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빌라이제이션

니얼 퍼거슨

by 조영필 Zho YP

저자 서문


14/ <콜로서스: 아메리카 제국 흥망사Colossus: The Rise and Fall of America's Empire>(2004)에서 나는 불균형한 경상계정과 회계계정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미국의 동아시아 의존도가 부지불식간에 높아졌다고 경고한 바 있다. 따라서 미 제국의 쇠락과 멸망은 테러리스트들이나 그들을 지원하는 불량 국가들 때문이 아니라 제국의 중심에서 싹튼 금융위기 때문일지 모른다...


15/ ... 2006년 중반 일련의 기사와 강의로 시작해 금융 위기가 최악으로 치닫던 2008년 11월에 출판으로 결실을 맺은 <금융의 지배The Ascent of Money>에서 나는 은행 대차대조표상의 과도한 단기 부채, 철저히 과대평가된 모기지 담보증권, 그 밖의 다른 금융 상품들, 연방준비제도의 지나치게 느슨한 통화정책, 정치적으로 조작된 주택 가격 거품, (파생상품이라고 알려진) 무분별한 가짜 보험증권 판매, 수량화가 가능한 리스크에 비하여 파악하기가 거의 불가능한 이름뿐인 보호책 등으로 국제 금융 시스템의 주요 구성요소들이 모조리 약화되었다고 지적했다...


18/ ... 극작가 앨런 베넷Alan Bennett은 <히스토리 보이즈The History Boys>라는 희곡에서 '트릴레마' 개념을 내놓았다. 역사는 어떻게 가르쳐야 하는가? 상반된 논증 기법을 써야 하는가, 아니면 과거의 진리와 아름다움의 만남으로 가르쳐야 하는가? 그것도 아니면 '꼬리에 꼬리를 물고 터지는 빌어먹을 사건들'을 가르쳐야 하는가?...


... 하지만 이 뛰어난 경제학자는 오만하게도 과거보다 미래에 관심이 더 많다고 대답했다. 이제 그는 자기 생각이 틀렸었다는 것을 안다. 사실 '미래'라는 것은 없다. '미래들'만 있을 뿐이다... 비록 과거는 지난 일이지만 다음 두 가지 이유에서 그것은 오늘날 우리의 경험과 내일, 그리고 그 이후에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일들을 이해하는 데 필수적이다. 첫째, 현재 세계 인구는 지금껏 지구에 살다간 인구 전체의 약 7퍼센트에 지나지 않는다. 죽은 사람들의 수가 살아 있는 사람들의 수를 약 14 대 1로 압도하는데도 우리는 감히 그들이 남긴 엄청난 양의 축적된 경험을 무시하고 있는 셈이다. 둘째, 과거는 우리 앞에 놓인 찰나의 현재와 수많은 미래를 생각할 때 우리가 믿을 수 있는 유일한 지식의 원천이다. 역사는 단순한 과거의 연구가 아니다. 시간 그 자체의 연구다.


19/ ... 인류 역사의 표본 크기는 1이다. 더욱이 이 거대한 경험의 '단편들' 하나하나에는 의식이 있다. 그리고 그 의식은 온갖 유형의 편견에 왜곡된다... 인간은 거의 본능적으로 자신의 과거 경험에서 학습하도록 진화했다. 따라서 인간은 적응하고 인간의 행동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변한다. 우리는 정처 없이 떠도는 것이 아니라 정해진 길을 따라 걷는다. 그리고 갈림길에 섰을 때 선택하는 방향은 지금껏 그래왔들 우리가 과거에 무엇을 마주쳤느냐에 따라 결정된다.

그렇다면 역사가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첫째, 역사가는 사회과학자들처럼 양적 데이터에 기대어 칼 헴펠Carl Hempel이 제시한 대로 거의 모든 사례에 적용할 수 있는 '포괄법칙'을 고안할 수 있다. 예를 들면, '권력이 민주적인 리더 대신 독재자의 손에 들어가면 그 나라는 전쟁을 치를 확률이 높아진다' 같은 것이다. 아니면 앞의 접근법과 상충되기는 하지만 옥스퍼드의 저명한 철학가 콜링우드R.G. Collingwood가 1939년 자서전에서 설명한 것처럼 상상력을 동원해 과거인들의 경험을 재구성함으로써 그들과 교감하는 것이다...


20/ 제1차 세계대전과 대량 살상을 경험한 이후 자연과학과 심리학에 대한 환멸로 벼려진 콜링우드의 야심은 그 자신이 '가위와 풀의 역사(작가들이 앞선 시대 사람들이 한 말들을 배열과 수식어만 바꾸어 똑같이 되풀이하는 것)'라 일축한 것을 과감히 내던지고 역사를 현대로 끌어들이는 것이었다...


1) '역사가가 연구하는 과거는 죽은 과거가 아니다. 그것은 어떤 면에서 문서나 인공물 형태로 남겨진 현재에 살아 있는 과거'다.

2)...'모든 역사는 사유의 역사'다...

3)...'역사적 지식은 자기가 연구하는 역사를 머릿속으로 재연하는 것'이다...

4)...'역사적 지식은 과거의 사유를 반박하여 현재의 사고 맥락 안에서 다르게 정의한 과거 사유의 재연이다.'

5) 따라서 역사가와 비역사가의 관계는 노련한 산사람과 무지한 등산객의 관계에 비유할 수 있다... 콜링우드는 역사가 과학적 법칙과 젼혀 다른 무언가, 한마디로 '통찰'을 제공한다고 말한다.

6) 역사적 통찰의 진정한 기능은 '과거, 즉 과거의 표면적인 주제가 현재의 맥락 안에 포함되어 있지만 훈련되지 않은 일반인들의 눈에는 확연히 드러나지 않을 때, 사람들에게 현재에 관한 정보를 제공하는 것'이다.

7)..."진정한 역사적 문제는 실질적인 문제에서 생겨난다. 우리는 좌시할 수 없는 문제적 상황을 더 명확히 규명하기 위해 역사를 연구한다. 궁극적으로 모든 문제가 발생하는 곳은 '실제' 삶의 영역이다... 참고해야 할 것이 바로 역사다."


21/ 일찍이 데일리메일Daily Mail을 혐오하고... 콜링우드는... 문명이 몰락하는 이유를 찾는 과정은 가위와 풀의 역사 전달자에게 맡겨놓기에는 무척이나 중요하고 현실적인 문제다... 이 풀숲에는 호랑이가 한 마리만 숨어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콜링우드는 데일리메일(Daily Mail)에 관하여.. "'독자들이 알아야 할 사실'이라는 '소식(news)'의 원래 의미를 잃어버리고... '읽기에 흥미로운 사실 또는 픽션'이라는 새로운 의미를 획득한 최초의 영국 신문."



25/ ... <도덕감정론Theory of Moral Sentiments>에서 위대한 경제학자이자 사회이론가인 애덤 스미스Adam Smith는 문명사회가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the war of all against all'이 아닌 이유를 설명했다. 즉 문명사회가 '공감'을 전제로 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27/ 프랑스 역사가 페르낭 브로델Fernand Braudel은 1959년에 쓴 백과사전 표제어에서 문명을 다음과 같이 정의했다.


문명이란 무엇보다 공간, '문화의 영역'... 중심지다...


브로델은 변화를 설명하는 것보다 구조를 상술하는 데 훨씬 뛰어난 실력을 발휘했다...


28/ ... 인생경험과 마찬가지로 역사적 현실은 소설보다 체스 게임에 휠씬 더 가깝고 놀이보다는 축구 경기에 가깝다.


... 위대한 문명이 모두 그렇듯 서양은 야누스의 얼굴을 가지고 있다... 경쟁과 독점, 과학과 미신, 자유와 노예, 치료와 살상, 고된 노동과 게으름. 어떤 경우에도 서양은 선과 악들 모두의 아버지였다...


29/ ... 문자로 작성된 기록이 없으면 역사가는 창의 촉과 항아리 조각에 의지해 그들의 생각을 유추해낼 수밖에 없다.


서론 - 라셀라스의 의문

39/ 'Civilization'이라는 말은 1752년 프랑스의 경제학자 안-로베르-자크 튀르고Anne-Robert-Jacques Turgot가 처음으로 사용한 프랑스어였고, 4년 뒤 위대한 혁명당원 가브리엘 리케티Gabriel Riqueti의 아버지 미라보 후작 빅토르 리케티Victor Riqueti가 처음으로 이 용어를 책에 실었다... 어원이 암시하듯 'civilization', 문명은 도시에 초점을 맞추고 있고, 여러 가지 면에서 이 책의 주인공 역시 그런 도시들이라고 할 수 있다. 도시의 법률은 도시의 성곽만큼이나 중요하다. 도시의 구조와 관습, 주민의 생활 방식도 그 안의 궁전만큼 중요하다... 문명의 성공은 미적 업적뿐 아니라 (어쩌면 이보다 더 중요한) 주민들의 삶의 질과 생존 기간으로도 측정된다...


40/ ... 캐럴 퀴글리Carroll Quigley는 지난 만 년간 24개 문명이 나타났다고 했다. 아다 보즈먼Adda Boseman은 근대 이전의 문명은 서양, 인도, 중국, 비잔틴 그리고 이슬람 다섯 개라고 보았다. 매슈 멜코Matthew Melko는 이제 존재하지 않는 문명 일곱 개(메소포타미아, 이집트, 크레타, 고대 그리스·로마, 비잔틴, 중앙아메리카, 안데스)와 지금도 남아 있는 문명 다섯 개(중국, 일본, 인도, 이슬람, 서양)를 합쳐 총 열두 개 문명이 있다고 주장했다. 슈무엘 아이젠슈타트Shmuel Eisenstadt는 여기에 유대인 문명을 덧붙여 여섯 개라고 본다...


42/ ... 15세기 후반부터 서유럽의 작은 국가들은... 전 세계 모든 사람의 생활 방식을 서양식으로 바꾸어버린 문명을 창조해냈다. 라틴어와 그리스어에서 말을 빌려오고, 나사렛의 유대인에게서 종교적 가르침을 얻고, 동양의 수학, 천문학, 기술의 도움을 받은 그들이 말이다...


45/ ... 사실 오늘날 세계는 거의 대부분 서양 경제 시스템에 통합되어 있다. 스미스의 주장대로 시장이 가격 대부분을 결정하고 무역의 흐름과 노동력의 분배를 주도하지만, 케인스의 비전과 비슷한 역할을 수행하는 정부가 경기 순환을 매끄럽게 만들고 소득 불평등을 줄이기 위해 애쓰는 시스템 말이다.


49/ 불멸의 영어사전 편찬자 새뮤얼 존슨은 서양의 패권 장악을 우연이라 보는 이 모든 주장을 과감히 거부했다. 1759년 출간된 자신의 저서 <에디오피아의 왕자 라셀라스History of Rasselas: Prince of Abissinia>에서 그는 라셀라스의 입을 빌려 이렇게 물었다.


유럽인들은 어떻게 그리 강력한가? 그들이 무역을 하거나 정복하기 위해 그리 쉽게 아시아와 아프리카를 오갈 수 있다면 왜 아시아인과 아프리카인은 그들의 해안을 침략하고, 그들의 항구에 식민지를 건설하고, 그들의 통치자들을 조종할 수 없는가? 그들을 본국으로 데리고 가는 바로 그 바람이 우리도 그리로 실어다줄 터인데*


*... 1731년 오스만 제국의 작가 이브라힘 뮈테페리카Ibrahim Mueteferrika도 이러한 질문을 던졌다. "이슬람 국가에 비해 과거 그리도 약했던 기독교 국가들이 왜 오늘날에는 그리 많은 영토를 지배하고 심지어 한때 승승장구하던 오스만 군대도 물리치는가?



이러한 물음에 철학자 이믈락Imlac이 대답한다.


그들이 우리보다 강한 것은 지혜롭기 때문입니다, 폐하. 인간이 동물을 다스리듯 지식은 언제나 무지를 지배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의 지식이 왜 우리보다 우월한지는 저도 이유를 알 수가 없습니다. 다만 우리로서는 파악할 수 없는 신의 뜻이 아닌가 합니다.


51/ 그렇다면 유럽인들이 아시아인들보다 앞서갈 수 있었던 것은 막연한 문화적 차이 때문인가? 이것이 바로 독일의 사회학자 막스 베버Max Weber의 주장이었다. 문화적 차이는 여러 가지 형태로 나타났다. 중세의 영국식 개인주의, 휴머니즘, 그리고 신교도 윤리 등의 문화는 영국 농부의 유언장부터 지중해 연안 상인의 회계 장부, 궁정의 에티켓에 이르기까지 모든 곳에 다양하게 적용되었다. <국가의 부와 빈곤The Wealth and Poverty of Nations>에서 데이비드 랜즈David Landes는 자발적인 지적 탐구와 과학적인 검증 방식의 발전, 연구와 보급의 합리화에 서양이 주도적 역할을 했다고 밝히며 문화적 차이라는 주장에 힘을 보탰다. 하지만 그 역시 그런 방식이 활발히 퍼지기 위해서는 다른 무언가가 필요하다고 했다. 바로 재정적 매개체와 훌륭한 정부였다. 제도가 관건이라는 사실이 여기서 더욱 분명해진다.


... 20세기에 몇 가지 실험이 행해졌다. 두 무리의 독일인(서독과 동독), 두 무리의 한국인(북한과 남한), 그리고 두 무리의 중국인(중화인민공화국 안의 사람들과 바깥의 사람들)에게 각각 다른 제도가 적용된 것이다... 문화가 거의 비슷한 사람들을 데려다가 한 무리에는 공산주의 제도를, 다른 한 무리에는 자본주의 제도를 적용하면 행동방식이 거의 즉각적으로 분리된다는 것이다.


52/ <총, 균, 쇠Guns, Germs and Steel>에서 재레드 다이아몬드Jared Diamond는 왜 유라시아가 세계의 나머지 지역보다 앞서갔는지 설명했다. 하지만 유라시아 서쪽 끝 지역이 동쪽 끝 지역보다 앞서간 이유를 밝힌 것은 1999년 평론 <부자가 되는 법How to Get Rich>을 통해서였다. 유라시아 동부 광야에 위치한 아시아의 단일 제국은 혁신을 억제한 반면, 산이 많고 강으로 나뉜 유라시아 서부에서는 여러 왕국과 도시국가가 창의적인 경쟁과 의사소통에 적극적이었다는 것이다.


... 경쟁은 서양이 패권을 쥐는 데 빼놓을 수 없는 요소였지만... 그것도 다만 일부에 지나지 않았다.


53/ 이 책에서 나는 무엇이 서양과 세계의 나머지 국가들을 구분 짓는지 보여주고, 제도, 관련 개념, 행위가 복합된 여섯 가지 비장의 무기를 설명할 것이다. 설명을 단순화하기 위해 그것들을 다음 여섯 가지 제목 아래 요약했다.


1. 경쟁: ... 근대 민족 국가와 자본주의의 발판을 만듦.

2. 과학: ... 군사적 강점을 제공함.

3. 재산권: ... 법률... 대의제의 기반을 형성함.

4. 의학

5. 소비 사회: ... 이것이 없었다면 산업혁명은 유지되지 않았을 것임.

6. 직업윤리: 신교에서 유래한 도덕적 틀과 행위 방식


55/ ... 식민지였던 북아메리카가 남아메리카보다 더욱 잘 살게 된 것은 영국 정착민들이 남쪽의 스페인인이나 포르투갈인과 완전히 다른 재산권이나 정치 제도를 확립한 덕분이었다... 유럽이 아프리카를 침략한 것은 어떤가... 누구에게나 치명적인 열대병을 예방하는 백신이 있었다.


56/ ... 우랄산맥 너머의 러시아는 동양인가?...


57/ ... 헌팅턴Samuel Huntington이 본 서양은 오직 서유럽과 중유럽(동방정교회를 믿는 동부 제외), 북아메리카(멕시코 제외), 그리고 오스트랄라시아뿐이다...


58/ ... 서양문명이 과거에 한 번 쇠퇴하고 몰락한 적이 있었다는 사실을 짚고 넘어가야 한다... 서양 문명 1.0은 유프라테스와 티그리스강이 만나는 지점부터 나일 강 유역까지 이어지는 소위 비옥한 초승달 지대에서 발생하여 아테네의 민주주의와 로마제국에서 정점에 달했다... 비잔티움의 도서관 사서들, 아일랜드의 수도승들, 로마 가톨릭 교회의 교황과 사제들이 아니었다면 서양의 전통 지식도 모두 함께 사라질 뻔했다. 아, 아바스의 칼리프들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들이 본분을 다하지 않았다면 서양 문명은 이탈리아의 르네상스로 다시 태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59/ 서양 문명 2.0 역시 쇠퇴하다 멸망할 운명일까?...


1장 경쟁

75/ 독일의 사회학자 막스 베버는 <유교와 도교Confucianism and Taoism>(1915)에서 유교적 합리주의를 '세상에 대한 합리적인 순응'이라 정의하며 서양의 '세상의 합리적 지배'와 대조를 이룬다고 여겼다. 이것은 중국의 철학자 펑유란馮友蘭이 쓴 <중국 철학의 역사History of Chinese Philosophy>(1934)나 케임브리지대학교의 조지프 니덤Joseph Needham의 <중국의 과학과 문명Science and Civilization in China>으로도 뒷받침된다. 그러나 이처럼 문화에 초점을 둔 설명은 명나라 시대 전에는 중국도 기술을 개혁해 세상을 지배하려고 했다는 증거와 부합하지 않는다.


76/ 누가 최초로 물시계를 발명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1086년 소송蘇頌은 여기에 탈진기脫進機를 추가해 세계 최초의 기계식 시계를 만들었다. 시간을 알려주는 것뿐 아니라 태양과 달, 행성들의 움직임을 기록할 수 있는 12미터 높이의 정교한 기구였다. 마르코 폴로는 중국 북부의 대두를 방문했다가 그런 시계로 조작되는 종탑을 처음 보았다. 1272년에 세워지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파종용 조파기를 처음 만든 사람은... 18세기 영국 농업 혁명의 핵심 농기구 로더럼 쟁기 역시 중국인들이 먼저 만들었다. 1313년 왕전王翦이 쓴 <농업에 관한 논문Treatise on Agriculture>은 당시 서양에는 알려져 있지 않은 수많은 농기구로 가득했다... 철광석을 녹이기 위한 용광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철 현수교는 영국이 아니라 중국 것이다... 직물 생산에 물레나 비단 얼레 같은 도구를 처음 도입한 것도 중국이었다. 이것은 13세기 이탈리아로 수입되었다... 14세기 후반 쓰인 초옥焦玉과 유기劉基의 <화룡경火龍經>을 보면 지뢰, 수뢰, 로켓, 폭발물을 채운 포탄 등이 설명되어 있다.


그밖의 중국 발명품에는 화학 살충제, 낚시 릴, 성냥, 자석 나침반, 놀이용 카드, 칫솔, 일륜차 등이 있다... 골프는... 송나라(960~1279) 때의 기록을 보면 '추환捶丸'이라는 게임이 있다...


84/ ... 경쟁자보다 경제적·정치적으로 앞서가는 것만이 그들의 유일한 목표였다. 다가마가 성공을 거두는 것은 곧 리스본이 베니스를 이긴다는 뜻이었다. 한마디로 15세기에 항해는 유럽의 우주 경쟁, 아니 향신료 경쟁이었다.


88/ ... 14세기 유럽에는 대략 1,000곳의 국가 조직이 있었다. 200년후에도 어느 정도 자주권을 가진 국가는 500개나 되었다. 과연 그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가장 직접적이고 단순한 답은 지리적 조건이다...


89/ ... 유럽에서는 국가 간 충돌이 유럽 전역을 황폐하게 만들었다... 이렇게 계속된 전투에는 세 가지 의도하지 않은 혜택이 있었다. 첫째, 군사 기술에 혁신이 일어났다...


90/ ... 두 번째 혜택은 전쟁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징세 방식이 점점 발달했다... 13세기 이탈리아를 필두로 유럽의 각국 정부는 사상 처음으로 여러 자금 조달 방식을 실험하기 시작했고 이것이 오늘날 채권 시장의 모태가 되었다... 또 다른 중요한 재정 혁신으로는 수익의 일부를 정부에 바치고 해군에 힘을 보태는 조건으로 합자기업에 독점무역권을 내주는 네덜란드의 아이디어를 꼽을 수 있다. 1602년 설립된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와 이를 모방해 세운 영국 동인도회사는 자기자본을 거래 가능한 주식으로 나누고 관리자들의 재량에 따라 현찰 배당금을 지급한, 진정한 의미에서 최초의 자본주의 기업이었다...


91/ ... 마지막으로 세대를 거쳐 반복된 대량살육 때문에 유럽에서는 특정 국가가 강력하게 성장하지 못했고, 그 결과 해외 탐험 금지 같은 조치는 내려지지 못했다. 16, 17세기에 반복적으로 그랬듯 투르크가 동부 유럽을 침략했을 때 포르투갈에 항해를 중단하고 동쪽의 적군에 집중하라는 명령을 내릴 정도로 강력한 범유럽 황제는 없었다. 정반대로 유럽 왕실들은 다른 국가와 경쟁하는 방법의 하나로 무역과 상업, 정복과 식민지 건설을 장려했다.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의 종교개혁이 독일을 휩쓸고 지나간 이후 한 세기 넘게 계속된 종교전쟁은 유럽 파멸의 주요인이었다(2장 참조). 그러나 신교도와 로마 가톨릭 사이의 피비린내 나는 전투와 간헐적으로 여기저기에서 벌어진 유대인 박해에는 유리한 부작용이 있었다. 1492년 유대인들이 이교도라는 낙인이 찍혀 카스티야와 아라곤에서 추방되었다. 처음에는 대부분 오스만제국으로 도피했지만 1509년 이후 베니스에 유대인 공동체가 만들어졌다. 1566년 네덜란드가 스페인 지배에 반기를 들고 그 결과 신교도 공화국인 연합주가 세워지자 암스테르담은 종교적 다양성이 인정되는 또 다른 피난처가 되었다. 1685년 프랑스에서 쫓겨난 위그노들은 영국과 네덜란드, 스위스에 정착할 수 있었다. 종교적 염원은 해외로 확장하고자 하는 유럽인의 열망에 또 다른 동기를 부여했다...


92/ ... 역설적으로 유럽인들은 스스로 분열함으로써 세상을 지배할 수 있었다. 유럽에서는 작은 것이 미덕이었다. 이는 곧 경쟁, 국가 사이의 경쟁뿐 아니라 국가 내의 경쟁을 의미했으니까.


공식적으로 헨리 5세는 잉글랜드와 웨일스의 왕이었고 프랑스 통치권도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영국의 지방에서 진정한 권력은 귀족, 즉 존 왕에게 마그나 카르타 대헌장을 숭인하도록 강요한 사람들의 후손에게 있었다. 수천 명의 지주와 셀 수 없이 많은 성직자, 평신도 조직들은 말할 필요도 없었다. 헨리 8세 시대 전까지 교회는 왕실의 지배를 받지 않았다. 자치적으로 운영되는 지방 도시도 많았다. 무엇보다도 국가 내 가장 중요한 상업 중심지는 거의 완전히 자치적이었다. 유럽은 국가로만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다. 영지, 그러니까 귀족, 성직자, 도시 거주민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런던 시 자치체가 설립·조직된 때는 12세기였다. 달리 말해 런던의 시장, 주 장관, 행정 장관, 시의회, 동업 조합원, 자유시민의 역사가 놀랍게도 800년이 넘는다는 뜻이다. 이 자치체는 최초의 자치적인 상업조직 중 하나로 어떤 면에서는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법인의 모태이기도 하고 또 어떤 면에서는 민주주의의 선조격이기도 하다.


93/ 헨리 1세는 이미 1130년대에 런던의 시민들에게 주 장관과 고등법원 판사를 직접 선출하고 왕실이나 다른 권력 기관의 간섭 없이 스스로 법적·재정적 문제를 관리할 권리를 주었다. 1191년 리처드 1세가 십자군 원정을 떠나 있는 동안 시장을 선출할 권리도 주어졌다. 1215년 존 왕이 이것을 공식화하자 런던은 왕권을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다... 왕실을 위한 대출과 선물은 도시가 자치권을 획득하는데 중요한 열쇠가 되었다. 도시가 부유해질수록 영향력은 더욱 커졌다...


94/ ... 시대순으로 포목상, 식료품상인, 직물상인, 생선상인, 금세공인, 가죽장인, 재단사, 잡화상인, 소금상인, 철물상인, 포도주상인, 직물생산자로 구성된 '위대한 12' 조합은 런던의 장인과 상인들이 얼마나 막강한 권력을 휘둘렀는지 알려주는 대목이다...


유럽에서 기계식 시계가 빠른 속도로 보급되고 그 기술력이 발전한 데는 다른 무엇보다도 여러 계층에 걸친 국가 간, 국가 내, 심지어 도시 내 경쟁의 공이 컸다. 이미 1330년대에 왈링퍼드의 리처드Richard of Wallingford가 세인트 앨번스 수도원의 수랑 남쪽 벽에 놀라울 정도로 정교한 기계식 시계를 설치했다. 이 시계는 달과 조수, 천체의 움직임을 보여주었다... 이 기계식 시계와 후에 그것을 대체한 스프링 달린 시계는 중국의 물시계보다 훨씬 더 정확했다. 하지만 정확성만이 차이는 아니었다. 이것은 중국에서처럼 황제의 천문학자들만 독점적으로 쓰고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널리 보급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었다. 이웃 마을 성당이 탑에 새로운 시계를 설치하면 가장 가까운 경쟁 마을 또한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다...


측정과 움직임의 조화에서 정확도가 높아진 덕분에 시계(그리고 훗날 개발된 휴대용 시계)는 유럽의 부상, 서양 문명의 확산과 함께 발전했다. 시계 하나가 만들어질 때마다 동양의 패권 시대는 조금씩 끝을 향해 다가갔다.


101/ ... 영국은 약물 사용 면에서도 운이 좋았다. 오랜 세월 술에 찌들어 있던 영국인들은 17세기 유입된 미국 담배, 아라비아 커피, 중국 차 덕분에 비로소 정신이 맑아졌다. 그들은 당시 유행하던 커피 하우스로 신경을 자극받았다. 3분의 1은 커피, 3분의 1은 주식 거래, 나머지 3분의 1은 거기에서 즐기던 자유로운 잡담에서 나온 것이었다. 반면 중국인들은 아편이 가져다주는 무력감에 젖어들고 말았다. 그들의 담뱃대를 채운 것은 다름 아닌 영국의 동인도회사였다.


유럽의 모든 비평가가 스미스처럼 중국의 '정체 상태'를 알아차린 것은 아니었다. 1697년 독일의 철학자이자 수학자 고트프리트 라이프니츠Gottfried Leibniz가 선언했다. "우리 집 문에 써 붙여야 겠군, '중국 학문 정보 수집국'이라고." 자신의 책 <중국발 최신 뉴스The Latest News from China>에서 그는 "중국은 우리에게 자연 신학의 목적과 실천을 가르칠 선교사를 보내야 한다. 우리가 계시 종교를 가르칠 선교사를 보내듯이"라고 했다. 프랑스의 철학자 볼테르Voltaire도 1764년 "중국어의 강점에 집착하지 않아도 중국이 사실상 세계에서 가장 우수한 제국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라고 했다. 그로부터 2년 뒤 중농주의자 프랑수아 케네Francois Quesnay는 <중국의 전제정치The Despotism of China>에서 중국 경제 정책에서 농업이 수행한 중심적 역할을 칭찬했다.


2장 과학

110/ ... 이슬람 수학자들은 그리스와 특히 인도 수학을 바탕으로 산수, 기하학과 뚜렷이 구별되는 대수학algebra('이항하다'라는 의미의 아랍어 al-jabr에서 유래) 체계를 세웠다. 최초의 대수학 교과서 <인도 숫자를 이용한 계산Hisab al-Jabr W'al-Musqabalah>은 820년경 페르시아 학자 무하마드 이븐 무사 알-콰라미즈Muhammad ibn Musa al-Khwarizmi가 아랍어로 저술했다...


117/ 투르크는 오스트리아에 많은 것을 남겼다. 투르크 국기에 그려진 초승달 모양을 본떠 크루아상*이 만들어졌고, 오스만 대군이 버리고 간 커피가 빈 최초의 카페를 여는 데 사용되었으며, 그 커피로 최초의 카푸치노가 만들어졌고 노획한 투르크 타악기 심벌즈, 트라이앵글, 베이스 드럼이 오스트리아 군악대에 도입되었다...


*이 이야기는 <요리 대사전Larousse Gastronomique>(1938) 초판을 쓴 알프레드 고트샬크Alfred Gottschalk에게서 비롯되었다... 나중에 그는 그 시기를 1683년 빈 공성전으로 변경했다.



119/ 오스만 제국의 쇠락을 단순히 서양 군사력 성장의 결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서양 군사 우수성의 기반은 전쟁과 정부의 합리성에 과학을 적용한 결과였다...


122/ ... 유럽의 과학혁명과 계몽주의는 교회와 국가가 반드시 분리되어야 한다는 기독교의 기본 교리에 뿌리를 두고 있다. 성서에 나오는 "그런즉 카이사르의 것은 카이사르에게,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에게 바치라(<마태복음>, 22장 21절)"라는 구절은 코란과 극단적으로 대비되는 율법이다... 유럽의 통치자들이 잇따라 로마 교황의 정치적 요구에 저항할 수 있었던 것은 5세기 성 아우구스티누스St. Augustinus가 <신국론City of God>에서 설명했듯 기독교가 세속적인 것과 영적인 것을 구분했기 때문이다. 성직서임권은 그레고리 7세(1073~1075)가 다시 빼앗아오기 전까지 교황을 꼭두각시로 전락시킨 세속의 권위에 속했다.


1500년 이전 유럽은 눈물의 골짜기였지만 무지의 골짜기는 아니었다. 르네상스 시대에는 수많은 고전 지식이 재발견되었는데, 그 대부분은 이슬람 세계와 접촉해서 얻은 결실이었다...


123/ ... 하지만 서양에 르네상스보다 더 결정적인 전환점은 종교개혁과 1517년 이후 잇따른 서양 기독교의 분열이었다. 기독교의 분열은 매우 극심했는데 그 한가운데에는 인쇄기 발명이 있었다...


125/ 개인적인 성경 강독과 '상호 가르침'을 강조한 이 새로운 매체는 종교개혁의 진정한 메신저가 되었다...


... 종교적 보수주의자들은 인쇄기를 '사악한 기관機關'이라고 비난했다. 아마 모든 지혜는 필사본에 있고 소수의 사람만이 도서관 열쇠를 가지고 있던 때가 좋았다며 한탄했을지도 모른다...


129/ 과학혁명은 행성운동과 혈액 순환 연구의 진보와 거의 동시에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훅Robert Hooke이 발명한 현미경은 지금까지 인간의 눈으로 볼 수 없던 것들을 드러냄으로써 과학을 완전히 새로운 경지에 올려놓았다. <미크로그라피아Micrographia>(1665)는 새로운 경험주의, 즉 파우스트 박사의 마법과는 거리가 먼 세상을 위한 선언이었다...


133/ 1600년대 중반에는 이런 유형의 과학적 지식이 한 세기 전 개신교 교리만큼 빠른 속도로 퍼져나갔다. 인쇄기와 점점 신뢰도가 높아가는 우편 서비스가 결합하여 매우 훌륭한 네트워크를 만들어냈다...


134/ ... 어떤 과학적 기준으로 보아도 과학혁명은 철저히 유럽 중심적이다. 전체의 약 80퍼센트에 달하는 과학혁명의 업적이 글래스고, 코펜하겐, 크라쿠프, 나폴리, 마르세유, 플리머스로 둘러싸인 육각형 지역 안에서 발생했으며, 나머지 20퍼센트가 이 지역으로부터 약 160킬로미터 안에서 거의 발생했다... 11세기가 끝나갈 무렵 영향력 있는 이슬람 성직자들이 그리스철학 연구가 코란의 가르침과 양립할 수 없다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유럽 대학들이 학문의 범위를 넓혀가고 있을 때 마드라사스(이슬람교 기숙학교)는 점차 배타적으로 신학에만 초점을 맞추었다. 이들은 인쇄술 역시 배척했다. 오스만제국에서 필사본은 신성한 것이었다... 1515년 술탄 셀림 1세는 인쇄기를 사용하다가 발각되면 사형에 처하는 법을 제정했다. 이슬람교와 과학적 진보를 조화시키지 못한 것은 재앙이었다... 18세기 후반까지 중동어로 번역된 서양 책은 매독 치료에 관한 의학 책뿐이었다.


135/ 1570년대 박식하기로 유명한 타키 알딘Taqi al-Din이 이스탄불에 지은 천문대의 운명보다 이러한 차이를 더 잘 설명해주는 것도 없을 것이다... 다루 라사둘 세디드('새로운 관측소'라는 뜻) 천문대는 어느모로 보나 당시 유명한 천문학자 브라헤가 설계한 우라니보르그 천문대와 비슷한 수준으로 정교했다. 1577년 9월 11일 이스탄불 상공에서 혜성이 관측되었다... 하늘의 비밀을 엿본 알딘의 행실이 사마르칸트 천문학자 울루그 베그Ulugh Beg의 행성 도표만큼 불경하다고 술탄에게 탄원했다(울루그 베그는 비슷한 행실로 참수당했다). 천문대 완공 후 약 5년이 지난 1580년 1월, 술탄은 알딘의 천문대를 없애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슬람교 성직자들은 이런 식으로 오스만제국에서 과학적 진보의 불씨를 꺼뜨렸다...


136/ ... 1662년 7월에 '자연과학 진흥을 위한 런던왕립학회'가 찰스 2세에게서 인가를 받았다...


137/ 4년 뒤, 지도 제작을 위한 선구적인 단체로서 프랑스왕립과학원이 파리에 세워졌다... 왕이 익히 이해한 바와 같이 진정한 과학은 국가의 이익이 걸린 문제였다.


159/ 포가 더 효율적이고 정확해졌기 때문에 정교한 축성술의 가치가 떨어지고 가장 잘 훈련된 일반 보병 연대도 덜 치명적이게 되었다. 프리드리히 대왕은 3년 뒤에 로빈스Benjamin Robins의 <새로운 포의 원리New Principles of Gunnery>(1742) 독일어 번역을 의뢰했다...


169/ 아타튀르크가 역점을 둔 부분은 그가 도입한 급진적인 문자 개혁이었다. 그동안 터키에서 사용해온 아랍문자는 이슬람의 영향력을 상징하기만 하는 것이 아니었다. 아랍문자는 터키어의 어음語音과 잘 어울리지 않았다...


171/ ... 칼리프 제도는 1924년 3월에 폐지되었다. 한 달 뒤 종교재판이 중지되었고 샤리아 법이 스위스 민법에 바탕을 둔 민법으로 대체되었다...


175/ ... 비서양 국가들이 앞으로도 계속 과학 이외에 서양의 다른 핵심적인 성공 공식, 즉 사유재산권, 법치주의, 대의제를 거부하면서도 서양의 과학 지식을 수용하는 것만으로 혜택을 얻을 수 있을까


3장 재산권

181/ ... 사실 민주주의는 인간의 신성한 권리인 개인의 자유와 사유재산권 보호가 대의제와 입헌 정치로 보장되는 법치주의 토대 위에 우뚝 선 체계다.


194/ ... 1670년 이후 영국을 떠나 아메리카로 건너간 사람들은 재산이 거의 없었다... 하지만 이들에게는 미국의 미래를 결정지을 수많은 사상적 기반이 닦여 있었다. 첫번째는 이들이 20세기 이래로 커먼 로 법원(그리고 형평법 법원)에서 발전시켜온 재산권 개념이다.* 두번째는 (퀘이커파, 가톨릭, 유대교 역시 동부 해안 정착에 각자 몫을 다했다는 사실도 중요하지만) 호전적인 프로테스탄티즘, 즉 개신교에 대한 개념이다. 세번째는 세금의 적법성이 의회 승인에 달려 있다는 개념이다. 왕은 입법제도로 국민의 불만을 해소하는 데 동의하는 대가로 '세출'을 승인받는다. 이러한 것들이 영국 내전에서 쟁점이 된 문제들이었다.


* 특히 아버지의 토지를 물려받을 남계 상속인 권리 추정, 양도 가능성에 따른 단순봉토권(무조건 토지 상속권)과 한사봉토권(限嗣封土權, 상속인에게 속하는 부동산에 대한 불가양의 권리로서 그의 직계비속에게 영원히 귀속되는 권리)의 구분, 자유보유권과 등본소유권 사이의 보유 안정성에 따른 구분, 봉건 소작료 또는 기타 다른 세금을 회피하는 수단으로서의 '유스use(중세 영국 재산법상 어떤 사람이 타인 소유의 토지에서 수익을 얻을 수 있는 권리)', '신탁trust'의 명칭과 적법성을 결정하기 위한 토지의 불법침해trespass, 부동산점유회복ejectment의 사용.



202/ 재산 소유권자들의 민주주의는 소박하게 시작되었다... 식민지 개척자들은 자신들의 대표의회가 있어야 한다고 확신했다. 이들은 지체 없이 독점적 무역회사를 본뜬 단체조직에 돌입했다. 1619년에 이미 버지니아 의회가 첫 회동을 했다...


209/ ... 새로운 공화국을 위한 현실성 있는 연방조직을 창조한 것은 역사상 가장 인상적인 정치제도인 1787년 헌법이었다. 여기에는 로크식 권력의 네 주체 - 행정부, 입법부의 상원과 하원, 대법원 - 뿐만 아니라 단일시장, 단일 무역정책, 단일 통화, 단일 군대, 단일 파산제도는 물론, '불합리한 수색과 체포'에서 개인을 보호하는 수정헌법 제4조도 있었다.


4장 의학

252/ 열강제국들은 대부분 자국의 의도가 후진국에 문명을 선물하는 평화적인 것이라 주장한다. 하지만 프랑스보다 '문명화 임무'라는 표현을 더 좋아하는 국가는 역사상 없었다. 그 이유를 이해하려면 먼저 프랑스 혁명과 미국 혁명 사이의 심오한 차이점을 알아봐야 한다. 이 차이를 처음으로 이해한 사람은 아일랜드 남부 신교도 정착지 출신의 위대한 정치 사상가이자 휘그당 의원 에드먼드 버크Edmund Burke였다...


255/ 루소의 책 <사회계약설>(1762)은 서양 문명이 창조한 책 중 가장 위험한 책으로 꼽힌다... 인간이 복종할 수 있는 유일하게 적법한 대상은 '인민'과 그들의 '일반의지'가 가진 주권이다...


256/ 버크가 미심쩍어한 부분이 바로 이 세조항이었다. 루소가 인정한 '사회질서'와 '사회적 필요'의 우월성은 버크에게는 매우 불길하게 느껴졌다...


257/ ... 버크는 놀랄 만한 예지력으로 그 시대 가장 위대한 예언을 통해 '학자들'의 유토피아주의의 위험성을 경고했다. "모든 전망의 끝에 교수대 말고 다른 것은 보이지 않는다."...


258/ 카를 마르크스의 사상(5장 참조)에 얽매인 한 세대의 역사학자들은 혁명을 흉작, 빵 가격 상승, 앙시앵 레짐, 즉 구제도 아래에서 프롤레타리아와 가장 비슷했던 상퀼로트(프랑스 혁명 당시 파리의 하층민 공화당원)의 불만 탓으로 돌리며 계급갈등에서 대답을 찾고자 했다... 오히려 혁명을 일으킨 것은 '명사'인 엘리트, 부르주아, 귀족이 뒤섞인 집단이었다. 알렉시스 드 토크빌Alexis de Tocqueville이라는 이름의 귀족 지성인이 이보다 더 조심스러운 해석을 내놓은 바 있다. 주요 저서 <미국의 민주주의Democracy in America>(1835)와 <구제도와 혁명The Old Regime and the Revolution>(1856)에서 그는 '왜 미국이 아니라 프랑스였나?'라는 질문에 매우 독창적인 대답을 내놓았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두 사회에는 다섯 가지 근본적인 차이가 있었고, 그로써 그들이 이룩한 혁명에도 큰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첫째 프랑스는 점점 중앙집권화된 반면 미국은 자연스레 연방 형태를 띠며 지방마다 여러 집단과 민간단체가 활발히 움직이고 있었다. 둘째 프랑스인들은 일반의지를 법보다 높게 치는 경향이 있는데 미국의 강력한 법조인 집단은 이에 거부감을 보인다. 셋째 프랑스 혁명가들은 종교와 그것을 유지하는 교회를 공격한 반면, 미국의 분리파 교회는 세속적 권력가의 요구로부터 스스로 보호할 발패를 가지고 있었다(토크빌은 종교에 회의적이었으나 종교의 사회적 가치는 잘 알고 있었다). 넷째 프랑스는 무책임한 지식인들에게 너무 많은 권력을 허용한 반면, 미국에서는 실용주의자들이 나라를 이끌었다. 그리고 마지막이자 토크빌이 가장 중요하게 여긴 다섯째, 프랑스는 평등을 자유보다 우선했다. 한마디로 그들은 로크가 아닌 루소를 택한 것이다.


260/ ... 토크빌은 마치 나중에야 떠오른 것처럼 여섯번째 차이점을 기록해놓았다.


프랑스는 전쟁에 대한 열의가 너무나도 강하다. 이것만큼 터무니없거나 국가 안녕에 해로운 일도 없다...


5장 소비

343/ ... 자본가들은 마르크스가 놓쳤던 부분을 이해하고 있었다. 바로 노동자가 곧 소비자라는 사실이었다. 따라서 그들의 임금을 겨우 생계만 유지할 수 있을 정도로 낮추는 것은 이치에 닿지 않았다...


368/ ... 단일화야말로 그 시대가 요구하는 것이었다... 의복만의 단일화였다... 1920년대에는 염색한 상의가 우익의 필수 복장이 되었다. 이탈리아의 파시스트들은 검은색을 택한 반면 독일의 국가사회주의자들은 갈색을 택했다.

대공황이 없었다면 그러한 움직임은 곧 옷맵시라고는 없는 패션의 암흑기로 이어졌을 것이다...


379/ ... 전쟁 전에는 대부분 재단사가 고객의 치수를 재어 옷을 만들었다. 하지만 수백, 수천만 벌의 군복을 생산할 필요가 생기면서 표준 치수가 개발되었다...


380/ 종전 후 미국에서 소비 사회는 대중적인 현상이 되어 사회 계층간 의복의 차이를 대폭 감소시켰다... 종전 후 고향으로 돌아온 군인들에게 제공된 교육 기회에 교외에서 일어난 주택 건설 바람이 더해져 삶의 질이 높이 향상되었다. 베이비붐 세대의 부모들은 신용 구매 혜택을 처음으로 본 세대였다. 그들은 집과 자동차, 냉장고, 텔레비전, 식기 세척기 같은 가전제품들을 모두 신용 구매할 수 있었다. 1930년 대공황이 닥칠 당시 미국가구의 절반 이상이 전기를 쓰고, 자동차와 냉장고를 소유했다. 1960년에는 미국인의 약 80퍼센트가 이러한 편의용품뿐 아니라 전화기까지 가지고 있었다... 세탁기는 대공황 전인 1926년경 발명되었다. 그로부터 39년 후인 1965년 가구 절반이 세탁기를 한 대씩 갖추었다. 1945년에 발명된 에어컨이 보급률 50퍼센트를 넘어선 시점은 29년 후인 1974년이었다. 빨래 건조기는 1949년에 개발되었으며 보급률 50퍼센트를 넘긴 시점은 23년 후인 1972년이었다(같은 해 개발된 식기세척기는 확산 속도가 조금 느렸다. 총가구의 절반 이상이 한 대씩 갖추게 된 것은 1997년이나 되어서였다). 컬러텔레비젼은... 1959년에 발명되어 1973년에 절반이 넘는 가구에 보급되었으니 14년이 걸린 셈이다. 사실상 냉전이 종식된 1989년에는 미국인 3분의 2 이상이 식기세척기만 제외하고 이 모든 가전제품을 소유했다. 그들은 또한 전자레인지(1972년 발명)와 비디오카메라(1977)도 손에 넣었다. 15퍼센트는 이미 PC(1978)도 사용하고 있었다. 휴대전화를 가진 사람도 2퍼센트나 되었다. 새로운 밀레니엄을 맞을 즈음에는 인터넷과 함께 이 모두가 미국 가구 절반에서 쓰이고 있었다.


스스로 이러한 궤적을 따라갈 수 있으리라 느낀 다른 사회들은 곧 소비에트 공산주의를 매력적이라고 보지 않기 시작했다...


383/ ... 한마디로 동아시아가 소련 공산주의라는 중력장에서 벗어난 것은 미국의 소비사회 속 이해관계자가 된 덕분이었다...


규격화가 후에 대량 소비주의가 만연하던 개인주의와 조화를 이루었다는 사실은 서양 문명이 지금까지 부렸던 여러 재주 중 단연 뛰어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냉전의 가장 큰 미스터리는 노동자의 낙원이라는 곳에서 왜 제대로 된 청바지 한 벌을 만들어내지 못했는가 하는 것이다.


6장 직업

413/ 어린 시절 베버는 조숙했다. 독일 종교개혁의 본거지 중 하나인 에르푸르트에서 자란 그는 13세 때 부모에게 크리스마스 선물로 <황제와 교황의 직위를 특별히 참조한 독일 역사의 흐름>이라는 제목의 평론을 주었다... 22세에 이미 법정변호사가 되었으며, 그로부터 3년만에 <중세 기업조직의 역사>에 대한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27세에는 <로마의 농업 역사와 그것이 사법에 갖는 중요성>이라는 논문으로 베를린대학교에서 교수직을 따냈다...


414/ 1904년 베버는 만국박람회에서 열린 예술과 과학 학회에 참석하기 위해 미국 미주리의 세인트루이스로 향했다... 베버는 전기 궁전의 빛나는 불빛에 완전히 매료되었다. 미국 기업가정신의 화신이라고 할 수 있는 직류 전기의 왕 토머스 에디슨Thomas Edison도 그 자리에 있었다. 세인트루이스는 전화부터 영화에 이르기까지 근대 기술의 경이로움으로 넘쳐났다...


415/ 세인트루이스에서 서쪽으로 약 150킬로미터 떨어져 있는 세인트제임스라는 작은 마을은 미국 대륙을 가로질러 서쪽으로 뻗은 철도를 따라 생겨난 전형적인 개척지 수천 곳 중 하나였다. 100년 전 그곳을 통과할 때 베버는 마을에 있는 다양한 교회와 예배당의 수에 매우 놀랐다. 만국박람회에서 느낀 산업 발달의 찬란함이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던 그는 미국의 물질적 성공과 활기찬 종교 생활 사이에 일종의 성스러운 관계가 있다는 사실을 깨닫기 시작했다.


그는 하이델베르크의 집으로 돌아와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The Protestant Ethic and the Spirit of Capitalism> 2부를 쓰기 시작했다...


417/ ... 이보다 더 큰 문제는 가장 명백한 예외였던 유대인에 대한 베버의 간접적 비판이었다. 베버에 따르면 "유대인은 정치적이고 투기 성향이 강한 모험적 자본주의의 편에 섰다. 그들의 기질은 최하층 자본주의의 것과 같다. 오직 청교도주의만이 자본과 노동으로 이루어진 합리적 조직의 정신을 이어간다." 베버는 또한 희한하게도 프랑스나 벨기에, 그리고 다른 나라에서 가톨릭 기업가들의 성공은 인정하지 않았다... 훗날 페이비언 협회의 경제사학자 토니R.H. Tawney를 비롯한 학자들은 인과관계가 종교적 교리에서 경제적 행위쪽으로 흐른다는 베버의 주장에 회의를 표했다...


418/ ... 그가 생각한 대로 종교개혁 이후 유럽의 신교도 국가들이 가톨릭 국가들보다 분명 빠른 속도로 성장하여 1700년이 되자 1인당 소득 면에서 그들을 따라잡았고, 1940년경에는 신교도 국가가 가톨릭 국가보다 40퍼센트 더 부유했다... 개인적인 성경 강독을 중요시한 루터의 사상 덕분에 신교는 인쇄뿐만 아니라 읽기와 쓰기 교육을 널리 장려했다...


419/ ... 서양 문명 역사에 종교가 가져다 준 가장 큰 공헌은 아마도 신교가 서양 사람들을 일하고 저축하고 글을 읽게 만들었다는 것이 아닐까?... 무엇보다 인적 자본의 축적에 의존했다... 다시 생각해보니 신교의 직업윤리뿐 아니라 '언어'윤리를 이야기하는 것이 더 나을 것 같기도 하다.


435/ 제임스 리버James River에 가보면 유럽과 미국 신교의 가장 큰 차이점을 뚜렷이 알 수 있다. 영국 국교회나 스코틀랜드 장로교회처럼 유럽에서는 종교개혁이 국가차원에서 이루어진 반면 미국에서는 언제나 종교와 국가가 엄격하게 분리되어 다양한 신교 종파끼리 개방된 경쟁이 가능했다. 이것이야말로 유럽 내 종교의 기이한 죽음과 미국에서 계속되는 활기를 설명할 최고의 증거일지도 모른다...


450/ 오랜 망설임 끝에 적어도 중국의 공산당 지도자 중 일부는 이제 기독교를 서양의 가장 위대한 힘의 원천 중 하나로 인정하는 것처럼 보인다. 중국 사회과학 아카데미의 한 학자의 말을 빌리면 다음과 같다.


... 처음에는 서양이 우리보다 더 강력한 무기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런 다음에는 서양의 정치체제가 뛰어나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서양의 경제 시스템에 초점을 맞추었다. 하지만 지난 20년간 우리는 서양 문화의 중심에 종교, 기독교가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것이 바로 서양이 그리도 강력한 이유이다. 사회적·문화적 삶의 기독교적 윤리 기반이 자본주의의 출현과 그후 민주정치로의 성공적 이행을 가능하게 했다...


또다른 학자 저우신핑은 "초월성의 기독교적 이해가 근대 서양의 사회와 정치에서 다원적 공존을 받아들이는데 매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라고 정의내렸다... 영화제작자이자 기독교신자인 위엔 즈밍도 이에 동의한다. "가장 중요한 것, 서양 문명의 핵심은... 기독교다." ... 장쩌민이 중국 주석과 공산당 서기장의 자리에서 물러나기 직전 당의 고위관료들이 모인 자리에서 중국에서 반드시 지켜야 할 한 가지 칙령을 내릴 수 있다면 '기독교를 중국의 공식 종교로 만드는 것'이 될 것이라고 했다는 말도 들린다... 제14차 중국공산당중앙위원회에서는 지속 가능한 경제 성장에 필요한 세 가지 요소가 발표되기도 했다. 그것은 재산권이라는 기반, 보호 장치로서의 법률, 그리고 그것을 뒷받침할 도덕성이었다.


맺는 말 - 라이벌

475/ ... 1530년 잉카인들은 안데스 산맥 꼭대기에 위치한 도시에서 내려다보이는 모든 것을 다스리고 통제했다. 그런데 10년도 채 안되어 말과 화약, 치명적인 질병을 몰고 온 외국 침략자들의 손에 그들의 왕국은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다...


476/ ... 최근 한 연구에 따르면 '아마겟돈을 피할 수 있었던 것'은 모두 1970년대 석유 파동 덕분이었다... 1985년 3월... 실제 소련이 보유하고 있던 핵무기는 미국보다 많았다... 그러나 고르바초프가 권력을 잡고 5년이 채 되지 않아... 1991년에는 마침내 소련 자체가 붕괴되었다...


479/ 서론에서 라셀라스의 질문이 등장했다. "유럽인들은 어떻게 그리 강력한가?..." 이에 대해 이믈락은 지식이 곧 힘이라고, 하지만 왜 그들이 다른 누구보다 우월한지는 자신도 알 수 없다고 했다. 이제 더 나은 답을 내놓을 수 있게 되었다... 나는 이 책을 통해 그것은 서양이 나머지 지역에서는 갖지 못한 여섯가지 비장의 무기를 개발한 덕분이라고 주장했다.


1. 경쟁. 유럽 자체가 정치적으로 분열되어 있었고, 각 왕국이나 공화국 내에도 경쟁을 펼치는 다수 조직이 있었다.

2. 과학혁명. 17세기 수학, 천문학, 물리학, 화학, 생물학 분야의 주요 혁신은 모두 서유럽에서 일어났다.

3. 법치주의와 대의제. 이를 통해 영어권 세계에서 사회적·정치적 질서를 세울 최적의 체제가 생겨났다. 이는 사유재산권, 지주계층 대표자들로 구성된 입법기관에 기반을 둔다.

4. 현대 의학. 열대병 연구를 비롯해 공중 보건에서 19-20세기 거의 모든 혁신이 서유럽과 북아메리카인의 손에서 이루어졌다.

5. 소비 사회. 산업혁명이 일어난 곳에는 생산성 향상을 가져오는 기술공급과 면제품을 비롯해 더 많고, 좋고, 저렴한 상품을 원하는 수요가 있었다.

6. 직업윤리. 서양인은 사상 처음으로 더 광범위하고 집중적인 노동을 높은 저축금리와 결합시켜 꾸준히 자본을 축적했다.


이 여섯 가지 무기는 서양의 패권을 연구하는 열쇠다. 오늘날 서양을 제외한 나머지 지역도 마침내 그것을 도입하기 시작했다(일본의 경우 메이지 천황 때(1867 ~ 1912)로 거슬러 올라간다)... 일본은 서양 문화와 제도 중 어느 요소가 정말 중요한지 몰랐다. 그래서 결국 서양식 의복과 헤어스타일부터 식민지 정책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모방하는 길을 택했다. 불행히도 그들이 제국을 세우기 시작한 것은 정확히 제국주의를 유지하는 비용이 그 혜택을 넘어서기 시작한 시기였다... 서양이 가지고 있는 비장의 무기를 모방하는 과정도 더욱 선택적으로 바뀌었다. 예를 들어 아시아 발전 과정에서 과학, 의학, 소비사회, 직업윤리(베버가 생각한 것보다는 덜 프로테스탄트) 같은 요소들에 비해 내부적 경쟁과 대의제는 덜 중요시되었다...


483/ ... 2007년 여름 시작된 금융위기는... 거의 대공황에 가까웠다. 하지만 그것이 가벼운 경기 침체에 그치고 말았던 원인은... 첫째, 중국의 은행 대출 확대. 이것은 서양으로의 수출이 주춤하는 것을 어느 정도 막아주었다. 둘째, 연방준비위원장 벤 버냉키가 주도한 미국 통화 기반 학대. 셋째, 거의 모든 선진국에서 겪은 엄청난 재정 적자, 미국은 3년 연속 GDP 대비 9퍼센트를 넘김으로써 이 중 선두에 섰다...


문명 붕괴는 대부분 전쟁뿐 아니라 재정 위기와도 연관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486/ ... 지금 위기의 다음 단계는 아마도 똑같은 투자자들이 미국 정부 자체의 신용성을 재평가하는 순간 시작될 것이다... 경제학자 토머스 사전트는... 인플레이션을 일으키는 것은 본원통화 공급량이 아니라 그것이 순환하는 속도이기 대문이다. 같은 식으로 정부의 지불능력을 결정하는 것은 GDP 대비 부채 비율이 아니라 투자자들이 요구하는 금리다...


물론 일본이 그러한 신용 위기를 일으키지 않고도 GDP 대비 공채 비율을 더욱 높일 수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일본 부채는 거의 모두 일본인 투자자와 기관으로부터 나온 것이었다. 반면 미국연방 부채는 외국 채권자, 그중에서도 5분의 1 이상이 중국의 통화당국으로부터 나왔다. 세계 최고의 준비 통화를 찍어낼 수 있는 미국의 '터무니없는 특권'만이 미국에 숨 쉴 공간을 마련해주고 있다...


487/ ... 중국 인민은행의 경제고문 시아 빈Xia Bin의 말을 빌리면 미국은 '무절제하고 무책임하게' 통화를 발행하고 있다. "달러 같은 세계 통화를 발행하는 데 세계가 억제책을 쓰지 않는 한... 또 다른 위기는 피할 수 없다."... 중국국제관계연구소의 수 징샹Su Jingxiang은 양적 완화책(중앙은행의 국채매입)은 일종의 '재정적 보호주의'라고 주장했다...


488/ ... 의회예산국의 대체 회계 시나리오에 따르면 연방 부채에 따르는 이자 지불액은 현재 연방 세입의 9퍼센트에서 2020년 20퍼센트, 2030년 36퍼센트, 2040년 58퍼센트까지 늘어날 전망이다.


이러한 수치가 의미하는 바는 많겠지만 그중에서도 미국 해외 파병 규모의 급격한 축소를 꼽을 수 있겠다...


504/ ... 그렇다면 서양 문명의 근간을 이루는 책은 무엇인가?* ...


*나는 킹 제임스 성경, 뉴턴의 [프린키피아], 로크의 [정부론], 스미스의 [도덕감정론]과 [국부론], 버크의 [프랑스 혁명에 관한 고찰], 다윈의 [종의 기원]을 꼽고 싶다. 그리고 여기에 더하라면 셰익스피어의 희곡, 링컨과 처칠의 연설문 등이 있다. 나의 코란으로 단 한 권을 고르라면 그것은 셰익스피어의 작품 전체가 될 것이다.



... '(서양) 문명의 핵심 원리는 헌법에 명시된 대로 민중의 관습과 그들의 의지를 따르는 지배층의 복종'이라고 한 처칠은 매우 중요한 요점을 잡아내었다.



감상:

가장 감명적인 사례는 남미와 북미의 차이이고, 또한 단 하나의 통찰은 기독교이다.

(2015. 03. 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