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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사각의 링

바둑 용어 궁시렁

조영필

by 조영필 Zho YP

1. 매화육궁과 오궁도화


매화육궁과 오궁도화의 영어 번역어는 flower six와 flower five이다.* 즉 매화와 도화와 같은 특수한 꽃을 식별하고 있지는 않다. 그래서 매화와 도화의 꽃잎 개수를 알아보니, 둘 다 다섯 잎이다. 그렇다면, 매화육궁은 좀 잘못된 표현이 아닐까? 궁금해서 더 조사하니, 매화가 보통은 꽃잎이 5개이지만, 더 있을 수도 있고 겹매화의 경우에는 더 많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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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의 바둑 용어인 花六, 花五를 그대로 옮긴 듯하다.

** 중국에서는 ‘오궁도화’를 ‘梅花五’ 또는 刀把五’로 표현한다. 즉 매화가 다섯 잎이므로 (우리와 달리) 오궁에 정확하게 배정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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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또 꽃 모양이라고 할 때, 매화육궁의 모양은 꽃잎 같아 보이나, 오궁도화의 경우에는 좀 통통해서, 무슨 모자나 토끼 같은 모양이다.*** 그럼에도 여기에서 아름다운 복사꽃을 보아낸 선인들의 심미안은 새삼 경탄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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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양에서 오궁도화는 Flower five 외에 Rabitty five도 있다. 모양을 인식하는 느낌은 누구에게나 비슷하다. 그런데 [나무위키]에서는 정사궁에 한 점이 더 이어진 모양을 흔히 오궁도화라고 하지만 원래는 열 십자 모양(十)의 별오궁만이 오궁도화라고 주장한다. 그런 까닭에 토끼모양의 오궁은 오궁도화가 아니라 방오궁이라는 것이다. 미국인들은 이 궁도를 지프형이라고 재미있게 부르는데(자동차오궁), 그 안쪽에 소문자 d가 숨어 있어 death의 운명이라고 해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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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이상한 것은 매화육궁에서는 꽃(매화)이 단어의 앞에 위치하는데, 오궁도화에서는 꽃(도화)이 단어의 뒤에 위치한다는 점이다. 다른 용례를 살펴보면, 직사궁, 곡사궁, 방오궁 등으로 모두 궁이 단어의 뒤에 위치한다. 어째서 오궁은 도화오궁이 아니고 오궁도화가 된 것일까?


시중에 '도화살'이란 무시무시한 용어가 있다. 색을 밝히는 병증인데, 아닌게 아니라 그런 이를 변별하는 다섯 가지 특징이 있다고 한다. 아마도 통통하게 살이 쪄서 죽은 모양이 도화살의 종말 같은 느낌이 있어서일까? 오궁도화 이름에 대한 탐색은 향후 좀더 궁구하기로 한다.



2. 패


패의 한자어는 覇(패)이다 이 한자가 정말로 맞는 것일까? 의구심이 심하게 든다. 왜냐하면, 覇(패)는 지배나 강압적 대결의 뜻이 강하기 때문이다. 그에 반해 바둑에서의 패는 일종의 흥정이다. 패도란 말에 권모술수의 뜻도 있다고는 하지만, 바둑의 패와 딱 맞아떨어지는 느낌은 아니다. 공물로서 패(佩)를 내밀 수도 있고, 카드게임에서 서로의 운을 저울질하는 패(牌)를 기대해보기도 한다. 패는 요술쟁이라고 하는데, 패에 대한 생각도 하면 할수록 마법의 세계로 빠져든다. 그냥 ‘패다’의 어근에 해당하는 순우리말인데 괜히 한자를 가져다 붙여놓지는 않았을까?


일본과 중국에서는 우리의 패를 劫(겁, 일본발음 ko)으로 쓴다. 劫(겁)은 위협하다와 엄청나게 긴 시간의 뜻을 가지고 있다. 끝없이 이어질 수 있으면서 또 동시에 언제 터질 지 모르는 시한폭탄과도 같은 패의 양면성을 잘 포착하고 있다.


패는 영어로 Repetitive Capture(반복 포획)라고 번역하지만, 패라는 형태는 바둑에서 '동형반복 금지의 원칙'이 적용된 것이다. 그런데 티베트에서는 이를 '자비의 원칙'으로 해석한다. 사바세계의 패도가 관점을 달리하면 잠시 숨돌릴 틈을 주는 배려의 온정으로 변신하였다.



3. 축


한국에서 우리가 '축(逐)'이라고 하는 것을, 일본에서는 '征(정, shicho)'으로, 중국에서는 '征子(정자, zhengzi)'로 쓴다. (출처: 매일경제, 남치형, 2020.11.15.) 사실 쫓는다는 뜻의 逐(축)이라는 한자어를 알기 이전에 어린 시절의 깜냥으로는 軸(축, 굴대)이 먼저 떠올랐다. 상대가 몰면 모는 대로 떼굴떼굴 구르는 비참힌 신세이기 때문이다.


영어로는 Ladder(사다리)로 표현하고 있는데 돌의 형태나 들어낸 모양을 생각할 때 참으로 멋진 표현이 아닐 수 없다. 아일랜드에 잠시 머물 때 더블린의 바둑클럽에 갔더니, 파란 눈의 서양인들이 자꾸 'Ladder'라는 말을 하였다. 그때, 나는 그 말이 축을 뜻하는 것일 거라고 바로 알아차렸다. 잘된 번역은 직관적으로도 통한다.



4. 호구


호구(虎口)는 범의 아가리를 뜻한다. 중국에서도 같은 용어를 쓴다. 그런데 일본에서는 보통 掛け粘ぎ(カケツギkaketsugi)로 표현한다. (고양이 얼굴이라는 뜻의 猫の顔(묘안, neko no kao)이라는 용어가 제안된 적이 있으나 잘 쓰이지 않는다고 한다.) 왜 일본 바둑 용어에 호구(虎口)가 없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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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반도에 원숭이가 서식하지 않듯이, 일본열도에는 호랑이가 서식하지 않는다. 그래서 ‘호구‘라는 표현이 없었다고 보는 것이 맞을 듯하다. 세간의 정보에 따르면, 일본의 원숭이는 한반도에서 건너갔다고 한다 (한반도에 원숭이 화석이 발견된다). 그러다가 빙하기에 한반도의 원숭이는 멸종하나, 일본에서는 살아남는다. 그리고 이전에 한반도와 연결되었던 일본지역이 바다로 끊겨져 일본의 원숭이는 한반도로 다시 올 수는 없게 되었다. 그대신 남쪽의 규슈에서 빙하기의 혹한을 견뎠던 일본의 원숭이는 호랑이가 없는 일본열도에서 가장 북쪽의 홋카이도오까지 잔출하여 세계에서 가장 높은 위도에서 서식하는 원숭이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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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지하다시피 바둑을 세계로 보급하는 일에 일본에서 많은 노력을 기울인 것이 역사적 사실이다. 따라서 우리에게는 안타까운 일이지만 바둑의 세계 공용어가 우리말 Baduk이 아니라 일본말 Go가 되었듯이 일본의 바둑용어가 영어로 먼저 번역되었다. 따라서 일본의 용어인 掛け粘ぎ가 Hanging connection(매달린 연결)으로 번역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Hanging에는 교수형이란 뜻도 있으므로 이 용어의 느낌은 좀 으스스하다.

그러다가 중국인들이 바둑을 진흥하고, 한국 바둑의 위상이 높아진 연후에 서양인들은 기존의 Hanging connection 외에도 Tiger’s mouth라는 훌륭한 표현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왠지 호감가는 이 용어 표현은 아마도 이러한 배경으로 새롭게 채택된 것이 아닐지 추측해본다.



5. 행마


국제 바둑용어 중에서 유일하게 한국어 발음으로 쓰이는 것이 하나 있다고 한다. 그것은 ‘행마(行馬)’라는 말이다. 영어로는 ‘Haengma’라고 쓴다. 이렇게 행마가 한국어 발음으로 불리는 것은 이 단어가 일본 바둑이나 중국 바둑에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출처: 월간중앙, 정수현, 2016.7.25.)


서양에서 행마와 유사한 용어로 체스에 'Moves'라는 말이 있다. 영어의 용례에 해당 용어가 이미 있는데, 굳이 'Haengma'라는 번역어를 사용할 필요가 있을까? 실제 서양의 기보에서도 'Moves'는 본 듯해도, 'Haengma'라는 용어를 본 기억은 별로 나지 않는다. 행마의 세계 공용어 등록에 대해 진정으로 기뻐해도 되는 것일지 약간 의구심이 든다.



6. 눈사태 정석과 요도 정석


눈사태 정석은 일본 바둑 용어의 '붕설(崩雪)형' 정석을 번역한 말이다. 그리고 현재는 '밀어붙이기'란 새 이름을 얻었다. 바둑계 일각에서 "원래의 멋진 느낌이 사라졌다"며 아쉬워하는 분위기가 있다고 한다. 나의 경우에도 '눈사태 정석'이란 말은 어린 시절의 추억에 짙게 아로새겨져 있다. 이 정석은 오청원의 십번기 시절 출현하여 바둑계의 상식을 뒤흔들었던 많은 사연들과 함께 한다. 그러나 심종식 6단은 '이 용어는 후지산의 장관인 겨울철 눈사태를 묘사한 것으로 남의 나라 상징물의 배경도 모른 채 그대로 따라하는 것은 곤란하다'고 주장한다.


심 6단은 또 소위 '요도(妖刀 요사스러운 칼) 정석'이라는 표현을 우리가 그대로 가져다 쓰는 것도 경계했다. 왜냐하면 이는 중세 일본의 사무라이와 피와 복수와 저주가 얽힌 일본 도검(刀劒) 세계의 전설에서 따다 붙인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출처 : 조선일보, 이홍렬, 2016.7.26.)


그리 멀지도 않은 이웃나라의 유래라고 해서 이리도 배척하는 것은 아마도 한반도의 주민 외에는 이와 비슷한 사례를 유사이래로 쉽게 찾지 못할 것이다.


7. 꽃놀이패


우리가 즐겨 쓰는 말이며, 이제는 사회에서도 많이 쓰는 말이다. 그런데 이 용어는 일본어의 '하나미코(花見劫)‘의 번역어라고 한다. 그리고 우리의 '꽃놀이'와 일본의 '하나미'가 그 규모와 중요성에서 크게 달라 '꽃놀이패'와 '하나미코'에서 느끼는 감흥도 상당한 차이를 보인다고 남치형은 주장한다. (출처: 남치형 (2011), 바둑용어에 있어서의 일본어 번역문제.)


위키백과에서 찾아보면 하나미는 '꽃구경'을 뜻하는데, 보통의 경우에는 3월에서 4월에 걸친 봄 기간에 핀 벚나무의 밑에서 벌어지는 연회, 파티를 가리키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기후와 문화가 다르니, 꽃구경 또는 꽃놀이에 동반하는 감흥이 일부 다를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래서 어쩌자는 것인지 나는 잘 모르겠다. 일단 '꽃놀이패'에서 ‘꽃놀이’가 번역어인 것은 알았다. 그러나 매우 잘된 번역이라고 생각된다. 그리고 이제 국적 유래의 세탁도 끝낸 상태에서 훌륭하고 많은 아름다운 비유적 표현으로 목하 재탄생되고 있지 않은가.


아마도 일본 유래의 용어라고 배척하기만 한다면, 오늘날 우리가 쓰는 '과학' '사회'와 같은 많은 서구 개념어의 대응어 90% 이상을 버려야 할 것이다. 이는 서구문명을 먼저 수용한 일본 학자들의 피땀어린 번역 작품이기 때문이다. 언어는 돌고 돈다. 문화도 돌고 돈다. 더 멋지고 아름다운 문화를 꽃피우기 위해서 우리는 우리의 언어를 갈고 닦음과 함께 우리의 정신도 끊임없이 그 지평을 넓혀 나가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