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옥순
인도에 미치다
<프롤로그: 그들은 왜 인도로 갔을까?>
... 고대와 중세에 인도의 서방에서 황금을 찾아간 그들은 대부분 말을 타고 무기를 들고 무리를 지어서 힌두쿠시 산맥과 인더스 강을 지나 인도에 도착했다.
인도의 동방에서 인도에 간 유일한 사례는 불법을 얻으려고 떠난 불교 승려들이었다. 흥미롭게도 그들은 서방 출신과 달리 용기를 무기 삼아 '눈에 보이지 않는 황금' 즉, 불법을 찾아 개별적으로 인도에 갔다.
... 투키디데스와 헤로도토스를 가진 그리스나 사마천을 가진 중국과 달리 인도는 역사적 전통이 부재하고 기록의 생산에 무관심했다... 연대를 추정할 수 있는 기록은 19세기 중반에 발견된 아소카의 석주와 돌벽에 새겨진 문자였다... 구비전통이 강한 이유는 '... 신성한 진리를 탐구하려면... 글자로 적을 수 없다'는 믿음 때문이었다. 진리는 '보는 것'이 아니라 '듣는 것'이었다. 눈이 아니라 귀가 중요했다... 카를 마르크스도 인도는 "시간의 이빨 속에서 식물처럼 성장"했고 역사라고 부르는 건 '계속적인 침입자의 기록'이라고 폄하했다.
(사진: 아소카 시대의 문자: 많은 인도 문자의 기원인 아소카 시대의 문자 브라미. 19세기 중반에 해독되었다.)
... 기록을 남기지 않고 침묵의 방식을 선택한 인도는 과거를 기억하기보다 '잊어버리기'를 바랐을지도 모른다. 슬픔을 치료하는 가장 좋은 약은 잊고 사는 것이다... 인도는 정복되고 파괴되었으나 굴욕을 침묵으로 견디고 '살아남은 자'를 통해 과거와 연결되는 살아 있는 문명이다. "가치 없는 돌 한 조각이 황금 술잔에 상처를 내도 그 돌조각의 가치는 늘어나지 않으며 황금 술잔의 가치도 줄지 않는다"는 13세기 페르시아의 시인 사디의 시처럼 '황금 술잔'의 역사는 계속되었다.
인도는 망각과 무시를 선택하여 정복한 자들을 '아무것도 아닌 존재'로 만들었다... 용기와 자존심을 대변하는 아스텍의 사제들은 영웅적으로 행동하고 죽음으로써 아스텍의 역사는 끝이 났다. 비겁한 인도인의 선택은 적어도 인도의 생존을 보장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바이런은 "인간은 미소와 눈물을 왕복하는 시계추"라고 노래했으나...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드로스>
기원전 326년의 어느날... 강 저편 둔덕에서는 인도의 포루스 왕이 200마리의 코끼리를 가진 강력한 군대를 거느리고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포루스가 4만 명의 보병, 4천 마리의 말, 200마리의 코끼리를 가졌다는 사실을 알았다. 몬순기의 폭우를 이용하기로 결정한 알렉산드로스는 군대를 이끌고 한밤에 강을 건너 상대를 압도했다... 디오도로스의 기록에 의하면, 포루스의 군인 1만 2천 명이 죽고 9천 명이 포로로 잡혔으며 코끼리 80마리가 죽었다...
헤로도토스는 [역사]에서 인도를... 해가 뜨는 동쪽에 있는 그곳에는 전설적인 동물과 이국적인 식물이 살고 여우만한 개미가 금을 파먹으며... 금이 가득한 사막에 굴을 판 개미가 더위를 피해 잠시 숨는 시간을 이용하여 사람들이 금을 채취한다고 적었다.
... 플루타르코스와 아리아노스의 기록은 포루스와 경쟁관계인 탁실라의 왕 암비를 데리고 힌두쿠시를 넘은 알렉산드로스의 인도 원정이 실패했다고 적었다... 코끼리를 보고 놀란 알렉산드로스의 말들은 부들부들 떨었다... 이디오피아의 역사가 뱃지의 기록을 보면, 젤룸 강 전투에서 알렉산드로스 군대의 상당수가 죽었고, 알렉산드로스의 애마까지 죽었다... 포루스에게 화친을 요청했다.
얼마 뒤 인도의 북부 지방을 통일한 찬드라 굽타는 알렉산드로스의 뒤를 이은 그리스의 셀레우코스와 싸우면서 마우리아 왕국의 영토를 확대했다... 기원전 305년 찬드라 굽타는 10만 명의 군인과 9천 마리의 코끼리를 앞세워 셀레우코스와 대전투를 치뤘으나 화친했다... 500 마리의 코끼리를 주고 결혼동맹을 맺었다...
코끼리가 서방에 전해진 것은 이때였다. 인도에서 전투용 코끼리는 기원전 1100년경의 산스크리트 경전에 언급될 만큼 역사가 오래되었다.
결혼동맹과 외교관계를 맺은 셀레우코스가 찬드라 굽타의 수도 파탈리푸트라에 대사로 파견한 메가스테네스는 흔적을 남기기 좋아하는 그리스인답게 당시 마우리아 왕국의 사정을 알려주는 흥미로운 기록을 남겼다... 파탈리푸트라는 64개의 성문과 570개의 망루를 가진 목책으로 둘러싸인 아름다운 '꽃의 도시'였다... 60만 명의 군대와 그보다 많은 농민이 살았고... 그리스의 사가 아리아노스의 서술에도... 인도인은 노예가 없이 모두 자유인이고 벌거벗은 현자, 농부, 목동, 장인, 군인, 관리인, 왕실 관료 등 7개의 카스트로 구분된다고 기록했다. 땅을 가는 농부는 존경을 받았고, 그들은 격렬한 전투가 벌어지는 옆에서 평화롭게 쟁기를 들고 농사를 지었다.
<법현과 현장 그리고 혜초>
5세기부터 인도 동쪽에서 일단의 사람들이 인도에 갔다... 법현(法顯 334~420 동진)의 인도 여행은... 중국 스님의 첫 구법 여행이었다... 399년 예순을 훨씬 넘긴 나이에... 톈산 남로를 이용하여... 누란褸蘭에... 허텐和天에서는... 402년 인도의 서북지방에 도착한... 간다라와 탁실라를... 델리 인근의 마투라와 사위국을... 당시 굽타 왕조의 수도 파탈리푸트라에는 600~700명의 승려들이 거주하는 불교사원이 있었다... 찬드라 굽타 2세는 힌두교도였지만... 스리랑카에서 2년을 지내다가... 자바를 거쳐 해로로 산둥성에 도착하여 대장정을 마쳤다... 법현의 [불국기]
당의 현장(玄奘 602~664)... 바르다나 왕국의 하르샤(재위 630~644년) 왕이 중부 지방을 다스릴 때... 630년 투루판에... 쿠차와 사마르칸트를 거쳐 바미안과 카비르 협곡을 지나... 현장이 남긴 여행기 [대당서역기]... 무려 138개국이 언급되는데, 현장은 그중 110개국을 직접 방문했다... 하르샤 왕의 수도인 카나우지는 '곱사등이 여인의 도시'라는 뜻을 가진 곳으로 문화의 중심지였다... 주어진 직업에 만족했고 세금은 가벼웠다. 왕실의 땅을 경작하면 수확의 6분의 1을 지대로 냈다. 상인이 육로와 해로를 통과할 때 내는 통관세도 많지 않았다. 꽃과 과일나무가 많은 그곳에는 망고와 코코넛, 배와 자두, 복숭아와 포도가 중요한 과일이었다. 땅은 기름졌다. 우유와 버터, 기름과 빵을 즐겨 먹었다... 금화와 은화가 사용되고 진주를 화폐로 썼다... 불교에서도... 인도에는 당시 18개의 학파가 있었다... 날란다는 현장이 방문했을 때 불교의 중심지로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었다... 상주하는 스님과 객승을 합치면 인구는 1만여 명이나 되었다. 가르치는 교수도 2천 명에 이르렀다... 5세기에 세워진 것으로 보이는 날란다는 대학이자 승원이었다... 신라 출신의 혜초가 스승으로 모신, 밀교를 중국에 전한 금강지가 공부한 곳도 날란다였다. [대당서역기]에는 인도가 '달의 나라'라고 적혀 있다. 중국어로 인도라고 발음하는 원래 이름은 음토陰兎라고 하면서, 고대 인도의 설화집인 [자타가(본생경)]에도 나오는 야토형신의 전설을 싣고 있다.
... 인드라 신... 여우는 잉어를, 원숭이는 과일을... 토끼는... 불 속에 뛰어들어... 토끼를 달에 남겨두었다.
... 혜초는... 8세기에 인도에 갔다... [왕오천축국전]은 8세기 인도를 알려주는 현존하는 세계 유일의 자료... 카나우지는 힌두 왕(라지푸트)이 통치하고 있었다... 중천축국의... 왕은 코끼리 900마리를 보유하고 그 아래의 큰 수령들은 각각 200~300마리의 코끼리를 가졌다... 항상 주변의 네 천축국과 전투를 벌여 승리를 거뒀다... 해마다 공물을 바치기로 약속하고 전쟁을 끝냈다... 인도에는 감옥이나 사형제도가 없고 죄를 지은 사람들은 벌금으로 다스렸다...
<바스코 다 가마>
솔로몬이 후추를 얻으려고 인도에 배를 보냈다는 기록도 남아 있다... 1세기경 로마 역사가들이 동양으로 유출되는 금을 우려할 정도로... 인도 말라바르 해안의 가장 중요한 무역품은 후추였다... 4세기경에 이미 후추는 사치품이 아닌 로마인의 일상품이 되었다. 408년 훈족의 아틸라는... 옷감과 금은과 더불어 3천 킬로그램의 후추를 요구했다... 독일에서는 부자를 '후추 자루'라고 부르기도 했다... 베니스에서... '검은 황금'으로 불렸다... 최적 환경에서 나온 후추, 몰루카 제도와 스리랑카에서 실려온 정향 등의 교역장소가 말라바르였다.
감상:
인도에 대한 역사적 기록을 여행기로 살펴야 된다는 것은 슬픔이다. 또한 인도의 계속되는 패배를 읽는 것도 가슴 아픈 일이다. 인도가 항상 약탈당하고 점령당한 이유는 무엇일까? 인도에 가서 인도의 후덥지근한 기후를 경험하고 나면, 인도의 환경이 인도인을 그처럼 무기력하게 만든다고 생각해왔다. 그런데 한가지 더 있다고 생각되는 것은 역시 인도인의 역사에 대한 무관심이다. 자존의 힘과 적에 대한 대비는 역사교육을 통하여 길러진다. 현세보다는 내세를 지향하는 인도인의 삶은 현실에서는 항상 패배할 수밖에 없는 운명이 아닐까? 문명의 요람이었던 인도로의 항해는 항상 해무가 짙게 끼여 있어 오늘도 나의 추적은 안습이다.
(2015. 03. 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