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영필
내가 노후에 하려했던 업종이 저물어간다. 1980년대에는 보통의 상가 건물 1층에 약국, 2층은 당구장, 3층은 탁구장, 4층에는 기원이 있었다.
기원에 가려면 많이 올라가야 했으나 나는 한 달음에 올라가곤 했다. 그곳엔 퀘퀘한 냄새를 풍기는 사람들이 담배를 뽀꿈거리며 바둑판에서 꼬물거리고 있었다.
처음 기원에 간 것은 외로움이었다. 가족과 떨어져 홀로 지내던 소년에게 바둑은 또하나의 보금자리이었다. 그곳에는 외로운 소년과 함께 시간을 보내줄 사람들이 아주 많이 있었다. 사실 처음에는 아니었다. 원장이 어떻게 왔느냐고 묻고는 한 판 두어 주었다. 그리곤 다른 사람의 대국을 조금 구경하는 척 하다가 기료를 정산하고 금방 나왔다. 그래도 다음에 또 가게 되었다. 원장에게는 9점을 깔고 또 졌다. 서점에 들러 월간바둑을 사서 하숙집으로 갔다. 한 학기가 지날 때쯤 나는 이미 그 기원의 단골이 되어 있었고 같이 둘 맞수도 많이 생겼다. 원장과는 이제 6점이 되었고, 항상 바둑은 압도적으로 유리했다. 한번 9점이 무너지자 6점까지는 금방이었다.
시험기간이면 더 좋았다. 학교가 일찍 파하기 때문에 기원에 빨리 갈 수 있었다. 참 그때는 빨리도 두었다. 상대가 장고를 하면 신문을 보다가 야단을 맞기도 했다. 참으로 바둑이 만만하고 또 두뇌가 신속반응하던 시절이었다.
당시의 기가는 소위 춘추전국시대이었다. 김인도 아직 타이틀을 갖고 있었고 잠시 하찬석이 천하를 호령하고 있었다. 내가 그렇게도 그를 응원하였으나 그의 전성기는 2년여에 불과했고 조-하 20번기를 거쳐 하찬석은 엄청난 내상을 입고 고향 합천으로 칩거하고 만다. 그후로 그 지긋지긋한 조서시대가 왔다. 도전 5강이 준우승을 간혹하던 시절이었다.
방학때 집에 가면 어머니는 몇 번씩이나 바둑판을 도끼로 쪼개버린다고 하셨다. 용케도 어머니를 무마하고 용케도 대학에 들어갔다. 대학에 들어가서는 캠퍼스의 다사다난한 사건으로 바둑을 멀리하였다. 그러다가 다시 기우회를 기웃거릴 무렵에는 이제 대학의 쓴맛 단맛을 다 맛본 이후이었다.
기원은 바둑교실이라는 명칭으로 동네에 가끔씩 보이기도 하지만 오래 버틴 곳은 못 보았다. 서울에선 종로 3가와 양재동에만 애기가들의 쉼터가 아직도 살아 옹송거리고 있다. 기원은 누구에게 그 고객을 앗긴 것일까? 나는 바둑인구 특히 기원 이용의 오래된 고객들 중 오피니언 리더를 데려간 곳은 90년대의 골프붐이었다고 생각한다.
골프는 특히 시간소모 오락이어서 원래 바둑을 좋아하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골프를 즐기면서 동시에 바둑을 두기란 쉽지 않았다. 과거 엘리트들의 4대 아취(금기서화琴棋書畵)로 사랑 받던 바둑은 소득 수준 일만 달러를 돌파한 이후로는 영 맥을 못추고 있다. 물론 젊은 세대들의 자연스런 유입도 끊어진 지 오래이다. 컴퓨터 게임에 비해 바둑은 너무도 느려터진 게임이어서일까? 실력향상의 진입장벽이 높아서일까?
요즈음 흘러간 유산으로 여겨지던 탁구장과 당구장은 다시 살아나고 있다. 이 분야는 이제 동호인 클럽화되었다. 탁구장의 경우에는 바닥에 무릎을 보호하기 위해 나무 마루가 깔렸고 어느 곳이든 레슨코치가 상시 대기하고 있다. 당구장도 금연화되면서 골프가 경제적으로 부담스러워진 노년층의 향수어린 만남의 장이 되었다. 기원도 이처럼 살아날 수 있을까? 아니면 온라인이 오프라인(기원)을 근본적으로 대체해 버린 것일까? 바둑의 저변을 늘리려고 유소년의 두뇌 개발 효과를 강조하는 홍보전략이 의미있는 것일까?
나는 그렇지 않다고 본다. 종래의 바둑이 오락으로서 경쟁할 만한 매력도는 이미 고갈되었다. 무엇보다도 승부욕과 호기심은 컴퓨터와 가상현실로 충분하다. 몸의 건강을 도모하는 스포츠도 아니다. 결국 오락이란 그것이 시간을 들일 만큼 재미있느냐의 문제이다. 또는 그 가치에 적절한 수요(니즈)를 가진 핵심 고객을 찾아 제대로 설득해낼 수 있느냐의 문제이기도 하다. 정적인 문화에서 동적인 문화로 트렌드를 바꾸어야 한다. 금기서화의 모든 장점을 바둑에 담아 넣어야 한다. 그러한 방향으로 과감하게 도전하는 지점에서 기원의 활로는 열릴 것이다. 이 힌트가 무엇을 얘기하는 것인지는 나의 사업기획이 실제로 전개되면 자연히 드러나리라.