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영필
[아겔다마], 박상륭 저, 문학과지성사, 1997년 6월
서평: 박상륭의 <연구>와 <어론>이 꼬리물어 쫓겨나온 <각설이타령>
『아겔다마』는 소설이라기보다는 차라리 몇 권의 시집이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듯하다. 그의 문장은 은유와 은유, 은유의 은유, 은유 밖의 은유, 은유 속의 은유, 은유의 그림자 등등이 무더기로 쏟아지는 장엄한 축제이다. 모름지기 은유란, 이상(李箱)의 주장에 의하면, 가깝지 않은 표상들을 서로 인접시키는 능력에 좌우되는 것인데, 그의 응용력 높은 세계관은 가히 어떠한 어휘라도 구애받음이 없이 마구 인접시키는데 그 경지를 헤아리기 힘들다.
그 은유의 힘은 너무도 거대해서 나는 감동받기 보다는 차라리 둔탁하게 나의 모든 감각기관이 그의 언어에 얻어터진다고 느낀다, 게다가. 나는 너무도 불가해한 그의 글을 다만 그냥 읽는다, 그의 해석에 따르면, 용(用)을 여읜 체(體)를, 그냥 대지를 덮은 마른 낙옆위를 더듬거리는 바람처럼 서걱거린다. 불란서식으로 하면, 시니피에(기의)를 벗은 시니피앙(기표)이라고 해야 할지도 모르는데, 이 시니피앙도 일종의 새로운 의미를 업게 된다고 할 때 나는 그러한 의미마저 여읜 채 마냥 책속의 모래사장을 전진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몸짓이 박상륭의 소설읽기에는 필요하리라
『아겔다마』는 박상륭의 초기단편집인데, 『죽음의한연구』와 『칠조어론』(3편과 4편은 아직 못 읽었다)을 통해, 시작하여, 『열명길』까지 소화한 나의 박상륭 읽기에서, 그의 초기단편집은 정말 이 위대한 작가에 대한 그 불가해함의 불가해한 단초라고나 할까, 캐나다의 납골당 같은 일터에서 쓴 『죽음의한연구』등의 족적을 그의 삶에서 축적된 원숙한 세계관에서 거두어진 결실로 생각해온 나의 생각은 여지없이 짓밟혔으니,,, 『열명길』(중기 중단편집)보다도 더 아득한 깊이 속으로 초기의 단편들은 이미 절여져 있는 것이니, 그는 얼마나 아스라한 깊이에서부터 그의 인생과 문학을 시작했던 것일까.
단편집의 표제제목으로 선정된 「아겔다마」는 박상륭의 데뷔작으로서 항상 내 궁금증의 속을 태웠었는데, 그 작품성으로서보다는 차라리 작품의 분위기로서 박상륭매니아의 흥을 돋우기에 부족함이 없다. 하지만, 「아겔다마」가 『아겔다마』의 분내가 되어, 읽게되는 그의 「각설이타령」 연작에 이르면 얘기는 좀 달라진다. 아마 「강남견문록」의 목마름으로부터 착근되었을 「각설이타령」연작(쿠마場 → 산동場 → 산남場 → 산북場)은 발표후 문단의 무관심을 유랑했을 터이고, 또한 그 단절은 작가자신에게도 곪는 상처였을 터이지만, 『열명길』의 편집시에도 외면되었다가 『아겔다마』와 함께 비로소 우리 앞에 나타날 수 있음은 이들 「~타령」을 이해하는 해제로서의 텍스트인 『죽음의한연구』가 이미 우리손에 쥐어져 있기 때문이 아닐런가. 그리하여, 살을 입은 말씀으로서 이 「~타령」은 그의 세상이 거쳐온 흔적을 더뎌 풍부하고도 음험하게 아흐 꽃망울을 터뜨린다.
박상륭소설의 또 하나의 힘은 독자의 생각을 넘어서, 독자의 어투마저 지배해버리는 그의 토속적인 구어체문장의 구사에 있지 않을까, 이따금씩, 잊어버렸던 사투리 한 구절이 읽혀지면, 어찌 그리 반갑던지《‘헤엣따 사둔은 백지 그래쌌네. 내가 말이사 바른말 안했는개벼? 들어봬겨요 모도(모두) 글씨 조 낫살 때사, 독을 묵으면 독이 안삭는 그라우, 엿을 묵으면 엿이 안삭는 그라우.’》(209쪽,천야일화),,,
마지막으로 훌륭한 시인으로서도 부족함이 없는 문장 한 토막을 소개하는 바, 이는 무수히 널려있는 것의 일례(一例)임일레라..《하늘은 진이 빠진 담배 연기 색깔로 엷은 구름장 하나 없었다. 태양은 시뻘겋게 달구어지고, 부풀어올라 수레바퀴만큼이나 커 보였다. 새도 날아다니지 않았다. 하루살이떼가 윙윙거리며 날았을 뿐인데, 그것들은 흡사 까마귀떼들처럼 실의(失意)한 육신에서 살점을 뜯으려는 것 같았다.……녹은 납물 같은 더위가 출렁임도 없이 천지를 가득 채우고 있을 뿐이므로.……그런 오후의 더위 속을, 나그네는 열사(熱砂) 위의 지렁이처럼 꿈틀거리며 걸어오고 있었다.》(28쪽,장끼전)
(2000년 8월 27일, Yes24 투고 서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