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영필
장마
비닐하우스는 가랑잎처럼 흔들린다
물은 검은 것이라고 성인은 말씀하셨다
검은 물이 들판을 가득 메우고
비닐하우스는 새하얗게 삐끄덕거린다
우체부가 경적을 두 번 울리고
비호처럼 사라진다
그에 대한 의심을 거두면서
그렇다면 무수한 내 편지들은
어디쯤에서 방황하고 있을까
비가 뜸한 참에
질퍽거리는 논둑길을
밀짚모자 하나 쓰고
담배를 사러 간다
진열대에는 쇳물 든 상품들
비의 기세에 바짝
주눅들었다
돌아오는 길에
기다림의 철분은 해체되었다
이를 가는 것도 짖는 것도 잊어버린 짐승이
제 숨통을 갉다가
폭우 혹
거대한 변화 속을
미친 듯이 달리고 싶은 본능의 마지막 파열음처럼
쏟아진다
(1993. 5. 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