이 강제로 자신의 환경에서 철저히 배제될 때만 이뤄지는 것 같다. 그래야만 사람들이 물건과 똑같은 것으로 다뤄질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678/... 금이나 은 덩어리들이 통화로 쓰이게 된 것은 바로 그 역사성의 결여 때문이었다. 이제 어딜 가도 출처를 의심받지 않고 받아들여질 것이다. 세상을 숫자로 바꿔놓는 시스템은 오직 무력으로만, 말하자면 칼과 곤봉 또는 오늘날의 무인항공기가 투하하는 "스마트 폭탄"에 의해서만 지탱될 수 있을 뿐이다.


680-682/ ... 레버리지 회사들을 가진 부자들은 지금 중요한 채무자들이다. 이것이 "금융민주화"라는 주장의 골자인데 새로울 것이라곤 하나도 없다. 이자로 살아가는 계층을 제거하자고 주장하는 사람이 나올 때면 언제나 그런 조치가 과부들과 연금생활자들의 삶을 파괴할 것이라고 주장하며 거기에 반재하는 사람이 늘 있기 마련이다.

놀라운 사실은 오늘날엔 금융시스템의 옹호자들이 그때그때 상황에 따라 이 두 가지 주장을 다 동원한다는 점이다. 한쪽에 보면 토머스 프리드먼 같은 "권위자"들이 있다. 오늘날엔 "모든 사람들"이 엑슨모빌이나 멕시코를 소유하고 있다고 떠벌리길 좋아하는 사람들이다. 다른 쪽에 보면 2009년에 <금융의 지배>(Ascent of Money)를 발표한 니얼 퍼거슨이 있다...

빈곤은 가난한 자들을 착취하는 탐욕스런 금융가들 때문에 생기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금융기관이 부족해서 생긴 결과이다...

... 퍼거슨이 하고자 하는 말은... 빈곤이 신용의 부족으로 야기되었다는 것이다. 부지런한 빈자들이 빈곤에서 탈출할 수 있는 때는 상어같은 대부업자가 아닌 안전한 은행으로부터 융자를 받을 수 있을 때뿐이다... 그렇다면 부지런하지 않은 빈자들은 어떻게 해야 하나... 그들은 이 세상에 살아남을 자격이 없다. 부지런하지 않기 때문이다...


... 우리들에게 인생에서 돈 외의 무언가를 추구하는 데 필요한 자원을 얻을 자격이 있는 사람은 약탈자의 눈으로 세상을 보려는 사람들뿐이라는 메시지를 던진다. 금융이 거의 모든 차원에서 도덕을 왜곡시키고 있다...



감상:

정말 대단한 통찰력의 책이다. 그러나 독서는 쉽지 않았다. 저자의 박학다식은 엄청나게 지루한 터널이었다. 햇살을 보았는데, 다시 돌아 보니 또 심연과 협곡이다. 돈이 무엇인지 알고 싶다면 이 책은 그 미망의 종착점이자 새로운 깨달음의 토대이다.

(2013. 03. 31)


거의 십 년이 지나서 다시 읽는데, 예전에 미처 파악하지 못한 것, 특히 서구에서, 그리고 전지구적 차원에서의 자본주의 성립과정에 대해 더 많이 알게 되어, 추가로 많은 부분의 기록을 보강하였다. 모든 부분에서 저자의 통찰력에 감탄하지만... 그리고 마지막에 부지런하지 않은 사람들에 대한 가치 부여에도 일부 인정하지만, 그래도 저자의 마지막 결론에는 동의할 수 없는 부분이 있다. 저자가 원하는 세계가 어떻게 돌아갈 수 있는지가 그려지지 않기 때문이다. (2023.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